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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현대문학-2
5. 러시아문학
볼셰비키 정권이 수립된 후부터 21년까지를 ‘전시 공산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사회제도의 변혁에서 오는 혼란에 뒤이어 추위와 굶주림 속 에서 러시아인들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혁명 이후로 소련 문학은 그 자체의 비타협적인 사실주의가 주축이 되고 상징주의, 인상주의에 대한 엄격한 회피에 의해서 특징지어진다.
혁명 후 많은 작가들이 외국으로 망명했으나 대다수 문인들은 그대로 러시아에 남아서 창작활동을 계속했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메레쥬꼽스, 아르쯔이바세프, 자이쩨프, 알렉산더 파더예프, 알렉세이 톨스토이, 예렌부르크, 마야코프스키, 숄로호프, 솔제니친 등이 거론된다.
메레쥬꼽스키(1865∼1941)는 러시아 데카당파의 대표적 작가로서 최초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을 받았으나 보들레르에 기울어졌다. 시집 《상징》을 발표하면서 상징주의 입장에서 리얼리즘에 도전하였다. 그는 3부작 《그리스도와 반그리스도》에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두 요소즉 그리스 사상과 그리스도 사상의 대립을 그리고 있다. 또한 대표작 《영원의 반려伴侶》에서 유럽의 역사는 이교와 그리스도교, 영과 육, 지와 신앙의 투쟁이라고 역설하였다.
아르쯔이바셰프(1878〜1927)는 러시아 현대파의 극작가로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러시아 문단을 풍미한 근대주의의 대표적 작가이다. 그는 《싸닌》에서 개인주의적이며 허무주의적인 세계를 보여준다.
아르쯔이바셰프는 개인의 속박, 연애, 성의 해방을 주장했으나 뒤에 혁명을 적대시하며 염세적 풍조를 강하게 풍겼다. 혁명 후 폴란드에 망명하여 바르샤바에서 작고했다. 그의 염세관을 잘 드러낸 대표작 《최후의 일선》에서 작가는 인생의 어려움과 뜻 없음을 증명하고 인간이 생의 우매함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살밖에 없다고 역설하였다.
자이쩨프(1881〜미상)는 잡지 《새로운 길》에 발표한 〈조용한 새벽〉에서 그는 체홉에게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은 주로 잃어버린 귀족적 장원생활을 묘사하고, 과거의 생활과 자연의 영위와의 융합을 칭송하며 인간 운명에 대한 숙명적 철학관을 보여준다. 1922년 이탈리아로 망명, 이어 파리로 가서 생활하면서 귀족의 운명을 그린 장편을 썼다. 염세가로서 자이쩨프의 인생관 -비통, 동경, 신비- 은 초기 작품인 《늑대》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 그의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는 장편 《먼 나라》, 투르게네프의 전기 《투르게네프의 생활》, 회상적 작품 《청춘》 등이 있다.
알렉산더 파더예프는 블라디보스톡 상업 학교에서 배우고 1918년부터 공산당의 활동에 참가한 소련의 소설가다. 그는 소련군에 입대하여 종군하고, 그 후 프롤레타리아 작가동맹 서기국의 수뇌가 되었다. 그의 데뷔 작은 《괴멸》로서 소련의 건설기를 그린 대표작이다. 주요 작품엔 《우데거족의 최후의 사람》, 《청년 근위대》 등이 있다.
또 알렉세이 톨스토이는 레오 톨스토이와 이반 투르게네프의 일련의 후손이다 그는 투르게네프의 아름다움과 고골리의 풍자와 도스토예프스키의 긴장을 함께 지닌 천재적인 작가이다. 그가 작가로서 인정을 받게된 것은 귀족의 몰락과정을 리얼하게 묘사한 《남은 보리수 밑에서》, 《절름발이 공작》이다. 특히 혁명기간 중 그는 볼셰비키 당원들에 맞서 싸웠으나, 1921년 소비에트 연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세 번이나 스탈린상을 받았다.
예렌부르크(1981〜?)는 언론인이자 저술가이다. 그는 《13개의 파이프》, 《제2일》, 《피리킨 함락》, 《폭풍우》 등의 명작을 발표했다. 그는 날카로운 관찰로 자본주의 사회구조를 분석한 중요 작가라 하겠다. 《해빙》은 그를 자유화 운동의 선구자로 부각시킨 작품이며, 스탈린 시대의 흑막을 실감 있게 묘사한 회고록 《인간》은 소련 지식인의 정신사가 되었다. 제2차 대전 당시 침략자들에게 저항한 그의 불꽃 튀는 논설은 그에게 큰 명성을 안겨주었고, 그는 그의 소설《파리의 함락》으로 스탈린상을 수상하였다.
마야코프스키(1893〜1930)는 1920년대 이후 소련뿐만 아니라 세계 현대시에 큰 영향을 미친 금세기의 대시인이다. 그는 ‘러시아 미래파’ 운동을 전개하면서, 과거의 온갖 유산과의 단절과 시대에 적응한 새로운 미의 추구를 주장했다. 그는 문제작인 장시 〈바지를 입은 구름〉, 〈전쟁과 세계〉와 소시민성을 공격한 풍자희곡 〈빈대〉, 관료주의를 공격한 희곡 〈목욕〉, 〈목을 놓아〉 등을 발표하였다. 이들 대작 중에서도 특히 〈빈대〉는 아리스토파네스의 풍자극과 같이 신랄하고 고상한 작품이다. 그의 시는 매우 표현적이며 대화체의 무음시 문체의 사용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는 1930년 4월 14일 ‘사라의 보우트가 세욕에 충돌했다’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 자살을 하였는데, 연인 릴랴브리크에게 보낸 서간이 최근 공개 되어 이 전위시인의 내면의 풍부함과 정열이 재평가되었다.
숄로호프(1905〜?)는 소련의 대표적인 작가로서 생업에 종사하면서 창작 활동을 하였다. 소련문학 중 최고의 걸작인 《고요한 돈 강》은 15년만에 완성되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그레고리는 뛰어난 재능과 강력한 의지력을 가졌으면서도 혁명과 전쟁의 부조리에 시달려 적군과 백군사이를 전전하다가 끝내는 몸 둘 곳을 잃고 마는 비극적인 인물이다. 숄로호프는 196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주요 작품엔 《열려진 처녀지》, 《증오의 과학》, 《그들은 조국을 위해 싸웠다》, 《인간의 운명》 등 다수가 있다. 그는 레닌상과 스탈린상을 수여 받기도 했다.
6. 중국문학
청나라 말기에는 서양문명의 물결이 거세게 밀려와 중국문화의 모습도 두드러지게 변하였다. 만주족의 청나라가 몰락하고 중화민국이 건국 된 뒤, 1917년에 호적胡適(1891〜1962) 등을 중심으로 하는 ‘문학혁명’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그 동안의 문어체에서 벗어나 모든 문학 언어를 구어체로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운동은 뒤이어 일어난 ‘5.4운동’에 편승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5)
1920년 11월에는 북경에서 젊은 문학인 사이에 신문학 최초의 단체인 ‘문학연구회’가 결성되었고, 1921년 1월부터 기관지 《소설월보》를 발간하였다. 이 모임의 중심인물은 소설가 모순茅盾이었는데, 그는 유럽의 사실주의 문학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비평과 이론면에서 주도했다. 소설에서는 섭소균葉紹鈞, 여류작가 사빙심謝氷心이 뛰어난 작품을 썼다. 노사老舍, 파금巴金 같은 작가도 뒤이어 이 모임에 참가 하였다.*5)
‘문학연구회’와 대립되는 ‘창조사’라는 동인 조직이 있었다. 1919년부터 일본 유학생들이 모여,1921년 《창조사 총서》를 냈고 1932년부터는 《창조 주간》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낭만주의 문학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창조사’는 ‘문학연구회’에 비하여 도회적이고 유미적이어서 주관을존중하고 자아의 주장을 내세웠다. 북경을 중심으로 한 사실주의의 문학연구회에 비해서 창조사는 상해를 중심으로 한 젊은 낭만주의자들의 그룹이었다.
그 즈음 세계적인 작가 노신魯迅(1881〜1936)이 등장하여 《아큐정전》(1921)을 비롯하여 우수한 소설과 평론을 발표하였다. 그는 날카로운
5) 《세계문학사》(조용만, 1983, 박영사)pp. 37-43.
