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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四十一回 連谷城子玉自殺 踐土壇晉侯主盟
제41: 연곡성에서 성득신이 자살하고, 천토에 단을 쌓아 진문공이 회맹을 주관하다.
話說,楚將鬥越椒與小將軍成大心,不去追趕祁瞞,竟殺入中軍,越椒見大將旗迎風蕩颺,一箭射將下來。晉軍不見了帥旗,即時大亂。卻得荀林父先蔑兩路接應兵到,荀林父接住鬥越椒廝殺,先蔑便接住成大心廝殺。成得臣麾軍大進,攘臂大呼曰:「今日若容晉軍一個生還,誓不回軍!」正在施設,先軫郤溱兵到,兩下混戰多時。欒枝、胥臣、狐毛、狐偃一齊都到,如銅牆鐵壁,圍裹將來。得臣方知左右二軍已潰,無心戀戰,急急傳令鳴金收軍。怎當得晉兵眾盛,把楚家兵將,分做十來處圍住。
한편, 초나라 장수 투월초와 소장군 성대심은 기만을 쫓아가지 않고 마침내 진(晉)나라 중군 진영으로 돌진했다. 투월초는 바람에 나부끼는 대장기를 보고 화살을 쏘아 땅에 떨어뜨렸다. 진나라 군사는 대장기가 보이지 않자 즉시 큰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곧바로 순임보와 선멸이 이끄는 두 갈래 지원부대가 달려와서 순림보의 군사는 투월초의 군사들을 향해 공격하고, 선멸의 군사는 성대심의 군사를 향해 공격했다. 성득신이 대군을 휘몰아 진격하면서 팔을 걷어올리며 크게 외치기를, “오늘 내가 진나라 군사들을 한 놈이라도 살려 보내면 맹세코 회군하지 않으리라!” 하고 돌격하려는데, 선진과 극진의 부대가 도착하여 양쪽에서 한참을 혼전할 때, 난지, 서신, 호모, 호언 등이 일제히 도달하여 철옹성을 이루며 초나라 군사를 포위하고 압박해 왔다. 성득신이 비로소 초나라의 좌군과 우군이 이미 무너졌다는 것을 알고, 싸울 생각이 없어져서 급하게 징을 쳐서 군사들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수많은 진나라 군사들이 초나라 군사를 십여 곳에 나누어 포위하였으니, 어찌 당해내겠는가.
小將軍成大心一枝畫戟,神出鬼沒,率領宗兵六百人,無不一以當百,保護其父得臣,拼命殺出重圍。不見了鬥越椒,復翻身殺入。那鬥越椒,乃是子文之從弟,生得狀如熊虎,聲若豺狼,有萬夫不當之勇,精於射藝,矢無虛發。在晉軍中左沖右突,正尋覓成家父子。恰好成大心遇見,說:「元帥有了,將軍可快行!」兩個遂合做一處,各奮神威,復救出許多楚軍,潰圍而出。晉文公在有莘山上,觀見晉兵得勝,忙使人教先軫傳諭各軍:「但逐楚兵出了宋衛之境足矣。不必多事擒殺,以傷兩國之情,負了楚王施惠之意。」先軫遂約住諸軍,不行追趕。祁瞞違令出戰,囚於後軍,伺候發落。
소장군 성대심은 화극을 들고 문중의 600여 군사들을 몰아 신출귀몰하였다. 그는 일당백의 기세로 그 부친 성득신을 호위하면서 필사적으로 겹겹이 둘러싼 진나라 군사의 포위망을 돌파했다. 성대심은 투월초가 보이지 않자 다시 몸을 돌려 포위망 속으로 쳐들어갔다. 투월초는 영윤 자문의 종제로서 생기기는 마치 곰과 호랑이 같고, 목소리는 승냥이 같았으며, 만 사내도 당할 수 없는 용기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활쏘기에도 정통하여 화살이 잘못 맞는 일이 없었다. 투월초는 진나라 군사의 포위망 속에서 좌충우돌하며 성득신 부자를 찾아다니던 중에 성대심을 만나게 되었다. 성대심이 투월초를 보자 소리치기를, “원수께서는 이미 몸을 빼셨으니 장군께서도 빨리 가십시다.” 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쳐 한 곳을 향하여 각각 귀신같은 위세를 떨쳤다. 다시 수많은 초나라 군사들을 구하여 진나라 군사의 포위망을 무너뜨리고 탈출했다. 진문공은 유신(有莘)의 뒷산 정상에서 진나라 군사가 승리를 거두는 모습을 보고, 급히 사람을 선진에게 보내어 각 군에게 명령을 전달하기를, “다만 초나라 군사들을 송나라 국경에서 몰아내는 것으로 만족하노라! 많은 초군을 사로잡거나 죽여 두 나라 사이의 정의를 해쳐서 옛날 초성왕에게서 입은 은혜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 했다. 선진이 즉시 여러 장군에게 초나라 군사를 추격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기만이 명령을 어기고 출전했기 때문에 후군에 감금하여 처분을 기다리게 했다.
胡曾先生有詩云:「避兵三舍為酬恩,又誡窮追免楚軍;兩敵交鋒尚如此,平居負義是何人?」陳、蔡、鄭、許四國,損兵折將,各自逃生,回本國去了。單說,成得臣同成大心鬥越椒出了重圍,急投大寨。前哨報:「寨中已豎起齊秦兩家旗號了!」原來國歸父小子憖二將殺散楚兵,據了大寨,輜重糧草,盡歸其手。得臣不敢經過,只得倒轉從有莘山後,沿睢水一路而行。鬥宜申鬥勃各引殘兵來會。行至空桑地面,忽然連珠砲響,一軍當路,旗上寫「大將魏」字。魏犨先在楚國,獨制貘獸,楚人無不服其神勇,今日路當險處,遇此勁敵,那殘兵又都是個傷弓之鳥,誰人不喪膽消魂!早已望風而潰了。
호증선생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삼사를 후퇴하여 옛날 은혜를 갚고자 했고, 다시 명을 내려 궁지에 몰린 초군을 쫓지 말라고 했다. 서로 싸우면서도 오히려 이렇게 은혜를 못 잊었거늘, 평소에도 은혜를 저버린 사람들은 어찌 된 것인가?” 했다. 진(陳), 채(蔡), 정(鄭), 허(許) 네 나라의 장수들과 병사들은 싸움에서 많이 죽고 패잔병들은 각자 목숨을 구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한편, 성득신은 성대심, 투월초와 함께 겹겹이 쳐진 진나라 군사의 포위망을 뚫고 급히 본영으로 달려갔다. 앞선 초병이 보고하기를, “우리 진영에 이미 제나라와 진(秦)나라의 깃발이 세워져 있습니다!” 했다. 원래 제나라 의 국귀보와 진(秦)나라의 소자은(小子憖) 두 장수는 초나라 군사를 급습하여 초나라 본영을 점령하고 치중과 양초를 모두 손에 넣었다. 성득신이 감히 지나가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유신산 뒤로 돌아 수수(睢水)의 강변을 따라갔다. 투의신과 투발도 각기 패잔병들을 끌고 와서 합류했다. 그들의 행렬이 공상(空桑) 땅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연달아 포성이 울리며 한 떼의 군마가 길을 막았다. 깃발에 쓰기를, ‘대장위(大將魏)’라고 쓰여 있었다. 위주는 옛날에 초나라에 있었을 때 혼자 맥(貘)을 잡은 일이 있어서 초나라 사람들은 그의 귀신같은 용기에 탄복하고 있었다. 오늘 험한 곳에서 강한 적을 만났으니 저 패잔병들은 모두가 화살에 다친 새의 처지가 되어 누군들 간담이 떨어지고 넋이 나가지 않았겠는가! 이미 바람맞은 풀잎처럼 흩어졌다.
