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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야를 맞는 순종
마2:1~12
우주의 왕이시오 우리의 구주가 되시며 우리 인생의 주님 곧,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은 가장 낮고 천한 마구간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양을 지키는 목자에서부터 가장 엘리트인 동방 박사에 이르기까지 경배를 받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곳은 유대의 작은 고을 베들레헴이라는 곳입니다. 베들레헴은 “떡집” 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는 “에브랏, 에브라다” 라고 불렸습니다. 이 베들레헴은 작은 고을이지만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마을입니다.
야곱이 그 아내 라헬을 장사지낸 곳이요 (창35:19~20), 이방 여인이었던 룻이 보아스를 만나 결혼하여 살던 곳이요(룻1:2), 다윗의 고향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을 “다윗의 성” 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윗의 혈통에서 메시야가 태어난다고 하는 약속을 따라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나셨다는 것은 아주 의미 깊은 사건입니다.
미가는 미5:2에서/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했습니다.
(1)에 예수께서 탄생하신 때는 헤롯 왕의 때입니다. 여러분~ 사람과 시대는 중요한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실 당시의 헤롯 왕은 유대인이 아닌 에돔 사람 안티파텔의 아들이었습니다. 정치적이나 군사적으로 탁월한 지략과 용기를 가졌던 그는 동시에 정신병적인 폭군의 모습을 지닌 야누스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시저 황제에 의하여 B.C. 47년에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B.C. 40년에 분봉 왕으로 임명되어 예수께서 탄생하실 무렵인 B.C. 4년까지 통치하면서 당시 70세였습니다.
그는 헤롯 성전을 지어 유대인의 환심을 사고 자신의 금 접시를 녹여서 백성들의 식량을 사들이는가 하면, 굶주리는 백성들을 위하여 세금을 감면해 주는 등 정치적 수완이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병적인 인격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와 장모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두 아들을 죽였고, 열 명이 넘는 아내를 두고 근친상간을 서슴지 않던 비인격적, 정신병적인 인격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최후를 맞을 때 유언하기를, 예루살렘 백성 중에서 가장 존경받는 한 사람을 택하여 감옥에 가두었다가 자신이 죽는 순간에 함께 죽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유는, 자신의 죽음에 아무도 눈물을 흘리며 애곡할 사람이 없을 것을 알고, 자신이 죽는 순간에 그 사람을 함께 죽임으로써 유대 백성들로 눈물을 흘리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시대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대조적인 두 왕의 모습을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세상 왕을 대표하는 헤롯과 만왕의 왕으로서 인류의 구주요, 참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것입니다.
헤롯은 예수 탄생의 소식을 동방 박사들에게서 들었을 때, 결코 잠잠할 수 없었습니다. (3~8)에 나타난 사건이 그것입니다.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왕이 모든 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대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했습니다.
이는 헤롯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배하기 위함이 아님을 누구라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후에 헤롯은 만왕의 왕 구주가 나셨다는 이유로 그를 죽이기 위하여 대살인극을 펼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이 탄생하신 때는 참으로 암울하고 불행한 밤과 같은 때였지만, 영적으로 보면 가장 성숙한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는 참으로 어두운 그리고 혼미한 극단적인 이기주의의 세상을 살아갑니다. 마지막 시대 곧 말세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걱정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시대를 살아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를 불러 세우셔서, 시대를 향해 주의 복음과 그 나라를 외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왜? 나를, 오늘, 여기에 태어나게 하시고, 왜? 나를 불러 구원하시고, 양무리교회로 보내셨는지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저는 압니다. 연약한 개척교회에 학생, 청년들을 보내주심은 저의 서원대로 천국인재 양성과 차세대를 책임 질 주자 양육의 꿈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요./할렐루야!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반응하며, 하나님 사랑의 삶을 통한 하나님 영광을 위한 삶을 신앙의 목적과 최고의 가치로 삼고, 어떤 형편과 처지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선한 싸움을 싸우는 반듯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그 날에, 그 때에(하나님의 우리 믿음을 인정하시는 그때)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고 쓰임 받는 자의 자리에 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은혜와 믿음의 사람이 저와 여러분이기를 축복합니다.
