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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41:1)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주제가 또 바뀐다. 이제는 이름을 말씀하신다.
'리워야단' 은 '용'을 말씀하신다.
용이 얼마나 대단한 창조물인지 욥기 41장
한장을 통으로 설명하신다.
용을 낚시로 잡겠느냐 노끈으로 묶겠느냐.
네가 용을 통제할 수 있겠느냐.
■(욥 41:2) "너는 밧줄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갈고리로 그 아가미를 꿸 수 있겠느냐"
리워야단을 밧줄을 사용해 잡을 수 있느냐.
밧줄로도 안 되고 갈고리로도 안 된다.
■(욥 41:3) "그것이 어찌 네게 계속하여 간청하겠느냐
부드럽게 네게 말하겠느냐"
리워야단은 사람이든 무엇이든 두려워 하지 않기 때문에
도망을 간다든지, 상대를 안한다든지, 협상을 한다든지
하지 않는다. 인정사정 보지 않는다.
부드럽게 간청하지도 않는다.
■(욥 41:4) "어찌 그것이 너와 계약을 맺고 너는
그를 영원히 종으로 삼겠느냐"
리워야단은 사람이 길들일 수가 절대로 없다.
■(욥 41:5) "네가 어찌 그것을 새를 가지고 놀 듯 하겠으며
네 여종들을 위하여 그것을 매어두겠느냐"
네가 그 용을 애완용으로 네 옆에 두겠느냐?
너의 여종의 노리게로 쓰겠느냐?
■(욥 41:6) "어찌 장사꾼들이 그것을 놓고 거래하겠으며
상인들이 그것을 나누어 가지겠느냐"
물고기를 잡아서든 좋은 물건을 놓든 상인들이 ‘경매’에
붙이는 것처럼, 용을 잡아 놓고 경매에 붙이겠느냐?
■(욥 41:7) "네가 능히 많은 창으로 그 가죽을 찌르거나
작살을 그 머리에 꽂을 수 있겠느냐"
아무리 많은 창을 던지고 해도 꽂히지를 않는다.
쫓아다닐 수도 없다. 작살을 던져도 소용이 없다.
■(욥 41:8) "네 손을 그것에게 얹어 보라
다시는 싸울 생각을 못하리라"
너 사람이라는 존재는 그 용에게 손도 댈 수도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한 번 네가 손을 댈 수 있거든 대 보라는 것이다.
손을 대 보기는 커녕 그 앞에 서 있을 수도 없다.
■(욥 41:9) "참으로 잡으려는 그의 희망은 헛된 것이니라
그것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그는 기가 꺾이리라"
용을 잡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은 헛짓뿐이었다.
용의 모습만 보아도 질려 죽을 판이다.
우리가 뱀을 보아도 그렇다.
작은 뱀이야 잡아다 뱀 주를 해먹고 봄 보신을
한다고 난리지만 조금만 큰 뱀이어도 우리는
질려버린다.
■(욥 41:10) "아무도 그것을 격동시킬 만큼 담대하지
못하거든 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
'베헤못' 같은 거대한 동물 하나도,
'리워야단' 같은 거대한 동물 하나도 상대할 수 없는
인간 주제에 누가 감히 그런 것을 만드신 창조주께
대항하겠다고 하는 것이냐?
■(욥 41:11)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너희 사람들 중에 누가 창조주께 먼저 주면서
"나중에 갚으세요" 했느냐?
온 천하가 다 나 창조주 것이다.
■(욥 41:12) "내가 그것의 지체와 그것의 큰 용맹과
늠름한 체구에 대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리라"
창조주께서 욥에게 용의 지체와 용맹과 늠름한
체구에 대해 계속 말씀하시겠다고 하신다.
이 리워야단을 말씀하실 때는 다른 동물들 보다
많이 설명하신다. 다른 것들은 그래도 지금까지
존재한다든지, 사라져버린 공룡도 신화까지로
생각하진 않는데. 이 '용'은 그야말로 신화적인
존재로 여길까봐 많이 자세하게 설명하신다.
이것을 상징이라고 주장하면 안 된다.