필치로 중국의 옛 도덕과 사회 제도의 악습을 고발하고, 새롭게 문학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다. 따라서 이미 곽말약郭洙苦(1892〜1972), 욱달부郁達夫(1896〜1981)를 중심으로 하는 창조자創造社와 주작인周作人(1885∼1966), 모순茅盾(1896〜1981), 사빙심謝氷心, 섭소균葉紹鈞 등의 문학연구회가 대립되어 있었으니, 1925년 상해에서 발행한 노동쟁의, 이른바 5.30사건을 계기로 하여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성행하게 되었고, 1930년에 노신魯迅도 가담한 좌익작가연맹이 결성되었다. 이후 계속 대립되는 좌우 양파와 그 중간에 위치하는 여러 파가 뒤엉켜 한동안 이념 투쟁을 하였다. 모순의 《자야》, 파금巴金의 《집》, 심종문沈從文의 《변성》, 노사老舍의 《낙타상자》, 숙군肅軍의 《제3대》, 조우曺遇의 희곡 〈뇌우雷雨〉, 〈일출〉 등은 이 무렵의 대표적 작품이다.
1936년 10월에 노신魯迅이 사망하고, 일본과의 전쟁이 확대됨과 동시에 모든 중국 문학자는 일치 항전을 목표로 대동단결하였다. 이들은 내륙 지방으로 후퇴함에 따라 중경을 비롯하여 계림, 곤명, 연안 등 지방 도시로 옮겨갔다. 그 때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까지의 주요 작품으로는 노사魯舍의 《사세동당四世同堂》, 파금의 《죽은 태양》과 《불》, 모순의 《상엽霜葉은 이월화二月花 보다 붉어라》와 《부식腐蝕》, 괄말약의 역사극 〈굴원屈原〉 등을 들 수 있다.
7. 한국문학
1) 근대문학의 출발기
백철은 한국고전문학과 대립되는 의미에서 ‘신문학’이란 용어로 근대문학의 시대 구분을 하고 있다. 근대문학이 한국고전문학의 전통 위에서 재출발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19세기 서구의 영향 밑에서 시작된 것이며 그래서 ‘신문학’이란 용어를 썼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단절론적인 백철의 시각에는 많은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는 아쉬운 대로 ‘신문학’이란 용어를 ‘근대문학’으로 바꾸어 백철의 사조사를 요약한다.
초창기의 근대문학은 금세기 초에는 1910년대를 말하게 된다. 구체적으로는 시에서 창가, 소설에서 신소설시대 그리고 뒤이어 온 육당, 춘원시대가 된다. 창가는 1890년대 후반에 ‘독립신문’의 발간과 함께 나타났고 신소설은 금세기 초 1906년에 만세보에 발표된 이인직의 《혈의 누》를 효시로 한다. 이 신소설은 그 뒤 약 10년 동안 성행하여 한국 근대문학의 과도기적 역할을 수행했다.
신시는 1908년 육당이 주간해서 낸 잡지 《소년》에 육당 자신이 쓴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처음이라는 것이 통용되고 있다. 혹은 1919년 《창조》지에 발표된 주요한의 〈불놀이〉를 자유시로서 처음이라고 하기도 한다.
소설에서는 춘원이 1917년에 ‘매일신보’에 발표한 장편소설 《무정》을 근대적인 소설의 시초라 한다. 그는 계속해서 동연대에 《개척자》 등을 발표했다. 이 동안에 문학계의 인구도 늘어서 1918년에 낸 문예 주간지 《태서문예신보》에는 시인 김억을 비롯하여 많은 신인들이 등장한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2) 1920년대와 근대문학의 성립
1920년대는 한국의 근대문학운동에 있어서 한 개화기라고 할 수 있다. 소위 문학의 근대화라면 이 시기가 한 중심점이라고 할 수가 있다. 물론 문학의 근대화라면 우선 독립국가라는 큰 전제가 있어야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1910년에 소위 한일합방이라는 이름아래 식민지 환경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근대화에 있어서는 불모지라고 할 수 있다. 하여간 그 속에서도 근대화를 위한 문학운동이 전개되었다면 그것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때가 1920년대가 되는 것이다.
이 20년대에 와서 19세기의 근대 문예사조인 낭만주의, 자연주의, 상징주의 등이 들어와서 문예사조를 이루고 그것들의 문학수법도 배워졌다. 그 사조들을 타고 나온 문학지들도 많이 등장했다. 1919년의 《창조》를 비롯하여 《폐허》, 《장미촌》(1920), 《백조》(1922), 《조선문단》(1924) 등이 나와서 문학계다운 성황을 이루었다.
그리고 시인 작가들도 재능 있는 젊은 시인들이 많이 나와서 문단 세대교체를 의미하기도 했다. 시인으로서 김억, 오상순, 황석우, 이상화, 박월탄, 홍로작 등, 소설에서는 김동인, 전영택, 염상섭, 현진건, 나도향 등을 들 수 있다.
20년대에 또 하나의 색다른 문학운동이 후반의 문단을 대표한 것이 있다. 소위 신경향파 문학과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그것이다. 이 두개의 문학은 20년 초부터 밖에서 온 사회주의 사상과 풍조를 바탕으로 해서 일어난 것이다. 신경향파는 시보다도 소설이 더 주류가 되었다. 그 특색은 하층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가난을 추방하되 결말에 가서는 지주 등 상류층 계급에 대한 반항을 나타낸 것이다. 대표작가로서 최서해를 들 수 있다. 그 뒤를 이어서 1925년에 프로 문학단체 ‘카프’가 결성 되어
약 5∼6년 간 문단의 패권을 장악했다. 이 프로문학의 특징으로서는 마르크스적인 이데올로기의 주입과 계급혁명의 정치성의 노출이었는데, 그 때문에 문학적인 작품으로서는 성과를 남기지 못했다. 대표적인 문학인을 든다면 시에 임화, 소설에 이기영, 김남천 등을 들 수가 있다.
이런 배경 아래서 전통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1920년대 중반 이후 프로문학과의 논쟁을 통해서 형성된 민족주의 진영에서의 문학론이 곧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주로 시조를 부흥하자는 운동으로 나타났다.
그 최초의 논문은 최남선의 〈조선 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였다. 그 뒤를 이어서 이병기, 염상섭, 조운 등이 ‘시조부흥론’에 참여 했다. 여기서는 주로 조선적인 시가 양식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다분히 심정적인 차원 이상을 넘어 서지 못한 감이 있다.*6)
한편 아동문학이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대두하게 된 것도 특기할 만 하다. 소파 방정환은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아동문학을 열었는데 그가 주재한 《어린이》는 당시 어른의 소유물 또는 어른의 축소판 정도로 여겨졌던 많은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고 아동 해방의 길을 열었다.
3) 1930년대 문학과 모더니티
30년대의 한국문학은 그 운동에 있어서 큰 전환을 가져왔다. 동기는 20년대 후반에 성했던 프로문학에 대한 반발이었다. ‘문학은 정치성이 아니고 더 작품적인 성질의 것이다’라는 입장에서 재출발을 한 셈이다. 전환한 문학사적인 입장에 대해선 몇 가지의 특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서정미학으로써 시나 소설에 있어서 모두 서정주의적인 경향이 한 특색을 이루었다. 시에서 김영랑, 소설에서 이태준의 작품들이 그 경향에 속한다. 이효석의 후기 작품도 그렇다. 거기에는 다분히 민족주의적인 애상과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다.
둘째는 1933년 전후에 등장한 모더니스트의 일파이다. 이 모더니즘은 시인들이 중심이 된 문학운동인데 서양의 상징파의 계통에서 모더니티를 강조한 것이다.
6)《한국문학의 전통논의》(성기조, 1985, 장학출판사), p. 20.
김기림이 주동이 되고 김광균, 장만영, 장서언 둥 젊은 시인들이 뒤를 따른 셈인데 국내적으로 정지용이 먼저 길을 열었다. 이 파의 시는 언어의 시각적인 이미지를 사용한 것이 특색이다.
이 무렵에 평론가 최재서에 의하여 헉슬리 등의 주지파 문학이 소개, 도입되어 모더니즘을 도왔다. 이상의 자의식의 소설 《날개》 등도 그 경향 속에서 나온 작품들이다.
평론가 김환태도 자칭 예술지상파라고 하여, 이 30년대 후반기 즉 35년 이래 수삼 년간에 재능있는 신인들이 많이 등장하였다고 했다.