“시대와 사람” 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어떤 시대냐, 누구를 만나느냐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하고 중요합니다. 오늘 여기 우리를 구원하시고 양무리교회로 보내심은 여러분을 향한, 그리고 양무리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이를 발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에4:14에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여러분과 저를 이 당에 태어나게 하시고 여기에 살게 하시며 양무리교회로 보내신 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 시대가 아무리 어둡고 패역하여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섞이지 아니하고 타협하지 아니하며, 그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뜻을 깨달아 분별하여, 그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 곧,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합당한 삶, 새 사람으로서의 삶을 이루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사랑의 삶인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세상이 어떠하든지,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할지라도 오로지 주님의 말씀을 좇아 우리게 주신 새 계명의 푯대를 향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얻기까지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과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그날에 이르기까지 늘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 어두운 헤롯 왕의 때에 그곳에 오셨는지를 안다면, 우리의 신앙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어둠의 세상을 향해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통해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고, 그 승리의 삶은 주님 안에 있음을 알게 하려 하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눅2:15~17에 보면, 예수님의 탄생 시 최초의 방문자는 양치는 목자들이었다고 기록합니다. /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의하면,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에 의해 예수님이 경배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은 낮고 천한 자리에 오셨지만 천한 목자와 엘리트 박사들에 이르기까지 경배를 받으심으로서 모든 인류의 구주로 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가장 가난한 자나, 가장 부유한 자나, 천한 자나, 존귀한 자나, 가진 자나, 갖지 못한 자나, 배운 자나, 무식한 자나 누구나 올 수 있는 곳이요, 주 안에서 한 형제자매인 것입니다. 목자냐, 박사냐가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주님을 경배하느냐 곧 예배자냐 아니냐, 신앙인이냐 종교인이냐, 제자냐 팬이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주님은 온 인류의 구원 주로서 온 인류의 찬양과 경배를 받아 마땅한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위한 삶을 신앙과 인생의 그리고 일상의 삶의 최고 우선적인 목적과 가치로 삼아야 함은 두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분이 죄인인 나를, 지옥 불에 떨어질 나를 건져내시기 위해 피 값 주고 사시기 위해 오시고 이를 담당하셨다는 것은 참으로 찬양하고 경배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여러분이나 저는 작은 이익 하나도 포기하지 못하고 주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지 못한 채, 세상의 것을 위하여 주님을 배반하고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으로서 그 영광보좌를 내려놓으셨고, 비우셨고 낮아지셔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 천한 곳에 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의 그 모진 고통을 친히 담당하시기까지 우리를 위해 다 포기하셨습니다.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합당한 요구 적 삶 곧, 하나님 사랑의 삶을 살지 않고 하나님과 흥정하고 종교인으로서 아직도 내 배와 이를 위한 삶을 좇아간다면, 이는 주님을 배반하여 두 번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헤롯이나 빌라도나 종교 지도자들이나 유대 백성들과 하나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목자나 박사들처럼,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나를 향한 요구를 발견한 사람 곧, 나를 구원하신 목적과 가치를 발견한 사람은 (딛2:14) 요4:24에서 이르시듯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영적 예배로서, 영적 예배는 롬12:2에 이름 같이,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 곧, 삶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 분별하는 것입니다. 온전하신 뜻을 좇는 것입니다./할렐루야!!
오늘날 심각한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영으로 드려야 할 예배가, 교회 안에서 만의 의식과 형식에 묶여버렸고, 죽은 믿음이 되어버렸습니다.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삶이 없는 형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영적 쾌락을 좇는 신비주의나, 사회참여나 민주화를 부르짖는 정치적 종교로 타락해 버렸습니다. 기복신앙에 하나님의 영광은 안중에도 없고, 하나님은 나를 복 받게 도우시는 곧, 세상 것으로 풍족하게 채우시고 즐기게 만들어 주시는 내 도우미나 졸개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는 어처구니 없는 죽은 예배를 좇고 있는 것입니다. 쇼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요구적 말씀보다 곧, 성도가 꼭 들어야 할 말씀보다,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기분을 맞추어 줌으로써 수적으로 끌어 모아 재정적 풍요 속에 세상과 짝하여 즐기는 일에 함께 뒹굴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 곧 헌신과 희생, 섬김과 사랑은 팽개치고 축복만을 엉터리로 강조함으로서, 죽은 종교, 죽은 신앙, 죽은 성도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짓을 버젓이 저질고도 말씀을 자기 변론이나 합리화에 교묘하게 이용하고 많은 숫자의 길들여진 종교인들을 내세워 하나님 자리에 앉아 어떤 잘못에 대하여도 책임지지 않는 기가 막힌 배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성도들은 전혀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고 신처럼 추앙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반드시 오게 될 것이고 그날에 그 책임은 반드시 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 안에서 발견되어야 할 예배가 영업적인 모습으로 타락해 버렸다고 세상의 조롱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 세상 적 사고나 논리, 세상적인 방법이나 방식, 태도가 들어오면 교회는 타락합니다.
