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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 운
《한강문학》(2018) 시조부문 등단, 평론부문 등단(30호, 2023,신년호), 《한강문학》 편집위원, 한강문학회 총무이사
한자, 한글, 한국어 그리고 한류
문자와 말은 다르다
우리는 많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일반적인 경우, 오류를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이 한자를 볼 때마다, 중국어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한자가 중국어라면, 라틴 문자에서 파생된 영문자, 프랑스 문자, 독일 문자가 로마의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말(언어)은 문자와 음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로간의 소통을 위해 정해진 규율에 따라 발성을 하고 이를 시각적인 부호로 발성된 음성을 표현한 것이 문자이다.
통상 문자가 없는 나라의 사람들에게 편리한 한글을 가르친다고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다. 실상은 그들에게 그들의 말을 표현해서 기록하게 하기 위한 부호로서 즉 문자로서 가르치는 것이다. 그들의 말을 한글이라는 매개체로 가르치고, 표현하고, 다시 그들의 언어로 한글을 읽게 할 뿐이다.
문자가 없는 나라도 많이 존재한다. 동남아시아의 고산족들의 경우는 문자가 없는 경우가 많다. 동남아시아의 고산족 중, 한국어와 흡사한 말을 하는 라흐족, 차카이족 등은 그들의 말은 있지만 문자가 없어서 그들의 역사를 기록으로 전달하지 못하고 구전으로 전설처럼 전달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문자가 없는 종족에게 한글을 보급하려는 노력들을 하고 있다.
즉 문자는 말과 다르다. 즉 한글은 한국어와 다르다. 지금까지는 한국어를 사용하는 집단이 한글을 사용했기 때문에 우리는 한글은 한국어라 생각하지만, 앞으로 다른 종족이 한글을 사용하게 된다면, 한글로 기록한 모든 것이 한국어가 될 수는 없게 된다.
한자는 화족華族의 글자가 아니다
한자는 은허에서 출토된 갑골문에서 유래되었고, 상나라는 자신들은 상나라로 칭했지만 은허 마지막 도읍이 있었기에 주변 나라에서는 은나라라고 지칭한다. 그러나 은나라는 동이족 계열이 세운 나라로 밝혀지고 있다.
초대 문교부 장관인 안호상 박사가 중국의 문호 임어당을 만나서, 여담으로 푸념을 하면서 한국은 중국인들이 만든 한자 때문에 문맹퇴치가 어렵다는 소리를 했다가, 임어당에게 오히려 핀잔을 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히려 중국이 동이족이 만든 한자 때문에 중국에 문맹자가 많다는 것이었다.
한자에서 많은 숫자의 문자는 화족들이 만든 글자가 아닌 것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交’자는 유목민들이 사람들이 둘러앉아서 손을 잡고 있는 형상이고, ‘禮’자는 사당에서 제기 위에 음식을 올려놓은 형상을 문자\화 한 것이며, ‘女’자는 여성이 앉아 있는 형상이다. 화족은 예로부터 의자를 사용하던 사람들이고, 상부의 음식 놓는 부분과 바닥 사이에 가느다란 기둥이 있는 그릇은 한국인만 제사에 사용하는 그릇이다.
또 악어鰐魚의 ‘鰐’자를 보고 한자는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만든 글자라고 주장한 사람도 있을 수 있으나, ‘鰐’자는 적어도 당나라 이후에 만들어진 글자이며 이후 널리 알려진 한자로, 초기의 한자와는 관련이 없는 글자이다. 반면에 ‘鯨’은 큰 수염고래 등이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 한 글자이다. 그런데, 큰 고래 사냥은 한반도 동남부 지역에 회유하던 동물이고, 서해[황해]에는 작은 돌고래과의 상쾡이 정도만 있던 지역이다.
이런 예로 보면, 한자는 화족이 만든 글자가 아니거나, 적어도 동아시아에 살던 많은 종족들이 서로 필요시 사물의 형상을 본 따서 만든 상형문자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생긴 문자라는 판단이 타당하다는 생각이다.
