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의 반복은, 노사가 서로의 목을 조른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이 우선이다.
마음의 교류가 끊겼을 때, 신뢰는 상실되고 만다.
지금은, 사회주의자도, 자본주의자도,
서로가 마음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각자가 자기자신의 마음을 말이다.
《“올바른 중도”》 를 마음의 척도로 하여 사는 일이야말로,
노사(勞使)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길이다.
인간은, 마음을 잃고 물질문명의 노예가 됨에 따라, 인간성을 상실해간다.
노이로제 환자가 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어떤 자는, 심부재(心不在)의 육체주(肉體舟)를
부조화한 지옥령에게 지배당하여,
자기가 자기를 제어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는.
그런 사람도 많은 것이다.
즉 자기이면서 자기가 아닌 사람들이다.
자기 이외의 자(者)가, 마음속에서 속삭인다.
이런 사람들은, 100% 지옥령에게 빙의되어 있으며,
분열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분열증이나 조울증의 사람들은,
거의가 스스로의 작은 마음속에서, 자기를 상실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마음의 스트레스가, 부조화한 지옥령을 불러들인 것이다.
그 원인은, 어릴 때부터의 가정환경, 양친의 교육,
애정 과다, 애정 부족등으로부터 발생하고,
또 스스로의 마음에 작은 틀을 만들고 만 사람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올바른 중도의 생활을 잊고,
원한, 질투, 시기, 미움, 노여움등을, 마음에 가진 사람들인데,
타인만이 나쁘다고 생각한다.
스스로의 반성이 없는 인간의 가련한 모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서(情緖)를 잃은, 좁은,
자신이 만들어 낸 마음의 세계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들이다.
자신을 되찾는 일,
스스로의 부조화의 원인을 제거하는 일.
마음을 수정하는 일,
이것을 하지 않는 한,
그 사람들은, 그 병으로부터 구제받지 못한다.
《“중도”》 라고 하는 마음의 척도로서,
과거의 잘못을, 용기와 결단을 가지고 수정한다.
‘ 그때, 마음의 구름은 걷히고, 부조화한 지옥령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그리고 “올바르다”는 그 기준은,
대자연의 질서가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극단적인 사고방식을 버리고, 중도의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스스로의 마음의 평안함을 만들어주는,
무엇보다도 최선의 방법임을 명심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팔정도,
이 길이야말로,
스스로를 바로잡는 인간의 마음의 방법론이며, 지름길인 것이다.
(주: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기능;
육신을 유지하기 위한, 신의 배려. 곧 신의 축복.
여기 물질의 세계에서 살기 위한, 꼭 필요한 기능. 그리고 육체.
하지만, 육체만을 위한 인생은 아니 되겠지요.
육체만을 위한 인생은, 마치 주객이 뒤바뀌어 버린...
돈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지만,
돈을 위해서 살면 아니 되듯이.
* * *
인연있는 이여,
우리같이 생각해 봅시다.
4. 마음이나 정신의 실체는 있는 것인가.
이 제목의 질문은,
어떤 종교 단체의, 청년부의 간부한테서 나온 것이었다.
만다라(曼陀羅) 앞에서,
아침저녁으로 경문(經文)이나 제목(題目)을 올리는 근행을 하는,
광신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석가의 불교는 이미 없으며,
일련상인(日蓮上人)이야말로, 말법의 세상을 구할 분이다.⟩
라고 말한다.
게다가 그들은,
중국의 천태대사(天台大師)가 설법한 법화경(法華經),
전교대사(傳敎大師)에 의해 일본으로 전해진 법화경,
그 경문을 올리면서,
⟨이것은 잠시 빌려 쓰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불가사의한 일이다.
지도자들은, 갖은 말로써,
그들의 주의(主義)를 진실인 양 꾸며대고 있다.
불교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말세의 가르침이라고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 철학등을 말하고, 지(知)만이 앞서,
마음은 전혀 없는 것이다.
다른 종교를 사교(邪敎)로 몰아붙이고,
신자들에게는 벌을 받는다고 협박하면서,
자기 자신의 마음까지 족쇄를 채운, 가엾은 사람들이다.
신자들도 또한, 벌(罰) 같은 것을 받을 리 없건만,
두려움에 떨고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다.
종교 따위를 믿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행복한데도,
그러한 종교를 믿고 있는 자들의 마음은,
마음의 평안등은 조금도 없다.
‘몇 사람을 입교시켜야 당신의 업(業)이 없어진다.’
라고 말을 듣게 되면, 욕망이 있는 자는 열심히 하게 된다.
그러한 신자의 모습이야말로, 측은하다.
조직의 세포가 되어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신앙을 가진 것이 도리어,
괴로움과 의문의 와중(渦中)에서, 이 인생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문도, 벌이 두려워서 숨기고 있는 지도자도, 가엾다.
질문자는 나에게 이렇게도 말한다.
“당신에게는, 예배를 드릴 대상물이 없지 않은가. 나에게는 있다.”
나는 그에게, 반대로
“당신은 태어날 때, 발가숭이였습니까.”
하고 질문했다. 그러자 그는,
“발가숭이였습니다.”
하고 대답을 했다. 나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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