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거도 가는 뱃길
섬 사랑 9호는 하루 한차례 진도 서망항에서 조도 어류포항 사이를 왕복한다. 독거도, 탄항도, 슬도, 혈도, 죽항도, 섬등도 등의 작은 섬들이 이 항로에 있다. 내릴 사람이 없을 때는 탈 사람이 있다는 연락을 받아야만 섬에 들른다. 기름 값을 아끼기 위한 고육책이지만 몇 가구 살지 않는 작은 섬은 그래서 더욱 외롭다.
독거도(獨巨島)는 본디 독고도(獨孤島)였다. 섬의 본질을 그대로 담고 있는 이름. 얼마나 지독하게 외로운 섬이었으면 이름마저 홀로 외로운 섬이었을까.
바로 옆의 작은 섬 탄항도와는 썰물 때면 잠깐 하나로 연결되지만 들 물이면 이내 섬은 다시 혼자가 된다. 구도, 납태기도, 초도, 화단도, 제주도, 소제주도 등의 섬들이 곁에 있으나 사람 하나 살지 않는 이들 무인도들 또한 제각기 외롭다. 이름은 같아도 한라산이 있는 그 제주도가 아니다. 제주도, 소제주도 등은 제주도로 가는 방향을 알려주는 지표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섬의 산이나 무인도, 여 등은 종종 방향을 가르키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섬에는 두 개의 우물이 있었다. 오래도록 섬 사람들의 식수원이 되어 준 고마운 우물. 지금은 사람이 몇 살지 않아 모터를 달아서 뽑아 올려 써도 크게 부족함이 없지만 예전에 사람들이 많이 살 때는 늘 물이 부족 했다. 그래서 아침이면 종을 처서 물 길러갈 시간을 알렸다. 그때는 물을 길어 올려 모두 똑같이 양동이에 나누어 주었다. 두레박 달가닥 거리는 소리에 잠을 못잘 정도였다. 두 개의 우물 중 바위샘 우물 하나는 아이가 빠져 죽은 뒤 매워 버렸고 지금은 마을에 우물이 하나만 남았다. 정자 옆 우물가 고목에는 아직도 그때 울리던 종이 매달려 있다.
독거도의 '갯닦기'는 조선 시대부터 있어왔던 오래된 전통 노동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포자가 갯바위에 부착되어 자라기 시작하는 음력 4월경부터는 매일 물을 끼얹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작은 미역 순이 햇빛에 말라 죽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 자란 미역은 7월 중순 경부터 8월 15일 사이에 낫을 들고 가 베어온다. 그때가 가장 '약이 찰 때'다. 빳빳하니 품질이 좋다는 뜻이다. 그 물미역을 종일 틀에 넣어 말린다. 자연산 미역이라고 그저 바위에 붙은 미역을 뜯어다 말리면 끝이 아닌 것이다. 들이는 공력에 비하면 미역 값이 비싸다고 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지금이야 묵정밭이 많아져서 밭에다 미역 건조장을 만들었지만 예전에는 바닷가 바윗돌에다 말려야 했으니 품이 더 들었다. 그 다음에는 김처럼 대나무로 만든 발장을 써서 말렸는데 곰팡이가 많이 펴서 매번 세척 하느라 고생이 심했다. 지금은 그물로 만든 발장을 미역 건조대로 쓰니 많이 편해 진 셈이다.
돌미역은 그 생긴 모양에 따라 부르는 이름도 각각이고 가격 차이도 크다. 잎이 넓적한 떡각, 줄기가 거의 없이 잎만 댓잎처럼 늘어진 댓잎 미역, 잎은 적고 거의 줄기로만 이루어진 쫄쫄이. 오돌오돌하고 쫄깃쫄깃한 쫄쫄이를 최상품 미역으로 친다. 떡각은 나오는 양이 많아 값이 싼 편이다. 독거도 미역은 2가닥을 한 구찌로 셈하는데 10구찌가 한 뭇이다. 최상품은 20가닥 한 뭇에 100만원을 호가한다. 일반 미역의 다섯 배다. 그래서 거의 산모들에게 선물용으로만 팔린다. 한참 잘 나갈 때는 미역 한 뭇 팔아서 송아지 한 마리를 샀던 적도 있다. 그러나 독거도 미역도 점차 산출양이 줄어드는 추세다. 예전에는 보통 한집에서 100~150뭇씩을 했지만 지금은 잘해야 50뭇이다. 미역은 자연 상태에서 말린 것이 최고다. 선선한 바람과 강렬한 햇빛을 받아 말린 미역은 파란 색이 나온다. 하지만 건조기에 말린 미역은 색이 까맣다.
옛날에는 미역을 베다 헤엄쳐 가는 구렁이도 자주 잡았다. 큰 놈은 2m가 넘었다. 그런 구렁이 한 마리면 100만원도 더 받았다. 지금은 구렁이는 고사하고 독사나 살모사도 구경하기 힘들다. 그래서 요새는 구렁이 값이 금값이다. “지금은 구렁이 한 마리 잡으면 1000만원이요.” 아무리 귀해도 그렇지 구렁이가 산삼도 아니고 웬 1000만원? 다들 멀뚱거리는데, 이장님 막내아드님 한 말씀. “벌금이 1000만원이요, 1000만원.”
10여 년 전 독거도를 다녀온 적이 있다. 김정호 당시 진도문화원장이자 전남문화재위원과 박병하 진도사진작가, 군청 직원 등이 함께 했었다. 독거도는 선착장이 북쪽에 있었다. 마을은 언덕을 넘어 남향을 했지만 신우대숲이 온통 뒤덮여 있었다. 이미 오래 전 폐교된 학교도 수풀과 신우대가 가득했다. 특이하게 마을 중간 쯤 우물과 큰 나무가 있는 곳에 종이 달려 있었다. 이 종은 사실 어뢰 포탄 껍질이라는 주장이 있다. 올라가는 길에 묘가 하나 있었다. 길을 내면서 조금 옆으로 이장을 했는데 비석이 앞뒤가 바뀌어져 있었다. 뒤쪽은 벼랑이 험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