30년대의 후반기는 외부정세로 봐서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침략전이 한창인 때문에 한국문학의 주경향은 도시의 현실을 도피하여 자연을 가까이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김동명, 김상용의 전원시, 이무영의 귀농의 문학이 그것을 증명하는 예가 된다. 역사소설이 유명한 것도 같은 뜻에서였다. 이 후반기의 문학으로서 더욱 두드러진 현상은 신인들 중 시에서 서정주, 소설에서 김동리, 정비석, 최인욱 등의 작품들이 한국의 토착적, 풍토적인데서 제재를 찾는 경향이 있다. 그 점에서 한국의 근대문학은 이 땅에 와서 자기의 본거지를 찾았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서 40년대로 들어서면 전쟁말기로서 한국문학사는 암흑기로 접어들었으나 거기서 특기할 것은 이때에 두 개의 문학잡지 《문장》과 《인문평론》이 있어, 문학을 지키는 교두보 구실을 했다. 그 잡지를 통해서도 신인들이 몇 사람 등장했는데 시에서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등 소설에서 최태웅, 임옥인 등이었다.*7)
8. 일본문학
명치유신明治維新(1868) 이후의 일본 근대사회를 가리켜 시민 사회라고 한다. 일본의 개화기 근대 문학에 선구자 역할을 한 사람은 쯔보우치 쇼요坪內逍遙(1859∼1935)와 후타바데이 시메이二葉亭四迷(1864∼1909)이다.
쯔보우치 쇼요는 소설 《신수神髓》를 발표하여 근대문학의 중심에 소설을 두었고, 그 방법으로는 사실주의에 토대를 두었다.
후타바데이 시메이는 근대 문학이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집중되어야 함을 장편소설 《부운浮雲》으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근대 문학 선구자 두 사람의 뒤를 이어 모리 오우가이森鷗外(1862∼1962)와 오자키 코요尾琦紅葉(1867〜1903) 등이 등장함으로써 소설부문은 착실한 성장을 해 나갔다.*8)
이 시기에 시가분야에서는 전통적인 양식인 탄카短歌와 하이쿠俳句에 감정과 사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그 때까지 부수되어 오던 까다로운 법칙과 관습에서 헤어나려는 시도들이 전개되었다.
하이쿠에서는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1867〜1902)에 의해 혁신 운동이 주도되었고, 탄카에서는 요사노 텟칸與謝野鐵幹(1878〜1935)과 아키코晶子(1878〜1942) 부부에 의해 규격화된 형식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일에 성공하였다.
7)《조선문학사조사》(백철, 1948, 수선사), 《국문학전사》(1979, 신구문화사)
8)《세계문예사조》(김희보, 1989, 종로서적), PP- 631-634.
또한 서양시를 모방하여 일본에서도 신체시를 일으키려는 운동이 지식 청년들에 의해 시도되어, 키타무라 토코구北村透谷(1868∼1894), 시마자키 토손島崎藤村(1872∼1943), 쿠니키타 돗포國木田獨步(1871∼1908) 등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주로 인간의 자유로운 감정과 감각의 해방을 추구하는 시를 썼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봉건적인 속박과 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사회에 동반되는 속악과 권력에 도전하여 거센 정열로써 자연스러운 마음의 움직임을 지키려 하는 ‘낭만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구니키다 돗포와 토쿠토미 로카德富盧花(1868∼1927), 이즈미 쿄카泉鏡花(1873∼1939) 등은 낭만파에 속하는 작가들이다.
노일 전쟁 후에는 ‘자연주의 문학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운동의 중심 인물로는 타야마 카타이田山花袋(1873∼1920), 마사무네 하쿠쵸正宗白鳥(1879〜1962) 등이다. 그러나 그들은 현실을 해부하기만 했을 뿐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부족했기 때문에 자연히 인간과 인생의 추악한 면의 해부에 만족해야 했다. 이러한 자연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것이 탐미주의와 이상주의 경향이었다.
탐미주의는 현대생활의 권태를 강한 자극과 감각적인 쾌락에 빠짐으로써 잊으려 하는, 일종의 도피적인 귀족 취미라 할 수 있다. 이 방면의 선구자는 나가이 카후永井荷風(1879〜1959)로서 그의 작품에는 허무적인 고독감이 강하게 드러난다. 카후에 비해 적극적으로 병적인 관능 세계와 여성의 아름다움에만 흥미를 가지고 그 속에 도취하려 한 사람은 타니자키 쥰이치로谷崎潤一郞(1886〜1965)이다.
시가부문에서는 키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1885〜1942), 요시이 이사무吉井勇(1886∼1960) 등이 있다.
한편, 일본 근대문학의 2대 거봉은 모리 오우가이森鷗外와 나츠메 쇼세키夏目漱石(1867〜1916)이다. 모리 오우가이는 평론, 번역, 소설 등 다방면에 걸쳐서 윤리라든가 인간의 삶의 방법을 사회의 풍습이라는 면에서 비판하였다. 나츠메 쇼세키는 인간의 이기주의 문제를 다루어 그것을 깊이 분석함으로써 인간성의 본질을 추구하려 하였다. 이들 두 작가는 자연주의 문학이 내버리고 돌보지 않는 윤리상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각각 다른 각도에서 문제 삼은 작가들이다. 따라서 그들의 작품은 자연주의나 탐미주의가 감각이나 육체에만 편중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내면적이고도 심리적인 해부를 주로 하였고, 세계에 대한 이해가 보다 깊고 넓었다.
나츠메 쇼세키의 영향을 받아 휴머니즘을 신장시키려는 목적으로 문학운동을 일으킨 사람으로는 《시라카바白樺》라는 잡지를 중심으로 활동한 무샤노코지 사네아쓰武者小路実篤(1885〜1976), 시가 나오야志賀直哉(1883〜1971), 아리시마 타케오有鳥武郞(1878〜1923) 등 ‘시라카바파’로 일컬어지는 작가들이다.
이들은 물질보다 정신을 중시하였고, 자연주의와 반대로 자신을 존엄한 것으로 바라보았으며, 그러한 개성을 펴는 것이 인류에 이바지하고 우주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심 인물은 무샤노코지 사네아쓰이다. 시가 나오야는 ‘단편의 신’이라고 일컬어 졌는데, 간결한 문체로 영혼의 깊이를 추구했다. 아리시마 타케오는 가장 강한 사회의식을 지닌 작품을 썼다.
‘시라카바파’보다도 더 가까운 나츠메 쇼세키의 제자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1892∼1927)이다. 그는 빈틈없는 기교와 정확한 문장으로써 인생을 깨끗하고 정확하게 표현한 지적인 단편을 발표하였다. 이시기 지적인 경향을 띤 기쿠치 히로시菊池寛(1888〜1948)는 ‘상식’을 생활의 중심에 두고 소설을 썼다.
자연주의 이후의 소설, 특히 타야마 카타이田山花袋, 이와노 호메이岩野泡鳴, 무샤노코지 사네아쓰武者小路實篤, 시가 나오야志賀直哉, 사토하루오佐藤春詠(1892〜1964) 등의 작품에는 자기를 주인공 또는 자기의 생활을 주체로 하여 픽션을 별로 가하지 않고 묘사한 것이 많다. 일본에서는 그것을 ‘사소설私小說’이라 한다. 특히 그 심경을 깊이 파헤쳐 인격의 고매함을 느끼게 하는 작품을 가리켜 ‘심경소설心鏡小說’이라 한다. 시가 나오야와 카사이 젠조葛西善藏(1887∼1928) 등은 대표적인 사소설
작가이다.
이 무렵, 사소설과 대조되는 경향으로서 사회와 자기와의 연관, 계급에 대한 의식, 빈부 격차의 타파 등을 목표로 하여, 계급 해방을 외치는 문학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1886〜1912)등이 이 경향을 선도한다. 1924년에서 1932년경에 걸쳐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이 성행하게 되었고, 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1899∼1951)의 소설 등이 주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예술활동을 정지 활동에 종속 시킨 결과로 작가의 자유로운 활동에 제약을 가져오게 되었고, 군국주의
정부의 탄압도 가혹해져 지속적인 흐름을 형성화하지는 못했다.
‘신감각파’ 문학 운동은 사소설에 반대하고 개성을 절대시하는 태도를 부정하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과 공통되지만, 예술의 기술적 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20세기 서양 문학의 기법에 의해 심리 및 감각의 비약과 현실의 새로운 정리 방법에 주력했다. 요코미츠 리이츠橫光利一(1898∼1947), 카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1899∼1972) 등의 소설가를비롯하여, 평론가 코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1902〜1983) 등이 여기에속한다. 카와바다 야스나리는 《설국雪國》으로 1968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침략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군국주의를 찬양하도록 문인들을 통제한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문단을 지킨 것은 이부세 마스지井伏鱒二(1898〜1993),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1904〜1951), 호리타츠오堀辰雄(1904∼1953), 타카미 준高見順(1907〜1965), 다자이 오사무太幸治(1909∼1948) 등이었다.
