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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군 문화재 지킴이 활동(남산공원-충의사-영벽정)
화순군청 홈페이지 https://www.hwasun.go.kr/index.do?S=S01
화순 문화 관광 http://www.hwasun.go.kr/culture/index.do?S=S09
◆ 양한묵 선생 추모비
3.1운동 민족대표 중 유일한 전남 출신, 전남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지강 양한묵 선생 추모비
양한묵(梁漢默), 1862년 4월 29일 ~ 1919년 5월 26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천도교인이며 본관은 제주. 아호는 지강(芝江).[1]자는 경조(景朝) 또는 길중(吉仲).
▶생애
전라남도 해남의 사회적으로 문과 급제자를 다수 배출한 양반의 명문가 출생이다.
지방의 세무 관리로 일하다가 사직하고 베이징과 일본을 여행하던 중에, 일본에 망명 중이던 천도교(당시 동학) 교주 손병희와 전직 개화파 관료 출신인 권동진, 오세창 등을 만나 천도교에 입교했다.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손병희는 일본에 머무르면서 국내에 진보회를 결성하도록 하여 단발을 권하고 내정개혁을 촉구하는 등 계몽운동을 펼쳤는데, 이때 이용구의 일진회 계열이 친일파로 변신한 사건이 있었다. 망명 중이던 천도교 동료들보다 앞서 귀국한 양한묵은, 일진회에 대항하기 위하여 이준, 윤효정과 함께 공진회, 헌정연구회를 조직하였다. 헌정연구회는 근대적인 헌정 연구를 내세운 계몽 단체로 입헌군주제를 주장했으며, '헌정요의'를 저술하여 약 한달 간 황성신문에 연재하였다. 이후 장지연, 나수연이 대한자강회로 이어받았다.
이기, 나인영, 오기호 등과 미국에서 열리는 포츠머스 강화회의에 참가해 한국의 입장을 밝히려는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이 귀국한 뒤로는, 다시 천도교 기반 계몽 운동으로 돌아온다. 1909년 천도교 법도사에 임명되어 천도교 교리서인 '대종정의', '무체법경' 등 약 20권의 교리서를 저술하였다. 그 중 대종정의라는 책에서 최초로 '인내천(人乃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손병희의 교육 운동에 적극 동조하여 보성전문학교, 보성중학교, 동덕여학교 등 근대 교육 기관의 인수와 경영에 참여했고, 1919년 3·1 운동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식에 참가했다. 만세삼창 후 체포된 양한묵은 서대문감옥에서 수감되어 재판을 받던 중 고문으로 인해 사망했다. 민족대표 33인에 대해 징역 3년형이 최고의 중형이었기에 대부분 옥고를 치르고 풀려났으나, 양한묵은 이들 가운데 유일하게 옥사하였다.[1]
▶사후
그의 유해는 수철리(현 성동구 금호동) 공동묘지에 묻혔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후 1922년 5월 고향을 그리던 선생의 마음을 헤아려 천도교단이 주선하여 선생의 묘소를 전남 화순으로 반장하였다.
▶저서
저서로는 천도교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을 해설한 교리서 《동경연의(東經演義)》(1907)가 있다.[1]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서양정[ 瑞陽亭 ]
▶정의: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향청리에 있는 활터.
▶개설: 서양정은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지역 주민의 궁도 활동을 도모하고자 마련된 궁도장이다.
▶건립 경위: 서양정은 전라남도 화순군의 궁도 발전에 계기를 마련하고자 건립하였다.
▶변천: 서양정은 화순읍 남산의 정상에 위치해 화순의 옛 지명을 따라 서양정(瑞陽亭)이라 칭했다고 한다. 서양정은 향사당(鄕射堂)으로 그 맥을 이어오다가 1964년 5월에 착공하여 9월에 준공하였다. 그 후 1974년 3월 10일에 착공하여, 같은 해 10월 26일에 준공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제대로 된 면모를 갖춘 궁도장이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양정 [瑞陽亭]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진각 국사 유적비[ 眞覺國師遺蹟碑 ]
▶정의: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향청리에 있는 화순 출신 진각 국사를 기념하는 유적비.
