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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1년(성종 12년) 동국여지승람은 50권으로 편찬되었다. 내용은 1477년에 편찬한 팔도지리지에다 동문선에 수록된 동국문사의 시문을 첨가한 것이다. 편찬체제는 남송의 방여승람과 명의 대명일통지를 참고하였다.
경국대전은 경제육전과같이 6분 방식에 따라 이전, 호전, 예전, 병전, 형전, 공전의 순서로 되어 있으며, 각 법전마다 필요한 항목으로 분류하여 규정되어있다. 또 조문은 경제육전과는 달리 추상화, 일반화되어 있어 유권해석이 가능하도록 되어있다. 이는 120여 년에 걸친 탁마의 결정체로서 손상이 없는 것이며, 명실상부한 조선의 최고 법전으로 면모를 갖춘 것이라 할 수 있다.
경국대전은 조선시대 통치의 기본 법전으로 우리나라에 전해져오는 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문헌적 가치가 대단히 크다.
경국대전의 각 법전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전에는 통치의 기본이 되는 중앙과 지방의 관제, 관리의종별, 관리의 임명, 사령 등에 관한 사항이 마련되어 있다. 호전에는 재정 경제와 그에 관련되는 사항으로서 호적, 조세 제도를 비롯하여 녹봉, 통화, 부채, 상업과 잠업, 창고와 환곡, 종운, 어장, 염장에 관한 규정과 토지, 가옥, 노비, 우마의 매매와 오늘날의 등기 제도에 해당하는 입안에 관한 것, 그리고 채무의 변제와 이자율에 관한 규정이 마련되어 있다. 예전에는 문과, 무과, 잡과 등의 과거 규정과 관리의 의장 및 외교, 제례, 상장, 묘지, 관인, 그밖에 여러 가지 공문서의 서식에 관한 규정을 비롯하여 상복제도, 봉사, 입후, 혼인 등 친족법 규범이 마련되어 있다. 병전에는 군제와 군사에 관한 규정이, 형전에는 형벌, 재판, 공노비, 사노비에 관한 규정과 재산 상속법에 관한 규정이, 공전에는 도로, 교량, 도량형, 식산에 관한 규정이 마련되어 있다.
경국대전의 편찬 연혁은 세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조는 즉위하자마자 당시까지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각종 법전들을 총체적으로 결합하는 새로운 법전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육전상정소를 설치하고 통일 법전 마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까지 조선의 법전은임시법의 형태를 띠로 있었다. 왕이 즉위하거나 사건이 생길 때마다 새로운 법령이 계속 쌓였고, 이에 대한 결함이 발견될 때마다 속전을 간행해 보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통일 법전의 편찬 작업은 1460년(세조 6년) 7월에 시작되었다. 먼저 재정 경제의 기본이 되는 호전과 호전등록을 완성하여 이를 경국대전호전이라고 했다. 이듬해 7월에는 형전을 완성하여 공포 시행했다. 1466년에는 나머지 이전, 예전, 병전, 공전 등을 완성하였으며 이미 만든 호전과 형전도 다시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여 1468년 1월 1일부터 시행하였다. 그러나 세조는 이때 마련된 법전을 최종적인 것으로 확정하지는 않았다. 이 법전이 아직까지 미비한 것이라고 판단했던 까닭이다. 그래서 세조대에는 통일법전 작업이 거기에서 멈추었고, 나머지 작업은 예종대로 넘어갔다. 예종도 육전상정소를 설치하여 1469년 9월까지 작업을 매듭짓고 이듬해 1월 1일에 반포하기로 결정했으나, 예종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그 일은 성종 대로 넘어가게 된다. 성종은 즉위하자 경국대전을 수정하여 1471년 1월 1일부터 공포하여 시행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신묘대전이다. 하지만 이 책은 누락된 조문이 많아 다시 개수하여 3년 뒤인 1474년 2월 1일부터 시행하였는데, 이 책이 갑오대전이다. 이 대전에 수록되지 않은 법령 중에 시행의 필요성이 있는 72개 조문은 따로 속록을 만들어 함께 시행하였다. 그러나 1481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논의가 있자 감교청을 설치하고 대전과 속록을 대대적으로 개수하여 1485년 을사년 1월 1일부터 시행하였다. 이것이 을사대전이다. 을사대전을 시행할 때는 앞으로 다시는 개수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이 을사대전은 최종적으로 확정된 조선왕조 영세불변의 만세성전이 되었다. 125년 동안의 끈질긴 노력의 결실이었다.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전해오는 경국대전은 을사대전을 가리키며, 신묘대전, 갑오대전을 비롯한 그 이전의 법전들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을사대전은 현재까지 우리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유일한 법전이 되는 셈이다.