한편 전쟁기간 중에도 비교적 일본문학의 전통을 잘 간수해온 것은 탄카와 하이쿠였다. 사이토 코키치齊藤戊吉1882∼1953), 타카하마 쿄시高浜虛子(1874〜1959) 등에 의해 대표된다. 현대시 부문에서는 타카무라 코타로高村光太郞(1883〜1956), 하기와라 사쿠타로萩原朔太郎(1886〜1942), 무로우 사이세이室生犀星(1889∼1962), 사토 하루오佐藤春夫(1892〜1964) 등이 작품을 발표했다.
2. 20세기 중반기의 문학
20세기 문학은 각 분야에 거장들을 배출한 19세기 문학을 계승하여 반세기를 지나는 동안에 역시 19세기 못지않게 다양한 문예사조가 혼류하며 진행되고 있다. 1차 대전 직후의 다다이즘, 쉐르리얼리즘, 모더니즘 등과 같은 운동은 문학 창작에 국한된 것만이 아니고 문학 연구, 미술, 음악, 건축 등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하여 사실상 자매 예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대체로 이 시기 문학의 특징은 의식에 치중한다는 점이다. 관념문학이나 사실문학 역시 극히 의식적이며, 더욱이 사실주의는 단순한 풍속묘사와 객관적 표현으로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참된 원인을 찾아내어 그것을 해명하려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한편 실존주의는 주로 키에르케고르(1813〜1855)를 비롯하여 니체(1844〜1900)에 의하여 움돋기 시작하여, 2차 대전 직후에 위력을 발휘하면서, 문학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까뮈(1913〜1960)는 “현대의 정신적 위기 상황에서 믿을 것이라곤 자기 존재밖에 없다”고 역설했다. 까뮈는 그의 소설 《페스트》에서 부조리한 세계를 타파하는 데 적극적인 참여 의식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기운은 장 폴 사르트르(1905〜1982)에 의하여 이론적 토대가 더욱 공고 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작가들이 기성 질서와 단절을 노리면서도 그 연대성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그 소극성에 반발하여, 그 후에 등장한 작가에 의하여 새로운 물결이 일기 시작하였다.
앙티로망(반소설)으로 일컬어지는 이 흐름의 선두에 선 작가가 나탈리사로트(1900〜1999)라면 그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사람이 알랭 로브그리예(1922〜2008)이다. 알랭 로브그리예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이들은 냉철하게 기성의 수법이나 형식을 배제하는, 또 그것으로 말미암아 현대의 근원적 부조리를 부각해 보고자 했다.
누보 로망(nouveau roman) 일파는 이 밖에도 미셸 뷔토르Michel Butor(1926〜 ), 시몽Pierre-Henri Simon(1903〜2005) 등이 손꼽힌다.
전후 영국의 젊은 세대들은 전통을 바탕으로 한 기성세대에 반역하기 시작하였다. 존 제임스 오스본ohn James Osborne(1929〜1994)의 처녀작 〈성난 얼굴로 뒤돌아 보라〉가 상연되자, 극단 뿐만 아니라 영국문단 전체에 ‘앵그리 영 맨Angry Young men’이라고 불리는 일파가 대두 하기에 이르렀다. 반감과 분노로써 기성의 전통과 질서에 항거하는 이 그룹의 선구자적 위치에 선 사람이 존 웨인John Wain(1925〜1994)과 킹즐리 에이미스 경Sir Kingsley Amis(1922∼1995)이다. 그러나 이들은 기성세대의 다음에 내세울 새 시대의 새 철학을 준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유 없는 반항’이란 이름으로 비판되었다. 이 그룹의 대표적 비평가 콜린 헨리 윌슨Colin Henry Wilson(1931∼2013)은 ‘Out sider’란 말로서 표현하였으나, 그 역시 변혁의 방향을 대치할 분명한 설계도는 제시하지 못하였다.
미국의 2차 대전 후의 문학은 ‘비트 제너레이션beat generation’의 등장과 함께 그 막을 열었다. 부유한 미국의 소시민적 안전이나 규범적 일상생활에의 완강한 항의 및 그로부터 탈출을 기도한 젊은 시대의 반항으로서 비트 문학이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안전과 질서에의 반항 의식에 차서 오토메이션을 바탕으로 한 현대 미국의 대중사회를 불신하고 존재 이유를 개인 본연의 감정 추구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비트 문학의 대표자로 알려진 잭 케루악Jack Kerouac(1922〜1969)은 《노상에서On the Road》 제시한 바와 같이 극단적인 자기중심적 생활을 추구하는 문학을 이룩하였다. 등장인물은 예외 없이 대륙을 횡행 하는 천사와 같은 방랑자들이다. 그들은 술과 여인과 여행을 거듭하면서 일반 사회와 자기를 격리하고 자기에게만 기반을 두는 새로운 인간형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현대의 작가들이 작품의 미적 완성보다도 위기적인 역사상황과 대결하여 먼저 그 작품의 윤리적 의미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보여왔다. 루소 이후 분열을 거듭하고 있던 자아와 사회와의 반 정립적 관계를 어떠한 형식에서라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거기에 새로운 문학적 인간상을 확립시키는 것, 이것이 20세기 중반 이후의 작가들에 부과된 공통의 과제 이기도 했다.
1. 영국문학
영국의 전후 젊은 세대들은 기성세대가 구축하고 있는 전통에 반역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을 대표한 것이 ‘앵그리 영 맨’의 작가들이다.
소설의 경우는 모옴의 소설과 같이 대중적이고 난해하지 않은 것을 환영하였다. 전후에 나온 우수한 작품들은 전쟁 전에 이미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맥켄지, 케어리, 보웬, 아이비, 콤튼 버네트, 오필, 워, 그레이엄 그린, 헨리 그린 등의 작가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작가와 작품은 그레이엄 그린의 《권력과 영광》, 《정사의 끝》, 오웰의 《동물농장》, 《1984년》 등이다.*9)
시의 경우는 두 명의 계관시인 브리지스, 메이스필드를 비롯하여 시트웰 등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미국 태생의 시인 엘리어트의 주지시 운동이 차지한 비중이다. 그가 《황무지》 이하에서 보여준 형이상학적 시풍은 대부분의 젊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엘리어트는 《대성당의 살인》등 일련의 시극을 발표하여 선풍을 일으켰다.
그리고 해박한 고전의 지식과 뛰어난 지성으로써 서양문학의 전통을 옹호한 비평은 20세기 문예비평의 최고수준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9)김희보, 앞의 책 PP. 639-645.
대전은 그 자체가 영국으로 하여금 대륙과 격리되게 하는 해협의 존재를 무의미하게 만든 것과 같이, 영국문학도 국제적 성격을 띠게끔 촉진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엘리어트가 주제한 《크라이테리언》을 위시하여 기타 문예지에서 앙드레 지드와 토마스 만 등 외국의 작가를 소개하기도 하고 기고 작업을 하기도 했으며 번역을 게재하기도 하였는데 이 또한 국제적 경향을 조성하는데 이바지하였다.
주요 작품과 작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레이엄 그린(1904〜1991)은 성공회에서 카톨릭으로 개종했다. 이후 ‘카톨릭 신자인 작가’로서 죄의식과 그 외면적인 표출을 추구하기 위하여 영화적인 수법을 구사하여, 스릴러, 서스펜스를 가미한 소설수법을 채택 했다. 저널리즘에도 관계하였고 장편소설 《내성이된 나》, 《브라이튼 룩》을 발표한 뒤에 《권력과 영광》, 《사건의 핵심》, 《정사의 끝》, 《조용한 미국인》에서 카톨릭 작가로서 명성을 확립 하였다. 한편 《다 타버린 인간》(1961)은 후기 소설 중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히며, 희곡으로 〈거실〉, 〈화분창고〉 등이 있다.
존 제임스 오스본(1929∼1994)은 배우이며 극작가로 명성을 쌓았다. 1948년 19세로 처음 무대를 밟고, 연극협회에 가담하여 무대 활동을 하였다. 현대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한 세계에 사는 젊은이들의 초조함과 반항을 묘사한 희곡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가 런던 왕립극장에서 상연 되었고, 이로써 그는 ‘앵그리 영 맨(노한 젊은이들)’이란 문학 율동의 기수가 되었다. 또 〈엔터테이너〉에서는 낡은 영국제국을 상징시키는 등장 인물,현대를 조소하는 아아치의 대비를 통해 기성 사회를 비판하였다.
