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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신학자 서남동의 생애와 사상 >>
한국 기독교 100년의 역사에서 서남동 교수는 안병무 교수와 함께
세계가 인정하는 독창적인 한국 신학을 창도한 신학자이다. 그는 혁명적인 신학을 창도하였다. 그는 두 가지 의미에서 가히 “신학의 혁명가”였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 서남동 교수는 지배자 중심의 신학에서 민중 중심의 신학으로 대대적인 방향전환을 하였다. 이것은 기독교
2000년사에서 혁명적인 사고의 전환이었다. 민중의 발견은 기독교 2000년사에서 가장 위대한 발견 가운데 하나이다. “민중”의 발견은 마치
2000년 동안 땅에 묻혀 있었던 보석을 발견한 것과도 같다.
둘째, 서남동 교수는 서구 중심, 서구 신학자 중심의 신학에서
한국적인 신학, 한국인의 자주적인 신학을 선언한 혁명적인 신학자였다. 서구신학에 눌려서 맹종하는 자세로 신학을 하는 한국 신학계의 풍토에서, 탈
서구 신학을 외치면서 서구신학자들을 과감히 비판하며 새로운 신학을 선언하고 나선 서남동 교수의 자세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그의 신학 하는 자세는
정말 당당하고 통쾌했다. 신학 하는 한국인으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러한 코페르니크스적인, 혁명적인
신학함의 자세는 진리를 꿰뚫어 보는 예지와 과감성, 그리고 담대함에서만 비롯될 수 있다. 서남동 교수는 이러한 예지와 과감성, 그리고 담대함을
갖추고 있었다. 서남동 교수는 세계가 인정하는 민중 신학이라는 보석을 우리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아래에서 그의 생애와 사상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1. 생애
서남동 교수는 1918년 7월 9일 목포 앞 바다에 있는 무안군 자은도에서 태어났다. 그가
예수를 만난 것은 소학교 오학년 때, 목포로 유학 와서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였다. 소년 서남동은 목포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전주에 있는
기독교계통의 학교인 신흥중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36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의 나이 19세가 되는 해에 일본으로 가서, 동지사대학 문학부
예과를 1년 수료한 후, 신학과에 입학하여 1941년(24세)에 졸업하였다. 그는 한국에 돌아와 잠시 평양에 있는 요한성경학교 교사로 약
1년간(1941.9-1942.12) 재직한 후, 그 다음 해에 대구로 내려가서 대구제일교회, 범어교회, 동문교회 등에서 10년간 목회를 하였다.
그는 목회를 하면서도 신학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러한 부단한 신학연구의 노력을 인정받아, 그는 35세가 되던
해에(1952년), 한국신학대학에 교수로 초빙을 받게 되었다. 한국신학대학 교수로 재직 중에, 그는 좀 더 체계적인 신학연구의 필요성을 느끼고
37세의 늦은 나이에 캐나다 유학길에 오른다. 그는 캐나다 토론토대학 빅토리아 신학교에서 신학사를 받고(1956.5), 1957년에는 동 대학
대학원에서 신학석사를 취득하고 귀국하였다. 캐나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 한국신학대학 강단에 선 서남동 교수는 왕성한 신학적 활동을
펼친다. 이와 같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서남동 교수는 1961년에(44세) 연세대학교 신학과 교수로 초빙 받아 “현대신학”, “기독교역사철학”
등을 강의하는 한편, 교목실장, 신과대학장, 연합신학대학원 원장직도 역임하게 된다.
한국인으로 서남동 교수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은 함석헌 선생, 김재준 목사 등이다. 일본 유학시절에 서남동 교수는 칼 바르트, 에밀 부른너, 라인홀드 니버에 매료되었고, 캐나다
유하시절에는 C.H. 다드, 불트만, 베르자에프, 엘리아데 등의 사상에 심취하였다. 서남동 교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신학자는 아마도
틸리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50년대에 서남동 교수는 틸리히의 실존주의 신학사상에 몰두했다. 그 이후에는 본회퍼의 세속화신학,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진화론적 신학, 화이트헤드의 과정사상, 몰트만의 정치신학, 도로테 죌레의 신의 죽음의 신학, 요아킴 플로리스의 성령의 제3시대론
등에 차례로 몰두하게 되었다.
