큰절 받던 날
전주꽃밭정이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금요반 문 광 섭
‘하얀
겨울날, 소중한 만남을 사랑으로 이루고자 합니다.’라는 청첩장을 받았다. 우리 집안 장손자의 혼례소식이다. 나이도 서른하나이니 노총각이련만,
요즘엔 남자 나이 32세가 딱 결혼 적령기란다. 큰아들이 옆에서 귀 뜸해 주었다. 서울 강남에 자리한‘엘 타워 6층 그레이스 홀’ 입구에
들어서니, 장조카인 혼주 내외가 서 있다가 반가이 맞아 주었다.
홀이
하도 크고 넓어서 극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세상은 참 좋다. 큰 사업가나 저명한 인사가 아니라도 돈만 있으면 누구나 이렇게 큰 장소에서
혼례나 행사를 치를 수 있으니 말이다. 중앙으로 신랑 신부가 입장할 1m 높이 50m 길이의 무대가 있고 양쪽에는 10명씩 앉는 원형식탁이
100개 정도 놓여 있었다. 어림잡아 1,000명가량의 하객이 입장할 수 있는 시설이다. 둘째조카의 안내를 받아 혼주 석 다음의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예식 시간이 다 되어도 내 옆자리에는 앉는 사람이 없었다. 나와 같은 항렬의 집안 하객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조카딸들의 손자들인
외증손자 증손녀들이 내 옆을 오가며 장난을 치고 있을 뿐이었다.
장형님과
형수님은 20여 년 전인 64세에, 아래 동생은 3년 전에 작고했다. 내 사촌 형제만 해도 열 사람이 넘는다. 서넛은 올 법도 한데 오질
않았다. 서울에서 하니 그럴 수도 있고,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못 왔을 것이다. 여기다 내 아내마저 늦둥이 외손자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으니
어른들의 자리가 비게 되었다. 갑자기 외로움이 파고들었다. 아내와 함께 오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나라도 오래 살다보니 이렇게 어른
대접을 받는구나 싶었다.
내가
결혼하던 옛날엔 85세의 우리 할머니를 비롯하여 재종당숙들과 8촌 형제까지 참석했었다. 거기에 외가 이모님들과 이종형제까지 모였으니 온 집안
잔치였다. 세월이 많이 변한 듯싶다.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대형무대의 화려한 조명이 신랑 신부에게 집중되니 공연장의 배우처럼 보였다. 신랑 신부의 키도 각각 180cm, 170cm 정도 되니
패션쇼라도 여는 것 같았다. 아니 영화를 촬영한다고 해야 맞을 듯싶다. 요즘 세대들은 한결 같이 키가 크고 날씬하며 얼굴이 배우 같다. 경제발전
덕으로 영양관리가 잘 되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랑 신부도 당당하고 발랄했다. 거침이 없어 보였다. 결혼식 중에 둘이 뽀뽀를 했다. 옛
어른들이 계셨다면 혀를 찰 행동을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민망할 뿐이다. 사전 예행연습이라도 한 듯이 결혼식은 30분 만에
끝났다.
집안
식구들이 폐백(幣帛)을 받으려고 작은 방에 모였다. 안내자의 호명에 따라 혼주인 조카 내외가 먼저 받았다. 옛날 같으면 장조카도 손자며느리의
절을 받을 나이련만 이제야 아들과 며느리의 절을 받고 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는데, 호탕한 웃음소리가
방안에 가득 쌓였다. 조카며느리가 던진 밤 대추가 신부 치맛자락에 우두둑 떨어지는 소리에 정신이 번뜩 났다. 다음은 집안에서 제일 큰 어른
차례라고 하였다. 내 순서였다. 또다시 아내의 빈자리가 마음에 걸렸다. 잔을 받고서 한마디 하려니, 준비했던 말이 나오질 않고 목이 잠겼다.
안으로 솟구치는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가슴속을 담금질했다.
“새아기야,
내가 집안의 큰 어른인 작은 할아버지다. 딸 아들 셋은 꼭 낳고 잘 살아라!”
라고
덕담을 하고서 술잔을 비웠다.
점심을
들며, 오랜만에 조카들과 조카사위, 손자와 외손자, 외손자 사위의 술잔을 받으면서도 허전함과 외로움은 가시지 않았다. 겉으로는 허허하며 반겼으나
동기(同期)간의 반가움과 끈끈함, 뜨거움, 다정함이 나오질 않았다. 큰 어른이라는 말 자체가 버겁고 불편하기만 했다. 돌아오는 고속버스에 오르고
나니 취기가 밀려왔다. 돌아가신 형과 동생이 야속하다는 생각을 하는 중에, 재작년 겨울에 돌아가신 당숙의 환영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우리
집안에서 가장 무서운 어른이셨다. 설에 세배를 빼먹는다든지, 추석 성묘를 거른다든지, 행실에 잘못이 있는 양이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동안에
나도 몇 차례 혼난 적이 있었다. 당숙께서는 90세를 넘기자 노쇠하시고 자식들을 앞세운 탓으로 조용히 지내셨다. 집안의 내력을 당숙만큼 아는
분도 없었다. 매사가 너무 분명하시니, 그 앞에서는 행동거지를 항상 조심해야 했다. 그러니 집안의 어른으로서 위엄이 섰다. 이러한데, 70대
초반의 나는 어떤 처지에 있는가? 곰곰 생각해보니, 당숙과 같은 처신을 한 일도 없고, 어른으로서 권위도 없는 것 같다. 시대의 변화와 신세대의
사고방식을 고려하더라도 나 자신이 해야 할 도리를 제대로 못 했다고 자책해 보았다. 집안의 큰 어른 행세는 아무나,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하루였다.
(2015.
01. 18.)
첫댓글 선생님께서는 어른 대접을 받으실만 합니다.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으시니까요.
어른댜접도 받으시고 좋은 글도 쓰셨으니 일거 양득을 하신샘이네요.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윤동현 올림.
문회장님 경사에 축하를 드립니다.
요즘은 5포시대라고 합니다. 설은하나 참 좋은 나이입니다. 큰절 받으시며 좋은 덕담 가슴새겨 5남매 생산해쓰면 합니다.
서울구경에 사모님 나드리 빠진게 저도 아쉬운 마음입니다.
건강 하십시요, 활동이 많으시니. 감사 합니다. 유천***
문광섭 회장님, 장손자의 결혼을 축하합니다.
'집안의 큰 어른 행세는 아무나,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하루였다.' 이 귀절을 읽으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누구나 다 그런 것 같습니다. 어른 행세 하기도 힘들고 뿔뿔이 흩어져 있으니 어른 대접 받기도 힘든 세상 입니다.
그 저 내 처신이나 남 부끄럽지 않게 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이런 기회를 주신 문선생님께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