조지 오웰(1903〜1950)의 본명은 Eric Arthur Blair로서 인도에서 태어났다. 스페인 내란에 참전하여 공산주의 체제에 대해 환멸을 느꼈고, 그러한 경험으로 우화소설 《동물 농장》을 쓰게 되었다. 또한 그 체제가 인간에게 끼치는 위기를 포착하여 《1984년》을 발표하였다. 평론집으로 《고래 속에서》, 《코끼리를 쏘라》 등이 있다.
《동물 농장》
‘어느 농장에서 동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수퇘지 나폴레옹이 그 반란을 지휘하여 인간을 추방해 버리고 그 농장을 ‘동물 농장’이라고 고쳤다. 날이 갈수록 농장은 번창하였고, 나폴레옹은 절대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인간들이 공격해 왔다. 내부의 대립도 있었고, 돼지와 개를 제외한 동물 가운데 배가 고프다고 호소하는 동물들도 많았다. 나폴레옹은 인간도 낀 연석회의를 열어 돼지와 인간을 대등하게 하였다. 농장 이름은 다시금 ‘장원 농장’으로 바뀌었다.’ 1946년에 발표된 우화소설이다.
2. 프랑스문학
프랑스의 현대문학은 1, 2차 대전의 파괴와 혼란을 거치며 천천히 변화하였다. 일부의 작가들은 정치계로 눈을 돌렸다. 최초의 초현실주의자였던 아라공은 공산주의자가 되어, 독일에 항거하는 프랑스 지하투쟁의 지도자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열정적인 반파시스트였던 앙드레 말로는 2차 대전 뒤 방향 전환을 하였으며, 그의 중국 내란에 관한 이야기인 《인간의 조건》은 진지하고 힘찬 행동 소설의 대표작이다.
2차 대전이 종식하자, 그린(Julien Hartridge Green, 1900∼1998), 콜레트(Sidonie-Gabrielle Colette(1873∼1954), 몽테를랑(Henry Marie Joseph Frédéric Expedite Millon de Montherlant(1895∼1972), 생떽쥐페리(Antoine Marie Jean-Baptiste Roger de Saint-Exupéry(1900∼1944), 보봐르(Simone de Beauvoir(1908∼1986), 모로아André Maurois(1885∼1967), 사강(Françoise Sagan(1935∼2004), 아누이(Jean Marie Lucien Pierre Anouilh(1910∼1987) 등이 눈부시게 활약했다.
이 시기의 프랑스 소설은 주로 불안한 사회의 묘사와 위협을 받고 있는 개인의 옹호에 역점을 두었다. 한편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자기의 실존을 확인하고 행동하는 삶을 이끌려는 작가군과 카톨릭 작가들과 전기소설 분야를 개척하면서 내면적인 몽상의 세계로 탈출을 시도한 작가들 등 관심사에 따라 다양한 흐름을 형성하며 작품을 썼다.
2차 대전과 프랑스의 패전에 따른 4년간의 피점령은 프랑스 문인들에게는 시련기였다. 몇몇 젊은 작가들이 점령군 또는 비시정권에 협력하게 되나, 대다수의 문인들은 망명과 침묵으로 어려운 시기를 버텨나갔다. 반면, 일부 문인들은 적극적인 저항 운동을 펼쳤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아라공, 엘뤼아르, 모리악 등이었다.
전후의 상황 또한 혼란기로서 작가의 현실 참여가 어느 때보다 요청 되었다. 사르트르, 까뮈의 실존주의 문학을 탄생시킴으로써, 20세기 전반의 지드와 발레리 못지않은 영향을 50년대 이후의 세대에 끼치게 했다. 이 양 거두를 중심으로 보봐르, 블랑쇼(1907〜2003) 등이 실존주의 문학을 대표하며, 이들의 정치 참여는 전후 문학의 큰 특색을 이루어 ‘참여문학’이라는 이름까지 낳게 하였다. 그리고 전후세대로서 정신적인 의지를 잃은 현대인의 혼란을 풍속적으로 포착한 사강과 모로아, 에메(1902〜1967), 크노(1903〜1976) 등이 활약하고 있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 철학자이며 소설가, 극작가, 평론가로 활약했다. 37년경부터 철학논문인 《자아의 초월》, 《상상력》을 발표하고, 그의 소설 《구토》를 발간하여 실존주의 문학을 창시하고 주도했다. 제2차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여 대독저항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에 철학적 저술 《존재와 무》를, 희곡 《파리떼》 등을 출판하였고 까뮈와 알게 되었다. 그는 월간지 《현대》를 창간, 실존주의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다채로운 문필 활동에 종사하였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최고의 지성으로 활약한 사르트르는 철학에서는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아 ‘현상학적 존재론’을 전개하였다. 그는 데카르트적 자아를 넘어서 인간은 하나의 실존의 존재임을 밝히고 실존은 본질에 선행하며 실존의 주체성이라는 명제를 제시하였다. 인간의 의식과 자유의 구조를 밝히고 ‘도구와 같은 존재에 있어서는 본질이 존재에 앞서지만 개별적 단독자인 실존에 있어서는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라고 역설했다. 그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철학적 저술을 비롯하여 희곡에 《갇힌 방》, 《무덤 없는 송장》, 《악마와 신》 등을 또 그의 유명한 소설 《자유에의 길》, 《말》 등을 발표했다.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수상을 거절하여 한층 유명해졌다. 사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양가쥬망을 주장하여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까뮈는 알제리아 출신의 소설가, 극작가, 평론가이다. 그는 ‘노동극단’을 창립하여 〈아스튀리의 반란〉을 상연하였다. 알제리아 풍경의 강한 인상을 정열적으로 그리고, 반짝이는 대낮의 태양을 쬐며 미지근한 바닷물에 잠겨 자연과 한 덩어리가 되는 인간의 정열을 노래하였다. 최초의 에세이 《안과 밖》, 《결혼》 사후에 발표된 《태양의 찬가》는 그의 지중해적인 사상과 감정이 형상화된 글들이다. 까뮈는 빈곤과 병고를 체험한 소년시절부터 죽음의 관념에 위협 당하여 생과 사, 자신과 세계와의 모순과 대립에 괴로워했다. 삶에의 절망이 없이는 삶에의 희망이 없다는 ‘부조리의 철학’은 이러한 인식에 바탕하여 인간은 싸우고 반항하면서 살아야 함을 역설한다. 커다란 바위를 끊임없이 오르려는 《시지프스의 신화》와 마지막까지 자기를 배반하기를 거부한 이야기인 《이방인》은 까뮈가 창조해낸 부조리 인간의 전형, 바로 그것이다.
까뮈의 부조리에의 사색은 전쟁, 점령, 수용소, 저항운동 등 극한 상황 속에서 다듬어진다. 그 후 그는 인간을 비참한 경지에 빠뜨리며 인간의 존엄성을 더럽히는 폭력과 부정의 사태에 엄연히 맞서게 되었다. 이는 그의 이후의 소설에 잘 나타난다. 나치즘의 비인간성을 공격하는《독일친우의 편지》, 숙명에 반항하여 사회의 관계와 도덕에 역행하여 절대적인 자유를 추구하다 자멸하는 폭군의 비극을 다룬 희극 《칼리귈라》와 고향의 암담한 잿빛 생활을 피하여 남쪽의 밝은 빛을 미치도록 동경하는 여인 마르타의 범죄를 그린 《오해》를 거쳐, 장편 《페스트》에 이르러서는 그의 사회악에 도전하는 적극적인 태도가 강하게 표출된다.
까뮈는 자연과 인간을 조화시키고,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균형을 발견하고 부조리 가운데서 행복의 왕국을 찾아내려 했다. 20세기라는 불안과 절망의 시대와 일치하는 그의 문학은 세계 문학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1957년에 네덜란드의 풍속 속에서 부조리의 측면을 회화적으로 그린 《전락》으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연극에서는 종전의 낭만주의의 운문극과 자연주의의 평범한 심리주의 극은 사라지고, 소위, ‘침묵의 극’이라 불리는 내면파의 극이 나타나게 되었다. 독일 점령 시대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아누이가 연극계에 군림하였고, 지로두Jean Giraudoux (1882∼1944)도 꾸준히 희곡을 발표하였으며, 마르소, 루생 등이 이 시기에 풍류극 작가로 눈부신 활약을 했다.
