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파 여행7 - 천일광장에서 지하철을 타고 고루에 내려 월호 호수를 찾아가다!
10월 17일 닝보(宁波 영파) 교외 저창고젠(慈城古镇 자성고진) 을 다녀와 영파역에서 지하철로
와이탄대교 外滩大橋(외탄대교) 역에 내려서 상해 보다 앞서 서양인 조계지 인 라오와이탄
老外滩 (노외탄) 을 둘러보고는..... 다리를 건너 티엔이쾅창 天一广场 ( 천일광장 ) 을 구경합니다.
그러고는 다시 나와 中山西路(중산서로) 에서 지하철 1호선 동문구역 地铁 東門口站
으로 내려가 지하철 1호선 을 타고 구러우 古楼(고루) 역에 내리는데 .....
원래 계획으로는 지하철을 계속 타고 가서 양산백(량산보)과 축영대(주잉타이) 의
사랑 전설에 의해 명명되었다는 랑주역 (梁祝站 양축역) 에 내려 벽화 를 보는 것입니다.
양축(梁祝) 은.......... “맹강녀(孟姜女)”, “우랑직녀(牛郞織女)”, “백사전(白蛇傳)” 과
함께 중국에 전래되는 4대 민간전설 중 하나로 “춘향전” 처럼 양산백과 축영대의
애틋하고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 는 중국인들에게 사랑받는 이야기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송, 원, 명, 청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희곡과 소설 에서 주요 재제로 활용되었으니 원래
전설에 문학적 가감이 진행되면서 구전된 만큼 판본도 10여개나 되며, 지역에 따라
이야기가 조금씩 달리 구전되기도 했으니 인물과 지리적 배경에 관한 이설이 존재 합니다.
장쑤(江蘇), 산둥(山東)과 강소성 이싱(宜興)에서도 양축전설 과 관련된 지명과 유적지가
발견되기도 하지만, 저장성(浙江성) 의 닝보(寧波 영파) 가 전설의 근원지 라는데...
‘중국의 로미오와 줄리엣’ 이라고 부를만큼 이루어질수 없는 비극적 사랑 이 주제라 합니다.
*** 이하 양축 관련 사진은 동양북스님과 청명교님 블로그에서 가져 왔습니다 ***
동진 시기에 왕조가 자주 바뀌고 사회가 혼란상태에 빠져 백성들의 삶은 파탄에 처하고
귀족 문인들은 현학(玄學) 에 빠졌으며 봉건지배 사상 이 자리잡기 시작해
여성 차별도 극심해지는 급변하는 사회에서...... 예교에 얽매이지 않고
기존의 경제와 신분의 차이를 바로 초월한...... "양축의 자유로운 사랑" 을 동경합니다.
축씨 가문에 영대(英台) 라는 총명하고 어여쁜 규수는 어릴적 부터 시문 을 좋아했으니
스승을 찾아 항저우에서 공부하길 원했지만 보수적인 아버지는 딸의 꿈을 받아
들이지 않으니..... 공부가 하고 싶었던 영대는 점쟁이로 가장한뒤 아버지에게
가서는 점괘를 빌미로 딸을 떠나보내야 한다고 말해 마지못한 승낙 을 얻어냅니다.
남장한 영대 는 항저우로 가는 길에 양산백(梁山伯) 과 조우하고 의형제 를 맺으니
항저우 만송서원 (萬松書院) 에 입학해 함께 공부하지만..... 산백은
영대가 여자라는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한채 동성 형제 로만 여기는데
3년후 아버지는 마씨 가문과 혼사 를 치르고자 그녀를 집으로 불러 들입니다.
산백은 영대가 떠나는 18리길을 함께하며 배웅 하는데 영대는 산백에게 사물을 기탁하며
사랑을 고백 해보지만.... 그는 얼른 이해하지 못하는지라 어찌 할수 없었던
영대 는 저와 외모와 성격이 똑같은 여동생을 소개해 주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헤어집니다.
헤어진 뒤 산백 은 그리움으로 앓게 되고 서원 사모로 부터 영대가 여자 였다는
사실을 듣게 되고 영대를 찾아가 청혼 하려 하지만 집안이
너무 가난했던 양산백 은........ 영대 집안에 제대로 청혼할 수 조차 없었습니다.
태수 아들 마문재와 혼사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와중에 뒤늦게 영대를 찾아간 양산백
은 눈물로 상봉 하는데..... 비록 살아서는 함께할수 없지만 죽어서라도 함께
묻히자고 약속하고는 고향으로 돌아온후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떠나 무성 구룡허에 묻히니 영대는 슬픔에 잠긴채 그를 따라 가겠노라고 다짐 합니다.
