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마포국민학교 교가 기억하고 있나.
대부분 기억이 가물가물 하겠지.
그런데,
허정균이라는 국민학교 선배님이 쓰신 글에서 교가를 발견했다.
그 것도 악보랑 같이.
서해의 푸른물결 에워싼 이곳 ~~
한 번 불러 보니 국민학교 때 기억이 새록새록 하는구만.
작사작곡은 박상만이라는 상산고 음악교사께서 68년도에 마포에 처음 부임하여
쓰신 거라고 하는구만.
아래 글은 허정균 님이 쓴 글..
고맙습니다. 이런 귀한 자료를.

지난 14일 오후 전주시 효자동에 있는 상산고등학교 체육관 강당에서는 아주 특별한 음악회가 열렸다. 정년 퇴임을 맞은 이 학교 음악 선생님인 박상만 선생님께 상산고등학교 제자들이 드리는 ‘헌정음악회’가 열린 것이다.
선생님의 40년 교직생활의 출발은 부안군 변산면(당시는 산내면) 마포초등학교였다. 김제 출신인 그는 1968년 전주교대를 졸업하자마자 마포초등학교에 부임하여 당시 5학년이었던 필자의 담임을 맡았다. 다음은 2005년 4월 37년만에 선생님을 만나뵙고 당시를 회상하며 쓴 글이다.
1960년대의 부안군 변산면(그 때는 산내면이었다)은 참으로 오지나 다름없었다. 들쭉날쭉한 갯가를 메워 드문드문 간사지 논이 있었고 대부분은 비탈진 산밭을 일구거나, 갯가에 나가 조개를 줍고 고기를 잡으며 살아갔다. 평생 기차구경 한번 못해보고 돌아가시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부안읍에서 먼지 풀풀 나는 신작로길을 따라 버스로 1시간 30분 정도 오면 마포리가 있다. 이곳에 지금은 폐교가 되었지만 마포, 산기, 낡은터, 유동, 삼발리, 성천, 유유동 등의 마을에서 300여명 아이들이 다니던 마포국민학교가 있었다. 나는 이 학교에 다니며 소년 시절을 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너나없이 가난에 찌든 아이들이었지만 우리들은 가난이란 말을 몰랐다. 다들 그렇게 사는 것인 줄 알았다.
우리는 점점 행동반경을 넓혀가며 산, 들, 바다를 쏘다니느라 매일이 새로웠다. 동네 정미소에는 소달구지가 늘 들락날락했는데 막걸리에 취한 주인이 달구지는 소에게 다 맡겨두고 끄덕끄덕 졸면서 가면 우리는 뒤로 몰래 올라타고 한참을 갔다. 주인에게 들키면 급히 뛰어내려 줄행랑을 쳤다. 포구에 매어 둔 빈 배를 끌고 나가다 혼쭐을 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지내다 5학년 때 새로 담임 선생님이 부임해 오셨는데 선생님은 그 때까지의 선생님과는 달랐다. 선생님은 전주교대를 갓 졸업하시자 마자 첫 부임지로 우리 학교에 오신 것이다. 선생님은 교육에 대한 열정을 음악에 실어 우리에게 크나큰 영향을 주셨다.
산기슭 웅덩이에서 도롱뇽알을 잡으며 노는 우리를 보신 선생님은 하얀 링게르병을 구해오셔서는 그 안에 넣으시고는 매일매일 돌아가며 관찰일기를 쓰라고 하셨다. 깐치밥(산자고의 구근)을 캐먹기 위해 야산을 쏘다니던 우리에겐 전혀 코드가 맞지 않는 일이었으나 이후 우리는 선생님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체험하기 시작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깡촌에서 하루는 선생님이 난생 처음 보는 희귀한 물건을 보자기에 곱게 싸들고 오셨다. 휴대용 전축이었던 것이다. 레코드판이 돌아가며 음악이 흘러나왔다.
“얌보 얌보 얌보얌보야~~~~~~~~쿠니쿠니쿠니쿨라~~”
정말 신기했다. 선생님은 노래를 아주 잘 부르셨다. 땟국이 졸졸 흐르는 촌놈들은 점점 선생님에게 빨려 들어갔다. 고음을 내는 건반 몇 개가 고장난 낡은 풍금을 치시면서 선생님은 우선 발성법부터 가르치셨다.
“아아아아아-” 한 음 올려서 “아아아아아-”
이렇게 해서 한 옥타브를 오르내리며 목을 가다듬은 연후에 노래를 가르치셨다. 처음에 40여명의 아이들이 두 패로 나누어 돌림노래를 불렀다.