▶개설: 화순 남산 공원에 있는 고려 시대 수선사(修禪社) 2세 사주인 진각 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1178~1234]의 유적비이다. 비문은 고려 시대 이규보(李奎報)[1186~1241]가 왕명으로 지은 것이며 진각 국사의 태생지인 화순 향청리에 1992년 건립하였다.
▶건립 경위: 진각 국사 유적비는 고려 시대에 왕명으로 이규보가 지은 진각 국사 비의 비문을 강동원이 『진각 국사 어록』 부록편에서 확인하여 진각 국사의 태생지인 적천리[현 화순읍 향청리]에 1992년 9월에 세웠다.
▶위치: 진각 국사 유적비는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화순군청에서 800m 거리로 국민 건강 보험 사거리, 자치샘 사거리를 지나 화순 남산 공원 오르는 길에 있다.
▶형태: 진각 국사 유적비는 현대에 세운 비이지만 좌대, 귀부, 비몸돌, 이수를 갖추고 있다. 앞면에 ‘진각 국사 유적비’라 1행으로 새기고 옆면과 뒷면을 돌아가면서 비문을 새겼다. 마지막 부분에 비문 글씨를 쓴 사람과 건립의 경위를 적었다. 글씨는 함안인 조용민이 썼고, 『진각 국사 어록』의 부록편에서 찾아서 국사 출생지에 비를 세운다는 강동원의 기문이 있다.
▶금석문
앞면에 ‘진각 국사 유적비(眞覺國師遺蹟碑)’라 1행으로 음각하였고, 비면을 돌아가면서 비문을 새겼다. 비문 내용은 고려 시대에 왕명으로 이규보가 지은 진각 국사의 비문을 앞부분에 그대로 새겼다.
비문은 진각 국사가 화순에서 향공 진사의 아들로 태어나 과거에 급제한 뒤 보조 국사 지눌(知訥)에게 출가하여 간화선을 수행하고 보조 국사에 이어 수선사의 제2세 사주가 되어 고려 강종(康宗)의 지원으로 수선사를 확장하고 집정자 최우는 두 아들을 국사에 출가시키는 등 연관을 맺고 월등사에서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 진각 국사는 입적하자 입적처인 월등사에서 다비하여 영골을 거두어 본산인 송광사에 돌아가 광원암에 탑을 세웠다 하였다. 진각 국사의 성은 최씨(崔氏), 자는 영을(永乙), 자호는 무의자(無衣子), 법명은 혜심(慧諶)이다.
마지막 부분에 비문 글씨를 쓴 사람과 건립의 경위를 적었다. 이에 따르면 ‘고려 고종 22년 을미(1235년) 평장사 판예부 한림원 소신 이규보가 왕명을 받아 지은 것을 함안인 조용민이 삼가 쓰다. 위의 비문은 『진각 국사 어록』의 부록편에서 찾아냈는데 국사께서 태어나신 화순읍 적천리 지금의 향청리에 이 비를 세우다. 때는 대한 광복 뒤 48년 임신(1992년) 9월 진양인 강동원이 삼가 기록하다[高麗 高宗二十二年乙未 平章事 判禮部 翰林院 小臣 李奎報 宣撰 咸安 趙鏞敏 謹書 上碑文 見於國師語錄附錄編 今敢摭出刻碑 樹之於師所生」和順跡泉里 現鄕聽里 時 大韓光復後 四八年 壬申 九月 日 晋陽 姜東元 謹記]’라는 내용이다.
비문은 『동문선』 제118권과 『동국 이상국 전집』 제35권에 ‘조계산 제이세 고 단속사 주지 수선 사주 증시 진각 국사 비명 병서 봉선술(曹溪山第二世故斷俗寺住持修禪社主贈諡眞覺國師碑銘 幷序 奉宣述)’이라는 제명으로 실려 있다. 『동국 이상국 전집』에는 ‘비석에 새길 때 비면이 좁기 때문에 산삭하기를 청하였고, 여기에는 예전 것대로 하였기에 두 본이 같지 않다.’는 주석이 있어 고려 시대에 현지에 건립되었던 비와 문헌상의 내용이 약간 다르다고 여겨진다. 고려 시대의 비는 비문상에서는 ‘입적처인 월등사에서 다비하여 영골을 거두어 본산인 송광사에 돌아가 광원암에 탑을 세웠다 하였다.’고 하였으나, 비석은 강진 월남사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글씨는 김효인(金孝印)이 써서 세웠다 한다.
