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정황은 정성공이 남경 대패 이후로 대만에 진지한 관심을 가진다고 보이고 있습니다. 다만 VOC는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정성공이 중국 본토에서 내몰릴 경우 올 곳은 대만 밖에 없다는것을 알고 있었으며, 유능한 인물인 코예트를 대만총독에 임명하는등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그들이 신임하는 중국인 통역인 하빈(何斌)이라는 인물을 정성공이 있는 하문에 보냈습니다. 하빈은 정지룡의 시대부터 정씨 가문과 친분을 유지하던 인물이었습니다.
1650년대 무렵에 하빈은 정성공이 대만을 노리고 있지 않다고 말했고, 거짓말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정성공은 중국 본토 공략을 준비하며 모든 신경을 쏟아붙고 있었기에 대만 정도에 여력을 낭비할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 정성공은 하빈에게 대만에서 머물면서 오고가는 선박들에 대해 통행료를 걷게 했는데, 이는 네덜란드 인들의 권한과 접촉하는 부분이라, 하빈은 문제가 생기기 전에 대만에서 떠나 하문으로 달아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정성공에게 하빈은 네덜란드 인들의 약점을 말해주었으며, 얼마전에 실패로 끝난 곽회일의 봉기를 알려주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대만을 명 왕조 회복을 위한 원거리 거점으로 삼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대만의 약점이라면 중국 본토에서 꽤 떨어져있다는것이었지만, 반대로 이는 중국 본토에서의 공격을 막아주는 방벽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대만 내에서라면 아무런 부담없이 군대를 정비하고 키워 재공격을 준비할수 있었습니다. 그의 부하들 중에는 대만에 정착하는게 아예 중국 본토 공략을 포기하는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여하간에 정성공은 재공격을 위한 발판으로서 대만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이전부터도 준비하고 있었던 정성공의 위협일진데, 막상 그것이 실제로 벌어지게 되었으니 모든 정황이 그 침입을 알려주고 있었을 것입니다. 대만 총독 코예트는 곧 다가올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며, 현지 대만 요새의 방어력에 대해 절망적인 판단을 내렸습니다. 제란디아 요새는 고립된 지점에 위치하여 상대적으로 안전한 편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요새 인근의 민간인 정착촌까지 방어하려면 작은 성벽을 쌓아야 했고, 그러려면 자금이 있어야만 합니다. 코예트의 예상으로는 많이도 필요없고 조금의 자금만 있어도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프로빈샤 요새 인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코예트는 요새가 샤캄 마을의 한 가운데 있기 때문에, 공격을 받으면 방법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바타비아에 있는 본사에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VOC 본사는 당초에는 코예트의 기대에 부흥해주는듯 했습니다. 얀 판 데르 란(Jan van der Laan)이라는 인물을 사령관으로, 12척의 선박과 600명의 병력을 지원해준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대만에 도착한 판 데르 란 함장은 이상한 소리를 했습니다. 이 증원군의 파견 목적은 전혀 다른데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정성공이 대만에 나타나면 우리는 방어에 임할 것이오. 허나, 아무 일도 없다면 우리는 마카오로 가겠소. 모든 것이 명확해져 평화가 유지되고 있다는 판단이 내려질 때까지만, 우리는 대만에 있겠소이다."
레이예르센이 마카오에서 대실패를 경험한지 40년 주년에 가까워졌고, 만주족의 해금령 요구가 모호한(포르투갈 인들은 막대한 뇌물을 주면서 소개령을 피했습니다) 마카오는 예나 지금이나 군침 돋는 지역이었습니다.
일단 판 데르 란이 받은 훈령에 따르면 그는 '본사의 훈령에 위배되지 않는 한' 코예트의 지휘를 받게 되어있었습니다. 하지만 판 데르 란은 마카오를 공략하여 전과를 올릴 생각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이는 그가 인도에서 포르투갈 점령지를 오랜 시기에 걸쳐 약탈했다는 경력에서도 드러납니다. 심지어 그는 대만에 오기전에 마카오에 들러, 포르투갈인들에게 엄포까지 하고 온 바였던 것입니다.
"언제든지 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 선박들이 근해에 나타날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할걸!"
