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멋
멋있다. 아름답다는 표현은 같으면서도 미묘한 차이가 있다. 아름다움은 시각적 이미지에 더 가깝고 여성에게 더 어울린다면 멋은 내적인 기품과 남성에게 맞는 은유적 표현에 가깝다. 사전적 의미의 멋은 곱고 아름다운 미적인 것을 말하는 순수한 우리의 말이다. 아름다움이란 동서양 구분 없이 여성에게 더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언어지만 남성에게 아름답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멋은 무엇이며 어떤 것들이 있을까. 전통적인 문화 속의 유물들에서 그 의미를 찾는 이가 있는가 하면 단일민족으로 이어온 수 천 년 역사 속에 침잠되어온 정신적 요소에 무게를 둔 학자들도 있었다. 한국의 멋을 예기할 때 가장 많이 나온 부분은 곡선(線)의 아름다움이다.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솟은 한옥의 처마는 그 재료가 나무라는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섬세한 곡선을 연출하고 있다. 수 천 년 세월을 지나온 고찰의 곡선들은 내려앉을 듯 무게감이 있으나 부드러움이 있고, 절제되면서도 힘찬 기상으로 하늘과 곡선이 맞닿아 한울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늘 공간과 어우러진 곡선과 달리 수직 기둥과 수평을 이룬 대들보의 다양한 선들은 건축물을 완성시켜 진정한 곡선의 여백을 느끼게 해 준다.
한옥의 추녀를 떠 올리게 하는 한복 저고리의 배래는 그 곡선이 허공으로 이어져 자연스럽다. 한복의 가장자리 도련의 선은 물결처럼 넘실대듯 유연하지만 빳빳한 깃의 동정은 음과 양의 조화를 살린 한국인만의 독특한 창조물이라 할 수 있다.
외국인들이 탄성을 지르고 만 달 항아리의 곡선은 또 어떤가. 무채색 인듯하면서 느껴지는 은은한 분청은 선의 조합으로 그 우아함을 담고 있다. 습식문화에서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빚은 주방용품들과 옹기, 밥그릇 찻잔 등도 선을 매개로 한 우리의 의식주에서 생성된 문화의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내적인 멋과 조화를 이뤘을 때 보여주는 시각감성의 완성일 것이다. 지인의 초대로 오랜만에 그림전시회에 갔었다. 초가집을 연상케 하는 작은 전시실은 창덕궁 뒷길에 자리한 특이한 장소였다. 전시가 끝나고 뒤풀이에도 엉겁결에 참석하게 되었다. 인사동 골목에 자리한 찻집으로 우리는 이동했고 그 자리에서 참 인상적인 한 여인을 보았다. 현대화 화가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회화작가와는 어울리지 않게 개량한복을 입은 이순초반으로 보이는 연령대의 그녀는 근자 보기 드문 기품과 고운 자태가 엿 보였다. 신선한 울림이 있었고 뒤풀이 내내 설렘으로 가슴은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찻잔을 다루는 손길이 자연스럽고 절제된 언행과 엷은 미소는 품격 있는 아름다움이었다. 색 바랜 수수한 개량한복의 깃은 그 세월만큼 무게와 품위가 있었고 그녀의 여유 있는 모습은 여밈의 깊이가 그대로 느껴졌다. 그녀 또한 젊고 활기찬 꽃 시절을 보낸 내제된 시간들은 꽃씨로 여물어가는 모습이었다. 코로나 사태로 한동안 한국엘 가지 못하다 다시 찾았을 때, 맨 먼저 찾아간 곳도 그 찻집이었다. 그녀를 바라보았던 그 자리에 앉아 차를 우리곤 했지만 다신 그를 볼 수 없었다. 어느 날 다시 찾은 그 찻집은 예고 없이 문을 닫고 말았기 때문이다.