그리고 『조계 진각 국사 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에도 비문이 실려 있는데, 이 비문을 확인하여 화순에 세운 것이다.
▶현황: 현대에 세운 화강석의 비로서 보호 시설물은 따로 없지만 보존 상태는 아주 양호 하다. 사람이 많이 찾는 공원 입구에 자리를 마련하여 관리도 잘 되고 있다. 관리 주체는 화순군이다.
▶의의와 평가: 현대에 세운 비이지만 고려 시대 문장가 이규보가 지은 진각 국사의 비문을 찾아서 그대로 새겨 세웠기 때문에 고려 시대 불교사와 화순의 향토학 현장을 알 수 있는 금석문 자료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각 국사 유적비 [眞覺國師遺蹟碑]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김삿갓
김병연(金炳淵, 1807년(순조 7년) ~ 1863년(철종 14년) 3월 25일)은 조선 시대 후기의 풍자 시인이자 방랑 시인이다.
그는 흔히 김삿갓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일생과 배경
속칭 김삿갓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김병연[2][3] 그는 '삿갓 립'(笠)자를 써서 김립(金笠)이라고도 한다.
그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字)는 성심(性深), 호(號)는 이명(怡溟), 지상(芝祥), 난고(蘭皐)이다. 그의 선대 조상을 살펴보면 9대조부는 병자호란 때 척화대신으로 유명한 청음 김상헌의 사촌형으로서 형조참판을 지낸 김상준이며 5대조는 황해도 병마절도사 김시태, 고조부는 전의현감 김관행, 증조부는 경원부사 김이환이다.
그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의 난 때 선천 부사로 있다가 레지스탕스로 투항한 것을 두고 비난하는 시로 장원한 것을 수치로 여겨, 일생을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단장으로 벗을 삼아 각지로 방랑을 했다.
도처에서 독특한 풍자와 해학 등으로 퇴폐하여 가는 세상을 개탄했다.
그의 수많은 한문시가 구전되고 있다.
그의 묘는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에 있다.
▶생애
1807년 경기도 양주에서 양반 가문인 김안근(金安根)의 4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당시 그의 조부(祖父)이자 선천부사(선천방어사)였던 김익순은 반란군 수괴 홍경래에게 항복하였다.
김익순은 함흥 중군(中軍:정3품)으로 있다가 선천부사 겸 방어사로 전관되어 온지 불과 서너달이 지난 상태였다.
신임지에 와서 어수선한 일을 정돈한 후 시골의 저명한 선비들을 모아 수일간 잔치를 열었는데 새벽에 반란군이 쳐들어와 술에 취해 있는 방어사(防禦使) 김익순을 결박하고 항복을 받아낸 것이다.[4]
김익순은 그로 인해 조정으로부터 참수를 당하였으나 그 가족은 살려주기로 하였고 김삿갓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그 후 가문에서 종 노릇을 하던 이(김성수)의 고향인 황해도 곡산으로 가족이 피신하였으나 아버지는 도중에 사망하였고 어머니만이 살아남아 4형제를 키워내었다.
그 중 차남인 병연은 어렸을 때부터 문장 솜씨가 뛰어나다는 정평을 받아 신동(神童)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그 뒤에 강원도 영월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20세의 나이로 급제를 받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과거에 응시했을 때, 자신의 조부인 김익순의 역적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을 쓰라는 시제에 김익순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글을 써 급제한 것이었다.
뒤에 어머니로부터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충격을 받아 삿갓을 쓰고 전국 유랑을 떠나게 되었고 이 때부터 이름도 '병연'이라는 본명 대신 '삿갓'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유랑 도중 집에 잠시 들렀다가 그 후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일설이 있다.
▶할아버지 김익순하고의 관계
당시 20세가 되었을 때까지 김병연은 할아버지 김익순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김익순이 적장 앞에 무릎 꿇은 대가로 역적으로 몰린 사실을 아들들이 알지 못하도록 숨겨온 어머니 때문이었다.