혼례를 치르던날 영대의 가마가 어떤 무덤을 피해 돌아가려 하나 더 나아가지 못하는지라
영대는 산백의 무덤임을 알고 장례 치르니... 천둥과 비바람이 몰아치고 산백의 무덤이
갈라지는지라 영대는 산백의 무덤으로 뛰어 들어가자 산백의 무덤이 닫히고 비바람이
그치며 무지개 떠오르고 영대와 산백은 나비 되어 무덤 밖으로 나와 세상을 날아 다닙니다.
无言到面前, 与君分杯水.
清中有浓意, 流出心底醉.
不论冤或缘, 莫说蝴蝶梦.
还你此生此世, 今世前世, 双双飞过万世千生去.
그대 앞에서 아무 말도 없이 그대와 물 한 잔 나눕니다.
맑은 물속엔 짙은 정이 있고, 마음 깊이 취한 사랑 넘칩니다.
원한이든 인연이든 호랑나비 꿈이라고만 하지 마세요.
이 삶도 이 세상도 당신께 드려 이제부터 영원히 함께 날아갈게요.
몇년전 이던가요? 중국 항저우 G20 정상 회담 환영회 때에 량주(양축) 전설 은
항주의 서호에 무대를 설치해..... 절강성 희곡인 월극(越剧) 으로
러시아의 푸틴과 독일의 메르켈 등 많은 국가 원수들 앞에서 공연 되었습니다.
량주(양축)역 역사 내부와 외부 에는 두 사람이 죽은 후에 나비 가 되어 날아갔으니
나비 장식 이 있는데....... 근처에 양산백· 축영대 테마공원 이 조성 되었습니다.
지하철 구러우 古楼(고루) 역을 나와 도로를 건너 행인에게 여러차례 물어 걸어서
10분만에 웨후콩위엔 月湖公园 (월호공원 : 문레이크 moon lake ) 에 도착합니다.
월호 호수 가장자리에 먼저 보이는건 옛날 이집트 전국일주 여행시 카이로 나일강변
에서 보았던 水厠碑(수측비) 인데..... 홍수로 물이 불어나는걸 확인 하던가 봅니다?
운하 를 둘러보고는 50미터 거리에 宝奎苗(보규모) 를 찾아가는데 듣던대로 입구에
작은 북을 든 노인과 어린아이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고는 달리 宝奎港(보규항)
이라고도 적힌 건물로 들어가니... 입장료가 없는 대신에 방명록 을 기록하게 합니다.
먼저 건물 마당에 선 ‘고려사관유지(高麗使館遺址)’ 표지석 을 발견하는데 그러니까 이
자리에 옛날 닝보(寧波 영파) 를 찾았던 고려 사신들과 상인들이 묵었던 영빈관 이
있었는데 지금은 보규모로 바뀌었지만 내부로 들어가 당시 그림이며 자료를 구경합니다.
닝보 (寧波 영파) 는 당나라 시대 중국 제일 최고의 무역항 으로 신라와 고려, 왜국 과
동남아 및 아랍 상인들이 드나들었던 국제 항구 이니 게다가 해상 실크로드 가
출발하는 항구이기도 한데..... 왜인들이 사력을 다해 둥지 를 틀고자 했던 도시입니다.
문득 닝보의 난 (寧波の乱) 이 떠오르는데........ 1523년에 명나라 닝보(寧波 영파) 에서
일본 오우치 大內氏(대내씨) 가문의 가신인 겐도 소세쓰 가 호소카와 가문 의 견명
감합선에 방화 해 일어난 사건으로 일본에서는 메이슈의 난 (明州の乱) 이라고 부릅니다.
난을 일으킨 오우치 가문 은 백제 성왕 의 셋째아들 임성태자 25세손 오우치 요시히로
(大內氏) 대에 서부 일본과 북규슈 7개국 을 지배하였으며.... 아시카가 막부 후계자
자리를 둘러싼 내란 오닌의 난 에도 참전해 교토를 지배 하에 두기도 했던 대영주 입니다.
그는 와카(和歌) 와 렌카(連歌) 에도 능했다는데... 오우치 大內氏(대내씨) 가문은 고려와
뒤를 이은 조선에 사신 을 보내 (조선왕조실록에 大內展 이름이 248회 나옴) 왜구 를
소탕해 주는 조건으로 불경 을 얻어갔으며 고려와 중국 무역을 장악해 부 를 쌓았습니다.
그런데 오우치씨 는 123년이나 계속된 전란인 일본 센고쿠시대에 책임 이 있으니, 무로마치
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나이 29세에 후사가 없자 동생 요시미 를 후계자로
정해 호소카와 가쓰모토 를 후견인으로 붙여 주었는데... 다음해 부인 히노 도미코 가
요시히사 를 낳으니 부인은 자식을 위해 중신 야마나 소젠 을 후견인으로 삼아 대립합니다.
