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붕당 정치 전개
1. 붕당 정치(朋黨政治)의 뜻
조선 중기ㆍ후기의 정치 형태
주자학적인 세계관을 신봉하는 사류가 이념 집단을 형성하고 공도에 바탕을 둔 정치를 표방하면서, 자신들의 의사를 집약한 당론을 매개로 하여 현실정치의 헤게모니를 추구하는 정치체제를 말한다. 붕당이란 붕과 당의 합성어로서, ‘붕’은 ‘동사(同師)’ㆍ‘동도(同道)’의 사류, 즉 같은 스승 밑에서 의리인 도를 동문수학하던 무리를 말하며, ‘당’은 이해관계로 모인 집단을 말한다.
2. 붕당정치의 운영 논리
신하들 사이의 세력 결집인 붕당은 원래 유교 왕정에서 금기의 대상이었다. 조선 초기에도 붕당이란 말은 반역자 또는 정치적 유죄 집단에 대해 주로 사용될 정도로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16세기 사림 세력에 의해 중국 송나라 때 확립된 새로운 붕당관이 수용되면서 붕당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중국 송나라 때는 사회경제학적인 발달로 정치 참여 유자격 층 내지 정치 참여 의식 층이 확대되면서 붕당관도 바뀌었다.
송나라 구양수의 <붕당론>이 변화의 전기를 마련했다. 그의 붕당론은 정치에서 붕당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는 점을 주지시키는 한편, 붕당을 공도의 실현을 추구하는 자들의 ‘군자의 당’과 개인의 이익의 도모를 일삼는 ‘소인의 당’으로 구분했다. 군주는 진붕(眞朋)의 전자가 위붕(僞朋)인 후자에 대해 우세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면 왕정은 저절로 바르게 이끌어질 것이라고 논했다.
성리학의 대성자인 주희 역시 구양수의 견해를 취하면서 붕당에 관한 한 정승의 문의에 답하기를, “붕당이 있는 것을 염려할 것이 아니라 군자의 당이 있다면 정승도 군주와 함께 그 당에 들어가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16세기 조선에서 훈구파와 사림파가 대립할 때 양자는 붕당관에 대해서부터 서로 다른 인식을 가졌다. 훈신ㆍ척신들이 한ㆍ당 시대의 붕당관으로 사림의 결집을 불충(不忠)으로 몰아 탄압의 구실을 삼은 반면, 사림들은 훈신ㆍ척신들을 ‘소인의 당’이라고 비판했다. 이후 선조대에 사림계의 우세가 확실해진 뒤에는 구양수나 주자의 붕당론이 정설로서 자리를 잡았다. 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ㆍ남인 두 정파의 상호 공존 체제가 추구되는 가운데, 중앙 정치체제에 대한 인식도 한 걸음 더 발전했다. 즉 구양수, 주자의 붕당론은 붕당의 존재를 죄악시하는 관념을 극복했다.
그러나 군자와 소인의 대립 관계만을 설정함으로써 공도 실현을 추구하는 복수 붕당(학파)의 공존에 대한 논리는 미쳐 세우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17세기 초 사림은 이에 다음과 같은 논리로 복수 정당의 공론을 합리화했다. 즉 현재의 붕당은 구양수나 주희가 말하는 군자당ㆍ소인당과는 달리 각기에 ‘선인(善人)’과 ‘불선인(不善人)’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어느 한 붕당의 인사들만을 등용하거나 배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으로 공존의 근거를 얻으면서 공론에 입각한 상호 비판 견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붕당을 미워해 없애려 한다면 군자들이 화를 입고 나라가 망하게 된다는 구양수와 주희의 견해를 들어, 군주와 권세가들이 인위적으로 붕당을 없애려 하는 노력에 반대했다.
그리고 당시의 붕당정치는 나름의 운영장치들을 새로 갖추었다. 즉, 이조전랑이 후임을 자처하는 자대제(自代制)와 삼사의 관원들에 대한 통청권(通淸權)이 좋은 예이다. 이조 정랑 자대제는 상관으로 조정 대부분의 인사 조치의 권한을 가진 이조판서로부터 구속을 받지 않았다. 이 조건 아래 조정의 언론을 담당하는 삼사 관원들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에는 교체자를 왕에게 직접 추천하는 통청권을 누렸다. 이조전랑에 대해 이와 같이 큰 권한을 부여한 것은 삼공ㆍ육경 등의 전횡과 일탈을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이조전랑직의 이러한 특별한 권한은 사림 사회에 대해 자신의 명예를 걸고 파당을 초월해 적합한 후임자를 제대로 추천하는 데서 지켜질 수 있었기 때문에, 사림의 붕당정치의 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재야 사림의 공론은 학문적 명성이 높은 인사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그를 가리켜 산림(山林)이라고 했다. 산림은 왕으로부터도 특별한 예우를 받았다.