하지만 정작 증원군이 도착헀을때 그들은 항해로 쇠잔한 상태라 대부분 진료소 신세를 졌습니다. 어찌되었건 병력의 숫자는 늘어나 대만에 있는 네덜란드 인들은 힘을 얻었지만, 정작 얼마 안 있어 실망하고 맙니다. 판 데르 란이 너무 혐오스러운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무례하고 허풍쟁이인데다 안하무인에서 대다수 네덜란드 인들은 그를 "왕고집 얀" "돌대가리 얀" 이라고 불렀고, 코예트는 스스로 기록하길 "이솝 우화에 나오는 돼지만큼이나 공무와 치안 문제에 약삭 빠른 자." 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런 현지 네덜란드 인들을 판 데르 란은 터무니 없이 무시하며, 하루 빨리 이런 촌동네를 떠나 마카오에서 빛나는 대승리를 거둘 생각에 부풀어있었습니다. 여러 보고들이 정성공의 위협을 경고했지만 그는 늙은 시아버지의 숨넘어가는 잔소리 정도로 정도로 생각했고, 여러 소문도 무시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만약에 정말로 정성공이 쳐들어올 경우에 대해서는 이렇게까지 말했습니다.
"중국인들이야 아녀자와 같아 나약하기 짝이 없든 자들인데, 제 아무리 날고 뛴다 해봐야 내 상대야 못 되지!"
코예트는 이 터무니없는 인물에 대해, 자신은 이곳에서 10년을 지냈고 판 데르 란은 이제 겨우 2주일 뿐이며, 경험은 비교조차 할 수 없고 대만의 중국인들도 앞으로 닥칠 무언가를 대비하고 있다는 점을 환기시키려 애썼습니다. 만약 이 스스로 용맹무쌍하다고 자부하는 전사가 대만의 네덜란드 병력 절반을 이끌고 마카오로 떠나버린다면, 수만이 넘을 정성공 부대에 대해 대만을 수호할 병사들은 닭 모가지 비틀 힘도 없을 나약한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코예트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 이 부분이었습니다.
한편, 코예트는 다른 방법으로 사신을 정성공에 파견하여 불만을 늘어놓았습니다. 사신은 또한 정씨 가문을 염탐하여 대체 그들이 무슨 꿍꿍이인지 알아보는 임무도 맡았는데, 하문에 도착한 사신이 본것은 마치 곧 전쟁이 날 것처럼 훈령 중인 병사와 출항 준비 중인 선박, 대규모 군사 준비를 위한 군수품이 산더미처럼 선적되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정성공은 넋을 놓고 있는 사신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네덜란드인들에게 나쁜 일을 행할 의도 따윈 전혀 없다오."
"콕싱가(Koxinga)께서 대만을 침공할 계획이 아니시라면, 저건 다 무엇입니까?"
"나는 마음에 생각한 것을 입 밖에 내지 않는 사람이오. 이것을 가져가시오."
사신은 서한 한 통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귀국 네덜란드에 대한 우리의 각별한 선의와 충정을 표한다." 라고 시작하는 문서는, 곧 코예트에게 "많은 허위를 보고 믿고 있다." 고 질책하며 코예트가 "사악한 자들"의 험담에 넘어가 그 소리를 곧이곧대로 믿고 있으며, 일전에도 우리 명의 유신 세력이 대만을 공격하려 한다는 뜬소문이야 많았지만 실제로 그런적이 있던가 하고 강조했습니다. 정성공은 이때 느닷없이 정지룡의 이야기도 언급했습니다.
"당시 이 섬을 지배하시던 나의 아버지께서 교역 활동을 개설하고 성공적으로 관리하셨소."
이런 식으로 그는 현재 VOC가 그 자리에 있는것은 정지룡이 방임한 덕분이라는 식으로 환기를 시키고, 선심을 쓰듯이 말했습니다.
"과연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내 영토 수복을 위해 전쟁을 벌이고, 그에 전적으로 전념하다보니……저 작고 초목이 우거진(대만)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기회를 할 기회조차 없지 않았소. 더욱이 전쟁 준비에 착수하여 전열을 갖추고 나면, 내가 동쪽을 도모하고자 한다고 소문은 날 테지만, 기실 나의 속 뜻은 서쪽을 향하는데 있소."