서남동 교수는 현대신학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서구의 최신신학들을 한국 신학계에 소개하여 한국 신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유동식 교수는 이러한 서남동 교수를 가리켜 “현대신학의 안테나”라고 불렀다. 그만큼 서남동 교수는 세계에서 어떤 신학이
새로 태동하여 돌아가고 있는가를 알기 위하여 세계 신학계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였고, 새로운 신학이 태동하면 그 신학을 곧 바로 한국 신학계에
소개하였다.
이렇게 세계 신학의 움직임을 열심히 받아들여 한국 신학계에 소개하던 서남동 교수에게 하나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터졌다. 그것이 바로 1960년 5‧16군사 쿠데타에 의해 한국사회가 군사독재 체제로 접어든 사건이었다. 그는 점차적으로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신학자, 민주주의의 투사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1973년 5월 20일에 서남동 교수는 국내 신학자들이 공동으로 서명한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을 주동하게 된다. 이것이 그가 사회참여를 하게 된 시발점이 된다. 이어서 그는 1974년 11월 18일에 현영학, 안병무 교수 등(66명
참여)과 함께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선언”을 주도하게 된다. 1974년 11월에는 민주회복국민선언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안병무 교수 등과
함께 정부로부터 경고조치를 받게 된다. 이러한 경고조치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아니하고, 1974년 11월 22-26일에 개최되었던
“연세대 구속학생, 교수의 석방을 위한 교수기도회”를 주도하였다. 곧 바로 이어서 그는 1974년 12월 18일에 서울대 백낙청 교수에 대한
징계를 규탄하는 “교수 자율권 선언”을 성내운 교수 등(34명 참여)과 함께 작성하여 발표하였다. 그는 기독교정의구현전국성직자단(전국 8개 교단
성직자 320명 가입)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억제하기 위하여 박정희 군사정부는, 1975년 5월
13일에 “국가안전과 공공질서 수호를 위한 대통령긴급조치 9호”를 선포되기에 이른다. 이 긴급조치 9호에 근거하여 군사정부는 국가안보를 위하여
면학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서남동, 안병무, 문동환, 이계준 교수 등을 해임 권고, 사직케 하였다. 서남동 교수도 1975년 5월
20일부로 교수직을 사임하게 된다. 그는 교수직을 해임당한 후에도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계속하였다. 1976년 3월 1일에는 함석헌, 윤보선,
김대중, 안병무, 문동환, 이우정, 문익환 등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에 서명함으로써 일명 “명동사건”으로 긴급조치9호 위반협의, 즉
민중선동에 의한 국가변란을 획책한 죄로 입건되어 서남동 교수는 징역 2년 6개월, 자격 정지 2년 6개월로 형이 확정되어 23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지내다가 1977년 12월 31일에 석방되었다.
서남동 교수는 감옥에서 민중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민중의 관점에서 성경을
다시 읽게 된다. 감옥에서 석방된 다음에 그는 감옥 안에 있으면서 구상한 민중 신학을 체계화시키는 일에 전념하게 된다. 그는 1978년 2월에
한국기독교장로회 선교교육원 원장으로 취임하여, 대학 강단은 아니지만 다시 강단에 서서 신학을 강의하게 되었다. 당시 선교교육원에는 데모하다가
대학에서 제적된 학생들도 많이 와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후에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목사가 되고 신학자가 되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1980년 3월에는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로 복직되어 다시 대학 강단에 서서 강의를 시작하였으나, 1980년 5월 17일에 비상계엄이
전국적으로 선포되었고, 김대중, 문익환, 이문영, 고은, 유인호, 한승헌, 이호철 씨 등 재야정치인, 민주인사, 학생대표 등이 연행되었다.
서남동 교수도 이 때 연행되어 약 6개월 후인 1980년 11월 4일까지 감옥에 있다가 석방되었다.
