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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회]
청미(靑眉), 청염(靑髥), 청발(靑髮)에 약간 휘어진 매부리코를 하고 있는 초로의 노인은 매부리코 때문인지 인상이 무척이나 강팍하고 고집이 있어 보였다.
더구나 초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번뜩이는 눈은 나이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날카로웠다.
그의 입가가 살짝 키켜 올라가 있는 것이 웃음을 짓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분명 호의적인 미소로 보였다. 그러나 초관염은 웃을 수 없었다.
푸른 머리에 푸른 수염, 그리고 눈썹마저 푸른 사람은 그의 기억 속에 오직 한 명밖에 없기 때문이다.
초관염은 자신도 모르게 남자의 정체를 입 밖으로 내 뱉고 말았다.
“마....선(魔仙), 혁련후.”
“맞았어! 역시 자네는 알아볼 줄 알았어.”
순간 혁련후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마선(魔仙) 혁련후, 달리 마중선(魔中仙), 또는 마중협(魔中俠)이라고 불리는 남자다.
보기에는 초로의 노인이지만, 그의 나이는 벌써 백 살이 가깝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가 강호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꽤나 늦은 나이였다. 마흔이 넘어 처음 강호로 출두한 혁련후, 그는 곧 엄청난 위명을 날리게 된다.
우연히 시비가 붙었던 그 당시 절정 고수들인 환마삼존(奐魔三尊)을 비롯해, 수많은 강호의 고수들을 연달아 격파하며 혁혁한 무명을 날리게 된다.
그러나 그가 결정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당시 마도문파 중 규모나 강력함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철산문(鐵山門)이 그의 손에 멸문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들이 부딪치게 된 동기나 원인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었으나, 당시 강호는 그 사건으로 인해 한동안 술렁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철산문은 전체 문도 수는 겨우 오백에 불과할 정도로 숫자가 적었으나, 대신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무위는 일반 문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쉽게 말해 소수정예인 것이다.
철산문의 문주인 일수개천(一手開天) 정만호는 당시 강호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평가를 받았던 고수로,
별호에서 알 수 있듯이 한번 손짓에 하늘을 찢어발길 수 있을 정도로 가공할 수공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 악몽의 날, 천산문의 전 문도를 비롯해 장만호는 몸이 난도분시 되어 갈가리 찢겨 죽었다. 그 모든 것이 혁련후 혼자 해낸 일이었다.
그날 이후 혁련후는 마선(魔仙)이란 별호를 얻었다.
비록 문파를 만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마도 문파들은 혁련후에게 존경의 예의를 보냈다. 또한, 어지간한 일이라면 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 마도를 걷는 문파들이 따르는 남자, 그가 바로 혁련후였다.
혁련후를 규정하는 특징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푸른 머리칼에 푸른 눈썹, 푸른 수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독문무공인 마라삼천겁수(魔邏三天劫手)를 극성으로 익히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마선께서 어찌 이곳에........?”
초관염의 눈에는 불신의 빛이 짙게 어려 있었다.
정도(正道)와 마도(魔道), 둘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관계다.
마찬가지로 무림맹의 맹주인 백무광과 마도의 절대자로 통징되는 혁련후 역시 같은 자리에 존재할 수 없는 남자이다.
최소한 초관염이 알기에는 그랬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무엇인가? 백무광과 혁련후가 같은 자리에 마주보고 앉아 있다니, 그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싶어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몇 번을 눈을 비벼도 그의 앞에 앉아있는 사람은 바로 마선 혁련후였다.
“후후! 이곳에 볼일이 있어 왔다가 잠시 들렀지. 오랜만에 천하대회의가 열린다고 하니, 구경거리가 꽤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혁련후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으로도 초관염은 심장이 오그라드는 듯한 경험을 해야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저 늙은 마물까지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의혹이 들었지만 감히 혁련후에게 이유를 물을 수는 없었다.
혁련후는 그런 초관염의 마음을 아닌지 모르는지 이어 신황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혁련후의 입에는 흥미롭다는 빛이 떠올라 있었다.