“다같이 돌자 동네 한바퀴 / 다같이 돌자 동네 한바퀴.............바둑이도 같이 돌자 동네 한바퀴 / 바둑이도 같이 돌자 동네 한바퀴”
세 패로 나누어 부르기도 하였다. 맨 마지막 패가 잦아든 소리로 “바둑이도 같이 돌자 동네 한바퀴”하며 끝나면 노래가 훨씬 재미있었다. 돌림노래로 팀워크를 갖춘 우리는 2부합창을 불렀다.
깊은 산 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새벽에 토끼가 눈 부비고 일어나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지요
이어 3부합창, 혼성2부합창, 혼성3부합창, 시골 깡촌 마을의 쪼무래기들은 어느새 어엿한 합창단으로 탈바꿈했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노래들도 많이 불렀다.
내 고향 가고 싶다
그리운 언덕
동무들과 함께 올라
뛰놀던 언덕
오늘도 그 동무들
언덕에 올라
메아리 부르겠지
나를 찾겠지
아 목동들의 피리 소리들은
산골짝마다 흘러나오고
여름은 가고 꽃은 떨어지니
너도 가고 또 나도 가야지
저 목장에는 여름철이 오고
산골짝마다 눈이 덮여도
나 항상 오래 여기 살리라
아 목동아 아 목동아 내사랑아
먼 산에 진달래 울긋불긋 피었고
보리밭 종달새 우지우지 노래 하면
아득한 저 산너머 고향 집그리워라
버들피리 소리나는 고향집 그리워라
모두 이 시기에 배운 노래들이다. 따뜻한 봄날 선생님은 우리 모두를 끌고 학교 옆 산으로 올라가 야외수업을 하기도 했고 미술시간에는 바닷가로 데리고 나가 바다를 그리게 했다. 그 바닷가에서 우리는 또 노래를 배웠다.
해당화가 곱게 핀 바닷가에서
나 혼자 걷노라면 수평선 멀리
갈매기 한두쌍이 가물거리네
물결마저 잔잔한 바닷가에서
선생님께서 직접 작사 작곡하신 노래도 가르쳐 주셨다.
흰물결 밀려오는 바닷가에서
수평선 저 너머로 돛단배 오고
시원한 바람 속에 여름이 가요
즐거운 여름바다 즐거운 바다
마침내 선생님은 우리 학교의 교가를 작사작곡 하셨다. 당시 우리는 학교마다 교가라는 것이 있는 것인 줄도 몰랐다.
서해의 푸른 물결 에워싸인 곳
변산의 정기 받은 배움의 터전
지혜와 예의를 한 몸에 담아
우리는 자란다 씩씩하게 자란다
아아 그 이름 빛내리 마포의 학교
찬란하게 빛내리 마포 국민 학교
이미 폐교가 된 학교지만 망년회 때 동창들 만나면 꼭 이 노래를 불러보자
선생님은 어느날 교무실의 캐비넷에 잠자고 있던 책을 한 아름 들고 교실에 들어오셨다. <빛나는 얼굴>이라는 한국 위인전과 <금성탐험대>라는 공상과학소설 등이었다. 이 때 처음으로 교과서 이 외의 책을 접해보았다. 아이들이 돌려가며 얼마나 재미있게 읽었는지 모른다. 이 책들은 이미 전부터 와있었던 것 같은데 아이들에게 대출을 안해주고 있던 것을 선생님께서 과감하게 꺼내 아이들에게 읽힌 것으로 보였다.
가을에 우리는 수학여행을 갔다. 해마다 십리를 걸어 봄 가을 채석강으로 소풍을 갔었는데 별도로 수학여행을 간다는 것이었다. 당시 소풍을 가면 평소 먹던 보리밥에 쌀을 조금 더 넣은 밥에 짠지나 무장아찌를 찬으로 도시락을 꾸려 갔었다.
멸치볶음이나 계란 같은 것 싸오는 아이들도 거의 없었고 도시락을 아예 못 싸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싱건지를 싸와 국물이 밥으로 다 스며들은 경우도 있었다. 이런 판국에 수학여행이라니. 학부모들에게도 수학여행이라는 개념이 서있지 않을 때였다.
교장 선생님도 반대하셨지만 우리는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다. 코스는 내소사~직소폭포~월명암이었다. 참가금은 보리쌀 두 되였다. 이것도 내지 못해 불참한 친구들이 몇 있었다. 어떻게든 보리 두 되야 마련할 수 있었겠지만 이들 부모님들에게는 수학여행이란 불필요한 사치였을 것이다. 우리들이 못가는 친구들 집에 찾아가서 함께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졸랐지만 야단만 맞고 왔다.