경국대전의 편찬, 시행을 통해 조선은 법치주의에 입각한 왕조 통치의 법적 기초인 통치규범 체계를 확립하고, 다음으로 중국법에 무비판적으로 의존하던 관행을 없앰으로써 법치주의의 자주성을 이룰 수 있었다.
경국대전이 시행된 뒤에도 대전속록, 대전회통, 대전통편 등과 같은 법전이 편찬되어 이 조문이 실제로 개정되거나 폐지된 적도 있었지만 그 기본 이념은 사라지지 않고 면면히 내려와 조선 법치주의의 근간이 되었다. 따라서 경국대전은 조선인의 통치관과 인간관, 역사관을 한데 묶은 위대한 역사적 산물임과 동시에 조선인들의 법치주의적 염원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적 자산이라 할 수 있다.
경세유표는 관제·군현제와 전제(田制)·부역·공시(貢市)·창저(倉儲)·군제·과거제·해세(海稅)·상세(商稅)·마정(馬政)·선법(船法) 등 국가 경영에 관한 일체의 제도 법규에 대하여 적절하고도 준칙(準則)이 될 만한 것을 논정한 책이다.
동국여지승람 책머리에는 진전문, 서문, 교수관원직명과 구본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노사신의 진전문, 서거정의 서문 및 교수관직명, 찬수관직명, 목록 등이 수록되어있다. 또한 책의 끝에는 홍언필, 임사홍, 김종직의 발문이 실려 있어 간행 과정과 의도를 살펴볼 수 있게 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은 각 도의 연혁과 총론에서부터 성씨, 인물, 풍속, 봉수, 능묘, 교량 위치 등 세세한 내용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인물 속에는 관원뿐 아니라 효자, 열녀 등이 포함되어 있고, 행정 구역에 관해서도 지역의 변천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여기에는 세종 대의 지리지가 지녔던 장점인 토지의 면적, 조세(租稅), 인구 등 경제, 군사, 행정적인 측면이 약화된 반면에 인물, 예속, 시문 등이 강조되어 있는데 이는 세종 대에 비해 성종 대가 그만큼 평화스러웠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1차 수교는 1485년 김종직 등에 의해 이뤄졌는데, 이때 시문에 대한정리와 연혁, 풍속, 인물 편목에 대한 교정, 그리고 대명일통지의 구성에 따라 고적편목이 첨가되었으며, 중국의 지리지에 없는 성씨, 봉화불을 꽂던 봉수의 양조 등이 신설되었다. 그 뒤 1499년 임사홍, 성현 등이 부분적인 교정과 보충을 가하였으나 내용상으로는 큰 변동이 없었다. 제3차 수정은 증보를 위한 것으로서 1528년(중종 23년)에 착수하여 1530년에 속편 5권을 합쳐 전 55권으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를 신증이라는 두 자를 삽입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이라고 했다. 이 중종시대본은 임진왜란을 겪은 후 희귀해져, 현재는 일본 경도대학 소장본이 유일하며, 1611년(광해 3년)에 복간한 목판본이 규장각도서 등 국내에 소장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몇몇 권에는 경도, 한성부, 경기도, 개성보,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황해도, 강원도, 함경도, 평안도 등 각 지방의 군현이 수록되어 있는데, 경도 앞에는 조선전도인팔도총도가 실려 있으며, 각 도 첫머리에는 도별 지도가 삽입되어 있다. 이 지도들은 실측 지도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지극히 단순한 형태를 띠고 있다. 그리고 한결같이 동서의 폭은 길고 남북의 길이는 짧아 기형적인 모양을 하고 있다. 그래서 팔도총서의 모양은 꼭 실제 지형을 위에서 꾹 눌러놓은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다. 당시의 지도들이 이같은 모양을 띠게 된 것은 남북의 교통로에 비해 동서의 교통로가 전혀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한반도의 지형이 동고서저, 즉 서쪽에 평야가 모여있고 동쪽에 산악이 집중되어 있기에 동서쪽의 거리는 멀게 느껴지고 남북쪽의 거리는 가깝게 느껴졌을 것이다. 어쨌든 지도의 정확성 여부를 떠나 지리지에 지도를 첨부한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편집이었다.