창조주의 말씀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욥 41:13) "누가 그것의 겉가죽을 벗기겠으며
그것에게 겹재갈을 물릴 수 있겠느냐"
사람 그 누가 용의 가죽을 벗기겠느냐,
용에게 재갈을 물리겠느냐.
■(욥 41:14) "누가 그것의 턱을 벌릴 수 있겠느냐
그의 둥근 이틀은 심히 두렵구나"
누가 용의 턱을 벌리겠느냐,
용의 이만 보아도 심히 두렵다.
■(욥 41:15) "그의 즐비한 비늘은 그의 자랑이로다
튼튼하게 봉인하듯이 닫혀 있구나"
이 용의 비늘이 얼마나 튼튼하고 정밀하게
붙어 있는지 봉인한 것 같다고 하신다.
그러니 몽둥이로 때려도 소용이 없고,
칼을 휘둘러도 들어가지도 않고,
활을 쏘아도 튕겨나가고,
화살촉을 쏘아도 박히지가 않는다.
■(욥 41:16) "그것들이 서로 달라붙어 있어
바람이 그 사이로 지나가지 못하는구나"
비늘이 얼마나 정밀하게 붙어있는지
바람도 들어가지를 않는다.
그것은 창조주의 정밀도이시다.
■(욥 41:17) "서로 이어져 붙었으니 능히 나눌 수도 없구나"
비늘과 비늘이 서로 이어져 붙어있어서 나눠지지를 않는다.
■(욥 41:18) "그것이 재채기를 한즉 빛을 발하고
그것의 눈은 새벽의 눈꺼풀 빛 같으며"
용이 재채기를 하니 빛이 나오고 눈에서도 빛을 발한다.
■(욥 41:19) "그것의 입에서는 횃불이 나오고
불꽃이 튀어 나오며 용의 입에서 불이 나오고"
용의 입에서는 횃불이 나오면서 불꽃이 튀어나온다.
용은 동서양의 신화나 전설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로
거대한 뱀을 닮은 형상을 하고 있으며 신성한 힘을
지닌 상서로운 존재로 여겨지지만
기독교 문명에서는 악과 이교(異敎)를 상징하는
퇴치의 대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상상의 영수(靈獸)인 용의 존재는 많은 문명에서 발견된다.
지역이나 문화에 따라 다양한 형상으로 나타나지만
거대한 뱀이나 도마뱀과 닮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한국ㆍ중국 등 동아시아에서는 몸에 비늘이 있고
네 개의 발에 날카로운 발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매우 큰 눈과 긴 수염을 지니고 있는데
코와 입으로는 불이나 독을 내뿜으며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몸의 색깔은 녹색, 붉은색, 누런색, 흰색, 검은색
등으로 나타난다. 중국 위(魏)나라 때 장읍(張揖)이
지은 자전(字典)인 '광아(廣雅)'에는 용이 아홉 가지
동물들과 비슷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곧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몸통은 뱀, 배는 큰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주먹은 호랑이와 비슷하다고 되어 있다.
또한 비늘은 81개이며, 소리는 구리쟁반을 울리는
소리와 같고, 입 주위에는 긴 수염이 있고,
턱 밑에는 구슬이 있으며, 목 아래에는 거꾸로
된 비늘[逆鱗]이 있다고 한다.
용은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지만
날개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박쥐와 비슷한 날개와
가시가 달린 꼬리를 지닌 존재로 묘사된다.
■(욥 41:20) "그것의 콧구멍에서는 연기가 나오니
마치 갈대를 태울 때에 솥이 끓는 것과 같구나"
용의 콧구멍에서 엄청난 연기가 나온다.
■(욥 41:21) "그의 입김은 숯불을 지피며
그의 입은 불길을 뿜는구나"
입에서 숯불을 때는 것 같이 불길을 뿜어대니
콧구멍에서 연기가 나온다.
"무슨 동물의 입에서 불길이 나가? 장난 하냐?
만화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실제 동물이 아니라 상징적인 것이라니까"
할지 모르겠지만 창조주께서는 못 만드시는 것이 없으시고
못 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다.
현재는 이 '용'이 존재하지를 않으니까.
