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 본부에 갇혀만 있다가 몇 달 만에 처음으로 군수물자 수송 트럭의 경계병으로 차출이 되어 트럭을 타고 부대 밖으로 나가 보게 되었다. 트럭 위에서 난생 처음 보는 월남의 시골 풍경을 신기하게 관찰하면서 이동을 하는데 트럭이 어느 마을 근처에 섰다. 트럭들이 서자 동네 아낙들이 잡다한 물건들을 담은 바구니를 들고 트럭들 주위로 다가왔다. 그 순간 내 눈에 띈 것은 그 때까지 별로 먹어 볼 기회가 없었던 바나나였다. 사실 53년 전 내가 군대에 가기전 까지만 해도 바나나는 보통 사람들이 감히 먹을 수 없는 책이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식물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한국 생각을 하고 1불을 주고 아낙이 들고 있는 바구니에서 바나나를 두 갠가를 뜯었다. 그래도 그 아낙은 바구니를 쳐들고 더 가져가라는 눈빛이었다. 그래서 내가 바나나 한 다발을 집었는데도 그냥 서 있는 것이었다.
그 때 옆에 있던 고참이 “야! 저 바구니에 있는 거 다 해도 1불이 안 돼.” 하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비로소 한국과 현지 물가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많은 바나나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간 망설였지만 아낙의 눈길 보는 순간 그 바구니를 통째로 트럭에 실었다. 물론 잔돈을 거슬러 달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잔돈을 거슬러 주고 싶어 하지 않고 바나나를 모두 팔고 싶어하는 아낙의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많은 바나나를 내가 다 먹을 수도 없고 보관을 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바나나를 트럭에 타고 있던 전우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인지 그 다음부터 나는 바나나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그 때 그 트럭에 같은 중대인 허경영도 타고 있었다. 모두들 야자나무 아래서 땀을 식히고 있는데 갑자기 경영이가 배낭을 주섬주섬 뒤지더니 구겨진 양복을 꺼내서 군복을 벋고 갈아입기 시작했다. 경계 근무하러 나가는 놈이 배낭에 사복, 그것도 양복을 넣고 다니는 것은 기상천외한 행동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럴 경우 다른 사람이면 영창깜이지만 워낙 평소에 이상한 행동을 많이 하는 경영이라 인솔 장교도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더욱 웃기는 일은 주머니에서 스카치 태잎을 꺼내더니 귀를 올려붙이는 것이었다. 경영의 귀가 당나귀 귀처럼 늘어졌는지는 모르지만 미리 어떻게 사진을 찍어야 하겠다고 철저하게 계획을 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는 야자수를 배경으로 마치 관광객처럼 유유하게 폼을 잡고 서서 가지고 온 사진기를 내밀고 다른 전우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당시 나는 전입한지 얼마 안 되는 신병이고 경영이는 선임급에 속했기 때문에 '전쟁터에서 저래도 되나?'하고 어리둥절하기만 했었는데 다른 병사들은 경영이의 특이한 행동에 이력이 났었는지 낄낄거리면서 웃기만 했다.
몇몇 고참들이 야유를 하자 경영이는 "내가 니들에게 무슨 피해주나? 상관 하지마라." 고 오히려 큰 소리를 쳤다.
경영은 내 기억으로는 특별히 타인이나 단체를 생각하는 공익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될 수 있는데로 자기에게 유리하다면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 안되는 억지를 부리기도 하는 타입이었다.
경영은 사단 법무참모부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함께 근무하는 행정고시를 패스하고 왔다는 김녹규(내 기억으로) 병장과는 대조적으로 워낙 엉뚱한 행동과 말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그저 웃기는 놈’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나는 경영과 다른 내무반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내무 생활에 대해서는 잘은 모르지만 석식 후 초번 보초를 나가기 위한 집합 시간에 매일 만나야 했다. 집합 시간에 가끔 요즘 말로 게겨서 주번사관으로 핀잔을 한 번씩 듣거나 간단한 기압 정도 받는 그런 타입이었다.
후일 허경영 덕분에 귀한 사진 한 장을 찾아보게 되었다. 즐거운 해외여행이 아니라 긴장이 감도는 철수작전이었다. 살아 돌아간다는 안도감에 더불어 비행기를 처음 타는 긴장된 마음으로 트럭에 실려서 나트랑 공항에 도착했다. 사이공에서 오산 비행장까지 오는 미군 용역 민간항공기에 탑승하기 위해서 총 없는 단독군장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도저히 한가하게 개인적으로 기념사진을 찍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 순간에도 어느 틈에 개인 사진을 찍은 것이다.
그러나 허경영과는 전혀 반대 이미지로 남아 있는 인물이 있다. 당시 정훈자료로 많이 등장했던 김 화복 병장이다. 김 병장은 군대에서 특과라고 할 수 있는 야전병원 원장(대령)의 당번병이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계속해서 병원으로 후송되어 오는 병사들을 보고서 후방에서 편히 근무하는 것에 대하여 자책감을 느꼈다. 병원장에게 자신을 전투부대로 보내달라고 하자 병원장은 미친 소리 하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
김 병장이 계속 청원을 하자 병원장은 이 사건을 주월 사령관에게 보고하고 사령관은 이를 가상히 여겨 김 병장을 전투 부대로 보낸다. 사령관의 특별한 관심 속에서 김 병장은 사단에서 연대로 대대로 중대를 거쳐 말단 소총소대까지 오게 되었다.
그런데 입장이 난처해 것은 막상 김 병장을 맡은 중대장이었다. 만약에 주월 한국군 전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김 병장, 정훈자료로 쓰이고 있는 김 병장이 죽거나 다치면 자신이 골치가 아파지는 것이다. 공연히 이상한 놈 하나가 자기 부대에 떨어져 관심이 집중되니 큰 부담이 생긴 것이다. 혹시 김 병장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다른 사병과는 전혀 다르게 추궁이 심할 것이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김 병장이 살아야 정훈 효과가 있는 법이고 만약에 죽는다면 시시하게 죽으면 안 되고 죽어도 장열하게 전사를 해야만 그럴듯하게 정훈 자료가 될 것이 아닌가?
김 병장 때문에 신경이 곤두선 중대장은 "저 새끼 취사반에 쳐넣어!"하고서 전투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다.
이렇게 되자 김 병장은 자기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막상 전투현장에 와서 총 한 번 만져 보지 못하고 지내고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파서 전투에 못나가게 된 소대원 대신에 출전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 그 뒤에는 김 병장이 나가는 전투마다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무적의 불사신이 되어벼렸다.
나에게 허경영과 김 화복은 전쟁터의 코미디와 허구적인 선전의 상징이었다. 허경영은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피에로였고 순진무구한 김 화복 병장은 군대라는 조직이 만든 피에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