동국통감은 성종의 명에 따라 서거정 등이 신라 초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편찬한 사서로 총 56권 28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의 편찬 사업은 1458년 세조에 의해 시작되어 1476년 성종 대에 와서 고대사부분이 완성되었다. 이 고대사 부분은 삼국사절요라는 이름으로 따로 간행되었으며, 이후1484년에 고려사를 완성해 동국통감으로 합본되었다. 하지만 이 책은 현재 남아 있지 않고 1485년에 성종과 사림 세력이 중심이 되어 개찬한 동국통감만 남아 있다. 이 책의 편찬 사업에 대한 세조의 원래 의도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권근의 동국사략으로 대표되는 고대사 관련 사서에 탈락된 것이 많아 보완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삼국사절요는 세조 때 이미 골격이 형성된 고대사 부분을 다시 손질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삼국사절요는 원래 신숙주가 거의 완성했으나 그가 미처 완성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노사신을 주축으로 하여 서거정, 이파, 김계창, 최숙정 등이 완성시킨 것이다. 그 명칭으로 보아 고려사절요와 연결시키려 했던 것으로 짐작되며, 이 속에는 삼국사기에서 누락된 많은 설화와 전설을 삼국유사, 수이전, 동국이상국집 등에서 채록하고 동국사략의사론을 수록하였다.
동국통감은 편년체로 되어 있으며, 단군조선에서 삼한까지를 외기, 삼국의 건국으로부터 신라 문무왕 9년(669년)까지를 삼국기, 669년에서 고려 태조 18년(935년)까지를 신라기, 그 이후부터 1392년까지를 고려기로 편찬하고 있다. 삼국 이전을 외기로 처리한 것은 자료가 부족해 체계적인 왕조사를 서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신라기를 독립시킨 것은 신라통일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함이었다.
동국통감의 사론이 지나치게 성리학적 관점에 치우쳐 있다는 것은 한계로 지적된다.
동도서기론은 개화사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는데, 두 사상은 노선과 방법에서는 차이가 있었으나, 모두 부국강병과 근대화를 통하여 국가독립을 확보함으로써 국내외의 위기를 타개하여 보려는 목표를 추구하였다.
동도서기론은 유교적 질서(東道)를 지키는 가운데 서양의 우수한 군사·과학기술(西器)을 수용하고자 하는 것으로, 도(道)에 비중을 두었으므로 기존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적인 성격을 띠었다.
삼국사절요는 세조 때 골격이 잡힌 것이지만 세조가 의도하던 역사책과는 성격이 다른 책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이전의 사서들이 신라 중심의 서술을 하고 있는 것에 비해 삼국을 대등한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성종실록은 총 297권 150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469년 11월부터 1494년 12월까지 성종 재위 25년 동안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성종 사후 4개월 뒤인 1495년 4월(연산군 즉위년) 영의정 노사신 등의 건의에 따라 춘추관 안에 실록청을 설치하고 편찬 작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편찬 과정에서 성종 대에 사관을 지낸 김일손이 제출한 사초에서 세조가 단종을 폐하고 왕위를 찬탈한 사실을 비난하며 은근히 단종을 추모한 조의제문과 이극돈이 정희왕후 상중에 기생들과 놀아난 내용을 비판한 화술주시가 실려 있는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가 발생했다. 조의제문과 화술주지는 김종직의 글로서 이를 사초에 실은 김일손은 그의 제자였다. 이 때문에 김종직 문하생이 중심이 된 사림 세력들이 일거에 숙청당하는 사화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오사화가 일어나기는 했지만 실록 편찬 작업에 별다른 지장을 초래하지 않아 작업 시작 4년 만인 1499년 3월 인쇄를 완료하여 네 곳의 사고에 나누어 봉안되었다. 실록 편찬 작업에는 영의정 신승선과 우의정 성준이 총재관을, 지관사 이극돈과 안침 등 15인이 실록청 당상을 맡았고, 그 외 74인이 실록청 낭청이 되어 실무를 담당하였다.