상형문자의 진화
어느 종족이나 최초에는 상형문자를 만들어 내고, 이를 사용하다, 좀 더 언어와 가까운 표현을 위해 상형문자에서 부호를 따와서 소리 문자를 만들게 된다.
우리도 초창기에는 이렇게 만들어진 한자를 글로 만들어서 기록화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단순히 한자를 대륙 식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광개토왕비나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비문들을 보면, ‘주어+동사+목적어’순으로 문장을 쓰지 않고, ‘주어+목적어+동사’ 순으로 적은 문장도 보이고 있다. 즉 조상들은 한자를 사용하여 우리 언어를 표현하되, 대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과 우리 식으로 쓰는 방식이 삼국 시대에 혼용되어 사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은 지금도 한시를 읽을 때, 쓰기는 대륙방식으로 글자를 배열했다 하더라도, 읽을 때는 ‘주어+목적어+동사’의 순으로 읽고 노래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한자를 사용하였지만, 이를 언어로 표현할 때 상당히 부족함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시대부터 절 등에서는 필요시 자신들 만의 방식으로 이두를 만들어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같은 방식은 삼국통일 후에도 일정기간 동안 자신들의 방식으로 사용하다, 설총이 이를 집대성 하여 이두를 통합하는 작업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우리는 통상 이두를 설총이 발명했다고 하지만, 발명이라기보다는 이전부터 각 지역에서 사용되던 것을 통일하고 집대성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이두가 좀 더 발전해서 소리를 표현 할 수 있도록 구결문자로 발전되고, 이는 지금의 가타가나와 상당히 흡사하게 발전한 것같다. 또한 이 문자를 이용하여 한자의 발음을 표현하기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점차 발전해서 현대와 같은 알파벳으로 진화하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우리는 세종대왕이 새로운 문자인 한글을 만들면서 이 진화 과정이 계단식으로 상당히 점프하고 말았다. 한자는 ‘단어 문자’이고, 이두나 구결 문자는 ‘음절 문자’인데 반해, 한글은 ‘음소 문자’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더 적은 부호를 가지고 이를 조합해 음절로 만들면서 다양한 음성을 문자화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타자기 시대에는 초성, 중성, 종성 스타일의 한글이 받침으로 인해 불편하기도 했지만, 컴퓨터 시대가 되면서 이런 문제도 해소된 상태이다.
세계적으로 경음과 경음을 구별하는 문자는 한글과 버어마 문자 밖에는 없다. 그런데 버어마 문자는 유성음과 비강음까지 포함되어 표현하는 음역이 우리보다 더 다양하다. 한글은 같은 계열의 자음 발음을 격음 경음까지 표현하는 3체제인 데 반하여, 버어마 문자는 5체제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한글이 발명되었어도, 별로 사용되지 않고, 식자층에서는 한자, 중류층이나 절 등에서는 계속 이두(구결)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구한말에 성경을 번역하면서 한글을 사용하다, 헐버트에 의해 이 한글 띄어 쓰는 방식이 사용되기 시작하고, 헐버트와 그 제자인 주시경에 의해 한글 문법이 체계화되기 시작했다.
한시
詩는 신에게 기원하기 위한, 소통을 위한 소리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시는 문학 중에 제일 먼저 시작되었다.
동양에서의 시는 시경에서 시작된다. 이는 4글자를 배열하여 노래처럼 읽혀지다, 한나라에 들어서면서 5언시가 대두된다. 시경에서는 없던 라임을 맞추는 방식이 오언고시에 나타나기 시작하면 이는 한나라 때 비단길을 통해 로마(대식국)와 교통을 하면서 이 방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AD 300년경 페르시아에서 4행시로 기, 승, 결 3개의 구에 라임을 잡는 방식의 시가 불교와 같이 전래되었다. 페르시아의 이 4행시 기법은 고대 그리스에서 태동된 시 작법으로 알렉산더 시대에 페르시아로 유입되었고, 다시 동아시아로 유입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성당盛唐 때 이 시작법이 체계화 되면서, 최치원 등 당나라 유학파들에 의해 이 땅에 들어온 것으로 생각된다.