비평문학에서는 19세기에 배출한 비평가들과 아카데믹하고 과학적인 문학 연구의 대가인 랑송의 교량 역할로 20세기에 연결된 역사적 방법에 의한 비평에 병행하여 작품을 작자의 내부적 측면으로부터 그 창조의 비밀을 탐구하려는 경향이 대두되었다. 티보데가 그 대표적인 존재였다. 2차 대전 이후, 블랑쇼, 풀레, 바르트, 바슐라르 등 새로운 재능을 가진 작가들이 대두하여 재래의 소설문학에 대한 부정의 방향에서 신소설 또는 반소설의 모험을 진행하면서 구조주의 혹은 정신분석적 지식 등을 비평
에서 시도하는 신비평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바슐라르(1884〜1962)는 소르본에서 역사와 과학, 철학을 강의하였다. 그의 생애에서 전반의 연구는 《과학정신의 형성》, 《부정의 철학》 등 비판적, 합리주의적 인식론의 시도와 《불의 정신분석》, 《물과 꿈》, 《공기와 꿈》, 《흙과 휴식의 몽상》 등 일련의 ‘상상의 형이상학’의 시도로 나뉜다. 후자는 시적 감각이 넘쳐흐르는 독자적인 정신분석적 방법에 의해 흙, 물, 공기, 불 등 4원소를 중심으로 물질 이미지를 분석하고, 몽상이라는 ‘인식상의 장해’의 원천에서 숨겨진 깊은 심층심리적 진실을 규명, 가치 부여를 하고 있다. 바르트 등의 비평가와 젊은 시인들은 바슐라르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후년에는 시적 몽상이야 말로 미래에 열려진 것보다 차원이 높은 새로운 현실의 창조라는 확신을 굳혔다.
후기 저서인 《공간의 시학》, 《몽상의 시학》, 《촛불의 불꽃》 등에서도 이미지의 현상학적 주해를 주축으로 하여 ‘시인의 창조적 의식과의 교류에의 유도’를 시도했다. 이같은 그의 이론이 현대 문학의 방향을 주도해 나가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라 하겠다.
3. 독일문학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은 동서로 양단되는 슬픔에 접하게 된다. 해외 망명 중 반파시즘의 통일전선에 결집되었던 작가들도 종전이 되자 서독으로 귀국하는 자, 동독으로 가는 자, 또는 망명 국가에 눌러 앉아 귀국하지 않는 자 등 세 가지 양상으로 나뉘게 되었다. 종전 후 이러한 냉전체제와 분단에 대한 인식은 통일국가가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문학작품에 투영되어 왔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여류 작가 안나 제거스는 반파시즘의 소설 《제7의 십자가》와 《통과 허가증》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차지하였고, 종전 후 멕시코에서 귀국하여 서사시적 대작 《죽은 자는 언제까지나 젊다》를 발표하였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발표하여 세계적 명성을 차지한 레마르크는 제2차 대전 직후 《개선문》을 발표하였다.
전후 서독의 문학은 헤세, 토마스 만, 카룻사 등의 작품과 릴케의 미발표 유고 서한과 연구서가 간행되었다. 더불어 카프카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과 전쟁 중 갖은 탄압을 받았던 기독교 작가들이 활발한 활동을 시작한 것도 서독 문단의 특색이었다.
베르겐그륜(1892∼1964), 슈나이더(1903〜1971), 슈테판 안드레스(1906〜1970), 여류 작가 게르트루트 폰 르포르(1876〜1971), 랑겟서(1899〜1950), 그리고 하인리히 뵐(1917〜1985) 등이 여기에 속한다.*10)
10)독일문학에 관한 항목은 김희보, 앞의 책, PP- 690-691.
전후 서독 문단의 정신 풍토를 굳이 규명한다면 토마스 만, 카프카브로흐 및 무질(Robert Musil)의 영향에 사르트르를 위시한 세계 문학의 조류도 더해져 복잡한 양상을 띤 휴머니즘적이면서 능동적 허무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47년에 형성된 전후 세대의 작가 집단인 ‘47년 그룹’에도 ‘실존’과 ‘앙가쥬망’의 의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가혹한 전쟁 체험을 하고 나서 희곡 《문밖에》를 발표한 뒤 요절한 보르헤르트(1921~1947)는 시대의 대변자였다.
시의 경우 레만(1882〜1968)과 뢰르케(1884〜1941)가 젊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소설의 경우 카작(1896〜1966)의 《흐름의 배후에 있는 도시》는 미래 소설로서, 카프카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생의 한 가운데》의 여류작가 루이제 린저와 스위스 태생인 《내 이름은 가텐바인》의 프리시도 이 시기를 대표한다.
레마르크는 제1차 대전에 참가하여 다섯 차례 부상하였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로 인기작가가 되었고 《귀환에의 길》을 발표함으로써 나찌스에 의해 독일 국적을 박탈당했다. 1949년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이외의 작품으로 《생명의 불꽃》(1952), 《사랑할 때와 죽을 때》(1954)가 있다. 《개선문》은 1945년 발표한 작품으로 허무감과 함께 휴머니즘의 짙은 향기를 느끼게 하는 전쟁문학의 걸작이다.
하인리히 뵐(1917〜1985)은 인간의 모든 비극적인 모순을 통하여 생의 참된 모습을 구현하려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197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에 《정각 열차》(1949), 《아담, 너는 어디 있었는가?》(1951), 《그리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53), 《아홉시 반의 당구》(1959) 등이 있다.
귄터 그라스Grass(1927∼2015)는 《양철북》(l959)에서 키가 세살 때 그대로라는 특이한 주인공의 눈을 통해 대전에서 부터 전후에 걸친 독일 사회의 혼란을 묘사하였고 그 뒤에도 《고양이와 쥐》(1961) 등 일련의 문제작을 발표하였다.
한스 에리히 노사크Hans Erich Nossack(1901∼1977)는 중편 《불가능한 증거 조사》와 장편《늦어도 11월에는》 등에서 극히 일상적인 사건 속에 스며있는 불안과 초조를 묘사하고 초현실적인 미지의 세계의 존재를 감각적으로 포착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극에서는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에 관한 로마교황의 책임을 추궁한 《신의 대리인》으로 일약 각광을 받게 된 롤프 호흐후트Rolf
Hochfuth(1931∼2020), 작가 자신의 청춘시대를 묘사한 소설 《양친과의 이별》(1961)과 희곡 《장 파울마라의 살해》(1964)로 주목을 받게 된 페터 바이스Peter Ulrich Weiss(1916〜1982), 극 외에 시와 소설 및 평론 등 다방면에서 정력적 활동을 하고 있는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Hans Magnus Enzens berger(1929~ ) 등이 주목되고 있다. 이 모든 극은 한결같이 브레히트의 영향을 받은 이른바 “도큐멘트 드라마”로서 전후의 연극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4. 미국문학
전후 미국은 소련과의 냉전, 한국전쟁, 민권운동, 우주 탐험 그리고 베트남전으로 사건이 이어지다가 오일 쇼크로 빚어진 세계적 불황 속에서 80년대를 맞게 된다. 20세기에 미국은 유례없는 풍요와 번영을 누리면서 문물이 고도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현대 산업사회는 그 나름의 부작용을 일으켜 많은 문제를 안겨주고 있다. 이런 문제를 예리하게 의식한 수많은 작가와 작품과 운동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 가운데 《호밀밭의 파수꾼》을 내놓은 J . 샐린저는 전후세대를 대변했고, H. 후크는 《케인호의
반란》으로 중류층의 보수주의를 대변했다. 또한 50년대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어난 젊은이들의 비트 운동은 인습에 대한 혐오와 불만을 강하게 표출하였고, 더 나아가 선禪에 의하여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였다. J. 케루악(1922∼1969)의 소설 《방랑》은 비트문학의 대표로 꼽힌다.
비평 활동도 활발해졌는데, 전후의 갑자기 불어난 대학생에게 문학을 가르치는데 분석비평이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 작품 자체의 내용과 형식을 중심으로 작품의 이해를 강조하는 분석비평은 랜섬, 워렌, 브룩스에 의하여 발전된 신비평으로 1950년 비평문학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60년대 이후의 미국 문단에서 두드러진 것은 유대계 작가와 흑인작가의 활약이다. 흑인문학은《보이지 않는 인간》의 엘리슨이 뛰어났고, 이런 흑인문학은 차차 백인문학을 전적으로 거부하려는 격렬하고 호전적인 경향을 보였다.