鬥越椒大怒,叫小將軍保護元帥,奮起精神,獨力拒戰。鬥宜申鬥勃也只得勉強相幫。魏犨力戰三將,水泄不漏。正在相持,忽見北來一人,飛馬而至,大叫:「將軍罷戰,先元帥奉主公之命:『放楚將生還本國,以報出亡時款待之德。』」魏犨方纔住手,教軍士分開兩下,大喝:「饒你去!」得臣等奔走不迭,回至連谷,點檢殘軍,中軍雖有損折,尚十存六七;其申息之師,分屬左右二軍者,所存十無一二。哀哉!古人有弔戰場詩云:「勝敗兵家不可常,英雄幾個老沙場?禽奔獸駭投坑穽,肉顫筋飛飽劍鋩;鬼火熒熒魂宿草,悲風颯颯骨侵霜。勸君莫羨封侯事,一將功成萬命亡!」
투월초가 크게 노하여 소장군 성대심에게 원수 성득신을 보호하라고 외친 후에 정신을 차려 혼자 위주에게 항거하여 싸웠다. 투의신과 투발도 할 수 없이 열심히 도왔다. 위주는 초나라의 세 장수를 상대하면서 한 사람도 지나가지 못하도록 길목을 막았다. 서로 버티고 있는데, 갑자기 북쪽에서 한사람이 말을 달려와서 큰소리로 외치기를, “장군은 싸움을 멈추시오! 선진 원수께서 주공의 명을 받들어 ‘초나라 장수들과 병졸들을 방면하여 본국에 생환시켜 주공이 망명하셨을 때 환대를 받은 은혜에 보답하라!’라고 하셨습니다.” 했다. 위주가 비로소 손을 멈추고 군사들에게 지시하여 양쪽으로 비켜서게 하면서 큰소리로 외치기를, “너그러이 너희를 보내준다!” 했다. 성득신 등은 서둘러 달아나서 연곡에 이르러 군사들을 점검하여 보니 중군은 비록 어느 정도 꺾였지만, 아직 열에 여섯 일곱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신읍(申邑)과 식읍(息邑)의 군사로 좌군과 우군에 속했던 자들은 남아 있는 자가 열에 한 둘이었다. 슬프다! 옛사람이 전장을 조상하는 시에 이르기를, “이기고 지는 것이 군사들에게 심상한 일이 아니니, 영웅은 몇이나 전쟁터에서 늙었을까? 새와 짐승도 놀라 굴속으로 몸을 숨겼고, 군사들의 살점과 힘줄은 칼날에 흩뿌려졌도다. 귀신불은 반짝이고 넋이 풀잎에 머물렀는데, 슬픈 바람 소리 쏴 하고 뼈에 서리가 서렸도다. 권하건대 제후에 책봉됨을 부러워하지 말라. 한 명의 장군이 세운 공은 만 명의 죽음이거니!” 했다.
得臣大慟曰:「本圖為楚國揚萬里之威,不意中晉人詭謀,貪功敗績,罪復何辭?」乃與鬥宜申鬥勃俱自囚於連谷,使其子大心部領殘軍,去見楚王,自請受誅。時楚成王尚在申城,見成大心至,大怒曰:「汝父有言在前:『不勝甘當軍令。』今又何言?」大心叩頭曰:「臣父自知其罪,便欲自殺,臣實止之;欲使就君之戳,以申國法也。」楚王曰:「楚國之法,兵敗者死。諸將速宜自裁,毋污吾斧鑕!」大心見楚王無憐赦之意,號泣而出,回復得臣。得臣嘆曰:「縱楚王赦我,我亦何面目見申息之父老乎?」乃北向再拜,拔佩劍自刎而死。
성득신이 크게 원통해 하며 말하기를, “본디 초나라를 위해 위엄을 만리에 떨치려고 하였더니, 뜻밖에 진(晉)나라 놈들의 계략에 빠져서, 공을 탐하다가 싸움에 졌으니 이 죄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이에 투의신과 투발과 함께 스스로 연곡의 감옥에 들어가서, 아들 성대심을 시켜 패잔병을 이끌고 초성왕에게 가서 뵙고 죽음을 청하게 했다. 그때까지 초성왕은 신성(申城)에 머물고 있다가 성대심이 온 것을 보고 매우 화가 나서 말하기를, “너의 부친이 ‘싸움에 이기지 못한다면 군령을 달게 받겠습니다’라고 한 말이 아직 내 귀에 생생한데 지금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느냐?” 하니, 성대심이 고개를 조아리고 말하기를, “신의 부친은 그 죄를 알아 스스로 죽음을 택하고자 하였으나 실은 신이 만류했습니다. 군주로부터 직접 명을 받아 죽어야 나라의 법을 밝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했다. 초성왕이 말하기를, “초나라 법에 싸움에서 진 장수는 죽게 되어 있다. 패전한 모든 장수는 마땅히 자결해야지, 나의 도끼와 모탕을 더럽히지 말라.” 했다. 성대심이 초성왕의 용서하지 않을 뜻을 알고 울면서 물러 나와 성득신에게 돌아왔다. 성득신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설사 대왕께서 용서했다 한들 신읍(申邑)과 식읍(息邑)의 어르신들을 무슨 면목으로 보겠는가?” 하고, 성득신은 즉시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허리에 찬 검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러서 죽었다.