이런 사납고 무섭고 위대한 존재가 왜 죽어서
다 없어졌을까?
창조주를 안 믿는 사람들이나 성경을 안 믿는 사람들이야
어짜피 아무 것도 안 믿으니까 그렇다 치고,
기독교인 조차도 '용'이라는 것을 상징적인 동물이라고,
신화 같은 이야기라고, 만화 같은 이야기라고,
비유해서 얘기하는 것이라고 치부한다면,
지금 욥기 41장에서 말씀하시는 분이 '창조주' 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믿어야 한다. 욥이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세 어르신이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엘리후가 얘기하는 것도 아니다.
창조주께서 그런 거대한 짐승도 만드셨다고 직접 말씀하신다.
이 내용을 실제가 아니라 상징 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 모든 말씀이 실제가 아니라 상징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꼭 명심해야 한다.
그러면 예수의 십자가 죽음도 상징이 되어 버린다.
사람인 우리도 창조주신의 지혜와 명철과 지식을 빌려
대포도 만들고 탱크도 만들고 화약도 만들고
미사일도 만들고 폭죽도 만들고 폭탄도 만들고
다이나마이트도 만들고 로봇도 만들고 인공지능로봇도
만들고 염색체로 복사도 하고 컴퓨터도 만들고 하는데
하물며 창조주 신께서 무엇을 못하시겠는가.
■(욥 41:22) "그것의 힘은 그의 목덜미에 있으니
그 앞에서는 절망만 감돌 뿐이구나"
베헤못 공룡은 꼬리에 힘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용은 온 몸이 힘 덩어리고 무기 덩어리고
방패덩어리지만 그 중의 목덜미에 힘의 중심이
있다고 하신다.
사람이나 짐승들이나 용 앞에서는 죽음밖에
없었기 때문에 절망만 있었다.
■(욥 41:23) "그것의 살 껍질은 서로 밀착되어
탄탄하며 움직이지 않는구나"
이 용은 얼마나 튼튼하고 단단한지 살을 무기로
자를 수 있거나 살을 무기로 꽂거나 해야 죽을텐데
꽂히지를 않고 잘라지지를 않는다.
■(욥 41:24) "그것의 가슴은 돌처럼 튼튼하며
맷돌 아래짝 같이 튼튼하구나"
용의 가슴부분은 단단한 맷돌짝 같다.
■(욥 41:25) "그것이 일어나면 용사라도
두려워하며 달아나리라"
아무리 용감한 사람이 나서서 싸우려고 해도
용이 일어서는 모습만 보아도 36계 줄행랑을
치게 된다.
■(욥 41:26) "칼이 그에게 꽂혀도 소용이 없고
창이나 투창이나 화살촉도 꽂히지 못하는구나"
용에게는 칼도 소용없고, 창이나 투창이나
화살촉도 소용이 없다.
■(욥 41:27) "그것이 쇠를 지푸라기 같이,
놋을 썩은 나무 같이 여기니"
용은 그런 것들을 지푸라기 다루듯이 한다.
■(욥 41:28) "화살이라도 그것을 물리치지 못하겠고
물맷돌도 그것에게는 겨 같이 되는구나"
화살도 소용없고 돌덩이를 던져도 겨 같이 된다.
■(욥 41:29) "그것은 몽둥이도 지푸라기 같이 여기고
창이 날아오는 소리를 우습게 여기며"
이 용은 사람이 어떻게 때릴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었는데
몽둥이가 지푸라기 같고 창도 우습게 여겼다.
칼이나 창이나 투창이나 화살촉이나 그 어떤 것이
그 단단한 비늘을 통과하지를 못해 몸에 꽂히지를
않았다.
걸리버의 여행 동화에서도 보면 거인이 된 걸리버에게
소인들이 화살을 쏜들 생선가시가 날라오는 정도다.
■(욥 41:30) "그것의 아래쪽에는 날카로운 토기 조각
같은 것이 달려 있고 그것이 지나갈 때는 진흙 바닥에
도리깨로 친 자국을 남기는구나"
용의 하체쪽에 날카로운 토기 조각 같은 것이 달려있어
용이 지나다닐 때 바닥에 도리깨로 친 자국이 남는다.
