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엄주력 수행기
우룡큰스님(울산 학성선원 조실)
해인사 강원에 있을 때 6.25 사변을 맞았습니다.
빨치산의 점령으로 해인사에도 큰 사건이 생겼고 은사이신
고봉(高峰)스님도 모함을 받아 수난을 당하는 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여러 고비를 넘기며 마무리를 다한 다음, 나는 오대산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전란때문에 오대산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청화 보경사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나는 보경사 서운암에서 능엄주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스님들이 아침 시간에 지금 많이 불자들이 하고 있는
능엄경의 대능엄주를 하지 않고, 대능엄주의 마지막 부분의
70여자로 된 아주 짧은 것을 외웠습니다.
이 능엄주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무 대불정여래 밀인 수증요의 제보살만행 수능엄신주
(南無 大佛頂如來 密因 修證了義 諸菩薩萬行 首능嚴神呪)
다냐타 옴 아나례 비사제 비라 바아라 다리 반다
반다니 바아라 바니반 호움 다로옹박 사바하
나도 백일을 목표로 이 능엄주 기도를 하기로 했습니다. 식사는 일체의 부식없이
소금간만으로 밥을 먹었는데, 한 2주쯤 지나니 밥 생각만 하여도 구역질이 날 정
도였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의 백일기도였으므로 신체적으로 너무 무리를 주는 것은 좋지 않
겠다고 판단하여 법당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하루 8시간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주로 보행을 하면서 능엄주를 마음에서 놓치지 않으려고 꾸
준히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60일을 넘기고 70일쯤 되었을 때부터 심한 장난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새
벽녘이 되어 눈을 뜨면 '오늘 몇시에 어디에 사는 누가 온다'라는 생각이 드는데 정
말 그때가 되면 그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며칠이 더 지나자 가만히 방에 앉아 이십리 삼십리 밖의 신도들 집이 다 보이는 것
입니다. 공부가 완전히 마무리 단계에서 생긴 일이 아니라, 공부를 지어가는 과정
에 이 장난이 붙은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생각만 일으키면 내 눈 앞의 텔레비젼을 보듯이 동네의 모든 집
이 보이고,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도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밥상위의 반찬이 무엇이
며, 어떻게 하루를 보내고 있는 지가 낱낱이 보였습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어느날 아침, 어머니가 아이와 다투는 것이 다 보이고 다 들
렸습니다. 아이가 말했습니다.
"엄마, 오늘까지 월사금을 가져가지 않으면 선생님이 혼을 낸댔어. 빨리 줘."
"오늘 구해 놓을테니 내일 가져가거라."
"오늘 가져가지 않으면 혼나. 학교가지 않을거야."
"그러지 말고 가거라."
"싫어"
"이 놈의 자식이!"
이렇게 모든 내용이 생생하게 보이고 표정까지 또렷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더 이
상한 것은 어떤 사람이 내 앞에 서면 그 사람의 몸이 마치 투명체처럼 다 들여다 보
이고, 뼈마디 마디가 그대로 보였습니다.
그 사람은 아직 아무것도 못 느끼고 있건만 병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까지 진행
되었으며, 얼마후면 어느 자리에서 어떻게 아픈 상태가 벌어진다는 것이 내 눈에는
다 읽혀졌습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아픈 사람에게 내 생각대로 앞에 있는 나뭇가지를 하나 꺽어주
면서 '이것을 씹어서 잡수시라'든지, 이파리를 따서 '이걸 달여 먹으면 낫는다'고
하면, 약도 아닌데 분명히 그 사람의 병이 낫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기 짝이 없는 그와 같은 장난이 붙는 시간이 이어지자, 호기심이 자
주 일어나, 마지막 20여일은 기도를 하였으나 제대로 기도에 집중을 하지 않고 보
내게 되었습니다.
그 뒤 그 해 겨울을 보경사에서 나고, 이듬해에 덕숭산 정혜사로 갔습니다. 그곳에
는 도를 깨달은 금봉(錦峰) 노스님이 계셨고, 그때 나는 '도인이라 하고 도를 통한
다고 하는 것이 내가 체험한 것인가?'하는 헛생각이 들어, 그 일들을 노스님께 자
랑처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금봉스님은 대뜸 호통부터 치셨습니다.
"이 죽을 놈! 마구니의 자식새끼! 중노릇을 한게 아니고 마구니 노릇을 했구나. 너
같은 놈은 당장 죽여버려야 된다. 너 같은 놈을 살려놓으면 여러 사람을 망쳐 놓는
다. 당장 주문을 버리든지 이 자리에서 죽든지 택해라."
그리고 스님게서는 일체 바깥 출입을 금하셨고, 곁에 두고, '아무 것도 하지 말
라'고 하셨습니다. 나 또한 의식적으로 능엄주를 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
데도 나는 무의식 중에 능엄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가끔 노스님께서 "지금 뭐하노?"하시면, 깜짝 놀라며 "아무 것도 안합니다."고 답하
였지만, 나도 모르게 능엄주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금
봉 노스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참말로 아무 것도 안하나? 그거 뗄려면 죽기보다 힘이 더 들거다."
정말 그랬습니다. 막상 눈 앞에서 전개되는 신통한 일에 호기심이 붙고 재미가 붙
은 상태에서는 뗄려고 해도 참으로 떼기가 힘들었습니다. 노스님의 '죽기보다 더
힘들거다" 하시는 말씀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어른들께 자주 물어라
그러므로 일단 공부길에 들어서면 눈밝은 어른들께 자주 물어야지 멋대로 공부를
지어나가서는 안됩니다.