卻說,蒍賈在家,問其父蒍呂臣曰:「聞令尹兵敗,信乎?」呂臣曰:「信。」蒍賈曰:「王何以處之?」蒍呂臣曰:「子玉與諸將請死,王聽之矣。」蒍賈曰:「子玉剛愎而驕,不可獨任;然其人強毅不屈,使得智謀之士,以為之輔,可使立功。今雖兵敗,他日能報晉仇者,必子玉也。父親何不諫而留之?」呂臣曰:「王怒甚,恐言之無益。」蒍賈曰:「父親不記范巫矞似之言乎?」呂臣曰:「汝試言之。」蒍賈曰:「矞似善相人,主上為公子時,矞似曾言:『主上與子玉子西三人,日後皆不得其死。』主上切記其言,即位之日,即賜子玉子西免死牌各一面,欲使矞似之言不驗也。主上怒中,偶忘之耳。父親若言及此,主上必留二臣無疑矣。」
한편, 위가가 집에 있다가 그의 부친 위여신에게 묻기를, “제가 듣기에 영윤 자옥(성득신)이 싸움에 졌다던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하니, 위여신이 말하기를, “사실이다.” 했다. 위가가 말하기를, “대왕께서는 어떻게 처리하셨습니까?” 하니, 위여신이 말하기를, “자옥과 여러 장수가 죽음을 청하여 왕이 허락하셨다.” 했다. 위가가 말하기를, “자옥은 깐간하고 고집이 세며 교만하여 혼자 맡겨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강직하고 굽히지 않아 지모 있는 사람을 찾아 보좌하게 하면 큰 공을 세우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비록 싸움에서 패했지만, 후일에 능히 진(晉)나라에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자옥입니다. 부친께서는 어찌하여 대왕께 간하여 자옥의 목숨을 구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니, 위여신이 말하기를, “대왕이 매우 성을 내어서 아마 말했어도 쓸데없었을 것이다.” 했다. 위가 말하기를, “부친께서는 범(范) 땅의 무속인 율사(矞似)가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하니, 위여신이 말하기를, “무슨 말인지 말해보라.” 했다. 위가가 말하기를, “율사는 관상을 잘 보았는데 주상이 공자 시절에 율사가 일찍이 말하기를 ‘주상과 자옥(子玉)과 자서(子西) 세 사람은 후일에 명대로 죽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주상께서는 율사의 말을 기억하고 계시다가 즉위하는 날에 자옥과 자서에게 면사패(免死牌)를 주어 율사의 예언이 맞지 않도록 했습니다. 주상이 노하시어 아마 그 일을 잊었을 것입니다. 부친께서 만약 그 일을 말하면 주상께서는 틀림없이 두 분 장군의 목숨을 살려줄 것입니다.” 했다.
呂臣即時往見楚王,奏曰:「子玉罪雖當死,然吾王曾有免死牌在彼,可以赦之。」楚王愕然曰:「豈非范巫矞似之故耶?微子言,寡人幾忘之矣!」乃使大夫潘尪同成大心乘急傳宣楚王命:「敗將一概免死!」比及到連谷時,得臣先死半日矣。左師將軍鬥宜申懸梁自縊,因身軀重大,懸帛斷絕,恰好免死命至,留下性命。鬥勃原要收殮子玉子西之屍,方纔自盡,故此亦不曾死。單死了個成得臣,豈非命乎?潛淵居士有詩弔之云:「楚國昂藏一丈夫,氣吞全晉挾雄圖;一朝失足身軀喪,始信堅強是死徒。」成大心殯殮父屍。鬥宜申、鬥勃、鬥越椒等,隨潘尪到申城謁楚王,伏地拜謝不殺之恩。
위여신이 즉시 초성왕을 뵙고 아뢰기를, “자옥의 죄는 죽어 마땅하나 옛날에 대왕께서 면사패를 그에게 주셨으니, 용서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초성왕이 듣고 깜짝 놀라 말하기를, “어떻게 하여 범 땅의 무속인인 율사와의 일을 알고 있는가? 미자(微子)의 말이 아니었다면 내가 잊을 뻔했다!” 하고, 즉시 대부 반왕(潘尫)과 성대심에게 급히 전마를 타고 초성왕의 명을 전하게 하기를, “패장들은 모두 죽음을 면하게 하라.”고 했다. 두 사람이 연곡에 도착하였을 때, 성득신은 죽은 지 이미 한나절이 지난 후였고, 좌군장군 투의신은 대들보에 목을 매었으나 체구가 너무 무겁고 커서 목을 맨 비단 끈이 끊어져, 마침 그때 죽음을 면한다는 명령이 도착해서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투발은 원래 자옥(성득신)과 자서(투의신)의 시체를 거둔 후에 죽으려고 했었기 때문에 그 역시 죽지 않고 살게 되었으며, 단지 죽은 사람은 성득신뿐이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었겠는가? 잠연거사가 시를 지어 조상하기를, “초나라에 기세가 등등한 한 대장부가 있었으니, 기상은 진(晉)나라를 삼킬 영웅적 계획을 품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실수하여 목숨을 잃게 되었으니, 원래 굳세고 강한 것은 헛되이 죽게 되는 법이다.” 했다. 성대심은 그 부친의 시신을 거두어 입관하고, 투의신, 투발, 투월초 등은 반왕을 따라 신성에 이르러 초성왕을 배알하여, 땅에 엎드려 목숨을 살려준 은혜에 감사했다.
楚王知得臣自殺,懊悔不已。還駕郢都,升蒍呂臣為令尹;貶鬥宜申為商邑尹,謂之商公;鬥勃出守襄城。楚王轉憐得臣之死,拜其子成大心成嘉俱為大夫。令尹子文致政居家,聞得臣兵敗,嘆曰:「不出蒍賈所料!吾之識見,反不如童子,寧不自羞!」嘔血數升,伏牀不起。召其子鬥般囑曰:「吾死在旦夕。惟有一言囑汝:汝叔越椒,自初生之日,已有熊虎之狀,豺狼之聲,此滅族之相也。吾比時曾勸汝祖勿育之,汝祖不聽。吾觀蒍呂臣不壽,勃與宜申,皆非善終之相,楚國為政,非汝則越椒。越椒傲狠好殺,若為政,必有非理之望,鬥氏之祖宗其不祀乎?吾死後,椒若為政,汝必逃之,無與其禍也。」
초성왕은 성득신이 자살한 것을 알고 후회해 마지않았다. 초성왕은 영도(郢都)로 돌아가서 위여신을 올려 영윤으로 삼고, 투의신은 벼슬을 깎아서 상읍윤(商邑尹)으로 삼아 상공(商公)이라고 불렀다. 다시 투발은 나가서 양성(襄城)을 지키게 했다. 초성왕은 성득신의 죽음을 가엾게 생각하여 그 아들 성대심과 성가(成嘉) 형제에게 모두 대부의 벼슬을 내렸다. 한편 영윤 자문은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머물다가, 성득신이 싸움에 졌다는 소식을 듣고 한탄하면서 말하기를, “위가가 생각한 데서 벗어나지 않았구나! 나의 식견이 도리어 어린 동자보다 못하니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하고, 피를 몇 되 토하더니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자문이 그 아들 투반(鬪班)을 불러 당부하기를, “나는 곧 죽을 것이다. 너에게 당부할 한마디 말이 있다. 너의 숙부 투월초(鬥越椒)는 날 때부터 이미 곰과 호랑이의 상에다 승냥이의 목소리를 지녔으니 이것은 우리 가문을 멸족시킬 상이다. 내가 그때 너의 할아버지에게 키우지 말라고 권했으나 네 할아버지가 듣지 않았다. 내가 보니 위여신도 오래 살지 못할 상이고, 투발과 투의신도 모두가 천수를 다할 상이 아니다. 초나라의 정사는 모두 네가 아니면 투월초에게 맡겨질 것인데, 투월초는 오만하고 사나우며 사람을 죽이기를 좋아하니 만약에 정사를 맡게 되면 반드시 도리에 어긋난 짓을 하게 되어 투씨의 조상은 제사도 끊어지게 될 것이다. 내가 죽은 후에 투월초가 만약 정사를 맡게 되면 너는 반드시 도망쳐서 그와 화를 함께 입지 말아야 한다.” 했다.