유대계의 작가로는 샐린저에 이어서 솔 벨로우, 멜라멋, 노먼 메일러 등이 있다. 이들은 도시화된 미국 문명 속에서 그들의 소외된 처지와 박식과 검소성과 세계상과 생존의 지혜를 토대로 소설을 써서 독자를 끌었다. 베트남전 이후, 문학의 특색 중 하나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성욕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존 업다이크의 모든 작품은 물론이고, G. 바이덜의 《마일러 브레킨리지》, 필립 로스의 《포트노이의 불만》과 《유방》 등은 미국 사회의 성의 해방을 반영하고 있다.
연극에서는 《세일즈맨의 죽음》(1949)을 쓴 A. 밀러와 T. 윌리엄스가 대표적인 작가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시에서는 R. 로월이 단연 빛나는 존재이다.
비평문학은 L. 트릴링 같은 전문 평론가들의 독점에서 벗어나 대학의 문학교수들이 비평문단의 주류를 이루며, 작가연구와 작품연구를 비롯한 항구적인 비평서적을 줄기차게 쏟아내고 있다.
마아커스 컨리프가 밝힌 《1945년 이후의 미국 문학》에서 미국의 생활과 문학의 근황 중 몇 가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 첫째는 상상할 수 있는 온갖 형태의 성욕에 대한 계속적이며 보다 더 세밀한 개척, 예컨대, 비달Gore Vidal(1925〜1912)의 《마이러 백켄리지Myra Bveckenridge》(1968), 업다이크John Updike(1932∼2009)의 《부부들》(1968), 《돌아 온 토끼》(1971), 로스Philip Roth(1933〜2018)의 《포오트노이의 불만》(1969) 등이 있는데, 그 노골적인 묘사들은 10년 전만 하더라도 이 작품
들이 판금 당했을 가능성이 많다. 둘째는 월남전쟁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항의와 시위운동에 나타난 노여움, 절망, 거부, 묵시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메일러Norman Mailer(1923〜2007)의 《야간 운송》(1968)에서 비상한 예민성을 가진 고백체로 그려져 있다. 셋째는 엘리슨Ralph Ellison(1914〜1994)과 보올드윈James baldwin(1924〜1987)의 작품에 나타나는 것으로서 백인과의 타협을 거부하며 흑인 문화를 새로 강조하는데 있어서 강한 반발을 보이고 있다.
미국은 여러 민족을 받아들여 하나로 융합시켜 그 곳에서 점차 하나의 미국 민족, 미국의 정신을 형성시키는데 성공하여 왔다. 거기에는 전통적인 것뿐만 아니라 그것과 또 다른 문화가 있는데 그것은 그 광대한 국토와 풍부한 지하자원을 배경으로 한 활달하고 풍부한 문화가 그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11)
5. 한국문학
1) 전후 문학
I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은 우리 민족과 그 문화를 지난 35년간의 일제의 쇠사슬로부터 해방시켰다. 문학도 그 해방의 무드 속에서 민족문학의 건설의 기치를 내세우고 새 출발을 하였다. 그러나 모처럼 일어났던 소생의 기운은 얼마 못되어 냉혹한 국제 정세에 의해 좌절되었다. 38선으로 국토와 민족이 분단되고, 사회는 좌우대립으로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뒤이어 처참한 6.25전쟁으로 남북의 국토는 전화 속에 쑥밭으로 화하였다.
이런 상태 속에서 민족문학이 제대로 일어나 발전하기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사회적인 악조건 속에서 그 나름대로의 문학이 있었다고 하면 문학잡지, 그 중에서 49년에 발간된 《문예》지 등을 통하여 기성작가의 작품도 나오고, 신인도 계속하여 등장하였다는 것이다.
박두진,박목월, 조지훈의 청록파 시집, 박인환, 김수영 등이 중심된 모더니스트의 시집 《도시와 시민의 합창》 등이 나온 것이 특기할 일이다.
손소희, 한무숙, 강신재 등 그리고 김성한, 오영수, 정한숙, 전광용 등이 전쟁 전후를 장식한 소설가들이다.
11)전규태《동서문학의 조류》(전규태, 1985, 일신사) p.365.
50년대 초반은 한국동란기로 문학사상 혼란기였다. 전선에 종군한 시인, 작가들의 르포르타지 작품들이 그 때마다 발표된 것이 있으나 전쟁체험을 객관적으로 볼 만한 거리감이 부족했고, 이념적인 편향성 때문에 문학사상에 기록될만한 작품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우리 문학은 5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 재능 있는 신인들의 다수 등장으로 새로운 전환기를 맡게 되었다. 소설에서 손창섭, 장용학 등에 뒤 이어 서기원, 선우휘, 이호철, 한말숙, 박경리 그리고 최인훈 등이 나타났으며, 시에선 신동엽, 김춘수, 박봉우 등이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다.
이 시기의 신인들의 주된 작품경향을 몇 가지로 나누어서 이야기할 수 있다. 첫째는 한국전란을 소재로 하여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비인간적인 잔혹성을 고발한 것으로 박영준의 《빨치산》, 황순원의 《카인의 후예》,선우휘의 《불꽃》, 이호철의 《부군浮群》 등이 있다. 둘째는 전후의 아프레게르의 신 윤리의 작품들이 밖에서 온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
으면서 나왔는데 가령 서기원의 《암사지도》, 한말숙의 《신화의 단애》등을 거론할 수 있다. 셋째는 부정부패와 부조리한 현실을 폭로하는 작품은 김성한의 《암야행》에서 시작하여 유주현의 《장씨일가》 등을 거론할 수 있다.
한편, 이 시기에 신세대론이 문단에서 논란거리가 되었는데,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가 윤리관이나 작품경향에서 큰 대조를 보였다.
소설에서 중편소설이 붐을 이루며 《문학예술》, 《사상계》, 《새벽》 등에 발표되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안수길의 《북간도》, 최인훈의 《광장》 등은 이 시기(50년대) 후반기에 등장한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이 중편 소설이 터놓은 토대 위에 60년대로 접어들면서 많은 수의 장편소설이 문학사를 장식한다.
2) 60년대 이후의 문학
6.25사변으로 인한 물질적 손실과 정신적 상처는 60년대 초엽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뼈아픈 체험으로 남아 있었다. 오상원, 서기원, 강용준 등이 이 시기에 전쟁의 여러 상흔과 치유의 몸부림을 소설을 통해 보여 주었다.
4.19 혁명과 5.16을 경험하면서부터는 작가의 정치, 사회에 대한 시민적 각성 내지 비판의 소리가 높은 작품들이 발표되었다. 김정환의 《모래톱 이야기》, 이호철의 《판문점》, 남정현의 《분지》 등이 바로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이 시기에 현실을 고발하고 풍자하며 민중의 정서와 가락과 삶에 특별한 관심을 모아온 시인들의 노력이 돋보였다. 즉 김수영, 신동문, 신동엽, 신경림 등의 작업을 간과할 수 없다. 그리고 시의 표현 기교에 새로운 실험을 끈질기게 시도하는 시인들 즉 김춘수, 전봉건, 신동집, 김구용, 김종삼, 박희진 등의 이름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과 함께 재래적인 풍속과 윤리와 신앙과 사상을 중시하여 회고적이며 소박한 자연에의 도취, 토속어의 애용 등을 특징으로 하면서 우리시의 전통을 이어온 시인들도 시단의 한 흐름을 형성하였다. 이원섭, 김윤성, 이동주, 천상병, 박재삼, 이성교, 김관식, 구자운 등이 이에 속하는데 김소월과 김영랑에서 출발하여 김광섭, 서정주와 맥을 잇고 청록파 시인에게서 한 봉우리를 이룬 전통적 서정주의에 바탕을 둔 시인들이다.
한편 소설에서는 60년대의 이후 내성적 기교주의로 불릴만한 젊은 세대의 작가들이 등장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이청준, 전상국, 류재용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이들의 작품은 50년대 작품 세계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개인주의적 내성과 새로운 감성의 세계를 섬세한 언어기교로 그려내고 있다. 또한 소설사에서 볼 때 이때에 이르러 단편소설 위주의 시대에서 벗어나 장편소설시대로 들어가는 전기를 마련했다는 사실을 묵과할 수 가 없다. 문학 전문지는 물론 종합 월간지에서도 장편을 연재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박경리의 《토지》는 1994년 완간을 볼 때까지 이 후 20여년간 연재하여, 장편소설을 뛰어 넘어 대하소설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6. 일본문학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이를 찬양하고 고무하는 국가주의 어용御用문학이 성행했으며 그 외의 경향들은 정부의 통제에 침묵을 강요 당해야만 했다. 전쟁이 끝나자, 카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는 《설국雪國》,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는 《여수旅愁》를 썼다.