솔직히 요즘 강호에 나와서 제일 많이 듣는 소문이 바로 신황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아직 서른 정도밖에 안 된 나이에 이미 오래전부터 전설의 한 축으로 자리 잡은 자신들,
대륙십강에 육박하는 무공을 가졌다는 믿지 못할 소문부터 한번 손을 쓰면 피를 보기 전에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소문까지 온통 그에 관한 것들로 강호가 들끓었다.
흥미를 보이는 혁련후의 눈빛에 반해 대륙십강의 수위에 올라있는 혁련후를 보라보는 신황의 눈빛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순간 혁련후가 미소를 지었다.
“그 나이에 무심지경(無心之境)에 이르다니..., 대단하군!”
솔직히 그런 무심함은 자신도 함부로 따라할 수 없다. 그것은 무공의 차이라기보다는 개성의 차이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자신과 같은 사람을 상대로 무심을 유지한다는 것은 신황의 공부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였다.
혁련후의 말에 신황이 입을 열었다.
“신황입니다.”
“혁련후라고 하네.”
여전히 혁련후는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서 신황은 강자의 여유를 읽었다. 같은 대륙십강이라는 상위 서열과 하위 서열의 사람들 간에는 무공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했다.
비록 그것이 반수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들 같은 고수들에게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커다란 차이였다.
혁련후는 그런 초고수들 사이에서도 최상층에 존재하는 자였다.
사제(四帝)위에 삼존(三尊), 삼존 위에 이선(二仙)이라는 말은 괜히 붙여진 것이 아니다. 그만큼 혁련후는 능력을 가늠할 수 없는 초강자였다.
그러나 신황은 그런 초강자 앞에서도 주눅이 들거나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습을 보는 초관염의 가슴이 거세게 쿵쾅거리면서 자신의 심장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만약 저들이 이곳에서 격돌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대륙십강의 수위에 존재하는 혁련후도 그렇지만, 신황 역시 대륙십강의 일인인 팽만우를 비무에서 이겼다.
그것은 무력으로 따지면 신황의 실력이 뒤지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했다. 더구나 신황의 성격상 둘이 충돌하게 되면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오늘만큼은 제발 그 성격 좀 자제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초관염은 등줄기에 한줄기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그때 백무광이 입을 열었다.
“마선께서는 근처에 볼일이 있어 이곳에 들르셨네.
세인들은 우리가 무조건 사이가 안 좋다고 하나, 그래도 지척에 와서도 인사를 외면할 정도로 그렇게 사이가 나쁘지는 않네.”
“사실이지! 더구나 딸아이가 이곳을 구경하고 싶다고 어찌나 성화를 부리는지 말이야.”
백무광의 말에 혁련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도 내 딸의 얼굴을 봤겠군. 그 아이가 자네와 만난 일을 이야기한 것을 보면 말이야. 그 아이는 자네가 무척이나 인상이 깊었던 모양이야.”
혁련후의 딸이라면 신황과 일행이 의창에 들어온 첫날에 객잔에서 만났던 여인인 혁련혜를 말함이다.
신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봤습니다. 그런데 별로 좋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더군요.”
“허~! 그런가? 이거 내 단단히 타일러야 겠구만. 아직 어리다보니 혈기만 왕성해서. 껄껄껄~!”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신황의 말에 얼굴이 붉어졌을 법한데도 혁련후는 그저 웃음만 터트릴 뿐이었다.
만약 이 자리에 혁련후를 아는 자가 있다면 놀라서 기겁할만한 일일 것이다.
마선 혁련후가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는 자를 그냥 놔두는 것도 모자라 웃음을 터트리다니, 세상에 그 누가 이런 경우를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신황을 보는 혁련후는 암중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강호에 사내다운 녀석이 출현했구나. 혜아가 관심을 가질 만해.....꼭 예전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군. 하지만 이런 녀석은 대가 너무 세서 여자들이 고생을 하는데........’
그 순간, 신황의 모습을 보면서 혁련후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 이제 초대협이 이곳에 왜 왔는지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여유로운 모습으로 입을 여는 제갈문, 그의 모습에 초관염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이자가 무얼 믿고 이리 행동하는 겐가?’