현재의 '도리깨'는 농업에서 볼 수 있다.
■(욥 41:31) "깊은 물을 솥의 물이 끓음 같게 하며
바다를 기름병 같이 다루는도다"
게다가 용은 바다 물속 깊이 들어갈 수 있다.
거대한 용이 바다를 휘젓고 다닐때는 물방울이
얼마나 소용돌이 치는지 물이 끓는 것 같다.
얼마나 힘이 좋은지 바다를 다니기를 기름병 같이
미끌어지면서 다닌다.
용은 깊은 물속에 힘 있게 들어가므로 물거품이
상당히 일어난다. 바다를 이리 저리 다니는 것이
어느 걸림돌도 없이 자유자재로 다닌다는 것이다.
■(욥 41:32) "그것의 뒤에서 빛나는 물줄기가 나오니
그는 깊은 바다를 백발로 만드는구나"
바다에서나 강에서나 위로 솟구쳐 올라갈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렇게 솟구쳐 오르면 물이 따라 올라갔다가 하얀 물거품을
이루는 모습이다.
날치도 상당히 높이 뛴다.
연어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힘이 있다.
이런 작은 물고기들도 물을 치고 올라가는 힘이 있는데
저렇게 큰 용은 얼마나 하늘로 치솟아 올라갈까?
그 거대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어떤 행위보다 나중에 생기는 형용사로 표현하니
우리는 잘 모른다.
■(욥 41:33) "세상에는 그것과 비할 것이 없으니
그것은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지음 받았구나"
창조주께서 리워야단(용)도 지으셨다고 다시 강조하신다.
만약 이렇게 강하기가 전무후무한 짐승이 죽어야 했다면
창조주께서 죽이셨던지, 사람은 약한 것 같지만 그래도
주께서 지혜를 주셨고 총명을 주셨고 꾀도 주셨기 때문에
무기라는 것을 만들 수 있었고, 그것을 계속 발전해서
쓸 수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사람에 의해서 죽이셨던지
어쨌든 지금은 용이 없다.
하지만 현재는 여러 곳에 용의 모습을 그려 놓은 것이
신화처럼 동화처럼 만화처럼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보고 오는 각자 자기의 지옥으로 알고 있는
'죄의 법' 영의세계를 창조주신은 ‘용’의 모습으로 표현하신다.
죄가 쌓인 것은 '죄의 법'이고 대장은 '용'이고,
선함이 쌓인 것은 ‘창조주의 법’이고 대장은 '미가엘’이다.
■(욥 41:34) "그것은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며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이니라"
동물의 왕이 ‘용’ 이었다. 지금은 동물의 왕을 사자라고 한다.
그 무서운 사자도 지금은 동물원에 있다.
이런 용이 살아있다면 동물원에 넣어 놓을 수가 없다.
용을 만드신 창조주는 세상의 '왕'을 비유하시려고 하셨다.
말은 빠른 속도로 달리는 존재로 비유되고.
사자는 무서우신 창조주신으로 많이 비유되고,
뱀은 교활하고 꾀가 많은 존재로 비유되었다.
용이 상징적인 동물인줄 알았더니 창조주께서
세상에서 용과 비교할 것이 더 이상 없다고
하실 만큼 거대하게 만드셨구나.
창조주께서 왜 '리워야단'에 대해서는 그렇게
자세하게 많이 성경 한장을 할애해서 말씀해 주셨을까?
그런 위대하리만큼 거대한 동물도 창조주께서 만드셨고,
필요에 의해서 죽이셔도 사람이 죽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께서 죽이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용을 만드신 것처럼 세상에서 인생에 있어서도 힘 센 자를
창조주께서 일으키시는데, 그 용을 죽이시는 것처럼 그 힘센
자를 또 창조주께서 죽이실 수 있으시다는 것을 말씀하시려고
하신다.
(욥 40:19)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 중에 으뜸이라
그것을 지으신 이가 자기의 '칼'을 가져 오기를 바라노라"
'베헤못'이나 '리워야단' 같은 거대한 창조물은 인간이
죽일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지으신 이가 자기의 칼을
가져와서 죽여야 된다.