대전 후에는 노대가들을 포함한 기성작가들의 힘찬 부활상을 보이며 이부세 마스지井伏鱒二 등이 작품을 발표하였고 평론분야에서 코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가 참신한 비평세계를 구축하였다. 연극에서는 키시다 쿠니오岸士田國土, 쿠보 사카에久保榮의 창작극 등이 나왔으며 시가詩歌에 있어서는 호리구치 다이가쿠堀口大學의 번역시가 있었고, 미요시 다쓰지三好達治, 미야자와 겐지宮賢治 등이 활약했다.
다자이 오사무太幸治 등 전전戰前 작가가 전면에 나타남과 동시에 전쟁의 체험과 반성을 쓴 오오카 쇼헤이大岡昇平의 《후료키浮慮記》, 코미카와 준페이五味川純平의 《인간의 조건》 등이 이 시기를 대표한다.
시이나 린조椎名麟三와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淸張 등의 전후파 작가들이 등장했다. 마쓰모토는 1961년 이후 추리소설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서 광범위한 독자를 얻었다. 작품경향은 사私소설, 풍속소설 등 전통적 작품과 민주주의 문학 일파와 타락을 강조해서 정서의 정화를 노리는 일파 등이 있었으나 이들은 정치, 혁명, 실존 등 현재의 과제를 다루면서 일본인의 반성을 촉구하는 작품을 주로 썼다.
제2 신인군으로 불리는 오오카 쇼헤이大岡昇平, 홋타 요시에堀田善衛에 이어서 제3의 신인군인 쇼오노 쥬죠莊野潤三, 엔토오 슈우사쿠遠藤周作, 미우라 슈몽三浦朱門, 소노 아야꼬曽野 綾子 부부작가 등이 활약 하여 문단의 안정을 보였다. 그러다가 1955년 이시하라 신타로石原 慎太郎의 《태양의 계절》이 나오면서 다시금 문단은 혼란을 빚었다.
그후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峰潤一郞는 두 번이나 노벨상 후보에 올랐고, 카와바타 야스나리川端는 196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일본 문학을 세계에 알렸다.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는 《금각사金閣寺》 등으로 많은 독자를 확보했다. 시대별로 이 시대의 일본문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대전시대의 문학
일반적으로 1935년(昭和10)부터 2차 대전이 종식될 때까지의 10년간의 문학을 일괄해서 대전시대의 문학으로 본다.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정부의 문화통제는 무산파 문학의 대부분을 이른바 전향문학으로 변질시켰으며 예술파 문학에서도 불안한 문학론이 대두된다. 그러한 가운데 민족주의 발흥에 대한 고전정신이 부흥의 영향을 입어 일본 낭만파가 탄생한다.
이 시대의 문학 현상의 특징으로 지적되는 것은 정부의 명에 의해 각종의 문학단체가 일본보국문학회로 통일을 보게 된 일이다. 그리하여 모든 문학 형태의 작가와 일문, 한문연구의 학자들도 그 산하에 모여졌고, 그 활동 방향은 정치적 목적에 부합하도록 통제되었다. 작가들은 종군작가 보도원 또는 선무반으로 동원되었으며 전쟁으로 인해 자재가 부족하여 인쇄 문화가 쇠퇴하고 작가활동은 거의 폐쇄상태에 빠지게 된다. 전쟁 말기에 이르러 이른바 낭독문학이 유행하게 된 것은 이 시기의 문학 활동이 암송이란 마지막 선택을 하게 된 증거이다. 문학가는 표면상 우대를 받고 있었으나, 군국주의와 관련되지 않은 어떤 자유주의적 색채를 띤 작품도 발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특기할 것은 전통 문학의 동향이다. 대정大正 말기에서 소화昭和 초기에 걸쳐 신감각파를 중심으로 한 예술적 근대파와 좌익문학이 눈부신 활약을 한 반면 전통파의 문학은 상대적으로 의기가 소침해 있었다. 그러나 예술적 근대파는 표현형식의 존중 때문에 인간성의 상실과 현실의 해체의 상황에 대응하지 못했고, 좌익문학은 문학 탄압이란 외적인 압력에 의해 그 조직이 해체되고 운동은 붕괴되고 만다. 이들의 몰락과는 대조적으로 전통문학의 부흥현상이 일어나 기성작가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것도 이 시기의 특색이다.
2) 대전후의 문학
전쟁의 종결은 굴절되었던 문학계에 해방감과 함께 새로운 모색의 시기를 예고한다. 낡은 것은 부활하고, 더불어 새로운 것의 출현이 이어지며, 크게 전통문학파, 민주주의 문학파, 전후파라는 세 갈래의 흐름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전통파에 속하는 기성의 대가들은 문단에 복귀하여 전쟁 중에 써두었던 작품의 발표를 통하여 전후문학의 기수로써 활약한다.
이러한 풍조 속에서 또 다른 흐름으로 전후의 문단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은 것은 잡지 《근대문학》을 중심으로 한 제1차, 2차 전후파의 문학이라 하겠다.
한편 전시 하에 탄압을 받았던 좌익문학의 흐름을 이은 민주주의 문학은 그 세력을 결집하여 문단에 복귀했다. 그들은 잡지 《신일본 문학》을 중심으로 활약을 하였으나, 사상의 대립에 의해 분열과 통합을 거듭 하면서 내분이 그치지 않았다. 이 밖에도 신희작파新獻作派에 의해서 전후의 혼란한 세태를 일종의 풍속소설로서 묘사하기도 했다.
현재 일본 문단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제1차, 2차 전후파의 뒤를 이어 등장한 제3의 신인이라고 불리는 젊은 세대들이다. 그들이 가지는 특색의 하나는 사소설적 경향이다.
3) 노벨문학상과 일본문학
예술적 근대파에 속하면서 신감각파 논의에 있어서 매우 공격적이던 카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에게 1969년 동양에서는 타골에 이어 두 번째로 노벨문학상이 수여되었다. 이는 일본의 근대 서정문학의 고전이라고 불리는 《설국雪國》을 비롯한 일련의 작품이 일본적인 미의 세계를 그린 것으로 평가된 탓이다. 이리하여 일본문학에 대한 세계의 관심은 일약 고조되고 일본문학의 번역작품이 해외에서 환영을 받게 되었다.
한편 신희작파에 의해 풍속소설이 유행하던 무렵 현대문학으로서의 하이꾸[俳句]를 부정하고자 하는 제2예술론이 논의된 일이 있는데 이것을 계기로 하이꾸 작단[俳壇]을 중심으로 반성이 일어났다. 또 순문학의 변질도 논의되었으며 중간소설의 유행은 SF소설이나 추리소설 등으로 문단을 변모시키고 다양화시키게 되었다.(27호에 계속 현대문학-2)
문예사조의 두 가지 측면 -문학사의 일부 -비교문학 연구의 한 분야 가령 낭만주의는 그 전시대의 고전주의와 아무런 관련 없이 돌연하게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동시에 다음 시대의 문예사조인 리얼리즘과 무관하게 종언한 것도 아니다. 이들의 상호간에는 근본적으로 일관되고 있는 문학사 전개의 어떤 질서가 있으며, 그것이 발전적인 것이든 순환적인 것이든, 또는 변증법적인 것이든, 교체 대응적인 것이든 각각의 사조에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파악해야 될 것은 문학사의 표면에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바로 그 심층 저류에 흐르고 있는 이와 같은 원리이다. 그것은 역사 철학, 예술철학의 이해 없이 쉽게 탐구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한편 우리가 문예사조라고 하면 그것을 관습적으로 그리스, 로마문학을 모태로 한 서구문학을 지칭하는 것으로 통용되고 있지만 서구 문학사가 세계문학사를 대표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 중국, 일본 등의 동아시아 문학, 아랍문학, 인도문학 또는 아프리카 문학도 그에 못지않게 세계 문학사에 공헌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당한 의미의 문예사조 란 세계문학을 포괄적으로 수용하지 않고서는 기술되지 못할 터이다.*12) 문예사조란 문학의 태도, 기질 등을 뜻하는 용어지만 문예사조를 살피는 일은 계속적인 작업이며 무엇보다도 문학사상의 흐름을 통해서 미래를 예측할 수 있고 삶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에 있다.*13) 그렇다고 보면 문예사조를 연구하는 작업은 문학상 필연적이며 그 탐구는 계속적일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
12) 오세영『문예사조』(서울: 고려원, 1983) 서문 참조.
13) 이상섭『문학의 이해』(서을: 서문당, 1977) p.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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