세계 최대의 단일왕조 역사서인 조선왕조실록은 1413년(태종 13년)에 태조실록을 시작으로 25대 임금인 철종 시대를 적은 실록이 1865년(고종 2년)에 편찬됐으니 427년이라는 시간 동안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소학은 경신(敬身)이라고 하는 정신과 행위의 함양을 통해서 인격의 완성자인 성인군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한 수신을 위한 책이다.
소학은 군현마다 상설되어 있는 향교나 서울의 성균관 같은 정부교육기관에서 필수적인 교과서로 쓰여졌다.
소학은 수신과 위기지학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권력의 부정과 비리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사림파 학자들의 정치, 사상 성향에 부합하는 점이 많았다. 삼강행실, 이륜행실, 주자가례와 같은 책을 널리 보급한 것도 유교적 도덕이념을 확산시키려 한 조처로서 소학의 보급과 그 맥락을 같이하였다.
소학은 윗사람에 대한 아랫사람의 무한정한 헌신을 요구하는 윤리적인 지침을 담고 있다.
소학은 조광조의 스승인 김굉필에 의해 적극 수용되었다. 김굉필은 업문(문장에 힘씀)으로는 천기(天機)를 알 수 없었는데 소학에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할 정도로 소학 예찬론자였다.
악학궤범은 1493년 성종의 명에 의해 예조판서 성현, 장악원제조 유자광, 악원주 신말평전악 박곤, 김복근 등이 편찬하였는데, 당시 장악원에 있던 의궤와 악보가 너무 오래되어 헐었을 뿐만 아니라 요행히 남은 것은 모두 잘못되어 있어 새로운 악규집을 편찬한다는 취지에서 작업이 이루어졌다.
악학궤범은 조선시대의 의궤와 악보를 정리하여 성현 등이 편찬한 악서이다. 총 9권 3책으로 되어있으며 내용이 치밀하고 정확하여 조선 초기의 음악 전반을 자세히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책이다.
악한궤범의 수록 내용을 살펴보면 1권에서는 음조를 60가지로 나눈 60조도의 세부적인 사항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궁, 상, 각, 치, 우의 오성의 높이를 한정짓는 오성도설이나 연향에 쓰이는 당악의 28조를 악서에서 인용하여 5음 12율로 설명한 오음율려 28조도설 등이 독특한 일면으로 평가되고 있다. 2권은 아악진설도설과 속악진설도설을 설명한 것으로당시 사용되던 제악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설명하고 있으며, 3권은 당악과 속악을 설명하고 있고, 4권에서는 성종 대의 당악을 일괄시킨 당악정재도의 설명하고 있다. 5권은 주로 향악을 다루고 있어 속악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처용가, 동동, 정읍 등을 수록하고 있다. 6권에는 아부악기도설을, 7권에는 당부악기도설을 싣고 있는데 악기의 전체 모양을 그림으로 볼 수 있어 당시 악기를 재현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8권의 당악정재의물도설은 당악정재에 쓰이는 복장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그 부분부분의 치수까지 기록하고 있어 당악에 사용되는 의상 복원을 가능케 하고 있으며, 양악정재악기도설은 당시에 사용하던 악기에 대한 그림, 악기에 쓰인 재료, 치수 등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악기를 복원할 수 있도록 해준다. 마지막 9권의 관복도설은 악공들의 관복을 복원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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