어느때에 다 죽이셨는지 모르지만 주께서 직접 죽이셨다.
노아 홍수사건 때 죽이신 것인지.
힘센 자, 부유한 자, 왕들, 높은 자들도 다 창조주께서 세우셨지만,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고, 백성이 자기 것인 양 함부로 백성들을
죽이고, 거만하게 군림하고, 교만한 자나 악행을 일삼는 자는
창조주께서 부숴 뜨리고 넘어뜨리고 꺾으시고 멸절시키시고
죽이신다(이사야 14:16, 17, 20).
사울이 처음에는 준수한 자였기에 창조주께서 왕으로
추대했지만 나중에는 변질되어 창조주께서 꺾어버리시는
것처럼,
욥도 처음에는 제대로 된 인격으로 살았기에 창조주께서
욥을 높은 위치로 세우셨지만 나중에는 잘못됐기 때문에
창조주께서 꺾어버리신다는 것이다.
이제 세상을 전천후로 군림했던 용이 없어진 것처럼,
세상을 전천후로 군림했던 '왕' 이라는 직위가 없어지고,
각 사람이 동등한 위치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대통령'을
만드신 창조주, 그동안 왕이라는 것 때문에 수많은
백성들이 시도 때도 없이 죽어 자빠졌다.
전쟁으로 왕의 권력으로. 정권다툼으로.
당파싸움으로.
왕의 먹이 감이 백성들이었다.
(사무엘상 8:18) "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니"
이 구절만 보고
창조주께서 이것들이 나를 안 찾고 왕을 찾네?
삐지셔가지고 너희가 불러도 응답하지 않겠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턴 왕에게 위임하시겠다.
지금까지 아브라함 후손이 '부족' 상황이었는데
이젠 '나라'로 등극되는 것이다.
(에스겔 23:24) "내가 재판을 그들에게 맡긴즉
그들이 그들의 법대로 너를 재판하리라"
(로마서 13:4) "그는(권세자)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왕을 세우시고 왕권을 창조주 같이 주셨다.
왕의 제도도 설명해 주신다.
백성들을 다스릴 수가 있었고,
전쟁에 출전시킬 수가 있었고,
죄로 묻고 죽일 수도 있었고,
부릴 수도 있었고,
마음대로 후궁도 들일 수가 있었고,
백성들의 수확 중 10%를 거두어 권세자의
양식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하셨다(사무엘상 8:11~17).
그래서 백성들이 왕 밑에서 시달려도 신은 마땅하다 하셨다.
그 권세? 창조주께서 주셨다.
이런 왕의 제도는 주변국들은 벌써 있었다.
이스라엘은 늦은 것이다.
하지만 너무 자만의 권세를 휘두르고, 폭력이 난무하고,
전쟁 중 죽이지 않아도 될 백성들까지 무참하게 짓밟고,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전쟁을 즐기고,
성읍을 초토화 시키는 교만한 왕이나, 자기가 신인 줄
아는 왕이나, 자기의 왕권이 하늘이 허락하신 것인 줄
모르고 자기의 것인 줄 알고 날뛰는 교만한 왕은
창조주께서 빗자루로 쓸어버리셨다.
‘용(리워야단)’과 ‘공룡(베헤못)’이 있으므로 모든 짐승들이
남아나지 않겠기에 이제는 다 없어지고, 힘만 있는 나쁜 존재,
세상의 나쁜 왕으로서의 상징적인 동물의 모습으로만 역사
그림으로 남아 있다.
왕의 모습도 그렇다. 이제 좋은 왕이든 나쁜 왕이든
‘왕’ 들은 없어지고 역사 그림으로만 남아 있다.
이제는 상징적인 것 뿐이다. 왕의 권력은 없어졌다.
창조주께서 없애버리셨다.
조선시대 선배들은 어떻게 알고
왕에게 '용'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
용안(임금의 얼굴), 용루(임금의 눈물), 용변
(임금의 똥), 용포(임금의 옷), 곤룡포(임금의 옷)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