변산 국민학교 마포분교에서 마포 국민학교로 독립한지 처음으로 가는 수학여행에 교감선생님께서 동행해주셨다. 우리 학년만 조촐하게 버스를 타고 가는 수학여행이라니... 우리는 신바람이 났다. 말재를 넘어 구불구불 내소사로 가는 버스 차창으로 스며드는 바람이 상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내소사에 도착하자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추녀 밑에 매달린 곶감의 행렬이었다. 10개씩 꿴 곳감 50열이 한 판을 이루었다. 한 판이 500인 셈이다. 500개짜리 곶감 판이 절집 주변에 끝간 데 모르게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당시 감은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먹거리였다. 5월 감꽃이 필 무렵부터 우리는 감꽃을 주워 먹기 시작했고 바람에 우수수 떨어진 땡감을 우려먹었다. 가을이면 빨갛게 맛이 들기도 했으나 아직은 떫은 맛이 그대로 남아있는 감을 따먹었다. 그 사이에 홍시라도 하나 발견하면 다람쥐처럼 나무 위로 조르르 올라가 기어코 손에 넣었다. 그러나 감나무는 아이들 맘대로 공략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다 주인이 있어서 아이들 손을 철저히 물리쳤다. 더구나 감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내소사 뒤로 난 숲길을 조금 올라갔더니 임자도 없어 보이는 산감나무에 감이 수없이 매달려 있었다. 종안이가 이를 보고 나무에 올라갔다가 죽은 가지를 디뎌 떨어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천행으로 바위 사이의 흙 있는 곳으로 떨어져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종안이는 교감선생님이 데리고 후송되었다. 선생님은 얼마나 놀라셨을까.
내소사 설선당 요사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세상에 이토록 넓은 방이 있다는 것도 처음 경험하였다. 이튿날 원암재를 넘어 직소폭포를 경유하여 월명암에 당도했다. 월명암에서 곶감이 내소사에서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월명암에서 또 하룻밤을 자고 남여치로 내려와 2박 3일의 수학여행을 마쳤다.
6학년이 되었다. 어느날 선생님은 푸석한 얼굴에 머리는 헝클어지고 두 눈은 충혈된 채 오셨다. 밤새껏 한 친구 아버지와 싸우셨다는 것이었다. 짐자전차를 타고 다니며 장사를 하시던 친구 아버지는 초등학교 5학년까지만 다니면 가감승제는 할 줄 아니 학교 더 다닐 필요 없다는 것이었고 선생님은 이를 말리느라 싸운 것이었다. 그 아버지는 끝내 6학년이 된 아들을 자전거 짐칸에 싣고 서울로 돈벌러 올라갔다. 이 사건 직후 선생님은 영장이 나와 군에 입대하게 되었고 우리는 선생님과 헤어졌다.
선생님과 헤어진지 37년의 세월이 흐른 2005년 4월 20일 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지금 종로 기독교100주년 기념관에 숙소를 정하고 오늘 밤 묵을 예정이니 영근이와 함께 오라는 것이었다.
앞마을 냇터에 빨래하는 순이
뒷마을 목동들 피리 소리
그리운 고향 그리운 친구
정든 내 고향집이 그리워지네
앞집에 김서방 뒷집에 이서방
새끼 꼬아 가마니 짜던 곳
그리운 고향 그리운 친구
정든 내 고향집이 그리워지네
드높은 하늘엔 흰구름 떠돌고
오곡백과가 넘실대던 곳
그리운 고향 그리운 친구
정든 내 고향집이 그리워지네
선생님이 가르치신 노래들은 지금 생각하면 서정성이 아주 짙은 노래들이다. 우리 노래인지 서양노래인지는 잘 몰랐으나 가사 자체가 하나의 서정시이다. 선생님한테 배운 노래를 떠올리며 전철을 탔다. 영근이를 만나보고 싶어 하셨으나 갑자기 연락이 안돼 혼자 종로 5가로 향했다. "영근이 그놈의 시적 토양은 필시 박상만 선생님이여."
37년 만에 선생님을 만났다. 우리는 얼싸안았다. 반백이 되신, 우리보다 11살 위이신 샘은 올해 60이시다. 그러나 그 테너 목소리만은 여전하시다. 선생님이 머물고 계신 숙소에서 이야기 보따리가 풀어졌다. (2005년 4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