제갈문의 눈가엔 미묘하게 곡선이 그려져 있었다. 더구나 초관염을 응시하는 모습이라니, 그것은 마치 학동을 바라보는 스승의 표정과도 같지 않은가?
초관염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그는 이내 마음속에 끌어오르는 열화를 가라앉히며 입을 열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다름 아니라, 당문을 이번 천하대회의에 의제로 올리자는 건의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호~! 당문을 말입니까? 이유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당문은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도리로 도저히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초관염은 열변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는 당문이 사천의 한 시골 마을에서 벌인 일을 그들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들이 어떻게 하독을 하고 병이 도지자 고쳐주겠다는 말로 주민들을 속이고 또다시 어떻게 실험을 반복했는지, 그 모든 일을 소상히 설명했다.
백무광과 제갈문은 초관염의 말에 매우 흥미롭다는 눈빛을 했다. 그 눈빛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초관염은 개의치 않고 끝까지 자신이 사천에서 겪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렇기에 ........저는 이번 당문의 만행을 천하대회의에서 의논하고자 건의 드리는 바입니다.
무림인이 아무런 힘도 없는 양민을 상대로 이런 실험을 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는 법입니다. 이것은 절대 그냥 간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초관염은 그렇게 말을 끝맺고 백무광과 제갈문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들의 결단을 촉구하듯이 말이다.
혁련후는 흥미로운 얼굴로 초관염의 말을 듣고는 백무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눈앞의 백무광이나 제갈문이 어떤 존재들인지.비록 같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립되는 입장에서 이십 년 세월을 대치하다 보면 오히려 친구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그가 아는 백무광과 제갈문은 결코 이런 일이 불거지도록 손을 놓고 두고 볼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는 과연 눈앞의 두 사람이 어떻게 초관염의 말에 대응할지 궁금해졌다.
초관염의 이야기가 끝난 후, 제갈문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증거가 있는지요?”
“증거? 내 자신이 증거네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인가?”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떤 큰일에는 반드시 입증할 만한 증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 당문에서도 우리한테 보내온 서신이 있는데 그것이 묘하게 초대협께서 하시는 말씀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당문에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갈문은 곧 서랍에서 서신을 꺼내 초관염에게 넘겨주었다.
“읽어보십시오.”
묘한 표정을 짓는 제갈문, 그 모습에 왠지 기분이 나빠졌지만 초관염은 순순히 서신을 읽기 시작했다.
순간 그의 인상이 잔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콱~!
그의 손에서 서신이 구겨졌다.
“이놈들~!”
초관염의 이가 뿌득 갈렸다.
콰앙~!
그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탁자를 소리 나게 쳤다.
신황은 눈에 이채를 띠며 초관염의 손에서 서신을 넘겨받았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동요를 하지 않는 초관염이 이리 흥분할 정도라니.신황은 시선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신항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훗!”
순간 제갈문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갑자기 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 때문이다.
탁~!
신황이 서신을 탁자에 놓으며 중얼거렸다. 이미 그 순간 그의 얼굴은 다시 무표정함을 회복하고 있었다.
“선수를 친 건가?”
그 순간, 제갈문의 가슴을 찌르던 바늘 같은 통증이 사라졌다.
그에 제갈문뿐만 아니라 백무광, 혁련후도 적잖이 놀랐다.
감정의 변화에 따라 주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신황이 내공이 등봉조극(登蜂造極)을 넘어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백무광과 혁련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조금 전까지 그들이 신황을 바라보던 감정은 어떻게 보면 잘난 후배를 보는 선배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시선이 바뀌었다. 신황은 단순히 잘난 후배가 아니라 이미 그들의 강력한 경쟁자였다.
“이게 당문의 입장인가 보군.”
신황이 서신을 보며 말했다. 그러자 제갈문이 말했다.
“그렇게! 그쪽에서는 이미 마을 사람들과 합의하에 시험을 했다는군. 그리고 보상이나 제반 모든 것들이 완료된 모양이야.”
