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희롱의 말 - 성도의 거룩함을 해치는 경박한 언행
본문: 에베소서 5: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여러분, 혹시 한 주간 살아가시면서 이런 말 해보지 않으셨나요?
"에이, 왜 그래? 그냥 농담인데.",
"아니, 나는 그냥 분위기 좀 띄우려고 그런 거지.",
"다들 웃고 뒤집어졌는데 왜 너만 진지해?"
우리는 참 자주 이런 핑계를 댑니다.
그런데 가만히 우리 일상을 들여다보면요,
우리의 말이 언제부터인가 참 많이 가벼워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을 한 번 웃기기 위해서 굳이 곁에 있는 누군가를 은근히 깎아내립니다.
단톡방이나 유튜브에서 관심을 끌려고 자극적인 단어를 마구 섞어 쓰지요.
친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상대방이 정해놓은 마음의 선을 훌쩍 넘어가 버리기도 합니다.
요즘 시대를 보십시오. 짧고 자극적인 '숏폼' 영상이 넘쳐나고,
이른바 '드립'이라고 하는 기발한 말장난이 능력처럼 통하는 시대입니다.
남을 교묘하게 비꼬고 조롱하는 능력이 '센스'라는 이름으로 포장됩니다.
참 안타까운 건, 이런 세상의 문화가 어느새 거룩해야 할 교회 문턱을 넘어 우리 안방까지 들어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예배는 드리는데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거칠고,
찬양은 뜨겁게 하는데 돌아서서 하는 대화는 경박하기 짝이 없습니다.
기도는 청산유수로 하면서도, 밥 먹는 자리에서는 형제자매를 너무나 쉽게 농담거리로 소비해 버립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를 향해 아주 무겁고 단호한 어조로 경고합니다.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왜 그럴까요?
말은 단순한 소리의 파동이 아니라, 지금 내 영혼의 적나라한 상태를 보여주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1. 희롱의 말은 영혼의 가벼움을 폭로합니다
바울이 말한 이 '희롱의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이 단어의 헬라어 원어는 '유트라펠리아(εὐτρα페λία)'입니다.
이 단어는 원래 '잘 변하다', '재치 있게 대처하다'라는 뜻에서 유래해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만 해도 '세련된 유머', '재치 있는 대화 기술'이라는 좋은 의미로 쓰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의 에베소 문화 속에서는 이 단어가 완전히 타락해 있었습니다.
당시 에베소 사람들은 술자리나 연회에서 음탕하고 저속한 이야기를 세련된 농담처럼 포장해서 주고받았습니다.
즉, '유트라펠리아'는 상대를 높이고 살리는 건강한 웃음이 아니라,
교묘한 말장난으로 음란함을 부추기고 사람을 희화화하는 '타락한 언어 기술'을 뜻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결코 웃음 자체를 죄악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뻐하고 웃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성경이 엄격하게 경계하는 것은 '죄를 가볍게 여기도록 만드는 웃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장 34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입술은 우리 영혼의 배수구와 같습니다.
속에 가득 차 있는 오물이 결국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내 입에 경박한 조롱과 희롱이 가득하다면,
그건 단순히 말버릇의 문제가 아니라 내 영혼의 방향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희롱의 말은 단순한 유머가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우리 영혼의 가벼움과 죄성을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2. 가벼운 말은 거룩한 공동체의 성벽을 허뭅니다
에베소서 5장 3절~4절 중반부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바울의 논리를 가만히 주목해 보십시오.
3절에서 '음행, 더러운 것, 탐욕'이라는 끔찍한 죄들을 언급하더니,
4절에서 느닷없이 '누추함,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을 그것과 동급으로 묶어서 경고합니다.
왜 행동으로 짓는 음행과 입으로 짓는 농담을 같은 선상에 놓았을까요?
말이 죄의 빗장을 열어젖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거대한 죄는 대개 아주 사소한 농담에서 출발합니다.
처음에는 장난처럼 툭 던집니다.
죄를 유머로 소비하다 보면 그 죄가 점점 익숙해집니다.
익숙해지면 무뎌지고, 무뎌지면 결국 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사탄이 공동체를 무너뜨릴 때 쓰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바로 이 언어의 오염입니다.
개구리를 끓는 물에 넣으면 깜짝 놀라 튀어나오지만,
찬물에 넣고 온도를 아주 서서히 올리면 개구리는 자기가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헤엄치다가 결국 삶아져 죽습니다.
가벼운 말과 희롱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어떤 교회 청년 목장에서 처음에는 친해지겠다는 뜻으로 서로에게 약간 짓궂은 별명을 붙이고 장난을 쳤습니다.
"에이, 다 애정이 있어서 그러는 거지."라며 웃어넘겼습니다.
그런데 그 가벼운 조롱이 몇 달간 반복되자,
한 영혼의 마음에는 피멍이 들었고 결국 소리 없이 교회를 떠나버렸습니다.
공동체 전체가 "농담"이라는 따뜻한 물 속에서 거룩함을 잃고 영적으로 삶아져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 오직 성경의 원리는 혀를 '작은 불'에 비유합니다.
아주 작은 불씨 하나가 온 숲을 태워버리듯이,
우리가 무심코 던진 가벼운 말 한마디가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고 교회의 거룩한 성벽을 허물어 버립니다.
세상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사람을 조롱하고 소비할지 모르지만, 성도는 그래선 안 됩니다.
