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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농촌계몽운동을 배경으로 한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산실, 당진 필경사를 아시나요?
1930년대 일제치하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하던 청년들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짧은 기간에 장편소설로 승화했던 심훈의 <상록수> 배경이 어딘지 아세요?
나는 안산에 있는 상록수역 근처와 군포시에 있는 둔대교회라고 알고 있었다.
<상록수>는 심훈 선생이 당진 필경사에서 집필했다는 사실을 새로 알았다.
당진 농업기술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고품질 쌀 특성화사업 워크숍까지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암울했던 시대 농촌계몽운동의 촉매가 되었던 농촌소설 상록수가
쓰여졌던 곳이 당진 송악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기어코 현장을 확인하고 왔다.
서해안고속도로 송악IC로 나가 5분쯤 한진포구 근처에 필경사 표지판이 나온다.
표지판을 따라 좁은 시골길로 들어가면 상록초등학교가 나오고 상록수교회를
지나면, 아늑한 솔숲이 있고 거기에 "나의 강산이여(1926년 5월)" 시비가 있다.
심훈 가족이 살던 집이 근처에 있고, 대숲을 배경으로 아담한 필경사가 나온다.
여기에서 선각자는 <직녀성> <상록수> 등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남겼다.
심훈 선생은 서울에서 기자생활과 시인, 소설가, 영화인 등 다양한 활동을 하다
출판금지 등 여러가지 쓴맛을 보고, 32세의 젊은 나이에 이곳 농촌으로 내려왔다.
붓으로 땅을 일군다는 뜻으로 '필경사'를 짓고 농촌계몽활동을 하던 친지를 모델로
상록수를 써 사실주의에 입각한 농민문학의 장르를 개척한 작가의 숨결을 느낀다.
심훈 선생이 서울에서 당진으로 내려와 농촌에 살면서
농촌계몽소설 <상록수>를 집필했던 초막집 필경사
민족의식과 계급적 저항의식을 지닌 소설가 심훈 선생이 살았던 '필경사' 내력
[(조국이 해방되는) 그날이 오면...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2001년 심 훈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당진군 출신의 조각가가
사철 푸른 상록수를 상징해 무쇠로 만든 조각품이 마당에 있다,
"그날 쇠가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 오라"
철판에서 상록수를 상징하는 모형을 도려낸 자리에 잔디를 심어
상록수의 그림자가 푸르름으로 계속 솟아나도록 형상화했다.
심훈 선생의 얼굴이 새겨진 조각의 뒷면에 새겨진 글
"내가 화가가 된다면... 반 고흐의 필력을 빌어 뭉툭하고 굵다란 선이 살아서
용같이 꿈틀거리는... 나와 내 친구의 얼굴을 그리고 싶소. 1932. 10. 8. 심훈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어 초가흙집으로 남아있는 필경사,
농촌 한가운데 조그만 초막에서 <상록수>가 탄생했다.
심훈 선생이 등잔을 켜고 '상록수'를 집필하던 자리에 앉아...
인고의 세월을 보내며 꼿꼿한 정신으로 집필활동에 몰두하다.
원고지에 펜으로 썼던 심훈 선생의 육필 원고
복사기도 없던 시절 선생은 꼼꼼하게 필사해 원고가 남아있다고 한다.
집필실에 남아있는 대백과사전 전질
인터넷도 없던 시절 농촌에 박혀 집필하는 작가에게 백과사전은...
선생이 숙식을 하며 생활하던 공간
신발장에는 흰고무신과 검정고무신이...
어린시설 농촌생활의 추억이 묻어난다.
필경사 내부 벽틈에 걸려있는 호롱을 보니 아련한 옛생각이...