“훗!”
당문에서 선수를 쳤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천의 마을에서 벌인 일에 대한 사정과 여러 가지를 구구절절 서신에 적어보냈다.
그 과정에서 진실을 감춰지고 오직 당문이 좋은 일을 했다는 것만이 남았다.
초관염은 어이가 없었다. 사실이 이렇게 호도가 되다니, 설마 그들이 이렇게 움직일 줄은 몰랐다.
그는 백무광을 보며 말했다.
“맹주님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글세.....성수신의와 당문의 주장이 각자 달라서 뭐라 말하기가 곤란하구려, 하지만 성수신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증거가 없구려.”
한마디로 초관염의 말만 믿고 당문을 의심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허허~! 이거 뒷통수를 맞아도 아주 크게 맞았습니다. 정말 명문정파를 표방하는 당문이 이런 꼼수를 쓰다니, 허허허~!”
이제 초관염도 상황을 인정했는지 허탈한 웃음을 토해냈다.
정말 당해도 제대로 당했다.
설마 당문이 이런 수법을 쓰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제갈문이 득의 어린 웃음을 지으며 말을 했다.
“조만간 당문에서도 천하대회의 때문에 이곳으로 올 것입니다. 정 인정할 수 없다면, 당문과 초대협이 대면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뭐가 달라질까? 됐네.”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춰놨을 것이다. 당문 차원에서 준비를 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의 반해 자신은 오직 뜨거운 마음만 있을 뿐 그런 준비는 하나도 못했다. 아마 다시 만나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될 것이다.
그때 신황이 입을 열었다.
“만약 천화대회의에서 문파와 문파 간에 갈등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해결합니까?”
“글세......일단 원칙적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방침을 정해두고 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면 공개 비무로 문제를 풀게 하네.
그리고 마침 이번 천하대회의에서도 문파들의 결속을 단단히 하는 차원에서 비무대회가 잡혀 있다네.”
대답을 한 사람은 제갈문이었다.
이번 천하대회의를 주도하는 모든 일정을 짜는 사람이 바로 제갈문이다.
백무광은 이제 그런 소소한 일에서 손을 놓고 관망의 자세로 돌아선지 오래였다. 그가 움직일 때는 정말 무림맹에 큰일이 닥쳤을 때뿐이다.
그때 수동적으로 대답만 하던 백무광이 신황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난 기본적으로 무림맹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최대한 자유를 보장하네. 문제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말이네 . 난 자네가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를 바라네.”
매우 부드러운 말이지만 그의 말속에는 거역하기 힘든 힘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신황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대답했다.
“날 건드리지만 않으면 문제가 생길 일은 없을 겁니다.”
“만약, 건드린다면?”
“끝을 봐야겠지요.”
“그게 어떤 상대라도?”
“오직 둘 중 하나만 살아남을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기세 싸움, 백무광과 신황의 팽팽한 신경적이 벌어졌다. 그들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대치하고 있었다.
그 기세에 초관염과 제갈문이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들이 견디기에는 두 사람의 기세가 너무나 막강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이십 년 간 신비에 쌓여 있던 무림맹의 맹주와 강호에 새로이 나타난 살성과의 기세 싸움, 이 두 사람의 기세 싸움을 말린 것은 다름 아닌 혁련후였다.
“자....자! 두 사람 살벌한 눈싸움은 그만 하고 오늘은 이만 헤어집시다. 더 이상 얼굴보고 있다간 사단이 일어날 것 같으니.”
동시에 그들 사이에 한발을 들이미는 혁련후, 두 사람의 기세 싸움에 그가 끼어든 것이다.
콰콰콰~!
순간 제갈문과 초관염은 실내가 진공상태가 된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귀가 멍멍해지고 물건이 두세 개식 겹쳐 보이는 현상이 그들을 지배했다. 동시에 실내의 물건이 두두두 떨리기 시작했다.
‘신....황! 절대자들이 인정을 했다는 말인가?’
두 명의 절대자와 기세를 겨루면서도 전혀 밀림이 없는 신황, 그를 보며 제갈문이 충격에 휩싸였다. 그리고 인정해야 했다.