또한 아들들마저 역적의 손자로 낙인이 찍히면 조정과 세상으로부터 불신과 비난 등은 물론 목숨도 위태로워진다는 사실을 알고있기에 일부러 할아버지의 존재를 숨겨왔던 것이었다.
때문에 병연은 자신의 할아버지 익순이 사망했던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결국 영월 백일장 때 시제에 김익순에 대한 내용이 나오자 그가 자신의 가족과 아무관계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여 그를 싸잡아 비판하는 답글을 쓰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가서야 어머니의 해명으로 자신의 할아버지를 욕되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결국 이로 인한 자괴감에 빠져 허심탄회하다가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그는 삿갓을 쓰고 방랑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방랑의 시작
그가 본격적으로 전국 방랑길을 떠난 것은 20세 때 어머니가 할아버지 김익순의 존재를 해명한 후부터였으며 방랑 중이던 29세 때는 가련(嘉蓮)이라는 기녀와 동거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방랑길을 떠나기 전에 갓을 파는 집으로 가서 크기가 큼지막한 삿갓을 주문하고 집에서 긴 지팡이와 동국여지승람 등 지도책 등을 소지하고 떠났다는 일설이 있다.
그에게는 충청남도 홍성군에 외가가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는 어머니와 처(妻)에게는 홍성의 외가에 다녀오겠다고 하면서 자신은 사실상 정반대 북쪽의 금강산으로 첫 방랑을 떠난 후 한때 잠시 집을 들렀던 것을 제외하곤 사실상 가족들과 일절 연락을 끊은 채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되었다.
▶사망
그는 20세에 방랑을 시작한 후로 가족과 연락을 일절 취하지 않았다.
한때 그의 둘째 아들 김익균이 3차례 정도 귀가를 권유받기도 했지만, 모두 거절하고 방랑을 계속했다.
그 후 사실상 마지막 방문지인 전라남도 화순에 들렀던 중 1863년(철종 14년) 안 참봉의 사랑방에서 죽었는데 아들 김익균이 부고(訃告)를 듣고 화순으로 달려가 아버지의 시신을 강원도 영월로 운구하여 안장되었다.
김병연의 시신이 묻힌 곳은 훗날 지금의 김삿갓면이 되었다.
조선 전국 방랑 중 전라도 화순 지방 기거 여부 관련 논란
화순군 관계자는 김삿갓이 화순군 동복면에 머물러서 6년 동안 있었던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주장했다.[5]
김삿갓은 방랑의 시간들 속에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1863년 3월 25일, 57세의 나이로 전라도 화순군 동복면의 한 선비 집에서 객사하게 된다.
부친의 행방을 찾아 헤매던 익균은 부친의 유골을 자기 집 가까운 영월로 이장한다
출처: 위키백과
◆ 항애국지사충혼탑[ 抗日愛國志士忠魂塔 ]
전라남도 화순군에 있는 김용상, 김영하 선생의 항일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충혼탑.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에서 출생한 두 명의 항일애국지사 해석 김용상(海石 金鏞相, 1858~1916)선생과 송정 김영하(松亭 金榮夏, 1872~1921)선생의 항일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8년 11월 5일 건립된 충혼탑이다. 두 선생은 서로 사제지간이면서 작은 아버지와 조카의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두 선생은 또한 을사늑약 이후 한일합방이 되자 전재산을 항일운동을 위해 내어놓고 항일운동에 투신하던 중 밀고에 의해 체포되어 형무소에서 복역하였으며, 이때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김용상 선생은 2003년 독립의사 대통령표창을, 김영하 선생은 1980년 독립의사 건국포장과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追敍)되었으며, 이후 화순 종중 유지들의 성금과 화순군의 후원을 받아 충혼탑 건립이 추진되었다. 충혼탑은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406-3번지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항일애국지사충혼탑 [抗日愛國志士忠魂塔]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충의사(최경회장군)
▶위치: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충의로 409
▶개요
충의사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삼장사의 일원으로 순국한 최경회 선생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한 곳이다. 선생의 자는 선우, 호는 삼계, 당호는 일휴당이며 본관은 해주로서 화순에서 태어났다. 1567년(명종22)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형조좌랑, 옥구.장수.무장현감, 영암군수, 영해.담양부사 등 내외 관직을 지냈다. 1591년 어머니 상으로 관직을 떠나 고향에서 시묘하고 있을 때,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운, 경장 두 형과 아들 홍기, 조카 홍재, 홍우와 함께 의병청을 설치하고 수천의 의병을 일으켜 전라우도 의병장이 되어 상복차림으로 북상하여 금산.무주의 왜적을 격퇴하였다.