般再拜受命。子文遂卒。未幾,蒍呂臣亦死。成王追念子文之功,使鬥般嗣為令尹,越椒為司馬,蒍賈為工正。不在話下。卻說,晉文公既敗楚師,移屯於楚大寨。寨中所遺糧草甚廣,各軍資之以食,戲曰:「此楚人館穀我也。」齊秦及諸將等,皆北面稱賀。文公謝不受,面有憂色。諸將曰:「君勝敵而憂,何也?」文公曰:「子玉非甘出人下者,勝不可恃,能勿懼乎?」國歸父小子憖等辭歸,文公以軍獲之半遺之,二國奏凱而還。宋公孫固亦歸本國,宋公自遣使拜謝齊秦。不在話下。
투반이 재배하고 부친의 명을 받들었다. 마침내 자문이 죽었다. 오래지 않아서 위여신도 역시 죽었다. 초성왕은 자문의 공을 추모하여 그의 아들 투반에게 영윤의 직을 잇게 하고, 투월초를 사마로 삼고, 위가를 공정(工正)에 임명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한편, 진문공은 이미 초나라의 군사를 패퇴시키고 초나라 본영으로 진을 옮겼다. 초나라 진영에 남긴 군량과 마초가 아주 많아서 각 군에서 배불리 먹으면서 희롱하여 말하기를, “초인들이 우리를 위하여 숙소와 식량을 이렇게 준비했구나!” 했다. 제나라와 진(秦)나라의 장수들과 여러 장수가 모두 북면하여 진문공에게 축하의 말을 올리니, 진문공이 사양하며 얼굴에 근심을 띄웠다. 여러 장수가 말하기를, “주군께서 싸움에서 이기고도 근심이 있으니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진문공이 말하기를, “자옥은 결코 남에게 굽히고 지낼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이기긴 했으나 두렵지 않은가?” 했다. 제나라의 국귀보와 진(秦)나라의 소자은이 작별 인사를 하니, 진문공은 싸움에서 얻은 전리품의 반을 떼어 주었다. 두 나라의 군사들이 개가를 부르며 돌아갔다. 송나라의 공손고도 역시 본국으로 돌아갔다. 송성공은 제나라와 진(秦)나라에 사자를 보내 감사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先軫囚祁瞞至文公之前,奏其違命辱師之罪。文公曰:「若非上下二軍先勝,楚兵尚可制乎?」命司馬趙衰定其罪,斬祁瞞以徇於軍,號令曰:「今後有違元帥之令者,視此!」軍中益加悚懼。大軍留有莘三日,然後下令班師。行至南河,哨馬稟復:「河下船隻,尚未齊備。」文公使召舟之僑。僑亦不在。原來舟之僑是虢國降將,事晉已久,滿望重用立功,卻差他南河拘集船隻,心中不平。恰好接得家報,其妻在家病重,僑料晉楚相持,必然日久,未必便能班師,因此暫且回國看視。不想夏四月戊辰,師至城濮,己巳交戰,便大敗楚師,休兵三日,至癸酉大軍遂還,前後不過六日,晉侯便至河下,遂誤了濟河之事。
선진이 기만을 문공 앞으로 끌고 오게 하여, 명령을 위반하여 군사들을 위험에 빠뜨리게 한 죄를 아뢰었다. 문공이 말하기를, “만약에 우리의 상군과 하군이 싸움에서 먼저 이기지 않았더라면, 초나라 군사를 어떻게 제압할 수 있었겠는가?” 하고, 사마 조쇠에게 명하여 그 죄를 정하게 한 후, 기만을 참하여 군사들에게 조리를 돌리고 명령하기를, “이후로도 원수의 명을 거역하는 자는 이와같이 될 것이니, 보라!” 했다. 군중 분위기는 더욱 숙연해졌다. 진(晉)나라 대군은 유신에서 3일을 머문 후에 명령을 내려 회군했다. 진나라 군이 황하 남쪽 강가 남하(南河)에 이르렀을 때 정찰 기병이 보고하기를, “황하 나루에는 배가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니, 진문공이 주지교를 불러오게 하였으나 그 역시 없었다. 원래 주지교는 괵국의 항장 출신으로 진(晉)나라를 섬긴 지 이미 오래라 늘 중용되어 공을 세우기를 바랐으나, 오히려 그를 황하 남쪽 강가에서 배를 모으라는 명령을 받아 마음속으로 불평했다. 그때 마침 집에서 그의 처가 중병에 걸렸다는 전갈을 받고, 진(晉)나라와 초나라가 대치하면 틀림없이 시일이 오래 걸리거나 아니면 싸움에 져서 회군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잠시 본국으로 돌아가서 처의 병세를 한번 살펴보려고 했다. 뜻밖에 여름 사월 무진 일에 군사가 성복에 이르러 기사 일에 접전을 한 끝에 초나라 군사를 크게 패배시켰다. 그리고 3일간을 휴식한 후에 계유 일에 대군이 마침내 돌아오니, 전후로 불과 6일이었다. 진문공이 황하 남쪽 강가 나루터에 도착했으나 마침내 황하를 건널 일이 어그러졌다.
文公大怒,欲令軍士四下搜捕民船。先軫曰:「南河百姓,聞吾敗楚,誰不震恐?若使搜捕,必然逃匿。不若出令以厚賞募之。」文公曰:「善。」纔懸賞軍門,百姓爭艤船應募,頃刻舟集如蟻,大軍遂渡了黃河。文公謂趙衰曰:「曹衛之恥已雪矣,惟鄭仇未報,奈何?」趙衰對曰:「君旋師過鄭,不患鄭之不來也。」文公從之。行不數日,遙見一隊車馬,簇擁著一位貴人,從東而來。前隊欒枝迎住,問:「來者何人?」答曰:「吾乃周天子之卿士王子虎也。聞晉侯伐楚得勝,少安中國,故天子親駕鑾輿,來犒三軍,先令虎來報知。」
문공이 대로하여 군사들에게 명하여 주변 민간의 배를 모아서 하수를 건너려고 하였다. 선진이 말하기를, “남하(南河)의 백성들은 우리가 초나라를 패퇴시켰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누가 감히 두려워 떨지 않겠습니까? 만약 군사들을 풀어 배를 모으려고 한다면 그들은 모두 도망쳐서 숨어 버릴 것입니다. 차라리 명령을 내리시어 배를 가지고 오는 자에게는 후한 상을 준다고 하여 배를 모으는 것이 낫습니다.” 하니, 진문공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 했다. 즉시 명령을 내려 영문에 상을 걸어 방을 붙이니,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배를 가지고 응모하여 곧 배가 개미 떼 같이 모였다. 대군이 마침내 황하를 건넜다. 진문공이 조쇠에게 말하기를, “조(曹)나라와 위(衛)나라에서 받은 치욕은 이미 갚았으나 오직 정나라만 아직 원수를 갚지 못했소. 어찌해야 하겠소?” 하니, 조쇠가 대답하기를, “주군께서 군사를 정나라로 돌리시면 정나라의 화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했다. 진문공이 그 말을 따라 행군하다가 며칠 지나지 않아서, 멀리 한 무리의 수레와 말이 한 귀인을 호위하면서 동쪽에서 오는 모습이 보였다. 앞에서 가던 난지가 맞이하여 묻기를, “오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하니, 귀인이 답하기를, “나는 주 천자의 경사(卿士)인 왕자 호(王子虎)입니다. 진문공이 초나라를 쳐서 승리하여 중국을 잠시 평안하게 했다는 소식을 듣고 천자께서 친히 어가를 움직여 삼군을 호궤하시기 위해 먼저 이 호(虎)를 보내 알리게 하셨습니다.” 했다.