3. 붕당 정치의 폐해
신축ㆍ임인년(1971,1972) 이래로 조정에서는 노론, 소론, 남인이 날이 갈수록 더욱 사이가 나빠져 서로 역적이라는 이름으로 모함하니 이 영향이 시골에까지 미치게 되어 싸움터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서로 혼인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당색끼리는 서로 용납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체로 당색이 처음 일어날 때에는 미미하였으나, 자손들이 그 조상의 당론을 지켜 200여년을 내려오면서 마침내 굳어져 깨뜨릴 수 없는 당이 되고 말았다. …근래에 와서는 사색(四色)이 모두 진출하여 오직 벼슬만 할 뿐, 예부터 저마다 지켜 온 의리는 쓸모없는 물건처럼 되었고, 사문(斯文:유학)을 위한 시비와 국가에 대한 충역은 모두 과거의 일로 돌려 버리니 ……....
<택리지>
4. 붕당에 관한 이이의 상소문
이이가 향리에 있으면서 상소하여 사직하고 아울러 시사(時事)를 전달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이준경이 죽을 임시에 진언하면서 붕당을 깨뜨리라는 주장을 제기하였는데, 전하께서 그 말을 깊이 믿고서 조정이 이미 어지럽고 붕당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의심하시어 조신(朝臣) 소차(疏箚)를 전부 자신을 변명하는 말로 여기고 깊이 살피지 않으시기 때문에 고굉(股肱)의 신하들이 이와 같이 황혹(惶惑)해 하니, 신이 비록 무상하나 가슴이 아픕니다. 붕당에 관한 설이 어느 시대라고 없었겠습니까마는, 그 취지는 다만 군자 당인지 소인의 당인지를 잘 분별하라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참으로 군자라면 천백인이 한 무리를 짓더라도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좋은 법이고, 참으로 소인이라면 한 사람이라도 용납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붕당을 형성한 것이겠습니까. 만약 사정(邪正)을 묻지 않고 곧장 붕당을 지었다는 것만을 의심하여 그것을 깨뜨리려고 한다면 또 다시 동경(東京) 당고(黨錮)의 화와 백마역(白馬驛) 청류(淸流)의 참극이 반드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보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로부터 붕당을 논한 것 중에 구양수의 붕당론보다 잘 분변한 것이 없고 주자가 유정에게 답한 것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으니. 전하께서 시험삼아 그 글을 보시면 군자와 소인의 정상을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어찌 감히 그 사이에 더 덧붙이겠습니까. … 준경의 말이 과연 사실이라면 정신(廷臣) 중에 분명히 간악한 자들과 서로 붕당을 만들어 공도를 등지고 사심을 행한 자가 있을 것이니, 전하께서 명백히 가리고 정밀하게 조사하여 반드시 그 사람을 잡아 먼 변방으로 내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 중에 만약 이런 사람이 없다면 준경의 말은 울분에 격앙되어서 나온 것이거나 아니면 정신이 착란된 상태에서 나온 것으로서, 불충(不忠)이 될 뿐만 아니라 도리어 큰 화를 부추기는 근원이 된다 하겠습니다. … ... 준경이 붕당으로 지목한 자들은 모두 한 때의 청망(淸望)을 등에 업고서 공론을 주장하는 자들이니, 만약 이름을 분명히 말하면 사림에 죄를 얻어 결과적으로 소인이 될 뿐만 아니라, 아무리 전하라도 그가 현인을 해치고 나라가 병들게 한 것을 의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직하고 강직한 자가 과연 이와 같다는 말입니까. … 대체로 구신을 노성(老成)하다고 하여 권력을 주는 것은 진정 옳지 않고, 구신을 무능하다고 하여 일체 쓰지 않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문제는 각자 그 재능에 맞는 직책에 앉혀 각각 제 자리를 얻게 하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심기를 평안하게 가지시고 심사수고하신 뒤에, 널리 조정의 신하를 소집하여 신의 이 상소를 내려주시고 시비를 가리도록 하소서. 신의 말이 과연 그르면 신을 군상(君上)을 기망한 죄로 다스림으로써 직분을 넘어 국사를 말한 자의 경계로 삼으시고, 신의 말이 과연 옳으면 준경의 설을 깨뜨려 중외에 효유하심으로써 고굉 대신들의 의혹을 풀어 그 마음을 위안시켜서 사기를 진작시키고 공론을 부지시키는 한편, 힘써 구신을 타일러 그들로 하여금 각자 그 분수에 안주하고 그 재능을 다하여 조정을 맑게 하고 화기(和氣)를 부르게 하소서. 그렇게 된다면 종사(宗社)를 위해서도 다행이고 사림을 위해서도 다행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