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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이 어떤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 건 소설에서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1)
디랙이 삼십대 초반에 가까운 친구에게 털어놓은 말이다. 이런 말을 할 정도로 디랙의 어린 시절은 행복하지 않았고, 훗날까지 트라우마를 남겼다. 원인은 주로 완고하고 전제적인 그의 아버지에게 있었던 것 같다. 적어도 디랙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훗날에도 디랙은 절대로 그의 아버지의 사진을 집에 걸어놓지 않았고, 책상 서랍에 아버지에 관한 서류를 보관하면서 가끔 꺼내보며 이 사람이 왜 그랬던가를 이해하려고 애썼다고 한다.
디랙의 아버지 찰스 디랙(Charles Dirac) 역시 그리 행복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고, 스무 살 때에 제네바 대학을 중퇴하고 나서 집을 나왔다. 그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언어를 가르치다가 영국으로 건너와 브리스톨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도서관 사서였던 플로렌스 홀튼(Florence Holten)을 만나 결혼했고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다. 디랙이 기억하기에 부모 사이는 원만하지 않았다. 부부는 나이 차이도 열두 살이나 났고, 종교도 (가톨릭 대 감리교) 언어도 (프랑스어 대 영어, 물론 찰스 디랙은 영어를 할 줄 알았지만, 영어는 그가 제일 자신없어하는 언어였다고 한다.) 달랐다. 식사시간이 되면 디랙은 아버지와 식당에서 식사를 했고, 형과 누이는 부엌에서 어머니와 식사를 했다. 디랙은 부모가 함께 식사한 적이 있는지를 기억하지 못했다. 특히 겨울 아침이 고통스러웠다. 석유램프 아래서 아버지는 아침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아들에게 프랑스어 강의를 했다. 식탁은 침묵이 지배했고, 그날의 상태와 관계없이 접시에 있는 음식은 다 먹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린 디랙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만의 상상의 세계로 도피하는 것 뿐 이었다. 디랙은 말이 없는 소년이 되었으며, 이 버릇은 학교를 다니면서도 달라지지 않았고, 먼 훗날까지 남아 일종의 전설이 되었다.
디랙은 초등학교에서 처음에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산수를 잘하긴 했지만 특별할 정도는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약한 역사와 미술 때문에 전체 성적이 이따금 떨어지곤 했다.’ 처음에는 반에서 13등을 해서 선생님을 실망시키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성적이 올라 반에서 일등이 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브리스톨 대학과 연계된 머천트 벤처러 스쿨에서 공부했다. 이 학교는 그의 아버지가 근무하는 곳이기도 했는데, 드물게도 고전 교육보다 직업 교육을 강조하는 곳이었다. 이런 실용적인 학풍이 디랙에게는 더 맞았다. 성적이 뛰어났던 디랙은 또래들보다 빨리 브리스톨 대학에 진학해서 전기공학을 전공했다.
브리스톨 대학을 다니던 디랙은 1921년 케임브리지 세인트 존 컬리지에 합격하고 소정의 장학금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장학금으로는 집을 떠나서 살기 어려웠다. 그래서 디랙은 일단 브리스톨 대학을 졸업했다. 디랙의 졸업 성적은 1등급이었지만, 1차 대전의 여파로 일자리를 쉬이 찾기는 어려웠다. 디랙은 다시 브리스톨 대학에 진학해서 수학을 공부했다. 대학은 원래 3년 과정이었지만 공학사 학위 덕분에 첫 1년은 면제를 받을 수 있었다. 디랙은 두 번째 학위 역시 1등급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수학과에서 디랙을 가르친 로날드 하세(Henry Ronald Hasse)와 피터 프레이저(Peter Fraser)는 디랙이 케임브리지에 가서 수학과 과학을 공부하는데 적극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케임브리지 출신이었으므로 아는 사람도 많았고, 추천서도 힘을 발휘했다. 1923년에 두 번째로 케임브리지에 지원한 디랙은 이번에는 충분한 장학금을 받게 되어 케임브리지 행이 결정되었다.