이 땅에서는 이 한시가 계속 전수되기도 하면서 이 시에 이두식 독법이 가미되면서 향가로 발전하기도 했다. 또 삼국시대의 한시 작법은 일본 시에 영향을 주고, 또 향가도 일본으로 유입되게 된다.
이 한시는 아시아 각 나라의 시에 영향을 주었으나, 같은 한시라 하더라도 대륙과 반도, 열도는 낭송 방법에 다소 차이가 있다. 대륙은 5글자 7글자를 동일 박으로 상성, 평성으로 읽는 경우가 많으나, 반도에서는 전통적인 장, 단 음을 넣어서 첫 글자는 짧게 두 번 째 글자는 길게 낭송하는 기법에 토를 달아서 낭송하기도 하고, 문자만 낭송하기도 한다. 열도는 반도의 창법에 각 단어에 조사나, 토를 달아서 낭송하고, 동사와 목적어는 한자의 순서와 바꾸어서 낭송하게 된다.
시의 발전
대륙에서 한시를 작성할 때의 분류된 성조는 지금의 성조가 아닌, 당시대의 성조를 기준으로 하게 된다. 또 단어 자체도 당나라 시대까지 형성된 단어 위주로 작성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서 지금의 현대 중국인도 한시를 쓸 때 다소 어려움을 겪는 점은 지금 자신들이 현재 사용하는 한자 발음과 단어를 기준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나라 말기부터 한시 대신 백화시를 쓰려는 운동이 생기기도 했다. 이는 성조는 당시대의 성조를 사용하지만, 사용하는 단어 등은 현재 구어체로 사용하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해서 시를 쓰려는 운동이다.
반도에서는 한시는 그대로 발전하게 되나, 고려 말 이규보 선생이 당시대의 시로부터 독립하려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고려인은 고려인의 목소리를 시에 담아내려는 운동을 하게 되었으나, 크게 호응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다, 조선 중기 이후 정약용 선생은 한시에 우리말과 단어를 입혀 시를 쓰려는 운동을 하기도 했고, 비슷한 시기에 한자가 아닌 한글로 7개 글자를 4행 또는 8행으로 구성 하면서 라임을 맞추는 형태의 시도 시도하기도 했지만, 우리 언어의 특성상 단어나 음절이 아닌 글자로 7글자 라임을 맞춘다는 방식이 표현 방식에 문제가 있어서인지, 호응을 받지는 못했다.
김병연에 의해서, 한시는 전통 한시에서 우리의 운을 한자로 표현한 단어를 채용하기도 하면서 고식적인 한시에서 해학적인 한시가 나타났고 이같은 한시가 많이 알려져 있다.
현대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한시로 쓴 시중에 유럽 또는 미주의 지명등을 그대로 사용한 한시를 여려 편 쓰면서 한시의 변혁을 꾀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시의 독립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못한 사유 중 하나는, 과거 시험에 답안으로 쓸 경우에는 조선 중기 이후 두보의 풍으로 써야만 좋은 평가를 받는 폐풍이 있었기에, 우리의 식자들이 과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우리만의 시를 쓰는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한시를 쓸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지역단위 향교 등에서 교류하는 소수의 내부적 인사들끼리만, 사용하는 방식이나 같은 문파들끼리만 같은 방식의 문법을 사용해서 한시를 쓰는 경우도 있다. 그리하여 한시를 쓰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에, 백일장 등에서도, 너무 과도하게 내용을 보지 않고 문법을 우선적으로 체크하기에, 정작 좋은 시는 심사조차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시 중에도 문법적으로 약간의 오류가 있는 시도 많이 있지만, 우린 너무 변별력이라는 점에 많은 방점을 찍다 보니 정작 중요한 내용이 있어도, 무시해온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오히려 현재 Facebook, Twitter 등에서 다소 한시작법 문법은 무시했더라도, 해학적인 한시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경우가 있다.
서양의 시풍이 동양으로 들어와서 지금까지의 한시가 형성되었다면, 우리는 다시 또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할 것이다. 전통 영시의 작법 기법인 발라드, 쏘네트, 프랑스 전통 시 작법인 Triolet 등의 방식을 기존 한시에 새로 입혀보는 시도도 필요하겠다.