欒枝即引子虎來見文公。文公問於群下曰:「今天子下勞寡人,道路之間,如何行禮?」趙衰曰:「此去衡雍不遠,有地名踐土,其地寬平,連夜建造王宮於此,然後主公引列國諸侯迎駕,以行朝禮,庶不失君臣之義也。」文公遂與王子虎訂期,約以五月之吉,於踐土候周王駕臨。子虎辭去。大軍望衡雍而進。途中又見車馬一隊,有一使臣來迎,乃是鄭大夫子人九。奉鄭伯之命,恐晉兵來討其罪,特遣行成。晉文公怒曰:「鄭聞楚敗而懼,非出本心,寡人俟覲王之後,當親率師徒,至於城下。」
난지가 즉시 왕자 호를 안내하여 진문공을 만나러 갔다. 진문공이 여러 신하에게 묻기를, “지금 천자께서 과인의 노고를 길에서 치하하시려고 하는데 어떻게 예를 행해야 하오?” 하니, 조쇠가 말하기를, “여기에서 형옹(衡雍)이 멀지 않습니다. 거기에 천토(踐土)라는 땅이 있는데, 그 땅이 넓고 평평하여 밤낮으로 공사를 한다면 거기에 왕궁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주군께서 열국의 제후들을 이끌고 어가를 맞이하여 천자에게 조례를 드리면 거의 군신의 도리는 잃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진문공이 곧 왕자호에게 날짜를 5월 중의 길일로 정하고, 천토에서 천자의 어가가 임하기를 기다리겠다고 약속했다. 왕자호가 작별하고 왕성으로 돌아갔다. 진(晉)나라 대군은 형옹을 향해 나아갔다. 도중에 또 한 떼의 수레와 말을 만났는데, 그 무리 중에서 한 사신이 나오더니 자기는 정나라의 대부 자인구(子人九)라고 했다. 혹시나 진나라 군사가 죄를 물어 토벌하러 오지나 않을까 걱정한 정문공의 명을 받들어 특별히 화의를 청하기 위해 사자를 보낸 것이었다. 진문공이 노하여 말하기를, “정문공이 초나라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낸 것이지, 본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다. 과인은 천자를 뵌 후에 마땅히 친히 군사를 인솔하고 정나라 도읍 성 아래 이를 것이다.” 했다.
趙衰進曰:「自我出師以來,逐衛君,執曹伯,敗楚師,兵威已大震矣。又求多於鄭,奈勞師何?君心許之。若鄭堅心來歸,赦之可也;如其復貳,姑休息數月,討之未晚。」文公乃許鄭成。大軍至衡雍下寨。一面使狐毛狐偃帥本部兵,往踐土築造王宮;一面使欒枝入鄭城,與鄭伯為盟。鄭伯親至衡雍,致餼謝罪。文公復與歃血訂好。話間,因誇美子玉之英勇。鄭伯曰:「已自殺於連谷矣。」文公嘆息久之。鄭伯既退,文公私謂諸臣曰:「吾今日不喜得鄭,喜楚之失子玉也。子玉死,餘人不足慮,諸卿可高枕而臥矣!」髯翁有詩云:「得臣雖是莽男兒,勝負將來未可知;盡說楚兵今再敗,可憐連谷有輿屍!」
조쇠가 나와서 말하기를, “우리가 군사를 일으킨 이래 위나라 군주를 쫓아내고 조나라 군주를 붙잡아 가두었을 뿐만 아니라 초나라의 군사를 패배시켜서 그 위세가 이미 천하를 크게 진동시키고 있습니다. 다시 정나라에 많은 것을 구한다면 우리 군사들의 노고를 어찌하겠습니까? 주군께서는 정나라의 화의를 받아들이십시오. 만약 정나라가 진심으로 우리에게 돌아온다면 용서하셔도 됩니다. 만약 그들이 두 마음을 품고 있다면 병사들을 몇 달 동안 휴식시킨 후에 토벌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진문공이 정나라의 화의 요청을 허락했다. 진나라 대군이 형옹에 이르러 진영을 세우고, 한편으로 호모와 호언 형제에게 휘하의 군사를 시켜 천토에 가서 왕궁을 짓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난지를 정나라의 도읍 신정성으로 들여보내서 정문공과 수호의 맹약을 맺게 했다. 정문공이 친히 형옹에 이르러 음식을 드리고 진문공에게 사죄하니, 진문공이 다시 정백과 더불어 삽혈하고 수호를 맺었다. 대화 중에 진문공이 자옥(성득신)의 빼어난 용맹을 칭찬하니, 정문공이 말하기를, “자옥은 이미 연곡에서 자살했습니다.” 했다. 진문공이 오래 탄식했다. 정문공이 물러가자, 진문공이 가만히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내가 오늘 정나라와 화의를 맺은 일은 그리 기쁘지 않지만, 초나라가 자옥을 잃었다는 것은 기쁘다. 자옥이 죽었으니 나머지 사람이야 염려할 것이 없다. 여러분들도 베개를 높이 베고 누울 수 있게 되었소!” 했다. 염옹(髥翁)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성득신은 비록 거친 사내였지만, 다시 싸운다면 승부는 알 수 없었겠지. 모두를 초나라 군사가 오늘 다시 싸움에서 졌다고 하니, 연곡에서 죽은 성득신만 불쌍하구나!” 했다.