경상우순찰사의 지원 요청을 받고 "영남도 우리나라 땅이다."하고 달려가 1차 진주성 싸움의 외원으로 대첩을 거둔 뒤 바로 거창에 주둔하고 개령지방의 왜군을 공격하여 성주성 탈환에 큰 공을 세우는 등 영남 7읍을 평정하니 그 전공으로 159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특별 임명되었다. 이해 6월의 제2차 진주성 싸움에도 참가하여 9주야의 항전 끝에 중과부적으로 성이 무너지니 조카 홍우를 탈출시켜 조복과 언월도를 고향의 중형께 보내고, 김천일, 고종후 장군 등과 함께 촉석루에 올라 서사일절을 남기고 남강에 투신 순절하니 그의 나이 62세였다. 뒤따라 논개가 왜적장을 껴안고 순절하였고, 중형 경장도 의병대장이 되어 사천, 고성 등지의 왜적을 격퇴하였으며 장형 경운도 오성산성에서 항전하다가 부자가 순절하였다. 뒤에 좌찬성에 추증되고 충의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진주의 창열사, 능주의 포충사,화순의 삼충사에서 제향해 오다가 고종 때 포충사와 삼충사는 훼철되었고 오늘에 이르러 국민의 숙원으로 2003년에 준공하여 후세를 위한 충효 교육의 도장으로 삼는다.
이용안내 문의및안내 061-373-8130
관련 홈페이지
http://www.hwasun.go.kr/index.do?S=S09
[네이버 지식백과] 충의사(최경회장군)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일휴당 기념관
일휴당은 최경회 의병장의 별명입니다.
최경회 의병장을 부르는 말이 다양하게 있는데요! 자는 선우, 호는 삼계외 일휴당, 시호는 충의라고 합니다.
자의 뜻은 예날에는 이름을 소중하다고 생각해서 함부로 부르지 않았어요..본명외 가명이라고 합니다. 호는 별명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시호는 왕이 내린 별명으로 죽은 뒤에 붙여진다고 해요...
◆의암영각
최경회 의병장의 부인이었던 주논개를 모시는 장소입니다. 부인이었던 주논개는 최경회 의병장이 남강에서 떨어져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의 우두머리(왜적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떨어져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영벽정[ 映碧亭 ]
▶요약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관영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영벽정이라는 이름은 계절에 따라 변하는 연주산(聯珠山)의 경치가 맑은 지석강물에 투영되어 운치 있게 바라볼 수 있다 하여 붙여진 것이다. 정자는 능주팔경의 하나로 연주산 밑 지석강의 상류 영벽강변(映碧江邊)에 있다.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양팽손(梁彭孫) 등이 쓴 제영, 《신증동국여지승람》, 김종직(金宗直)의 시 등으로 볼 때 16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능주목(군), 즉 관청이 주도하여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1632년(인조 10) 목사 정윤이 아전들의 휴식처로 개수하였으며, 1872년(고종 9)에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이듬해 목사 한치조(韓致肇)가 중건하였다. 이후 보수를 거듭해오다가 1982년, 1983년에 각각 보수하였으며 1988년에 해체, 복원하였다.
건물은 2층 팔작지붕에 한식 골기와를 얹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형이다.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두리기둥으로 누각 아래 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원래 목조였으나 1988년 해체 복원시 영구성을 위해 석조로 대체하였다. 기둥 위에 마루를 깔아 중층 누각형 정자를 만들었다.
마루 둘레는 계자난간으로 장식하였고, 처마 밑에 활주를 세웠다. 누각 위의 기둥머리에는 익공형식 공포를 하였고, 천장은 연등천장인데 가운데 부분만 우물천장이다. 지붕은 3겹으로 처리한 점이 특이하다. 정자 안에는 9개의 현판이 있다.
▶소재지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관영리 산1번지
[네이버 지식백과] 영벽정 [映碧亭]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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