다만 한시작법 시 기본적인 문법은 지켜야겠지만, 우리의 시로 만들어야 한다, 정약용 선생의 말대로 앵무새처럼 대륙의 옛날 시풍만 고수할 것이 아니라 한시도 우리식으로 재해석해서 이를 다시 발전시켜 우리식으로 한시를 써보려는 시도 정도는 해야 할 것이다.
향가에서, 시조, 그리고 단가, 하이쿠까지
우리나라에서의 시조 발전은 향가에서부터 시작된다. 일본에서는 향가와 한시가 단가로 발전하게 되었고, 이는 다시 하이쿠로 발전하게 되었다.
하이쿠는 세계에서 제일 짧은 정형시로서, 일본의 개항 이래 전 세계로 뻗어 나갔고, 지금도 유명 시인들은 자신의 나라 언어로 하이쿠를 쓴 경험이 많이 있다. 그리고 하이쿠에서 계어가 빠진 상태로 센류라는 새로운 시작법까지 소개 되고 있다.
인터넷의 여러 시 사이트에서는 일본의 단가도 Tanka라는 이름으로 해외 시인들에게 소개되고 있고, 이는 또 그들이 자신의 언어로 단가라는 독특한 형태로 새로운 형태의 5행시를 쓰는 경우도 등장했다.
따라서 우리의 시조 또한 전 세계에 소개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시조를 전통 형식에 치중하면서, 3행시로 번역하다 보면, 라임과 인토네이션도 제대로 없는 3행시로 번역이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시조 차체가 글자 수에 융통성이 있는 터라, 번역시 음절수에도 많은 융통성이 있고, 라임도 없는 3행시가 될 경우에, 그들이 시조를 시로 인정하기 어렵게 된다.
필자는 시조 번역의 7행시와 우리 나름의 음절을 사용한 방식을 일전에 제안한 적이 있다.
우리의 음과 한자의 음이 기본적으로 맞지 않기에 낭송할 때는 상당히 문제가 있다. 통상적으로 1성과 4성은 우리말에서 짧게 발음되고, 2성과 3성은 길게 발음되고는 한다.
낭송 시 비슷한 박으로 한시를 낭송할 때 우리 방식으로 단음 장음으로 읽는 다면, 당 성조의 방식과, 우리 언어에서 1성은 짧게, 2, 3성은 길게, 4성은 짧게 읽는 방식의 우리 방식과는 다소 괴리가 있다. 우리의 한시창의 경우 대부분 조선 후기 이후 편집이 되고, 악보가 개발이 되었기에, 조선 시대의 사성체계가 무너진 이후라 다소 시작법 문법과도 다소 괴리가 있다.
우리는 구한말 일제시대에 일본을 통해서 유럽 특히 영어권의 시가 소개되기 시작했다. 당연히 일본의 단가의 작법 음보인 7.5조의 기법의 영향을 받게 된다. 따라서 그 영향으로 김억 등이, 영시를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하기 시작했고, 이는 당시 시를 쓰려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7.5조의 작법이 우리 시에 접목 된다.
김소월 대표시인 〈진달래꽃〉은 한시의 전통 작법인 1, 2, 4구의 라임을 맞추는 작법을 응용하여, 1, 2, 4 연에 라임을 맞추고, 기본적인 운율은 일본 단가 스타일인 7.5 음절을 사용해서, 영어권 시의 감성을 도입하여 새로운 우리만의 시를 지었다. 김소월의 아름다운 시가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한시를 번역해서 알려주고, 영미시의 시를 번역해서 소개했던 소월의 스승 김억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음이 드러나고 있다.
단가와 하이쿠 운율의 도입
우리 시의 전통시조 작법인 3.4 조의 운율에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단가와, 하이쿠의 영향을 받아 7.5조의 운율이 많이 도입된다. 물론 우리의 민요나 판소리 등에는 3.4조 운율을 채용한 것들이 많이 있었으나, 김소월 등의 시에는 자연스럽게 7.5조 운율이 들어가 있다.