나 자신을 뒤돌아보면, 지나간 시간에 정법(正法)과 깊은 연(緣)이 있었든지, 전혀
엉뚱한 쪽으로 가지 않고 바른 수행의 길로 계속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 지금 생각
하면 천행처럼 느껴집니다.
또한 어른들께 물을 줄 몰랐던 내가 참으로 어리석었다는 생각도 들고, 곁에 계시
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주의깊게 살펴주셨다면 그와 같은 탈이 없었을 것이라는 아
쉬운 생각도 듭니다.
실로 나는 이때의 여러가지 체험을 통하여, 공부 초기에는 '아는 길도 물어가라'는
말처럼 눈밝은 어른들께 자꾸 물어야 한다는 것과, 어른들 또한 젊은 사람을 관찰
하면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떤 차원까지 갔는가?'를 잘 살펴 다독거려 주
셔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나는 근래에 와서 신도님이나 초심자들에게 자주 부탁을 드립니다.
"공부 자리가 완전히 잡힐 때까지 될 수 있으면 어른들에게 자주 물어라. 자주 물어
야 길을 그르치지 않는다. 잘못하면 길을 그르치게 된다."
나 또한 내가 체험한 몇 가지를 어른들께 말씀드렸더니, "식광(識光)까지는 체험했
구나. 분명히 식광은 쳐다봤다."라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식광이라는 그 자체가 아
직까지 공부 중간입니다. 미처 공부의 한 70%정도도 못간 고비에서 겪는 상태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제6식이라고 하는 의식(意識)이 분명하고 또렷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는 그와 같은 세계를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수행을 하다가 의식이 떨어져 버리는
상태에 이르면 식광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곧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5근(根)과 관련된 전오식(前五識)의 파도를 넘고, 제6
식과 제7식의 파도도 넘고, 제8식의 파도를 넘어가면서 식광의 고비가 터지는 것입
니다.
나의 체험으로 보면, 수행자가 전5식의 파도, 곧 눈 앞의 모든 것이 흔들리는 고비
가 넘어 가고 나면 좀 조용해집니다. 그러다가 다시 제6식의 파도가 나타나고, 그
파도를 극복하고 나면 제7식의 세계가 나타나며, 그때 전생이 보이게 됩니다.
제6식의 파도를 넘어 제7식의 파도에 가면 전생이야기가 눈에 비치고 전생이야기
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7식의 파도를 다 넘어서서 제8식의 파도를 넘
다가 보면 식광의 세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식광의 세계 가지고는 참된 공부가 이루어졌다고 논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
니다. 행과 마음가짐이 점점 더 익숙해져야 합니다. 24시간 언제나 화두나 주력이
나 염불 속에서 마음이 흩어지지 않는 공부를 계속해야 합니다.
주위를 살펴보면 공부를 짓다가 잘못되어 완전히 정신병자처럼 된 스님도 있고, 약
간 정신이 이상해진 언행을 하는 사람도 더러 만납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다 끝까지 도착했다고 큰 소리 치는 분들 중에서도 '아직 멀었습
니다, 스님. 그것 가지고 끝까지 갔다고 자부하면 완전히 옆길로 가버립니다.'라고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말 나는 '칼날이 넘을 아슬아슬한 고비에서 칼날을 넘지 않고 중단했다'는 것으
로도 천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나는 식광의 고비까지 도착하면서 옛 어른들
이 '신통' 이라고 하는 그런 차원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만, 수행과정 중에 생겨나
는 이러한 신통은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물론 부처님 말씀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완전히 익어진 차원에서 나타나는 신통
은 마음대로 부려도 됩니다. 그러나 거기까지 도착을 하면 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겪는 고비는 잘못하면 나를 망치고 남을 망치는 사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꼭 명심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경우를 보면, 그런 고비를 체험하고 그것을 중단은 하였지만, 바로 없
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파가 오랜 시간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나중에 여러 어른들께 내가 체험한 것을 말씀드렸더니, 동산 노스님께서는 "꽁꽁
맺힌 놈"이라 하셨고, 나의 은사이신 고봉 스님은 다른 이야기 없이 "아직 멀었
다"고만 하셨습니다.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노스님은 "그래, 애는 썼는데, 거기에서 막히면 안된다. 그 고
비를 넘기고 가야된다"고 일러주셨습니다.
우리나라 어른들은 공부에 대해 대부분 자상하게 일러주시지 않습니다. "아직 멀었
다" 라는 말로만 표현을 해버리지, 어떻게 어떻게 하라고 일러주지 않습니다.
'철두철미하게 네가 체험해서 가야된다'는 식입니다. 이러한 교계의 풍토가 정말
아쉽습니다. 그리고 내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금봉 노스님 같은 어른을 만났을
때 계속 지도를 받으며 공부를 밀고 나갔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는 것입
니다.
어쨋든 공부는 그 길을 그대로 유지하며 계속 밀고 나가야 합니다. 계속 밀고 나가
야 무엇을 얻든지 어떤 자리까지 도착을 할 수 있지, 중간에 단절을 하면 공부의 향
상이 더 이상 없게 됩니다. 공부하는 이들은 이점을 잘 새겨두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