우리는 타인을 웃음거리로 소비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발견하고 존중해야 하는 영적 파수꾼들입니다.
사소하게 여긴 희롱의 농담은
공동체의 거룩함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무서운 불씨가 됩니다.
3. 십자가를 통과한 입술은 오직 감사로 채워집니다
에베소서 5장 4절 후반부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조롱하지 마라, 경박한 말 하지 마라"라는 금지 명령으로 설교를 끝내지 않습니다.
성경의 원리는 언제나 비워진 곳에 더 거룩한 것을 채워 넣는 것입니다.
바울이 제시한 대안은 바로 '감사하는 말'입니다.
감사의 헬라어 원어는 '유카리스티아(εὐχα리스τία)'인데,
이 단어는 '좋은'이라는 뜻과 '은혜'라는 뜻의 '카리스(χάρις)'가 합쳐진 말입니다.
즉, 내 삶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기억하고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왜 자꾸 입술로 남을 깎아내리고 희롱할까요?
우리 영혼이 굶주려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메마르니까, 세상적인 재미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서
그 공허함을 채우려고 자꾸 무리한 농담을 던지는 것입니다.
은혜를 잊어버리면 입술이 독해지고 거칠어집니다.
그러나 반대로,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한 사람은 말이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내 형편이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자격 없는 나를 얼마나 오래 참아주셨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은혜를 아는 영혼은 함부로 형제를 정죄하거나 조롱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나 같은 자도 살리셨는데, 내가 어찌 저 영혼을 가볍게 대하랴" 하는 영적 경외감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복음과 하나님의 마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마태복음 27장을 보면 예수님은 로마 군병들에게 말할 수 없는 희롱을 당하셨습니다.
자줏빛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씌우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침 뱉고 조롱했습니다.
온 우주의 창조주께서 피조물들에게 처참하게 웃음거리로 소비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이 입술로 지은 그 모든 경박한 죄,
남을 찢고 조롱했던 그 더러운 언어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모진 희롱 속에서도 저주 대신 가슴 저린 구원의 기도를 쏟아내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이 십자가의 사랑을 통과한 입술만이 세상의 조롱 문화를 끊어내고 감사의 축제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거친 입술을 은혜의 도구로 고쳐 가십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희롱을 당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할 때,
우리의 입술은 조롱을 멈추고 감사를 채우게 됩니다.
구체적이고 작게, 바로 오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우리의 삶이라는 거친 현실로 가져와 봅시다.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자극적인 조롱과 밈(meme)이 판치는 세상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그 속에서 성도로서 우리의 언어생활을 지켜내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오늘 세 가지를 마음에 품고 구체적으로 돌이키기를 원합니다.
1. 첫째, 나를 돋보이게 하려고 누군가를 깎아내렸던 모습을 회개합시다
대화 중에 은근히 곁에 있는 사람의 약점이나 외모, 실수를 들추어내어 웃음의 소재로 삼았던 적이 있다면,
그것은 유머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인격을 훼손한 죄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2. 둘째, 내 언어의 천박함을 문화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내 영혼의 기갈로 인정합시다
"남들도 다 그러는데 뭐", "요즘 예능 트렌드가 그래"라는 핑계를 내려놓읍시다.
내 입에서 감사가 사라지고 거친 말이 나간다는 것은
지금 내 심령에 은혜의 공급이 끊겼다는 영적 경고등입니다.
"주님, 제 입술을 지켜주옵소서"라고 나의 약함을 주님 앞에 정직하게 고백합시다.
3. 셋째, 오늘 단 한 사람에게 '희롱' 대신 '감사와 격려'를 배달해 보십시오
오늘 예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실 때, 혹은 단톡방에서 늘 하던 기발한 말장난을 잠시 멈추십시오.
대신 오늘 한 사람을 콕 집어 그 사람의 존재에 대한 감사를 전해 보십시오.
부부 사이에, 자녀에게, 혹은 목원들에게 "당신이 내 곁에 있어서 참 감사합니다.
힘을 내세요."라는 진심 어린 감사의 말을 건네 보십시오.
우리의 말 한마디가 바뀌기 시작할 때, 내가 머무는 가정의 공기가 바뀌고, 우리 교회의 영적 온도가 거룩하게 차오를 것입니다.
결론: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말씀을 맺겠습니다. 입술은 우리 영혼의 내비게이션과 같습니다.
지금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이 결국 내 영혼이 가고 있는 방향을 보여줍니다.
경박한 농담과 희롱의 말은 단순한 성격이나 말버릇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안에 하나님의 거룩함이 허물어지고 있다는 엄중한 신호입니다.
세상은 점점 더 강하고, 자극적이며, 남을 사정없이 찔러서 웃기는 언어를 요구할 것입니다.
그래야 살아남는다고 속삭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 온 세상이 조롱으로 가득할지라도 오직 성도의 입술에서만큼은
진실한 은혜와 거룩한 감사의 향기가 피어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돌아서면 우리도 모르게 또 가벼워지고 세상 분위기에 휩쓸려 갈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 입술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우리의 언어를 새롭게 빚어 가실 것입니다.
세상의 가벼운 재치보다 하나님의 무거운 은혜를 선택하십시오.
사람을 찢는 웃음보다 영혼을 살리는 감사를 선택하십시오.
그리하여 우리의 입술이 주님의 십자가를 닮아,
만나는 사람마다 살려내는 복된 입술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세상을 웃기려는 가벼운 몸짓이,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한 무게를 잃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