김소월, 김동환, 그리고 일제시대 시작을 했던 많은 시인들의 시에서 7.5 운율이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생각된다. 당시 일본은 선진국이고, 또 많은 서구적 시나 사상도 일본을 거쳐서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서정주, 박목월 등 많은 시인들이 7.5조의 운율로 시를 썼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해방 후에도 상당기간 지속되었다. 심지어 해방된 감격을 쓴 시에도 7.5조의 운율이 그대로 채용했던 경우도 있다. 또 우리 대중음악에서도 일본 엔가의 영향을 받아 7.5 조의 운율이 도입되기도 했고 이는 상당기간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따라서 70년대, 80년대까지 상당기간 우리 노래들 중 금지곡 상당수가 왜색이 짙다는 이유로 금지된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렇지만 한 번 도입된 7.5조의 운율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갈수록 시, 노래에서 우리의 것과 접목되어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의식하지 않을 뿐이지 7.5조의 운율을 자연스럽게 접하고, 무의식적으로 우리 것으로 받아들이고 또 계속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시인들이 3.4조와 7.5 운율을 혼용해서 쓰고 있다. 다만 이를 혼용해서 쓰기에 3.4 운율로 썼는지, 3. 4. 5 운율로 썼는지 구별하기 애매한 경우도 종종 있다.
낭송 방식의 변화
낭송에서, 음보 단위로 잡으면서 우리의 시를 낭송하는 방식으로 시작되었으나, 1930년대 중반 〈서울구경〉이라는 대중가요가 나왔다. 60년대 코미디언 서영춘이 리바이벌 하면서, 전통 낭송 방식이 아닌 강약 강약 비트로 부르는 낭송법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당시 서영춘, 후라이보이 곽규석, 또 다른 분들이 만담으로, 속사포로 강약강약의 비트로 줄줄 읽는 방식의 낭송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초기에는 강약의 인토네이션으로 읽는 이런 방식이 코메디의 소재로 이용되었기에, 어색하게 들렸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하게 들렸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방식은, 시를 장단으로 읽는 우리 낭송 방식에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이는 21세기 젊은이들이 랩 형태로 세계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랩이 국내 도입 시, 우리의 전통 낭송 스타일에, 강약 비트를 주는 랩방식은 실패할 것이라던 예견을 깨고 성공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시가 앞으로 어떤 식으로 낭송이 될 것인가는 좀 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용히 장단음으로 리듬을 맞추는 방식으로 계속 갈 것인지, 아니면 강약의 비트로 낭송하는 방식이 주류의 시 낭송법이 될지 이 두 가지 방식이 혼용되어 새로운 방식으로 될 지는 시간을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번역과 시인
한류가 세계로 나갈 수 있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우리 문화를 영어로 구사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젊은 세대가 늘어나면서, 노래에 우리말과 영어를 섞어서 부르기도 하고, 우리말로 부르고 영어로 번역을 해서 부르는 경우 등 영어권 문화와 친숙해진 것도 큰 몫을 했다.
우리 문학을 영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외국인들에게 한 발 다가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국인들이 영어로 쓰여진 우리의 문학 작품을 보면서 우리말에 관심을 갖게 만들 수 있게 된 것이지, 처음부터 우리말로 전파하면서 그들이 우리말에 관심을 갖게 만든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시를 영어로 번역을 하려는 작업을 하려고 하고, 또 유튜브 등에 우리 시를 영어로 번역을 해서 올리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 시의 리듬 잡는 방식과 영시의 리듬을 잡는 법이 같지 않음에도, 우리식으로 원문에 충실한 해석, 번역을 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의 좋은 시를 잘 번역했지만, 막상 번역하고 난 이후 좋은 시라기보다는 좋은 말들을 모아놓은 명언, 경구집처럼 변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김소월의 진달래 꽃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는 Yeats의 시 중에 "He Wishes for the Clothes of Heave"와 "진달래 꽃" 비교해 보자.
