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
-유동하는 역사
젊은 날 인도를 여행하며 라자스탄 조드푸르 메헤랑가르 성을 방문한 적 있다. 성문벽 옆에 수십 개 붉은 손이 새겨 있었다.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죽음을 따르기 위해 성벽에 붉은 손바닥 도장을 찍고 화장 장작더미에 몸을 던져 명예롭게 따라 죽은 여인들의 사티 풍습 결과물이라고 했다. 그 수십 개의 붉은 손이 라자스탄의 붉은 흙처럼 슬펐다.
지역에 내려와 마을사를 찾아보니 골골이 효자와 열녀 이야기가 많다. 병든 부모를 위해 손가락을 끊어 피를 마시게 하거나, 허벅지 살을 베어 봉양하고, 죽은 뒤 3년 상은 기본이었다. 열녀는 일찍 죽은 남편을 대신해 평생 수절을 지키고 부모님을 보양하였으며, 남편의 죽음을 따라 자결하였다. 그런 기록들이 하도 많다보니 점점 갑갑한 마음이 들었다. 조선시대도 이슬람의 명예살인처럼 왜곡된 전통이 있었을 것이다. 순수한 도덕이라기보다 이데올로기적 압력이 죽음을 강요했을 것이다. 가문의 명예를 위해, 강요하고 미화하였을 것이다.
강진 군동의 시목마을에는 영광김씨 소녀의 슬픈 이야기가 전해온다. 시목마을의 영광김씨 소녀는 16세에 결혼하고 며칠 뒤 친가로 해먹이를 왔다가 남편의 죽음 소식을 들었다. 순결을 지키고 집 뒤 안 동백나무에 목을 매고 자결하였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부부를 시목마을 갈고리에 합장하였다. 하지만 수년 동안 영광김씨 여인의 집터에서 궂은 날이면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리고, 키질 소리 절구질 소리가 들려 이웃들은 무서워하였다. 땅거미 질 때 뒤 안으로 살짝 돌아가는 여인의 뒷모습을 보고 따라가 보니 없어졌다는 목격담도 있었다. 그 집은 나중에 청주김씨로 주인이 바뀌었지만 다 큰 자식 둘이 연달아 죽자 청주김씨도 그 집을 떠나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열녀문을 세워 넋을 위로해주지 못해 집터에 한이 서렸던 까닭이라고 한다. 신부가 동백나무의 혼령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과연 열녀문 때문이었을까? 열녀문이 아니라면 억울한 죽음을 위로할 방법이 없는 것일까?
여필종부를 전부로 여겼던 어린 신부는 사회적 압박에 못 이겨 끝내 자결해야 했을 것이다. 이런 자살은 사회적 인습의 타살이기도 할 것이다. 어찌 한이 안 남겠는가?
정려문이 위세가 되었다. 가문이라면 사당과 서원과 정려문의 삼박자를 갖춰야 행세를 했을 것이다. 지금도 남겨진 인습의 유물들. 삼강오륜의 이름 아래 강요되었던 죽음을 어찌 도덕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도그마였다.
자기를 돌보는 것이 사치가 되었던 시대에 개인은 어쩔 수 없이 한을 짊어지고 살아가게 된다. 살고 싶지만 살 수 없었기에, 한 맺힌 영혼이 떠돌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