20세기 초반의 케임브리지는 J.J. 톰슨과 러더퍼드의 지도력에 힘입어 숱한 발견을 이뤄내고 현대물리학을 선도했던 곳이다. 그러나 대륙에서 양자론이 원자의 이론으로서 떠오를 때, 케임브리지는 실험 분야에서의 명성만큼 이론 분야에서는 눈에 띄는 업적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1923년에 디랙이 케임브리지에 도착했을 때 지도교수로 삼을만한 이론물리학자로는 파울러 외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랠프 파울러(Sir Ralph Howard Fowler, 1889-1944)는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컬리지에서 공부하고 1920년부터 강의했다. 1925년에 왕립학회 회원이 되었고, 1932년에는 캐번디시 연구소의 이론물리학 부장이 되었다. 파울러는 평생 60여명의 학생을 지도했는데, 그 중에는 디랙을 비롯해서 찬드라세카르(Subrahmanyan Chandrasekhar, 1910-1995)와 모트(Sir Nevill Francis Mott, 1905-1996) 이렇게 세 사람의 노벨상 수상자가 있다. 그는 러더퍼드의 사위기도 하다.
랠프 파울러 | 폴 디랙(왼쪽)과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
1925년 9월, 파울러는 하이젠베르크로부터 방금 받은 논문을 디랙에게 건네주며 좀 자세히 살펴보라고 했다. 하이젠베르크의 “그 논문”이었다. 디랙도 처음에는 이 논문에 나오는 식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했으나, 어느 순간 갑자기 이 형식이 고전역학의 포아송 괄호 표현의 구조와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디랙은 곧 독자적으로 이 체계를 발전시켜서 그의 첫 양자역학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하이젠베르크의 논문에 뒤이어 나온 보른과 요르단의 논문과 거의 동시에 발표되었다. 보른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이 바로 이 논문이다. 이로써 디랙은 단번에 양자역학의 중심인물 중 한 사람으로 떠올랐다. 다음 해에 디랙이 받은 박사학위도 이 논문에 의한 것이다.
불과 2, 3년 사이에 중요한 양자역학 논문을 잇달아 내놓은 디랙은 1928년에 마침내 그의 이름을 불멸의 것으로 만들게 되는 논문을 발표했다. 1928년 1월에 내놓은 이 논문에서, 디랙은 전자가 스핀을 가진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하고,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2)
자연이 왜 전자를 그냥 점으로 된 전하로만 놔두지 않고 이런 특별한 성질을 가지도록 선택해야 했는지에 관한 의문이 남아있다.
그리고 이 논문에서 그 답을 내놓는다고 말한다.
이 논문에서는 이전의 이론이 불완전했던 이유가 상대성 이론, 혹은 양자역학의 일반적인 변환이론과 일치하지 않아서였다는 것을 보였다. 상대성 이론과 일반적인 변환 이론을 모두 만족시키는 점전하 전자의 가장 간단한 해밀토니안은 다른 가정 없이 전자에 관한 모든 이중성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3)
지금까지의 양자론에서는 분명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이 성립하지 않았다. 이를 쉽게 보려면 슈뢰딩거의 방정식을 살펴보면 된다. 슈뢰딩거의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시간과 공간은 동등한 물리량이며 서로 얽혀있다. 그런데 이 방정식에서 왼쪽 변의 공간에 대한 변화는 두 번 미분한 형태고, 오른쪽 변의 시간에 대한 변화는 한 번 미분한 꼴이다. 따라서 이 방정식은 시간과 공간을 동등하게 다룰 수 없고, 명백하게 특수 상대성 이론과는 맞지 않는다.
디랙은 이 식을 특수 상대성 이론을 만족하도록 하기 위해서 특수 상대성 이론의 에너지를 시간에 대한 미분처럼 운동량에 대한 1차식으로 써야 한다고 가정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1차식을 먼저 썼다.