불같은 열정의 훈남이었던 심훈 선생에 대해 설명해주는 김수옥 문화해설사
심훈이 상록수를 집필했던 당진 필경사 (筆耕舍, 충남 지정문화재 제107호)
서해안고속도로 서해대교 완공 이후 수도권에서 손쉽게 다녀올 수 있는 문학유적지가 바로 심훈 문학의 산실인 '필경사'이다. 서해안고속도로의 송악 나들목을 빠져나온 뒤, 고대부곡공단 방면으로 가다 한진나루에 닿기 직전 상록초등학교와 상록수교회를 지나면, '필경사'라는 안내판을 만나게 된다. 논밭사이로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길을 따라가면, 필경사 주차장에 닿는다. 이곳에 바로 그 유명한 소설 <상록수>의 작가 심훈 선생이 살며 집필하던 집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필경사 건물은 남남동향에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바로 앞에는 상록수문화관 건물이 들어 서 있다. 문화관 뜰에 서면 아산만의 물결과 서해대교가 한눈에 잡힌다. 상록수문화관에 심훈 선생의 일대기가 간략히 정리되어 있고, 동영상과 함께 문화해설사의 안내도 받을 수 있다. 필경사 오른쪽에 심훈이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가 있고, 뒤로는 대숲이 우거져 바람이 불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를 낸다. 여행자들은 심훈 고택과 문화관을 둘러보며 상록수의 스토리를 자연스레 연상한다.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과 박동혁이 이 마을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폈었나? 그러나 채영신의 모델이 되었던 최영신은 경기도 반월 샘골마을에서 농촌운동을 하던 여인이고, 박동혁은 심훈의 조카로 역시 농촌운동을 하던 심재영의 소설 속 인물로 두 사람은 실제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어쨌든 최영신의 고향에는 수도권전철 상록수역이 세워져 있고, 이곳 심재영의 고향에는 상록초등학교와 상록수교회가 서 있어 두 사람의 소설속 행로가 완전히 허구의 산물만은 아니었음을 느끼게 한다.
항일 저항시인이요 소설가로서 계몽문학의 선구자였던 심훈(1901~1936) 선생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생활을 거쳐 영화 시나리오 집필과 영화 <장한몽>에 주연으로 직접 출연하며 열정적으로 활동하다, 1932년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부친이 살고 있는 이곳으로 내려와 우리 문학사에 빛나는 <직녀성> <영원의 미소> <상록수> 등을 집필하였다. 1934년 집안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직녀성> 소설공모 상금으로 받은 돈으로 직접 설계하고 지은 집이 바로 필경사이다.
심훈 선생은 1935년 이 집에서 대표적 농촌소설인 상록수를 집필했다. 필경사는 한 때 그의 장조카인 고 심재영 옹이 관리하다 당진군에 기부한 이후 군에서 관리를 하고 있다. 마당에 있는 시비는 1996년 문학의 해를 맞아 선생의 높은 업적을 기리고자 한국문인협회가 현대문학 표징사업의 일환으로 세운 것이다. 비에는 조국의 해방을 염원하던 <그날이 오면> 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어 생전의 심훈선생 음성을 듣는 듯하다.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 끊치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중략)... /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한국관광공사 여행정보]를 참고하여 살을 붙임.
[상록수문화관]을 둘러보니...
필경사 오른쪽에 세워진 상록수문화관
[심훈 선생의 약력]
1901년 9월 서울 노량진에서 심상정의 3남으로 출생(본명 심대섭)
경성고보(경기고) 졸업, 3.1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 치름.
1921년 중국 북경, 상해, 남경을 거쳐 지강대학 국문학부에 입학,
1924년 동아일보, 1928년 조선일보, 1931년 경성방송국 기자생활
1932년 당진 송악면 부곡리에 정착 <직녀성> <상록수> 등 집필,
1936년 손기정 선수 마라톤 우승소식 듣고 "오오 조선의 남아여!",
1936년 9월 <상록수> 간행 위해 상경, 원고교열하다 병으로 사망
선생의 중국유학과 귀국, 문예활동
[신문예] 잡지 창간, [극문회] 창립
3.1운동으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어머니께 올린 글
영화에도 관심이 많았던 심훈은 시나리오를 쓰기도 하고
영화 <장한몽>에 직접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젊은 나이에 요절한 심훈 선생의 작품세계를 설명듣고 있다.
