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대지라 하더라도, 생명을 갖고, 감정을 품고 있습니다.
화산, 지진, 산사태, 함몰 등, 대지 그 자체는,
때로는 노하거나, 미친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노여움이나, 미친다고 하는 것은,
대지 자체가 마음대로 움직이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고,
인간의 제멋대로의 행동, 상념이 원인으로 되어
만들어 낸 물리적 현상이 대부분입니다.
태평양의 중앙에 있었던 무-대륙,
대서양에 문명의 꽃을 피웠던 아틀란티스 대륙 등의 함몰도,
어느 것이나 다 거기에 살던 인류의 업 상념(業想念)이 만들어 낸 현상입니다.
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
인간의 생명의식, 지상에서의 목적이라고 하는 것이,
자기 자신의 조화와 동시에,
동물, 식물, 광물을 포함한, 지상의 조화에 있고,
그 목적에 반(反)한 상념 행위에 대해서는,
그 목적에 반(反)한 분량만큼의 속죄가 필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각자가 믿든 안 믿든 관계없이,
인간의 생명 목적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져 있어, 하는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대지라고 하는 생활환경이 주어져,
태양이라고 하는 열, 빛의 변함없는 에너지의 공급에 의해,
살려지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거기에 대자연의, 신(神)의,
위대한 자비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느끼지 않을 까닭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대자연의 생명에 조화하고,
신(神)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한 자비와 사랑으로 사는 것의 의의(意義)가,
이제까지의 설명에 의해, 대충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인간의 가치라고 하는 것이, 가치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규준으로, 무엇을 표준으로 정해야 하는가를 설명합니다.
우선 가치의 개념에 대해서 생각하면,
물건에 가격이 있는 것은, 효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돈의 가치는,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빈슨 크루소처럼, 절해 고도의 독신 생활은,
몇억의 재보도,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습니다.
이처럼 가치(價値)라고 하는 것은,
효용이 있음과 동시에, 상대적인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라고 하는 것도, 이 의미에서는 상대적입니다.
나쁜 사람이 있으니까, 나쁘지 않은 사람이 좋게 보인다.
선인(善人)뿐이라면, 선인(善人)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에는, 인간적으로 어떻든,
돈, 지위, 명예, 혹은 재능이 있는 사람은
선(善)한 사람,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는 모양입니다.
<.....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저 친구는 대단한 남자다>
라고 하는 것을 자주 듣습니다.
인간의 평가를 단순하게,
그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운, 불운으로 결론을 내고 마는 듯합니다.
가치의 성질은 이처럼 상대적이지만,
동시에 그때그때의 시대적 배경에 의해서,
그 가치관은 빙글빙글 바뀝니다.
원수 갚음은 옛날에는 미담이었습니다.
지금은 범죄입니다.
부모를 위해서 어린아이는 매춘을 강요당하여도 할 수 없었으나,
현대는 아이에게도 주권이 인정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가치관에도 유행이 있는 듯합니다.
가치에도 유행의 기복이 있어,
현대는 확실히 그러한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치의 보편성, 안정성을 원하는 것은,
인간인 이상 누구라도 구하는 것은 아닐까요.
가치가 빙글빙글 변한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불안정하고, 매사에 동요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역사가 마음을 중심으로 해서 회전하지 않고,
오관에 휘둘려, 지(知)와 의(意)라고 하는,
이른바 겉만의 인생밖에 보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은 아닐까요.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는,
기행(奇行)이나 부자연한 언동이 있어도, 사람은 묵인(默認)합니다.
지위나 돈이 있으면,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내고 맙니다.
문명 문화는 발전해 왔지만, 인간의 마음이 불안정하니까,
항상 불안과 초조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공해든, 과당경쟁이든, 인간의 마음이 부재하여,
지(知)와 의(意)가 선행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이 때문에, 이러한 현상을 방지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마음의 안정, 마음의 인식, 그리하여,
가치의 확립이라고 하는 것을, 인류는 다시 한번,
그 원점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화폐가치가 해마다 내려간다고 하면,
어중간한 저금으로는, 그것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오 년 전의 백만 원이, 지금은 오십만 원으로 내려가면,
저금의 의욕도, 일할 의욕도 저해될 것입니다.
역시 생활하여 가려면,
가치의 절대성, 안정성을 바라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마음, 인간의 가치를 정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외면적, 상대적인 이유만으로, 가치판단을 하는 것의 어리석음에,
우리들은, 긴 인생 경험 속에서, 몇 번인가 직면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서 인간의 가치를 정하는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는,
표준을 어디에서 구하면 틀림이 없는 것인가.
적어도, 가치의 잣대인 이상,
절대불변의 잣대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잣대는,
대자연의 모습밖에 눈에 띄지 않고,
대자연이라면 절대로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자연의 척도를 갖고, 인간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자연의 척도를 갖고, 인간의 가치를 정한다.
이것이야말로, 다시 또 얻기 어려운, 척도라고 생각합니다.
불공평함은, 절대로 없습니다.
플라스코의 분석과 같은, 순수한 결과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 위에 이 가치 판단은,
인간을 바르게 평가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우리들의 생활을 참으로 엔조이시켜 줍니다.
불안과 초조로부터도 해방시켜 줍니다.
그러면 대체 이 자연의 척도는 무엇인가.
우선 제1의 척도는, 다름 아닌 지구라고 하는 대지입니다.
지구가 우주 공간에 창조된 이래,
지구 자체의 변화 변멸은, 아직껏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구의 변화는 인간이랑 생물이 살아가기 위한 땅 고르기를 하고,
또 인간 자신의 아욕의 결과 이외는,
지구는, 항상 건재하며, 우리들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제2의 척도는, 물입니다.
기체, 액체, 고체의 3상(三相)의 순환을 반복하면서,
결코, 그 분량을, 늘이거나, 줄이거나 하는 것 없이,
몇만 년, 몇억 년이라고 하는 동안,
지상의 생물에게, 살아가는 힘을 주고 있습니다.
제3은, 태양입니다.
몇 번이나 반복한 것처럼,
태양의 열, 빛의 에너지는,
만물만생의 근원이라고 말해도 좋고,
이것 없이, 생물의 생존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지상에 살기 전부터,
태양은 존재하고,
그 열. 빛의 에너지는, 조금도 변함이 없이, 방사되고 있습니다.
제4는, 공기입니다.
산소, 탄산 가스등의 혼합물질인 무색투명의 공기는,
지구의 주위를 감싸고, 결코 우주공간으로 날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인류의 수가 늘고, 공기를 찾는 생물이 많아져도,
공기의 양은, 일정 불변, 그 분량을 가감하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제5의 척도는 우주입니다.
지구라고 하는 혹성, 태양이라고 하는 항성이 존재할 수 있는 것도,
우주라고 하는 공간,
우주라고 하는 무한의 넓이와 통제가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우주는 한없는 생명의 모체(母體)이며,
지혜와 창조의 원천입니다.
이상의 다섯 개가, 인간의 가치 판단의 척도입니다.
대자연이라고 하는 척도는,
항상 절대불변의 입장을 지키고,
게다가 늘어나지도 않으며 줄지도 않는,
<중도>. <법>의 아래에서 살고 있습니다.
인간이 이 중도(中道)라고 하는
자연의 모습을 척도로 해서 생활한다고 하면,
우리들 인류에게는, 한없는 진보와 조화가 약속됩니다.
왜냐하면, 자연은 중도(中道)를 축으로 조화되어 있고,
조화는 다툼이 없는 세계이며,
파괴가 없으면, 그 (없는) 분량만큼 진보의 분량이 늘어가게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