卻說,狐毛狐偃築王宮於踐土,照依明堂之制。怎見得?有《明堂賦》為證:「赫赫明堂,居國之陽。嵬峨特立,鎮壓殊方。所以施一人之政令,朝萬國之侯王。面室有三,總數惟九。間太廟於正位,處太室於中霤;啟閉乎三十六戶,羅列乎七十二牖。左個右個,為季孟之交分;上圓下方,法天地之奇偶。及夫諸位散設,三公最崇。當中階而列位,與群臣而不同。諸侯東階之東,西面而北上;諸伯西階之西,東面而相向;諸子應門之東而鵠立,諸男應門之西而鶴望。戎夷金木之戶外,蠻狄水火而位配。九采外屏之右以成列,四塞外屏之左而遙對。朱干玉戚,森聳以相參;龍旗豹韜,抑揚而相錯。肅肅沉沉,巒崇壑深。煙收而卿士齊列,日出而天顏始臨。戴冕旒以當軒,見八紘之稽顙;負斧扆而南面,知萬國之歸心。」
한편, 호모와 호언은 명당(왕궁)을 짓는 제도에 따라 천토에 왕궁을 지었다. 어떻게 알겠는가 하면, <명당부(明堂賦)>에 증언하기를, “빛나는 명당은 나라의 양지쪽에 있어 우뚝 솟았으며 다른 지방을 진압한다. 그래서 한 사람의 천자가 정령을 펴면 만국의 제후들이 달려와 조회를 한다. 정면의 방이 셋이고 모두 아홉 개의 방이 있다. 한가운데 태묘(太廟)가 있고 중심에 태실(太室)을 두었다. 여닫는 문은 36개이고 창문은 72개다. 왼쪽 것과 오른쪽 것은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직분이 다름을 말하고,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진 것은 하늘과 땅이 홀수와 짝수로 이루어진 것을 본뜬 것이다. 모든 관리 중에서 삼공이 가장 높으니 마땅히 가운데 계단에 늘어서서 군신들과는 같이 서지 않는다. 후작 제후들은 동쪽 계단의 동쪽 편에 서서 서쪽을 쳐다보다가 천자가 나타나면 북쪽으로 몸을 돌려 절을 올리고, 백작 제후들은 서쪽 계단의 서쪽으로 서서 동쪽을 바라보고 서로 마주한다. 자작 제후들은 정문의 동쪽 편에 고니처럼 늘어서고, 남작 제후들은 자작들의 서쪽 맞은편에 학처럼 바라본다. 융(戎)족과 이(夷)족은 금(金)과 목(木)이니 서문과 동문 밖에 서고, 만(蠻)족과 적(狄)족은 수(水)와 화(火)이니 남문과 북문 밖에 선다. 구주의 지방 관원들은 밖에서 오른쪽으로 열을 짓고, 변경을 지키는 장수들은 담장 밖 왼쪽에 멀리 마주 선다. 주홍색 방패와 옥으로 자루를 장식한 도끼들은 마치 숲처럼 들어서고, 표범 가죽으로 깃대를 장식한 용이 그려진 천자의 깃발은 바람에 펄럭이며 섞여 있다. 또한 엄숙하고 무성한 높은 산과 깊은 골에 연기가 걷히듯 경사들이 나란히 줄을 지어 서고 아침 해가 솟으면 천자께서 면류관을 쓰시고 임하시어 명당의 용좌에 앉으신다. 천자는 온 세상이 절하는 것을 굽어보며 붉은 바탕에 도끼를 그린 병풍을 등지고 남쪽을 향하여 앉으시어 만국의 충성을 헤아린다.” 했다.
王宮左右,又別建館舍數處,晝夜并工,月餘而畢。傳檄諸侯:「俱要五月朔日,踐土取齊。」是時,宋成公王臣,齊昭公潘,俱係舊好;鄭文公捷,是新附之國;率先來赴。他如魯僖公申,與楚通好;陳穆公款,蔡莊公甲午,與楚連兵,(都是楚黨。)至是懼罪,亦來赴會。邾莒小國,自不必說。惟許僖公業,事楚最久,不願從晉。秦穆公任好,雖與晉合,從未與中國會盟,遲疑不至。衛成公鄭,出在襄牛;曹共公襄,見拘五鹿;晉侯曾許以復國,尚未明赦,亦不與會。
왕궁 좌우에 몇 채의 관사를 더 짓기로 하고 밤낮으로 공사를 강행하여 한 달 남짓에 공사를 끝냈다. 제후들에게 참석을 요청하는 격문을 써서 전하기를, “5월 초하루에 천토(踐土)에서 모두 모이기로 하였습니다.” 했다. 그날이 되어 송성공 왕신(王臣), 제소공 반(潘)은 모두 예부터 우호적이었고, 정문공 첩(捷)은 이번에 새로 우호를 맺어 솔선하여 왔다. 노희공 신(申)은 초나라와 수호했고, 진목공 관(款)과 채장공 갑오(甲午)도 초나라와 동맹했지만, (모두 초나라 편이다) 이에 죄를 물을까 두려워서 또한 회맹장에 왔다. 주(邾)나라와 거(莒)나라는 소국이지만 말할 것도 없이 참석했다. 오직 허희공(許僖公) 업(業)은 가장 오래 초나라를 받들어 왔기 때문에 진(晉)나라를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진목공(秦穆公) 임호(任好)는 비록 당진과 우호를 맺고 있었지만, 아직 중원의 회맹에 참석한 적이 없어 망설이다가 오지 않았다. 위성공 정(鄭)은 양우(襄牛)에 나가 있었고, 조공공 양(襄)은 오록에 잡혀 있었는데, 진문공이 귀국을 허락하기는 했지만, 아직 확실하게 죄를 용서하지 않아 역시 회맹에 참석하지 않았다.
單說,衛成公聞晉將合諸侯,謂寧俞曰:「徵會不及於衛,晉怒尚未息也。寡人不可留矣!」寧俞對曰:「君徒出奔,誰納君者!不如讓位於叔武,使元咺奉之,以乞盟於踐土,君若為遜避而出。天如祚衛,武獲與盟,武之有國,猶君有之。況武素孝友,豈忍代立?必當為復君之計矣。」衛侯心雖不願,到此地位,無可奈何,使孫炎以君命致國於叔武,如寧俞之言。孫炎領命,往楚丘去了。衛侯又問於寧俞曰:「寡人今欲出奔,何國而可?」俞躊躇未答。衛侯又曰:「適楚何如?」俞對曰:「楚雖婚姻,實晉仇也,且前已告絕,不可復往,不如適陳。陳將事晉,又可藉為通晉之地也。」
한편, 위성공은 진문공이 장차 제후들을 모이게 한다는 말을 듣고, 영유에게 말하기를, “회맹에 초청하는 편지가 위나라에 오지 않은 것은 진문공의 노여움이 아직 식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곳에 더 머물러서는 안 될 것 같다!” 하니, 영유가 대답하기를, “주군께서 이곳에서 무작정 도망쳐 초구성으로 돌아가면 누가 주군을 나와서 맞이하겠습니까? 차라리 숙무(叔武)께 양위하시고 원훤(元咺)으로 하여금 숙무를 받들어 천토에서 회맹을 애걸하게 하십시오. 주군께서 만약 겸손하게 군주 자리를 내놓는다고 하더라도, 하늘이 우리 위나라에 복을 주어 숙무가 회맹에 참석하면 숙무가 위나라를 가질 것이고, 그러면 주군이 위나라를 가지는 것과 같습니다. 더욱이 숙무는 평소에 우애가 깊으니 어찌 차마 대신 군주가 되겠습니까? 틀림없이 주군을 복위시키려고 할 것입니다.” 했다. 위성공이 마음속으로 비록 원하지 않았지만, 지금의 처지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위성공은 영유의 말대로 손염(孫炎)을 초구성에 보내 숙무에게 나라의 일을 모두 맡긴다는 군주의 명을 전하게 했다. 손염은 명을 받들어 초구성으로 갔다. 위성공이 다시 영유에게 묻기를, “과인이 지금 망명해야 한다면 어느 나라가 좋겠소?” 하니, 영유가 주저하며 대답하지 않았다. 위후가 다시 말하기를, “초나라로 가면 어떻겠는가?” 하니, 영유가 대답하기를, “초나라는 비록 우리와 혼인을 하였지만, 실은 진(晉)나라의 원수입니다. 또한 예전에 우리가 이미 국교를 끊는다고 선언하여 놓고 다시 갈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진(陳)나라에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진(陳)나라는 장차 진(晉)나라를 받들기로 했으며 또한 주군께서 앞으로 진(晉)나라와 통호하는 데 힘을 빌릴 수도 있는 곳입니다.” 했다.