1932-33년경 문인활동을 했던 동료들과 당진에 내려왔던 모습들
심훈 선생의 작품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 우승을 차지한 쾌거를 듣고
"오오, 조선의 남아여!" 이겼다는 소식을 전해준 그대에게 감격을...
심훈의 농촌계몽소설 <상록수>와 사후에 출간된 시집 <그날이 오면>
서울 교동초등학교와 당진 상록초등학교, 남산공원 등 곳곳에 세워진 심훈 기념비와
심훈 선생의 정신을 계승코자 1977년부터 매년 10월 중에 개최되는 상록문화제
심훈 선생의 아버지가 살았던 집 근처 솔숲에 있는 "나의 강산이여" 시비
"... 목멱의 등어리는 젖 물고 어루만지던 어머니의 허리와 같고,
삼각산은 적의 앞에 뽑아든 칼끝처럼 한번만 지르면 먹장구름
살아질 듯이 아직도 네 기상이 늠름하구나" 1926년 5월 심훈
소설 <상록수>의 배경 마을에 있는 상록수교회
상록초등학교, 1930년부터 야학을 시작하여 1935년 상록수가 동아일보 공모에 당선되어
탄 상금 중 100원(당시 쌀 10가마 값)을 희사하여 야학당(상록학원)을 신축하였다.
1958년 한진국민학교가 되었다가, 심훈의 뜻을 기리며 상록초등학교로 개명하였다.
* 필경사란 이름은 1930년 <그날이 오면> 제목의 시집을 내려다 일제의 검열에 걸려 못냈는데,
그 시집 원고 중에 붓으로 땅을 가꾼다는 "필경"이란 시의 제목에서 딴 것이라고 한다.
- 심 훈(1930) -
우리의 붓끝은 날마다 흰 종이 위를 갈(耕)며 나간다.
한 자루의 붓, 그것은 우리의 쟁기요, 유일한 연장이다.
거치른 산기슭에 한 이랑의 火田(화전)을 일려면
돌부리와 나무 등걸에 호미 끝이 부러지듯이
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번이나 꺾였었던고?
그러나 파랗고 빨간 잉크는 정맥과 동맥의 피
최후의 한 방울까지 종이 위에 그 피를 뿌릴 뿐이다.
비바람이 험궂다고 역사의 바퀴가 逆轉(역전)할 것인가.
同志(동지)여, 우리는 退却(퇴각)을 모르는 前衛(전위)의 투사다.
「剝奪(박탈)」「餓死(아사)」「飮毒(음독)」「自殺(자살)」의 經過報告(경과보고)가 우리의 밥벌이냐?
「俄然活動(아연활동)」「檢擧(검거)」「送局(송국)」「判決言渡(판결언도)」「5年」「10年」의
스코어를 적는 것이 하고 한날의 職責(직책)이란 말이냐?
槍(창)끝 같이 鐵筆(철필)촉을 베려 暗黑面(암흑면)을 파헤치자.
샅샅이 파헤쳐 온갖 罪惡(죄악)을 자서 白晝(백주)에 폭로하자.
스위치를 제쳤느냐, 輪轉機(윤전기)가 돌아가느냐?
깊은 밤 猛獸(맹수)의 咆哮(포효)와 같은 轟音(굉음)과 함께
한 시간에도 몇 만장이나 박아 돌리는 活字(활자)의 위력은
민중의 맥박을 이어주는 우리의 혈압이다.
오오 붓을 잡은 者(자)여 위대한 心臟(심장)의 把守兵(파수병)이여!
농촌으로 내려오기 전에 기자생활을 할 때 쓴 글인데, 땅을 가꾸는 농사꾼의 심정으로
글 쓰는 사람은 붓대를 꺽지말고 암흑을 파헤치자는 비장한 각오가 느껴지는 글이다.
* 상록수 여주인공 채영신 관련기사(둔대교회) 참조 http://blog.daum.net/psp727/7713948
언제 시간 내서 주말 나들이로 한진포구와 곁드려 농촌에 한번 다녀오시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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