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 수풍댐이 바라보이는 호젓한 강변에 서서 바라보는 북한 땅은 깊은 강을 사이에 두고 손에 잡힐 듯 지척이다. 스산한 강바람이 일고 햇살마저 어두운 강물 속으로 빠져드는 적막한 오후, 고기잡이 배 한척이 외롭게 강둑에 묶어있다.
여름철이 되면 강도 바빠진다고 한다. 중국 하구촌 도화도(桃花島)에서 출발한 유람선이 여기까지 거슬러 올라와 승객을 내려놓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6.25전란으로 남쪽으로 내려온 실향민이 여기까지 찾아왔다.
유심히 강 건너 언덕을 살피던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체 “저기 저 언덕에 예배당이 있었습니다”. 눈길을 떼지 못하고 한참이나 석상(石像)처럼 그렇게 서 있었다고 했다. 그의 눈시울에 이슬이 맺히고 켜켜이 쌓인 오랜 그리움도 속절없는 세월의 강물에 흘려보내야 했을 것이다.
중국은 수풍댐으로부터 20여km 떨어진 압록강 하류에 '태평만 댐‘을 건설했다. 이 공사로 장하도(長河島)와 도화도(桃花島) 두 개의 섬이 생기고, 도화도와 마주하고 있는 땅이 북한의 청성군(淸城郡)이다. 이곳에는 6.25전란 중 폭격으로 반 토막이 난 압록강 다리가 65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쟁의 상흔으로 그대로 남아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남침으로 6.25전란이 발발했다. 낙동강까지 밀렸던 국군은 ‘맥아더’장군이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전선의 허리가 잘린 북한군을 지원하기위해 중공군이 한국전선에 투입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미 공군은 신의주와 청성군으로 연결되는 압록강 다리를 폭파했다.
이런 아픈 역사를 증언하듯 도화도에는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모택동 주석의 아들 모안영(毛岸英) (1922.10.24-1950.11.25)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그는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 팽덕희의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참전했다. 평양과 가까운 회창군 대유동에서 복무하던 중, 미군의 소이탄 폭격으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화상을 입고 전사했다.
중공군 1백만 명이 참전하여 36만 명이 희생된 이 전쟁이 우리에게 주는 특별한 교훈이 있다. 당시 미국대통령 아들과 중국주석의 아들이 참전한 일이다. 이것은 사회 지도층이 자신이 누리는 명예만큼 그 의무를 다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1953년 2월까지 미8군사령관으로 있었던 ‘제임스 밴프리트’ 장군(1892~1992)이다. 이 전쟁에서 장군은 외아들 ‘밴프리트 2세’ 공군 중위를 잃었다. 밴프리트 2세는 B-26 폭격기로 압록강지역에 출격했다가 새벽 3시에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4월4일 아침, 미 5공군 ‘에베레스트’ 사령관으로부터 아들의 실종보고를 받은 ‘밴프리트’ 사령관은 “밴프리트 2세 중위에 대한 수색을 즉시 중단하라. 적지에서의 수색은 너무 무모하다”는 명령을 내렸다.
이 아들이 전쟁터로 오기 전,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어머니, 저는 지원해서 전투비행훈련을 받았습니다.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저는 조종사이기 때문에 기수에는 폭격수, 옆에는 항법사, 후미에는 기관총 사수와 함께 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지금 한국에서 싸우고 계십니다. 저도 미력하지만 아버지에게 힘을 보탤 시기가 된 것 같습니다.
어머니,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미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소집된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연인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의무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들 짐 올림“
‘밴프리트’ 중위가 전사하고 부활절을 맞은 밴프리트 사령관은 이 전쟁으로 전사한 미군장병들의 부모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저는 모든 부모님들이 모두 저와 같은 심정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다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바와 같이 벗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내 놓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밴프리트’ 사령관의 후임은 마지막 UN군 사령관인 ‘마크 클라크’대장이었다. 사령관의 아들 ‘클라크’ 대위는 금화지구의 저격능선 전투중대장으로 세 번에 걸친 부상을 입은 후 전역했으나 그 후유증으로 결국 사망했다.