衛侯曰:「不然,告絕非寡人意,楚必諒之。晉楚將來,事未可定。使武事晉,而我託於楚,兩途觀望,不亦可乎?」衛侯遂適楚,楚邊人追而詈之;乃改適陳,始服寧俞之先見矣。孫炎見叔武,致衛侯之命。武曰:「吾之守國,攝也,敢受讓乎?」即同元咺赴會。使孫炎回復衛侯,言:「見晉之時,必當為兄乞憐求復也。」元咺曰:「君性多猜忌,吾不遣親子弟相從,何以取信?」乃使其子元角,伴孫炎以往,名雖問候,實則留質之意。公子歂犬私謂元咺曰:「君之不復,亦可知矣。子何不以讓國之事,明告國人,擁立夷叔而相之?晉人必喜。子挾晉之重以臨衛,是子與武共衛也。」
위성공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초나라와 국교를 끊는다고 한 것이 과인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초나라는 틀림없이 알 것이다. 진(晉)나라와 초나라 의 장래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숙무로 하여금 진(晉)나라를 섬기게 하고 나는 초나라에 몸을 의탁하여 양쪽을 다 같이 관망하면 또한 되지 않겠는가?” 하고, 위성공은 마침내 초나라로 갔다. 초나라의 변경 사람이 따라다니며 위나라의 의리 없음을 욕했다. 이에 길을 바꾸어 진(陳)나라로 간 위성공은 비로소 영유의 선견지명에 대해 승복하게 되었다. 한편 손염이 숙무를 뵙고 위성공의 명을 전하니, 숙무가 말하기를, “내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섭정하겠지만, 감히 양위를 받겠느냐?” 하고, 즉시 원훤과 같이 회맹에 가면서, 손염을 시켜 위성공에게 돌아가 자기의 말을 전하게 하기를, “진(晉)나라 군주를 만날 때 반드시 형을 위해 간청을 올려 위나라의 군주 자리에 돌아올 수 있게 하겠습니다.” 했다. 원훤이 말하기를, “우리 주군의 성격은 의심하고 시기하는 마음이 많아서 제가 아들이나 동생을 인질로 보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이에 그 아들 원각(元角)을 손염에게 딸려 보냈다. 명분은 비록 위성공에게 문후를 드린다고 했지만 실은 인질의 뜻이었다. 공자 천견(歂犬)이 몰래 원훤에게 말하기를, “주군이 위나라 군주에 복귀할 수 없음은 또한 다 아는 일입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주군이 양위한 일을 나라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알려서 이숙(숙무)을 옹립하여 돕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되면 진(晉)나라 사람이 반드시 기뻐할 것이고 그대는 진나라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위나라에 돌아올 수 있어서, 그대와 숙무가 위나라를 같이 다스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했다.
元咺曰:「叔武不敢無兄,吾敢無君乎?此行且請復吾君矣。」歂犬語塞而退。恐衛侯一旦復國,元咺洩其言,未免得罪,乃私往陳國,密報衛侯,反說:「元咺已立叔武為君,謀會晉以定其位。」衛成公惑其言,以問孫炎。孫炎對曰:「臣不知也。元角見在君所,其父有謀,角必與聞,君何不問之?」衛侯復問於元角,角言並無是事。寧俞亦言曰:「咺若不忠於君,肯遣子出侍乎?君勿疑也。」公子歂犬私見衛侯曰:「咺之設謀拒君,非一日矣。其遣子,非忠於君也,將以窺君之動靜,而為之備也。若使乞憐於晉,以求復吾君,必辭會而不敢與,如公然與會,則為君信矣。君其察之。」衛侯果陰使人往踐土,伺察叔武元咺之事。胡曾先生有詩云:「弟友臣忠無間然,何堪歂犬肆讒言?從來富貴生猜忌,忠孝常含萬古冤。」
원훤이 말하기를, “숙무께서 감히 형이 없겠으며, 나에게 감히 주군이 없겠습니까? 이번 행차에는 오로지 주군의 복위를 청할 뿐입니다.” 했다. 천견이 말이 막혀서 물러갔다. 천견은 후일에 위성공이 하루아침에 복위하여 원훤이 자기가 한 말을 위성공에게 전하여 그 죄를 면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어, 이에 몰래 진(陳)나라에 가서 위성공에게 비밀리에 반대로 말하기를, “원훤은 이미 숙무를 군위에 앉히고 회맹에 참석하여 진문공에게 군주 자리를 인정받으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했다. 위성공이 그 말을 의심스럽게 생각하여 손염에게 물으니, 손염이 대답하기를, “신은 모르는 일입니다. 원각이 현재 주군 곁에 있으니, 그의 아비가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면 원각이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주군께서 어찌 물어보지 않으십니까?” 하니, 위성공이 다시 원각에게 물었으나 원각은 그런 일이 없다고 말했다. 영유가 역시 말하기를, “원훤이 만약 주군께 불충하다면, 기꺼이 그의 자식을 보내 주군을 모시라고 했겠습니까? 주군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했다. 공자 천견이 몰래 위성공을 뵙고 말하기를, “원훤이 주군의 복위에 반대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가 자식을 이곳에 보낸 것은 주군에게 충성을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군의 동정을 엿보게 하여 대비하려는 것입니다. 주군은 살펴보십시오.” 했다. 위성공이 비밀리에 천토에 사람을 보내 숙무와 원훤의 행동을 살펴보게 하였다. 호증선생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동생의 우애와 신하의 충성에 아무 틈이 없는데, 어찌하여 천견의 모함에 귀를 기울였는가? 예부터 부귀에는 시기(猜忌)가 생겨나는 법이라, 충효는 항상 만고의 원한을 품고 있도다!” 했다.
