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설움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욱마다 눈물 고였네
선창가 고동소리 옛님이 그리워도
나그네 흐를길은 한이 없어라
타관땅 밟아서돈지 십년너머 반평생
사나이 가슴속엔 한이 서린다
황혼이 찾아들면 고향도 그리워져
눈물로 꿈을 불러 찾아도 보네
낯익은 거리다마는 이국보다 차거워
가야할 지평선엔 태양도 없어
새벽별 찬서리가 뼈골에 스미는데
어디로 흘러거랴 흘러 갈소냐
이창민(백년설)은 학창시절 문학과 연극에 관심을 갖고 할발하게 활동했으며 23세 때
테너 안기영(그리운 강남 작곡자)에게 시에 소질이 있음을 인정받고 콜럼비아사에 입사해
작사가로 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바로 문학공부를 위해 일본 유학을 떠났다가
태평레코드 문예부장이었던 박영호의 권유로 일본 고베의 태평레코드사에 채규엽, 박향림, 김추월 등의
취입을 위해 방문했다가 그가 작사한 "유랑극단"을 취입하고 가수로 나서며 백년설이라는 에명을 쓰기 시작한다.
(박영호는 박단마를 스카웃하기도 한 인물)
1939년 초에 발매된 "유랑극단"이 뜻밖의 인기를 얻자 태평레코드 전속가수가 된 백년설은
"두견화 사랑", "고향의 지평선", "일자일루"를 모두 히트시키며 두각을 나타내다가 1940년
"나그네 설움"을 빅히트시키며 10만장의 음반을 판매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하나,
일제에 의해 볼온한 가사라는 이유로 경찰서로 끌려가 혹독한 고초를 당하기도 한다.
일제 막바지인 1943년 친일가요인 "아들의 혈서", "헐서 지원"을 녹음하기도 했다.
해방 후 1960년 초대 가수협회장을 지내고 1963년 은퇴하였으며, 1979년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하였으며
1980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