교활한 소리였습니다. 모든 정황이 그가 동쪽을 노린다는것을 알리고 있었지만, 정성공은 이는 기만책일뿐이며 서쪽으로 가겠다고 말한것입니다. 그러는 한편 중국인 갖바치 한명이 VOC의 배를 타서 대만에 도착하더니, 자신이 하빈을 만나보았고, 현재 하빈이 제란디의 성 주변의 물 흐름을 잘 아는 도선사(導船士)를 300여명이나 고용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300명의 도선사라면 그들이 안내하는 함대의 병력만 해도 기본이 수천은 넘을 것입니다.
이 시점에 이르자 코예트는 정성공의 공격을 전혀 의심없이 확신하게 되었고, 짜증나는 인물인 판 데르 란에게는 합리적인 판단을 하라고 촉구했습니다. 또한 대만에 주둔한 병사들의 복무 기간이 연장되었고 사람들은 포위 공격에 대비해 물자를 저축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정성공의 위협에 눈 앞에 다가와 분위기가 뒤숭숭했던 탓인지 묘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섬에 몇 차례 지진이 벌어지는가 하면, 여진이 열흘이 넘게 계속되고, 바다에서 인어가 헤험치며 노는 모습을 봤다는 사람들이 나오고, 무기고 안에서 칼들이 부딫히고 대포가 쏘아지는 소리가 들려 확인해보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코예트는 이 모두를 허황된 이야기라고 말했지만, 정작 그런 그도 자신의 기록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저 처형장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참한 소리가 들려오는데, 중국인들 목소리는 확실이 아니다. 네덜란드 사람의 목소리다."
그런 소란 마저도 짜증스러워했던 판 데르 란은 곧 코예트와 격한 말싸움을 하며 다툼을 일삼았습니다. 사실 그가 이렇게까지 비 협조적으로 나온데는 어느 정도 이유가 있었는데, 그가 위풍당당하게 대만에 들어설 무렵, 총독이 부두에 나와 환영하지 않고 총독 관저에 이를때 의장병들이 영접조차 안했던것에 모욕을 느꼈던 것입니다.
1661년 2월, 단단히 화가 난 판 데르 란은 바타비아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는 코예트를 바보로 만들고 마카오 공격에 주력할 작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우연인지 계획인지 정성공은 바로 이때 움직임을 취했습니다.
부하들을 소집한 정성공은 회의를 열면서, 만주족의 위협은 목전에 와 있으며 아군은 새로운 작전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고 공식적으로 언급했습니다.
"재작년이 하빈이 우리에게 와 대만의 풍부한 조건에 대해 논하기를, 수천만 평의 전답에 수천 리의 미개간지가 있고, 수십만 냥의 세금이 나온다고 했소. 그곳에서 우리 직인들은 배를 건조하고 무기를 생산할 기회를 넉넉히 얻게 될 것이외다. 근자에 붉은 머리를 한 오랑캐들이 그곳을 차지하고 있지만, 숫자야 수천에 불과할 뿐이지 않는가. 우리는 그곳을 얻기 위해 온 힘을 쏟을 필요는 없소. 내가 원하는 것은, 대만을 거점으로 확보하고 뭇 장수들의 가족이 옮겨가서, 후방의 안녕에 대해 우려하는 일 없이 동쪽을 응징하고 서쪽에 죄를 물을 수 있게 되는 것이오."
장수들의 반응은 다양했는데, 대부분 좀 머뭇머숫하는 쪽이었습니다. 혹자는 만약 대만에 집중하다보면 결국 명나라 유신들인 그들의 진정한 목표는 멀어질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했으며, 어떤 장수는 네덜란드인들의 대포가 중국인들의 그 어떤 대포보다도 강력하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해상 활동에 참가했던 인물이 아닌 본토 깊숙한 곳 출신의 장수들은 신경질적으로 대응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정성공은 '선포' 를 하는것이었고, 논쟁을 할 기분은 아니었습니다. 한 장수가 대만에 풍토병이 만연하고 땅이 척바하고 풍수도 나쁜 땅이라고 말하자, 정성공은 그가 하극상을 벌인다고 비난했습니다. 장수들도 눈치를 채고 자신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대만 공격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준비가 공식적으로 시작되면서, 정성공은 자신을 지원할 인물로 정지룡이 양아들로 고른 정태를 선택했습니다. 정태는 정씨 가문의 재정을 총괄하는 직을 맡아, 대만해협을 횡단하는 보급로를 유지하라는 명을 받고 남게 되었습니다. 다만 대다수 정씨 가문은 대만 공격에 대해 드러내놓고 반대는 안해도, 대부분은 장수들의 우려와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들로서는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요새를 유지하는 편이 더 좋았을 것입니다.