卻說,周襄王以夏五月丁未日,駕幸踐土。晉侯率諸侯,預於三十里外迎接,駐蹕王宮。襄王御殿,諸侯謁拜稽首。起居禮畢,晉文公獻所獲楚俘於王,(被甲之馬凡百乘,步卒千人,器械衣甲十餘車。)襄王大悅,親勞之曰:「自伯舅齊侯即世之後,荊楚復強,憑陵中夏,得叔父仗義翦伐,以尊王室,自文武以下,皆賴叔父之休,豈惟朕躬?」晉侯再拜稽首曰:「臣重耳幸殲楚寇,皆仗天子之靈,臣何功焉?」次日,襄王設醴酒以享晉侯。使上卿尹武公,內史叔興,策命晉侯為方伯。賜大輅之服,服鷘冕;戎輅之服,服韋弁;彤弓一,彤矢百,玈弓十,玈矢千,秬鬯一卣,虎賁之士三百人。
한편, 주양왕은 그해 여름 5월 정미 일에 어가를 타고 천토를 향했다. 진문공이 제후들을 거느리고 미리 30리 밖에서 영접하여 왕궁에 머물게 했다. 주양왕이 궁궐의 어전에 나아가니 제후들이 머리를 숙여 뵈었다. 천자를 뵙는 의식이 끝나자 진문공이 붙잡은 초나라 포로를 왕에게 바쳤다. (무장한 말이 모두 백 대이고, 보졸이 천 명에 병장기와 갑옷 등을 실은 수레가 십여 대였다) 주양왕이 크게 기뻐하여 친히 그 노고를 위로하며 말하기를, “백구(천자가 성이 다른 제후를 존경하여 이르던 말) 제환공이 세상을 뜬 이후로 형만 지역의 초나라 세력이 더욱 커져서 중원을 능멸하고 있던 차에 숙부께서 의를 세워 정벌하여 왕실의 위신을 세웠습니다. 주나라는 문왕과 무왕 이래 모두 숙부의 노고에 힘입어 쉴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짐인들 허리를 굽히지 않을 수 있겠소?” 하니, 진문공이 머리를 조아리며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신 중이가 다행히 초나라 오랑캐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천자의 보살핌에 의한 것입니다. 어찌 신의 공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했다. 다음날 주양왕이 주연을 마련하여 진문공을 대접했다. 주왕실의 상경 윤무공(尹武公)과 내사(內史) 숙흥(叔興)을 시켜 진문공을 방백으로 임명한다는 칙명을 내렸다. 이어서 문공에게 천자가 타는 수레에 치장할 수 있는 장막과, 천자가 제사를 지낼 때 입는 의복, 큰 전차에 장식하는 치장과 무두질한 가죽으로 만든 모자, 천자가 사용하는 붉은 칠로 장식한 활 한 개와 붉은 화살 열 개, 검은 칠을 한 활 열 개와 화살 천 개, 검은 기장에 향기로운 풀을 넣어서 빚어서 천자가 제사 지낼 때 쓰는 거창주 한 통 등을 하사하고, 천자와 같이 3백 명의 호위무사를 거느리고 행차할 수 있는 의전을 하사했다.
宣命曰:「俾爾晉侯,得專征伐,以糾王慝。」晉侯遜謝再三,然後敢受。遂以王命布告於諸侯。襄王復命王子虎,冊封晉侯為盟主,合諸侯修盟會之政。晉侯於王宮之側,設下盟壇,諸侯先至王宮行覲禮,然後各趨會所。王子虎監臨其事。晉侯先登,執牛耳,諸侯以次而登。元咺已引叔武謁過晉侯了。是日,叔武攝衛君之位,附於載書之末。子虎讀誓詞曰:「凡茲同盟,皆獎王室,毋相害也。有背盟者,明神殛之,殃及子孫,隕命絕祀!」諸侯齊聲曰:「王命修睦,敢不敬承!」各各歃血為信。
왕명을 내려 말하기를, “그대 진문공에게 정복하는 일을 오로지 맡기노니 이로써 왕의 재앙을 바로잡으라.” 했다. 진문공이 겸양하여 재삼 사양하고 나서야 하사품과 명을 받았다. 양왕은 즉시 왕명으로 제후들에게 포고했다. 다시 주양왕은 왕자 호에게 명하여 진문공을 맹주로 책봉하고 제후들을 규합하여 회맹을 주재하도록 했다. 진문공이 왕궁 옆에 회맹 단을 만들고, 제후들이 먼저 왕궁에 이르러 왕을 뵙는 예를 올린 후에 각각 회맹 장소로 갔다. 왕자 호가 그 일을 감독했다. 진문공이 먼저 등단하여 희생으로 잡은 소머리의 귀를 잡자 다른 제후들도 단 위로 올라왔다. 위나라의 원훤도 숙무를 인도하여 진문공을 뵙게 했다. 그날 숙무는 위나라 군주를 대신하여 맹회의 서약문 끝에 서명했다. 왕자 호가 서약문을 읽기를, “무릇 이 동맹은 모두 왕실을 위해 힘쓰고 서로 해치지 않는다. 동맹을 배반하는 자는 밝은 신이 죽일 것이며 재앙이 자손에게 미쳐 목숨을 끊고 제사가 끊어질 것이다.” 했다. 제후들이 한 목소리로 답하기를, “왕명이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고 하시는데 누가 감히 지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각각 입술에 피를 발라 맹세했다.
潛淵讀史詩云:「晉國君臣建大猷,取威定伯服諸侯。揚旌城濮觀俘馘,連袂王宮覲冕旒。更羨今朝盟踐土,謾誇當日會葵邱。桓公末路留遺恨,重耳能將此志酬。」盟事既畢,晉侯欲以叔武見襄王,立為衛君,以代成公。叔武涕泣辭曰:「昔寧母之會,鄭子華以子奸父,齊桓公拒之。今君方繼桓公之業,乃令武以弟奸兄乎?君侯若嘉惠於武,賜之矜憐,乞復臣兄鄭之位。臣兄鄭事君侯,不敢不盡!」元咺亦叩頭哀請,晉侯方纔首肯。
잠연선생이 역사를 읽고 지은 시에 이르기를, “진(晉)나라 군주와 신하들이 큰 계략을 세우더니, 위엄을 떨치고 방백이 되어 제후들을 복종시켰다. 성복에서 승리의 깃발 날리며 얻은 포로를 보여주고, 제후들이 함께 왕궁의 천자를 뵈었네. 또다시 천토에서 회맹을 맺어 제후들의 부러움을 샀으나, 지난날 제환공이 규구에서 회맹한 걸 자랑하더니, 제환공이 죽을 때 많은 한을 남겼다. 중이는 능히 천자의 뜻에 보답할 수 있겠는가?” 했다. 이윽고 회맹의 의식이 끝나자 진문공이 숙무를 데리고 양왕을 접견한 후에 위나라 군주로 세워 위성공을 대신하려고 했다. 숙무가 울면서 사양하기를, “옛날 영모(寧母)의 회맹 때 정나라 공자 자화(子華)가 아들로서 아버지를 참소하였으나 제환공이 거절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군주께서는 바야흐로 제환공의 패업을 계승하여 이에 숙무로 하여금 동생으로서 형을 참소하라는 것입니까? 군주께서 만일 이 숙무에게 은혜를 베푸시겠다면 부디 저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시어, 바라옵건대 신의 형 정(鄭)의 군주 자리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그러면 저의 형 정(鄭)이 군주를 섬겨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원훤도 역시 머리를 조아리며 간절히 청하니, 진문공이 비로소 겨우 수긍했다.
不知衛侯何時復國,再看下回分解。
위성공이 언제 복귀할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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