남자가 ‘참 멋있다’라고 처음 느낀 것은 조선 중기 외교관이자 통역사인 홍순원에 대한 글을 읽으며 참다운 멋이 무엇인지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홍순언은 역관(통역사)으로 사신을 수행해 명나라로 갔었다. 수도 연경의 홍등가를 구경하다 한 기방 앞에 하룻밤 자는데 은자 1천 냥이라고 쓰여 있는 안내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은자 50냥도 비싼 그 시절 어떤 기녀가 1천 냥을 요구하지? 호기심에 기방에 들어가 그 기녀를 불렀다. 여인은 “저의 부친이 억울하게 나라에 죄를 지어, 은자 1천 냥이 있어야 구명이 됩니다. 부친을 살리기 위해 제 몸을 팔 수 밖에 없습니다.”고 했다. 류씨라고만 알려진 그 여인은 지극히 아름다울 뿐 아니라 기품이 있었다. 홍순언은 인삼을 판돈과 비단을 사기 위해 가지고 간 공금을 털어 낭자에게 주었다. 여인은 이름이라도 알려 줄 것을 간청했으나 홍순언은 말없이 기방을 떠났다. 공금을 여인에게 준 홍순언은 귀국 후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선조가 임금이 되고, 주청사를 보내면서 200년 동안 해묵은 종계변무(宗系辨誣)를 반드시 해결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종계변무란 태조 이성계의 족보가 명나라의 '대명회전'에 반대파였던 이인임의 아들로 잘못 기록된 것을 수정하려 한 일이다. 개국 이후 10여 차례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했으나 해결되지 않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도 조정은 이 문제에 매달려 있었다.
목숨이 두려워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사절단에 홍순언은 자원하였다. 사절단이 연경에 도착했을 때 명나라 예부상서 석성(石星)이 조선사절단의 역관을 찾았다. 예부상서는 지금의 외교장관이다. 조공관계가 분명하던 시절 예부상서는 황제 다음으로 고관이었다. 홍순언이 기방에서 도와준 여인은 석성의 후처가 되어 있었다. 류씨 부인은 남편에게 조선 역관의 선행을 알려주었고, 석성은 홍순언을 찾아 부인의 은혜를 갚으려 한 것이다. 그 때서야 종계변무도 해결되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명나라의 파병으로 임진왜란은 끝났는데, 그 때 조선파병을 강력히 지원한 사람이 바로 석성이다. 기방에서의 특별한 인연이 나라를 구하게 된 관계로 발전한 것이다. 무리한 임진왜란 지원으로 석성은 파면당하고 화를 피해 조선으로 피신해 정착하게 되었고, 한국의 해주 석씨가 그 시조다.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의 멋을 말 할 때 으뜸으로 치는 것도 유구한 역사의 문화에 기인한 정신적 요소를 꼽고 있다. 서로 분열되어 있다가도 어떤 위기가 닥치면 혼연일체가 되어 그것을 극복해 내는 점도 한국인만의 정신이자 멋이라고 말한다. 오묘하고 치밀한 손재주와 무기교의 기교와 자연을 살린 선의 예술적 감각 또한 어느 민족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매력이라고 말한다. 세계적인 건축가 프랑크 게리는 몇 번이고 종묘를 찾아가 감탄하면서 남긴 명언이 있다. 고귀한 단순함과 조용한 위대함은 한국인의 혼에서 비롯된 멋이자 예술적 감각이라고 표현했다.
자명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인사동 찻집에서의 경험과 몇 백년 전 홍순원이란 분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네요. 수필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늘 격려의 말씀 감사합니다.
이 글은
오래전부터 한 번 써 보려고 자료들을 모으고 모으고 하다
마무리를 했는데, 뭔가 좀 아쉬운 점이 있네요.
시간이 좀 흐른 후 다시 교정을 보려고 합니다. 아직 원고 마감이 좀 남아서요.
저 이번 한국 방문에 종묘를 방문 했어요!
정전은 보수 공사 중이라 아쉬운 면이 있었지만 별모에서 그 ‘고귀한 단숨함과 조용한 위대함’이 흘러나왔어요. 그 기품을 담고 싶습니다!
역시
한나님 답습니다. 저는 늘 근처 숙소에 머물지만 아직 가 보질 못헀네요.
오픈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지만 다음 달엔 꼭 가보려고 다짐합니다.
담에 종묘에 대한 얘기도 듣고 싶네요.
빨리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