예배는 어떤 정치적인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신비한 황홀감을 체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의 검에 나의 죄 된 모습을 도려냄을 받음으로써 고침을 받고 말씀 안에서 회개함으로 힘을 얻고 다시 세상 가운데 승리의 삶 곧, 하나
님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결단을 갖는 시간인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이요 거룩이요 능력이요 영성이요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 가운데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고 회복하고 돌아가야 합니다. 참된 속죄와 회개 그리고 기쁨과 승리에 찬 확신하는 믿음을 가지고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만나고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참 예배 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탄생에 대한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는 세 부류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첫째, 헤롯 왕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겉으로는 주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 같으나 실상은 아닌 사람들입니다. 바로 불신자들입니다. 십자가를 불태우고 그럴듯한 철학으로 미혹하는 자들입니다. WCC가 그것입니다. 사단을 숭배하고 돈을 사랑하며 사상의 노예가 된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이 없는 자들입니다.
WCC 제 10차 총회가 오는 10월28일부터 11월 9일까지 부산에서 열립니다. 진리를 가장한 가자 곧 사단의 앞잡이들입니다. 옛날 신사참배를 거리낌 없이 행한 목사들을 좇아 한 구덩이 불 못에 빠진 성도들이 있었듯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실제 믿음이 없는 ,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사단의 졸개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지옥이 있을 뿐입니다.
이참에 WCC의 전과에 대하여 돌아 보겠습니다.
1차(1948, 8, 3/ 네들란드 암스텔담) “공산주의는 가난과 불완전으로부터의 구원의 수단이다” 라고 성명서를 발표함. 용공주의 선언.
2차(1954, 8/ 미국 에반스톤) “세상의 모든 악을 퇴치하기 위하여 투쟁하자”고 선언함.
3차(1961, 7/ 인도 뉴델리) “마르크스주의는 정의로운 사회구현을 위한 필수 이념이다” 고 선언함. 종교다원주의, 혼합주의, 해방신학 선언.
4차(1968, 7/ 스웨덴 옵살라) “게릴라 혁명가를 돕기 위한 자금 지원모금운동 선언함.
5차(1975, 11/ 케냐 나이로비) “마르크스 게릴라 운동 묵인과 각기 다른 성생활 묵인 (간음묵인)선언함.
6차(1983, 7, 24/ 캐나다 벤쿠버) “오직 예수로만의 구원 부정, 종교다원주의 천명하여 다른 종교에도 구원있다고 선언함. 예수구원 부인.
7차(1991, 2/ 호주 캔버라) “무속신앙 접목한 범신론적 종교혼합주의 선언함.
8차(1998, 12, 3~14/ 잠바브웨 하라레) “일부다처제 묵인 및 주장함.
9차(2006, 2, 14~23/ 브라질 포르토 알레그레) “동성애자들에게도 성직 허락을 위한 제도적 변화 촉구 선언함. 동성애자 성직 지지선언.
WCC는 이래서 이단단체입니다. 기독교 연합체를 가장한 사단의 앞잡이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부산 총회의 대회장은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입니다. 그는 “WCC를 개최한 것은 한국 교회 전체의 커다란 축복이다” 라고 했습니다. 죽을 짓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영이 미혹되었기 때문입니다. 세계 제일의 교회를 담임하는 조용기 목사는 동국대 불교대학 강연에서 예수로만이 아니라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지옥 문이 활짝 열린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신앙의 위기요 캄캄한 밤의 때를 지나고 있습니다.
까딱 잘 못하면 지옥으로 굴러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제사장이나 서기관들처럼 무관심한 사람들입니다.
신앙의 가장 무서운 적은 무관심입니다. 사랑의 반대가 무관심입니다. 습관적이고 의식적으로 형식적으로 예배하고 찬송 기도하고 봉사하고 교회에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헤롯 왕이 시키는 대로 예수의 행적만을 조사하는 반응 정도의 사람입니다. 분별이 없는 사람입니다.
구원하신 주님에 대한 감사나 감격이 없습니다. 오로지 내 배만을 위해 종교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신앙연조나 직분만을 자랑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회개의 삶이나 주님의 피 묻은 손을 단 한 번도 잡아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안중에도 없는 엑세사리 종교인들입니다. 그래서 단 한 번도 헌신을 해보지 못한 불상한 사람들입니다.
훗날 주님은 그들에게 지옥을 선언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 오래 믿은 것, 직분 자랑하지 마시고 예수 만나 것, 감사와 기쁨으로 봉사한 것 곧, 주님 원하시는 삶을 산 것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응답의 훈장을 자랑 말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곧 세상과 벗하거나 짝하여 친구하지 않는 섞이지 아니하고 타협치 아니하는 삶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먼 길을 생명 걸고 주님을 경배(예배) 하고자 찾아 온 동방박사 같은 사람들입니다.