정성공의 원정군은 무려 900척이나 되는 함선이 25,000명이나 되는 엄청난 대부대였습니다. 통솔을 맡은 장수는 북벌 싸움에서 용맹을 보여준 주전빈과 마신이 맡았습니다. 1661년 4월 21일, 정지룡이 30년 전 VOC의 한스 푸트만스를 물리쳤던 그곳에 모인 함대는 순조롭게 진군을 시작했습니다.
팽호열도 안쪽에 이르기까지 함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폭풍우가 바다를 가로지르자 부대는 팽호 열도에 발이 묶이고 말았고, 곧 문제점들이 노출되기 시작합니다. 원정대는 보급품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만과는 이틀거리 밖에 나질 않기도 했고, 현지 중국인들이 자신들을 도와줄 것이라 여겼던것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4월 26일, 정성공은 어쩔 수 없이 병사들을 팽호 열도에 풀었습니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였는데, 팽호 열도도 그리 넉넉한 곳이 아니라 병사들은 현지 주민들에게 거의 구걸하여 아주 약간의 식량만 가져왔을 뿐입니다.
제대로 된 싸움도 하지 않고 실패를 겪는것, 그것에 정성공은 진저리가 난 상태였고 바다가 어쩌던 간에 정성공은 출항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만 해협을 곧바로 횡단하자면 북부 계절풍을 타야 했는데, 너무 늦어지면 오도가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성공 부하 장수들은 자연스레 양산에서 입었던 그 끔찍한 재난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조금만 기다려보자고 간청했지만, 정성공은 이미 대만 공격에 대해 강박 관념에 가까운 감정이 생긴 뒤입니다. 그는 자신을 지켜준다는 수호신 마조를 극한까지 몰아부치고 있었습니다.
이 당시에, 정성공이 바다에 화포를 쏘라고 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습니다.
"우리가 얼음 위를 걸을 수 있을까? 그렇다. 하늘의 뜻이 그리한다면 가능하다. 우리가 대만을 정복하는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오늘밤 우리가 출항한 후에 바람과 파도는 잠잠해질 테지. 여기서 주저 앉아 섬들 사이에서 굶고 있을 것이 아니다."
폭풍우가 치는 한밤중, 원정 함대는 쏟아지는 빗줄기와 미친듯이 요동치는 심연의 파도 속으로 자진하여 들어갔습니다. 무모한 객기인지, 영웅적인 용기의 발현인지, 몇시간 동안 칠흑같은 어둠속을 공포스런 파도 속에서 버티고 있자, 폭풍우가 완전히 그쳤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아 오르자,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육지가 보였습니다. 대만 해안에 도달한 것입니다.
해안을 바라보면서, 정성공은 부하들에게 말했습니다.
"하늘이 나를 아직은 저버리시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하늘은 버림 받아 홀로 된 자를 가엾게 여기시고 나를 이곳 안식처로 이끌어 주셨구나."
네덜란드 사람들은 바윗돌을 가득 채운 낡은 배 여러 척을 대만만으로 들어오는 수로에 침몰시켜 놓았는데, 이 수로는 매월 음력 초삼일 만조 때가 되면 평상시보다 60cm 이상 높아집니다. 그리고 정성공은 이미 하빈을 이용해서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별다른 문제없이 접근 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훗날 덧붙여졌을 이야기들에서는 정성공이 바다의 여신이자 자신의 수호신인 마조에게 바닷물 수위를 높여주십사 하고 부탁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리고, 제란디아 요새의 성루에서는 한 남자가 고통스런 표정으로 이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코예트였습니다. 그는 이 순간을 예언했고, 30,000파운드의 화약과 6개월의 식량을 준비시켜 놓았습니다. 하지만 천명이 넘는 네덜란드 인들을 지켜야할 그에게는, 전투를 경험한 인원이 고작 40여명 밖에 없었습니다. 판 데르 란이 떠나는 통에, 남은 전함은 헥토르(Hector) 호, 스흐라벤란데('s Gravenlande) 호 2척과 빈크(Vink) 호와 마리아(Maria) 호 소형 선박 2척 뿐이었습니다.
첫댓글 빠른 업데이트 감사합니다 (__)
흐음 바타비아는 지켜냈지만 대만은 지켜내지 못한거군요.......
지금까지 너무 젬있게 보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