서남동 교수는 그의 모교인
캐나다 토론토대학 빅토리아신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 온 지 두 달 뒤, 췌장암과 간암이 악화되어 한국선교 100주년이 되던 해인
1984년 7월 19일에 67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평소 가까이 지내시던 이우정 선생님은 “이 병은 1980년에 당한 지독한 고문 때문에 생긴
병”이라고 말씀하셨다. 맞는 말씀이다. 만약 그런 심한 고문이 없었더라면 평상시 건장하시던 서남동 교수가 66세의 나이에 가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유해는 경기도 파주군 금촌면 탄현 기독교 공원묘지에 묻혔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나 광주시는 5‧18 광주 민중항쟁에 기여한
서남동 교수의 공로를 인정하여, 광주 망월동 5‧18 민중항쟁희생자 묘역에 안장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래서 그의 유해는 1999년 3월 26일에
5‧18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서남동 교수는 단순히 이론적으로만 신학을 한 학자가 아니라 민중의 고난 현장에 몸으로 참여한 신학자였다. 그가
망월동 묘역에 안장된 것도 바로 그의 이런 실천적인 신학함의 결과였다. 서남동 교수는 신학을 역사 속에 성육신시킨 삶을 사시고 가신
분이다.
2. 신학사상
서남동 교수는 민중 신학을 창도한 탁월한 신학자였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군사독재는
서서히 서남동 교수의 신학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서남동 교수는 군사독재에 맞서는 신학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까지 서구의 최신신학을
한국 신학계에 소개하는 데만 열중했던 서남동 교수는, 비로소 자기 자신의 신학을 창조적으로 시작하기에 이른다. 그 새로운 신학이 바로 민중
신학이다. 만약 서남동 교수가 민중 신학을 창도하지 않았다면, 그는 “서구신학의 안테나,” “번역 신학자”에 머물고 말았을는지 모른다. 서남동
교수에게 있어서 민중 신학은 “서구신학의 안테나”라는 오명을 씻어주는 새로운 신학 작업이었다. 왜냐하면 서남동 교수에게 붙여진 “서구신학의
안테나”라는 애칭은 서구신학에 그만큼 민감하다는 칭찬임과 동시에, 자기 신학은 없고 줄곧 남의 신학에만 촉각을 곤두세우고 소개한다는 비판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남동 교수는 1974년 2월,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퇴수회에서 “예수와 민중”이라는 강연을 하고, 그
이후에도 동일한 주제로 수십 번도 넘게 되풀이한 강연을 활자자화 한 것이 “예수‧교회사‧한국교회”(『기독교사상』 1975년 2월호)라는
논문이다. 이 글에 대한 김형효 교수의 비판에 대하여 서남동 교수가 응답한 글의 제목이 “‘민중의 신학’에 대하여”(『기독교사상』 1975년
4월호)이다. 서남동 교수는 그의 책 『민중 신학의 탐구』에 “‘민중의 신학’에 대하여”를 다시 실으면서 “이 小文은 김형효 교수의 비판에
대하여 응답한 글(『기독교사상』 1975년 4월호)이며 여기에서 ‘민중의 신학’이란 말이 처음 사용되었다”고 각주에서 밝히고 있다. 우리는 이
언급에서 “민중 신학”이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논문에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 서남동 교수였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실천적 신학 함을
엿보기 위하여, 한국교회가 고난당하는 한국의 민중문제를 풀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작성한 신학선언들 가운데서 그의 손길이 닿은 두 선언에 나타난
민중 신학사상의 흔적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서남동 교수의 역사현실에 대한 관심이 최초로 문서화하여 나타난 것은 그가 주도하여 이루어진
“1973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이다. 이 선언은 1973년 5월 20일에 발표되었는데, 우리는 이 선언문에서 “눌린 자, 가난한 자, 약한
자, 멸시받는 자”라는 표현이 4번이나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말들은 훗날 민중 신학자로 나타난 서남동 교수가 늘 반복하여
사용한 서남동 교수의 신학의 핵심 내용과 일치하는 말들로서, 이 선언을 주도한 서남동 교수가 포함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선언서에
가난하고, 약하고 멸시받는 자들을 총칭하는 말로서 훗날 민중 신학자들이 사용한 “민중”이라는 말은 아직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서남동 교수의