이때 는 운동량이나 에너지와는 관계없는 양이어야 하는데, 이것이 단순한 숫자일 경우에는 필요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디랙은 여러 가지 조건을 모두 고려한 결과 이들이 4차원의 행렬로 표현되면 필요한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들 행렬을 감마 행렬(gamma matrix)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이에 맞추어서 파동함수도 네 개의 성분을 가지는 4차원 벡터가 된다.
파동함수가 네 개의 성분을 갖는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디랙이 찾아낸 4차원 감마 행렬은 사실 2차원인 파울리 행렬을 이용해서 만들어낼 수 있다. 따라서 파동함수의 네 개의 성분을 두 개씩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는데, 각각은 바로 파울리가 썼던 스피너가 된다. 즉 네 개의 파동함수는 스핀이 위와 아래를 가리키는 스피너를 한꺼번에 포함하고 있는 셈이다. 디랙은 논문에서 이렇게 말했다.4)
4차원 행렬로 이루어진 식이므로, 이 방정식의 해는 비상대론적인 파동방정식보다 네 배 많고, 이전의 상대론적인 파동방정식보다는 두 배 많다.5)전자의 전하가 라는 것으로부터 절반의 해는 버려야 하므로, 이중성을 설명하는 해만 남는다.
여기서 절반의 해를 버린다고 한 것은 디랙이 아직 반입자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뒤에 이야기하자.
디랙은 4차원 벡터인 파동함수가 적절하게 변환하면 이 방정식이 로렌츠 변환에 대해서 불변임을 보였다. 즉 이 방정식은 특수 상대성 이론을 만족하는 방정식이다. 그리고 나서 디랙은 전자에 전기력이 작용할 때, 이 방정식에서 궤도 각운동량이 그 자체로는 보존되지 않고, 각운동량에 을 더해주어야 보존된다는 것을 밝혔다. 즉 보존되는 전체 각운동량은 궤도 각운동량에 을 더한 양이며, 따라서 가 바로 전자의 스핀 각운동량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곧 파울리가 만든 스핀 이론을 상대성 이론에 의해 확장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디랙은 방정식을 풀어서 에너지 준위를 구하고 첫 번째 근사값을 구한 결과가 이전의 결과들과 잘 맞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로써 이론적으로 더욱 완전한 전자의 양자역학 방정식이 완성되었다. 이 방정식에서는 자연스럽게 이중성 현상, 즉 두 가지 스핀 상태가 나타난다. 스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디랙이 애초에 원했던 일이었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해결되리라고는 디랙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디랙의 방정식은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의 양자역학처럼, 이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허공중에서 끄집어 낸듯한 일이었다. 이전의 이론으로부터 유도해낸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한편, 논문의 서두에서 밝혔듯이 이 일은 전자의 스핀을 설명하기 위한 일이었고, 그러므로 디랙 방정식의 선행 연구는 파울리의 스핀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해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 도모나가 신이치로는 이렇게 말했다.6)
디랙의 작업은 분명 천재적인 일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 일은 파울리의 이전 연구에 자극을 받은 바가 크다. 1계 미분 방정식과 클라인-고든의 방정식을 연관시키기 위해 행렬을 이용한다는 디랙의 아이디어는 파울리의 행렬이 같은 관계식을 만족한다는 사실로 촉발되었을 것이다. ... 또한 디랙이 방정식이 로렌츠 대칭성에 대해 불변인 것을 보인 방법은 바로 파울리가 자신의 방정식이 축에 대한 회전 대칭성에 불변임을 보인 방법을 일반화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파울리의 연구가 디랙 방정식의 선구적인 작업이라고 말한 바 있다. 디랙의 연구는 1928년 1월에 완성되었는데, 파울리의 연구 결과가 나온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하지만 역시 방정식을 1차식으로 바꾸고, 이를 만족하기 위해 행렬을 도입한다는 것은 디랙의 독창적인 생각이었다. 더구나 그렇게 함으로써 두 가지 스핀 상태가 자연스럽게 나타난다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여기에 디랙의 천재성이 있다. 파울리는 이를 두고 디랙의 사고 과정은 마치 곡예와 같다고 평했다.