김소월의 스승이 김억이 천상의 천을 소원하며라고 번역을 해서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고, 또 이를 김소월에게 가르쳐서 그 영향으로 김소월의 진달래 꽃이란 희대의 명시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만일 예이츠의 이 시를 번역해 놓고, 진달래 꽃과 비교한다면, 예이츠의 시는 중언부언하면서 불필요한 말을 반복한 듯한 느낌으로 읽게 되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진달래 꽃은 시를 압축해서 아주 정교하면서도 단음과 장음의 리듬을 갖고 읽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다 보면, 진달래 꽃에 비해 예이츠의 시가 많이 떨어진다는 노벨상 받은 계관시인에 대한 실망을 하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반면에 진달래 꽃을 영어로 옮겨 놓고 예이츠의 시를 비교한다면, 번역할 때, 압축인 내용을 풀어서 번역을 하다 보면, 시인지 에세이인지 구별도 되지 않고, 리듬도 맞지 않은 채, 라임도 맞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반면에 예이츠의 시는 약, 강음의 리듬이 완벽히 반복되며, a-b, a-b, c-d, c-d형의 완벽한 라임과 4 feet의 정형시 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김소월의 시를 영시로 번역하여 예이츠 시와 단순 비교한다면, 김소월은 한참 격이 떨어지는 시인으로 착각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시인들이 직접 자기 시를 번역해 보고, 또 아예 외국어로 시를 써보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어로 시를 쓰는 훈련을 한다면, 영시로 탁월한 작품을 쓰지는 못하더라도, 어떤 식으로 우리 시를 써야, 전문 영역 시인이 번역을 할 때 최선의 번역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쓰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시가 해외로 나갈수 있도록 하나의 기회를 만드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이 외국어로도 시를 쓰게 하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 영시, 한시, 하이쿠나 단가 등을 쓰면서 우리 시와 그 시의 리듬을 잡는 방법의 차이를 정확이 인식할 때, 우리 시를 쓰더라도 외국어로도 제대로 번역될 수 있는 시를 쓸 수 있는 확장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신세대가 시를 배우고 쓰려고 할 때는, 그들은 기성세대보다 외국어에 능하니, 그들에게는 능한 외국어로 시를 쓸 수 있는 훈련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법이 바로 우리 시, 우리 문학이 세계를 향해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결론
세상의 모든 것은 생로병사의 과정으로 사멸한다. 다만 새로운 후손을 남기고 사라진다. 문학, 예술, 기술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과도하게 순혈주의만 고집하는 생명체는 약해져서 소멸되듯이 예술 분야도 마찬가지가 된다.
우리는 우리 시, 문학 분야도 외부에서 새로운 방식이 도입되면서, 그것이 계속 우리의 시에, 또는 문학에 덧칠되면서 발전해 왔다. 그러면서 더욱 강한 예술로 재탄생하고, 이는 또 다시 해외로 나가서 영향을 주게 된다.
지금 젊은 세대의 음악이 또는 영화가 한류로 해외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것에 계속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 융합되고 발전되고, 다시 강하게 탄생되어 해외로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 수십 년 전의 전통의 고수하거나, 좁은 우리 시장내에 안주하면서 자기들만의 아성을 구축하여 골목대장 역할을 하려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민족이 오랜 기간 써왔던 전통 민요작법 기법에, 절구, 율시, 배율 등의 한시 기법, 그리고, 서구식 영시의 전통 작법인 ballad, Sonnet, 프랑스 전통 작법인 Triolet, Vienalle 등과 그리고 일본식 작시 기법인, 단가와 하이쿠의 작법도 과감하게 채용하고, 우리 것으로 녹여낼 필요가 있다.
이어서 이런 기법을 획득한 다음에도 우리 것으로만 가지고 있지 말고, 다시 또 이를 외국으로 내보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좀 더 큰 시각으로 외부 세계를 내다보아야 할 것이다. 인터넷으로 전 세계의 모든 정보가 실시간으로 들어오고, 유튜브, 넷프릭스로 전 세계의 모든 영상과 지식을 실시간으로 서로 주고받는 시대에, 우리만의 것을 고집하고 안주하려는 자세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