1467년 교토에서 충돌하니 호소카와씨의 동군은 24개국 16만 인데 비해 야마나씨의 서군은
20개국 11만 에 불과한지라 승패가 날 무렵 히로시마등 6개국 영주 오우치씨 가 정예군
2만을 이끌고 서군에 참전 하니 전투는 장기전으로 변해 교토 50% 가 불타는데, 1473년
호소카와씨와 야마나씨가 죽으며 지방 영주들이 귀향해 자립 하니 수백개 국가로 갈라집니다.
명나라와 일본 무로마치(아시카가) 막부 사이 행해진 감합무역 은 명나라 건문제 (建文帝)
와 무로마치 막부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 때 개시되었는데, 명나라는 왜구 탓에
해금정책 (海禁政策) 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아시카가 막부의 쇼군은 일본 국왕 으로
책봉받음과 함께 왜구(倭寇)와 구별 하기 위한 감합부(勘合符) 를 명나라로 부터 받았습니다.
이에야스 11남 요리후사는 미토번 번주로 고산케 (御三家 어삼가) 인데 2대 번주 도쿠가와 미쓰쿠니
는 1672년 대일본사(大日本史) 를 편찬했으니 이때 쇼군이 중국에서 책봉받은걸 비난 합니다.
그건 그렇고 무역은 감합부를 통해 십년에 한번 조공형식으로 무역했는데 막부 사절 하카타
(博田) 나 사카이(堺) 의 유력한 일본 상인들이 따라갔으니..... 사무역(私貿易) 이 함께 행해졌습니다.
1467년에 오닌의 난 (応仁の乱) 이 벌어지니..... 막부의 간레이 가문 이자 사카이를
무역의 거점으로 하던 호소카와 가문 과 야마구치를 본거지로 하며 하카타와
효고(오닌의 난으로 얻음) 에 권익을 갖고 있던 오우치(大內) 가문 이 각자
사절단을 파견해 무역하자 호소카와씨와 오우치씨는 감합부 를 둘러싸고 대립 합니다.
명나라에서는 무종 정덕제가 새로 즉위했으며 오우치 가문 은 견명선을 주최해 발행받은
정덕 감합부 를 독점하니 1523년 오우치 요시오키 는 겐도 소세쓰 를 정사로 삼아
견명선 을 파견하자, 호소카와 다카쿠니 는 이에 대항해 란고 즈이사 를 정사로 삼아
무효화된 홍치 감합부 (弘治勘合符) 를 지니고 남해(南海)를 경유한 견명선을 파견합니다.
닝보(영파) 에는 오우치 가문의 견명선 이 입항해 있었기 때문에 호소카와 측 에게
전적으로 불리했지만.... 부사 소 소케이 가 명나라의 입항 관리소인
시박사(市舶司) 대감 에게 뇌물 을 써 호소카와 측이 우선 입항검사 를 받도록 합니다.
이에 오우치(大內) 측은 호소카와 측을 습격해 견명선을 불태워 버리는데 명의 관헌은
호소카와를 지원했지만 겐도 소세쓰 는 정사 란고 즈이사 를 죽이고 소흥 으로
도망친 부사 소 소케이 일행을 추격해 명의 관리들까지 살해 하는 대 사건이 벌어집니다.
사건은 외교 문제로 비화 되었으며 소 소케이 는 옥에 갇혀 죽는데 명나라의 대일
감정이 악화일로로 접어들어 1529년에 닝보의 시박사 대감이 폐지 되었으나
견명선은 1536년 오우치 요시타카 가 재개했으며 명나라 무역은 요시타카의
가신 스에 하루카타의 모반 으로 1551년 오우치씨가 몰락 할때 까지도 계속됩니다.
스에씨 를 꺽고 야마구치와 히로시마 영주 가 된 자는 모리씨 로 임진왜란에서 1군 1만9천중
고니시 유키나가군은 7천 이고, 2군 2만3천중 가토 기요마사군은 1만 이며 나베시마씨가
1만 2천, 4군 시마즈씨가 1만, 7군 고바야카와씨가 1만, 9군 우키다씨가 1만인데 비해
8군 모리 데루모토는 3만 을 동원했으며 정유재란도 3만을 유지하니 대단히 큰 영지 입니다?
명나라가 닝보의난을 문책 하려고 닝보(영파) 시박사를 폐지 했으니 그럼 무역이 중단되었느냐?
닝보 근처 쌍서와 선산제도에서 일본 상인 에 의한 사무역과 밀무역 은 계속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왜구 도 활동합니다만...... 고려 시절 뜸하게 오던 무역선 은 조선 건국후
성리학에 기초해 농업을 중시하고상업을 천시 하니 조선은 단 한척의 무역선도 띄우지 못합니다.
첫댓글 양산박과 영대의 애기 중국판 로미와 줄리엣입니다.
나라마다 이런
애잔한 이야기가 전해지는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