민중 신학은 그 때 이미 민중 편에 서서 일하시는 하나님과 예수를 발견하고, 그리스도인과 교회도 이들 민중 편에 서야 한다는 핵심 사상이 형성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선언은 한국 민중들의 참상을 국내외에 널리 알린 선언으로서, 특히 세계교회로 하여금 한국교회의 의로운 싸움을
주목하게 만들었고, 도움의 손길을 뻗칠 수 있게 하였다. 세계교회는 이 선언을 “제2의 바르멘선언”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두
번째로 서남동 교수의 민중 신학사상을 뚜렷이 볼 수 있게 해주는 선언서는 NCC가 1978년 9월 5-7일에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산업선교신학정립협의회”를 갖고 채택한 “산업선교신학선언”이다. 이 선언 가운데 “민중의 신학”이라는 항목이 들어 있다. 이 신학선언에 참석한
분들 가운데 서남동 교수 외에도 김용복, 문동환 등 민중 신학자들이 있었으므로 이들의 영향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필자가 생각하기로는 당시에 민중
신학을 주도적으로 발전시켜 나갔을 뿐만 아니라 이 협의회에서 발제강연을 한 서남동 교수의 생각이 가장 많이 반영됐으리라고 생각한다. 민중
신학이라는 항목이 하나의 항목으로 NCC의 신학선언에 당당히 들어 온 것은, 민중 신학이 몇몇 신학자들의 신학으로만 머문 것이 아니고,
한국교회의 신학으로 자리매김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선언서에서 민중 신학의 과제는 단순히 이론으로만 머무는 신학이 아니라, 산업현장,
민중고난의 현장의 울부짖음을 대변하고 밝혀주는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난당하는 민중의 울부짖음에서 그리스도의 부름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서남동 교수의 민중 신학사상을 엿볼 수 있다. 서남동 교수는 이 외에도 수많은 선언서, 성명서, 탄원서 등에 참여하고 강연, 설교
등을 통하여 민주화, 인권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서남동 교수는 많은 글을 남기지는 못하였지만 민중 신학의 이정표가 될 만한
귀중한 글들을 남겼다. 그 대표적인 글들은 “두 이야기의 합류”, “우리의 부활과 사월혁명”, “恨의 사제”, “恨의 형상화와 그 신학적
성찰”, “소리의 내력,” “민중(씨알)은 누구인가”, “민중 신학의 성서적 전거”, “민담에 관한 탈신학적 고찰”, “민담의 신학 -
반신학”, “십자가 - 부활”, “세계의 생명과 그리스도”, “문화신학 - 정치신학 - 민중 신학”, “빈곤의 사회학과 빈곤의 신학” 등이다.
이러한 글들을 모아서 출판한 책이 『민중 신학의 탐구』(한길사, 1983)이다. 그리고 민중 신학 이전의 글들을 모은 책이 『전환시대의
신학』(한국신학연구소, 1976)이고, 그의 유고집으로 제자들이 모아서 낸 책이 『서남동 신학의 이삭줍기』(대한기독교서회, 1999)이다. 비록
그의 저서들이 많지는 않지만, 민중 신학을 이해하는 데는 없어서는 안 될 주옥같은 글들로서 민중 신학의 중요한 자료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서남동 교수가 “민중이 메시야”라는 주장을 하였다고 알고 있지만, 이는 오해이다. 서남동 교수는 “민중이 메시야”라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 “민중이 메시야”라는 주장 대신에 그는 민중이 “메시아적 성격”을 가지고 “메시아적 기능”을 하며 “메시아적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민중이 메시야”라는 주장과, 민중이 “메시아적 성격”을 가지고 “메시아적 기능”을 하며 “메시아적 역할”을 한다는 주장은 큰 차이가 있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필자의 논문 “서남동의 예수이해, 민중이해에 대한 새로운 고찰”, 『신학사상』 86호, 1994년 가을호, 167-185
참고). 서남동 교수는 예수를 참 하나님 참 사람, 성육신한 하나님, 그리스도, 메시아, 주(主,) 속죄주로 보며, 삼위일체를 인정한다. 이런
칭호들을 서남동 교수는 민중에게는 사용하지 않는다. 서남동 교수는 예수를 민중과 동일시하면서 또한 구별한다. 예수는 신이 성육신해서 민중이 된
존재이고, 민중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한계 안에서 메시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서남동 교수는 민중이 인간이라는 한계 안에
머무르면서 메시아의 남은 고난을 몸으로 체현하는 “메시아적 성격”을 가지고, “메시아적 기능”, “메시아적 역할”을 감당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서남동 교수는 안병무 박사와 함께, 한국교회 100년의 역사에서 세계가 인정하는 민중신학을 창도한 한국 신학계의 인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이 글은 월간 숲과나무 <한국기독교인물연구> 2007년 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