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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에 쓰인 월인석보 권두본 첫 장.[1] |
1. 개요2. 내용3. 기타4. 관련 영상5. 외부 링크
訓民正音 諺解本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을 우리말로 번역한 책. 현재 1459년 만들어진 원본이 서강대학교 도서관에, 그 필사본들이 서울대학교 도서관, 고려대학교 도서관, 세종 대왕 기념 사업회, 일본 궁내성 등에 소장되어 있다. 또 다른 명칭으로는 훈민정음주해본(訓民正音註解本)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의 4대 왕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최초로 창제하고 훈민정음 해례본을 반포한다. 그러나 이 해례본은 한문으로 작성되어 있어 한문에 조예가 있는 사람만이 읽을 수 있었다.[2] 이후 7대 왕 세조가 즉위한 후 세종 때 만들어진 훈민정음을 백성들에게 좀 더 널리 알리기 위한 목적에서 해례본의 서문과 예의(例義) 부분을 한문에 무지한 사람들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완전히 우리말로 언해, 윤문, 번역하고, 훈민정음으로 기록하여 전국에 배포한 책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훈민정음이라 하면 떠올리는 "나랏말싸미 듕귁에달아" 로 시작되는 문장도 여기서 나온다. 서문의 내용 자체는 실록에도 그래도 수록되어 있지만 당연히 한문으로 적혀 있다. 만약 언해본이 편찬되지 않았다면 서문을 '국지어음, 이호중국.'으로 외워야 했을 것이다. 물론 언해본이 번역된 문장이라면 세종이 직접 한 말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훈민정음 반포(1446년)부터 훈민정음 언해본 간행(1459년)까지의 간격이 겨우 13년에 불과하기에[3] 신하들 사이에서 구전으로 이어졌거나 세종으로부터 직접 듣고 기억하는 신하가 있었다면 세종의 말을 번역 없이 훈민정음 언해본에 그대로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다.
서강대학교에 소장된 1459년 초간본 월인석보 권1에 수록되어 있는 훈민정음 언해본이 가장 오래된 것이며, 훈민정음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로 간주되고 있다.
남한강 여주보에는 훈민정음 언해본 문구가 수록되어 있는데 2011년에 이 부분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이 나와 난리가 난 적이 있다.연합뉴스: 남한강 여주보 '훈민정음 언해본' 오기 논란 여주보에 만들어놓은 훈민정음 언해본 구조물은 1459년(세조 5년) 간행한 훈민정음 언해본에서 한자와 주석 부분을 빼고 글자체를 월인천강지곡(1449년)과 비슷한 체로 바꾸어 새겨넣은 것인데, 확인 결과 목구멍 소리 동그라미(o) 등이 오기되어 있다고 한다.
2010년 5월에는 훈민정음 언해본을 소재로 한 소설이 나온 적이 있다. 책의 작가는 세종 대왕의 훈민정음 한자 전문이 왜 세조 대에 들어온 이후에야 우리말로 번역될 수 있었던 것인가 그리고 또한 어째서 불경인 월인석보 1권 첫머리에 수록되어야 했는가에 대한 의문에서 착안해, 세종의 훈민정음이 언해되고 불교 경전에 들어간 것은 세조가 단종에 대한 왕권 쟁탈과 정당성을 위해 사용한 포석이었을 것이라는 허구의 프레임을 우수한 상상력을 통해 풀어나갔다고 소개하였다.
부산일보: 모반의 연애 편지 / 김다은
국민일보: 세조의 왕위 찬탈에 얽힌 비밀 파헤쳐… 김다은 장편 ‘모반의 연애편지’
한국경제: 궁궐 편지 84통에 담긴 정치 음모와 사랑
[1] 18세기경에 쓰인 박승빈본(육당문고본)은 번역의 시기가 다르므로(그동안 한국어가 달라졌으므로) 번역문이 다르다. 예를 들면 월인석보 권두본의 첫 글은 나랏〮말〯ᄊᆞ미〮지만, 육당문고본의 첫 글은 나랏〮말〯소리〮다.[2]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처음 한글을 소개하는데 한글로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영어를 모르는 어린이에게 영어를 처음 가르치려면 영어는 큰 글씨로 한 마디만 써놓고 한국어로 뜻이나 발음을 자세하게 써놓는 것과 같다.[3] 그 사이 문종의 죽음, 계유정난 등 굵직한 사건들이 있기는 했지만 언해본 간행 당시까지도 세종 치세에 등용된 신하들이 많이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