신앙은 곧 믿음은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는 십자가에 못 박는 삶입니다. 이것이 비움이요 내려놓음이요 죽음입니다. 이것이 참 예배요 거룩한 제사요 경건이요 영적인 예배입니다.
오늘 우리는 동방박사들을 통해 주님을 어떻게 예배하는지 배울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참 된 헌신입니다.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멀고 먼 동방에서 주님을 만나 경배하려고 찾아 온 것입니다. 예배는 생명을 바쳐 하나님을 만나는 결단이요 헌신입니다. 모든 일을 다 포기하고 주님께 경배하려고 찾아 온 것입니다. 그들의 목적은 (2)에서 보듯 주님을 경배 곧 예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배는 결단입니다. 곧 비움이요 내려놓음이요 죽음입니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이러한 헌신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예배는 내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받기 위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드리러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분의 은총과 긍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목사가 설교를 잘 해서 은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어떤 태도, 마음으로 나오는가에 달렸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예언의 말씀을 믿는 믿음 하나로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주님을 찾아 나섬은 헌신의 결단,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거룩한 욕심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먼 길 오는 동안 강도를 만날 수도 있고,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죽음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는 돌아가 가족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약도 없습니다. 더구나 주님이 탄생하실 목적지도 모릅니다. 무작정 별 하나를 보고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아브라함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할 때, 갈바를 알지 못하고 갔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그렇게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할!
종교행위로, 자기 의에 다른 열심히 주님을 만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사랑하는 삶을 통한 헌신 곧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삶 곧 비움과 내려놓음, 죽음선언의 결단하는 삶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기꺼이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첫 번째 조건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를 통과하지 않고는 결코 주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의 영광은 애당초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참 된 예물입니다.
그들은 예물 곧 황금과 몰약과 유향을 준비하여 드렸습니다.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예배 자는 정성어린 예물이 있어야 합니다. 엎드려 곧 갑사함으로 자원함으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시50:23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했습니다. 예물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격과 감사의 신앙고백입니다.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그를 하나님은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또 시51:17에/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했습니다. 곧 하나님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그 은혜로 사는 존재라는 신앙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전적 하나님만 바라보는 즉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삶 가운데 행하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했습니다.
사1:1~17에서 하나님은 타락한 제물, 정성 없는 제물, 마음에 없는 안식일에 대해 진노하고 계십니다.
또한 말1:7~8에서도/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받아들임, 만나주심)하겠느냐”
대답은 "NO ! 아니다“입니다.
말1:13에 경고하시기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로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 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했습니다.
정성어린 예물이 있어야 은혜를 받고 복을 받습니다. 세상에서도 내게 잇는 것으로 누군가에게 주면 행복하지 않습니까? 예물을 드릴 때 행복한 것입니다. 주는 것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예배에 기쁨이나 만족이 없고 번폐롭게 여기는 것은 예물이 없는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즉 내 욕심과 허영으로 가득한 채 나와서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하나님 영광을 위해 내려놓지 않는 한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그 사람에게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과 기쁨, 문제 해결과 복의 역사는 없는 것입니다.
등록금이나 세금을 내는 것처럼 헌금을 드리면 안 됩니다.
마6:21에/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했습니다.
돈을 사랑하고 아까워하여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지 못하는 사람은 돈을 사랑함이요 그것에 노예가 된 사람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인정치 않는 불신앙의 사람인 것입니다. 돈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기 보다 더 하는 우상숭배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성껏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고후9:7~9에 헌금을 하는 방법과 그 결과에 대하여 이르시기를/ “각 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한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했습니다.
셋째, 동방박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12)/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 가니라” 했습니다. 왓던 길, 쉬운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혹이라도 헤롯이 쫓아 올 것을 생각하여 힘들고 생소한 다른 길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헤롯에 대한 분별이 있었음이며, 주님께 그 어떤 불행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는 드리는 것이지 보는 것이나 참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으로 재능으로 물질로 시간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신앙의 성공은 말씀에 순종하는 살을 사느냐 아니냐에 달렸습니다.
저는 헌신하고 봉사하는 여러분을 보면 눈물이 납니다. 십일조, 감사헌금을 드리는 것을 보면 눈물이 납니다. 시간과 재능과 몸으로 물질로 교회를 섬기시는 여러분을 보면 가슴이 뭉클합니다. 하나님 앞에 복의 사람으로 세워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헌신 없는, 헌물 없는 , 삶의 결단이 없는 예배는 실패한 예배요, 종교생활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동방박사들과 같은 믿음의 신앙이 있어서 주님을 섬기고 경배하고 순종하는 삶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진정한 기쁨과 만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