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노르만디 상륙작전의 영웅으로 미국 대통령에 당선 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도 1952년 12월 한국전선을 찾았다. 밴프리트 사령관으로 부터 전황브리핑을 받은 대통령은 그의 아들의 근무지를 물었다. 전방 3사단 정보처에 있다는 보고를 들은 대통령은 ‘존 아이젠하워’ 소령을 후방에 배치해 달라는 주문을 했다. “내 아들이 전투 중에 전사한다면 슬프겠지만 나는 그것을 가문의 영예로 받아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포로가 된다면 적은 미국대통령의 아들을 가지고 흥정을 하려 들 것입니다. 나는 그런 사태를 원치 않습니다.“
이들 외에도 낙동강 전투의 영웅 ‘워커’장군이 있다. 장군은 1950년 12월 23일 전방부대 포상을 위해 의정부로 가던 중, 도봉동 596-5번지에서 반대편에서 남하하던 한국군 트럭과 정면으로 충돌하여 현장에서 사망했다. 전방부대에 있던 그의 외아들 ‘샘 워커’대위에게 아버지의 시신을 미국 본토로 운구하도록 지시하자 자신은 전선에 남아 싸워야 한다며 이 제안을 거절했다.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그를 동경 사령부로 불러서 아버지의 시신 운구를 직접 명령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에 미군장성의 아들 142명이 참전했고, 그 중 35명이 전사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러나 전쟁 당사국인 우리국민들의 의식은 참으로 부끄러웠다. 애국도 은혜도 몰랐던 무지한 백성이 있었다.
전북 금산의 산속에서 풀뿌리와 산짐승을 잡아먹으며 36일을 버텼던 미 24사단장을 미화 5 달라를 받고 인민군에게 팔아넘긴 사람이 있었다.
만 3년 동안 북한에 억류됐다가 풀려난 ‘딘 소장’은 오히려 자신을 밀고한 두 명의 한국인을 선처해 달라는 편지를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기까지 했다.
‘딘 소장’의 미 24사단이 초기 북한군의 공격을 20일 동안 지연시키지 않았다면 유엔군이 한반도에 상륙하기 전에 남한은 이미 공산화 되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나 스스로에게 자문해 본다. 내가 밴프리트. 클라크. 워커 장군이었다면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솔직히 자신이 없다.
벌써 17년도 지난 일이다. 대학 1년을 마친 아들이 군에 입대하겠다고 했다. 아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육군으로 입대하겠다는 아들의 뜻을 공군으로 돌렸다. 젊은 날 25사단 최전방 D.M.Z에서 철책을 사수하는 G.O.P소대장으로 복무할 때의 내경험이 떠올라서였다. 아들이 이런 최전방에서 위험한 보직을 받았을 때 누구에게든 부탁하지 않을 자신이 내겐 없었다.
고교 동기로 가깝게 지내던 당시 수도군단장인 친구 생각이 났다. 전도유망한 삼성장군에게 사적인 일로 부탁하지 않으려면 육군을 피해 공군으로 입대하는 것이 해답이었다. 아들은 군복무기간이 육군보다 길다는 이유로 잠시 망설였지만 내 뜻에 기꺼이 따라주어서 고마웠다.
연전에 D.M.Z에서 목함 지뢰로 다리를 잃은 두 하사관의 의연한 자세와 이일로 자진해서 전역을 연기했던 87명의 장병들을 보면서 이들의 애국심에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자유민주주의 토양에서 자란 신세대가 편향된 역사교육에도 흔들리지 않고 존엄한 국가관을 지키고 있는 그 모습이 몹시 자랑스러웠다.
이런 용기는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불꽃처럼 살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름 없는 수많은 영혼들을 욕되게 하지 않을 든든한 초석이 될 것이다.
창조문예 6월호에서 퍼 온 글 수필집 '나그네길,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음
첫댓글 아버지의 날 저녁에 읽은 멋진 아버지들의 이야기가 감동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