이렇게 전자의 스핀이 가지는 보다 심오한 의미가 드러났다. 이제 더 이상 전자가 자전한다는 생각은 할 필요가 없다. 전자의 스핀은 페르미온이 특수 상대성 이론을 만족할 때 나타나는,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시공간의 로렌츠 대칭성에 의해 나오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결국 파울리의 말대로 “고전적으로는 묘사할 수 없는” 성질인 것이다.
앞에서 전자는 페르미-디랙 통계법에 따라 다뤄야 한다는 것을 보았다. 페르미-디랙 통계는 배타원리에 따른 것이고, 배타원리는 전자의 스핀과 관련이 깊다. 한편 보즈는 빛이 보즈-아인슈타인 통계를 따른다는 걸 보였다. 그러면 보즈-아인슈타인 통계는 스핀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아니, 빛도 스핀이 있을까? 있다면 어떤 값일까?
전자의 스핀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역시 슈테른-게를라흐의 실험이다. 슈테를-게를라흐의 결과는 각운동량이 0인 상태의 원자도 자기 모멘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전자가 자기 모멘트의 원천이 되는 각운동량을 원래 가지고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으며, 이 전자에 내재된 각운동량이 바로 스핀이다. 전자의 스핀에서 중요한 점은 스핀 상태가 두 가지가 있고, 크기가 의 1/2이라는 것이다. 두 가지 스핀 상태가 필요하다는 것은 원자 속 전자껍질의 전자 배치로부터, 스핀 각운동량의 크기는 제이만 효과에서 스펙트럼이 갈라지는 정도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빛은? 빛은 전하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각운동량을 가져도 자기 모멘트가 생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빛이 각운동량을 가진다는 것은 이미 양자역학 이전에도 알고 있었다. 고전적으로 빛을 나타내는 방정식은 맥스웰 방정식을 풀어서 구하는, 전기장과 자기장이 진동하는 전자기파의 식이다. 이때 빛의 편광 상태가 진행하는 방향을 축으로 해서 회전할 수 있는데 이를 원형 편광(circular polarization)이라고 한다. 원형 편광된 빛은 분명 각운동량을 가지므로, 만약 이 빛을 어떤 물체가 흡수했다면 각운동량에 의해 회전하게 될 것이다. 한편 편광 상태가 일정한 것을 선형 편광(linear polarization)이라고 하는데, 선형 편광된 빛은 각운동량이 0이다. 그러나 선형 편광 상태는 원형 편광 상태를 가지고 구성할 수 있으므로, 역시 각운동량을 정해줄 수 있다.
원형 편광. 빛을 받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빛의 편광 방향이 시계방향으로 회전하고 있다.
<출처: Dave3457 at wikimedia.org>
1930년에 아시아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라만(Sir Chandrasekhara Venkata Raman, 1888-1970)은 1932년 초에 [네이처]에 “광자의 스핀에 대한 실험적 증명”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라만과 그의 동료는 빛이 여러 기체와 레일리 산란을 할 때 편광이 소멸되는 정도를 측정하고, 이 결과가 스핀 이론에서 계산한 결과와 일치한다는 것을 보였다.
1936년 프린스턴 대학의 베스(R. A. Beth)는 “빛의 각운동량의 역학적 검출 및 측정 Mechanical Detection and Measurement of the Angular Momentum"이라는 논문7)에서 최초로 빛의 스핀을 측정했다. 베스는 복굴절판을 이용해서 선형 편광된 빛을 원형 편광으로 바꿀 때, 반작용으로 복굴절판에 생기는 토크를 측정했고, 이렇게 측정한 광자의 스핀은 크기가 임을 밝혔다. 이로써 빛의 스핀은 전자의 스핀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 이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스핀과 통계법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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