그동안 자신이 신황이란 존재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음을. 그래서 자신의 딸이 죽었음을.
구욱~!
그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손톱이 파고들어간 손바닥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는 전혀 그런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후, 첨예하게 대립하던 세 명이 조금씩 기세를 거뒀다. 그렇게 잠깐 동안의 대치는 끝이 났다.
“다음에 다시 만나지요.”
신황이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묘한 여운을 남기는 그의 말에 백무광이 눈을 반짝였다. 신황과 초관염이 맹주실을 나섰다.
그들의 뒤를 혁련후가 묘한 웃음을 흘리며 따라나섰다.
“이봐! 같이 가자구. 자네 나이를 보니, 내 딸하고 그리 차이도 안 나는 것 같은데....이봐.”
그렇게 신황과 초관염, 혁련후가 밖으로 나간 후 백무광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신...황! 길가에 걸리는 조그만 돌맹이가 아니라 길 전체를 가로막고 있는 커다란 바위였군.”
“그 정도입니까?”
“그냥 놔두면 천하대회의를 망칠수도 있을 존재야.”
그는 조금 전에 신황을 시험했다.
비록 중간에 혁련후가 끼어들면서 온전한 힘을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그 나이에 그 정도 공력과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당문의 주력이 언제 이곳으로 들어오지?”
“닷새 정도면 들어올 거라 생각됩니다.”
“천수암제(天手暗帝)도 신황과 원한이 있다고 했던가?”
백무광의 말에 제갈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셋째 아들이 저자의 손에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로 인해 천수암제의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고 들었습니다. 그를 이용할까요?”
“방법을 찾아봐.”
“알겠습니다.”
“그리고 혁련후 늙인이, 무슨 냄새를 맡은 것 같은데 각별히 조심토록 하고.”
“물론입니다.”
그렇게 지시를 내린 후 백무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보며 제갈문은 조용히 물러났다. 주군이 혼자 사색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그를 생각나게 만드는군.”
초관염의 안색은 그리 좋지 못했다.
“설마 당문이 먼저 선수를 칠 줄이야.”
그는 못내 당문의 일에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에 반해 신황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무림맹의 맹주인 백무광을 만났다는 것도, 자신을 노린 당사자인 제갈문을 면전에서 직접 봤다는 것도,
그리고 옆에서 같이 걷고 있는 혁련후 조차도 그에게는 어떤 의미도 주지 못하는 듯했다.
혁련후는 그런 신황을 굉장히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감히 자신을 두고도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는 오늘 처음 알았다.
그것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혁련후는 도저히 궁금증을 참지 못하겠는지 신황을 보며 말을 건넸다.
“자네, 사문이 어찌 되는지 말해줄 수 있겠는가? 내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의 사문으로 짐작되는 곳이 떠오르지 않으이.......”
혁련후의 나이도 어느새 백수를 눈앞에 두고 있다. 하지만 백년의 세월 동안 살아온 그의 기억 어디에도 신황과 같은 인물을 키울 만한 곳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들은 신황의 무공은 기를 이용한 전신무공인데, 중원 어디에도 그런 무공을 사용하는 곳은 없었다.
무공이란 것이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 경우는 없다.
제아무리 무공을 만든 사람이 천재라 해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세월동안 다듬고 보완하고 발전시켜야 형태를 잡는 것이 무공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신황의 무공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졌다고 짐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때문에 그는 신황의 가문이나 가문이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이라고 짐작했다.
혁련후의 기대에 담긴 시선을 받으면서도 신황의 인상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이름 없는 가문일 뿐입니다. 말씀드려도 모르실 겁니다.”
“그래도 혹시 아는가? 말을 하면 혹 알 수 있을지.”
“사정이 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신황은 입을 다물었다.
그 무심한 모습에 혁련후의 눈가가 미미하게 떨렸다. 그가 비록 신황을 좋게 보고 있지만, 그래도 그의 본질은 대륙십강의 수위를 차지하는 고수다.
무력은 둘째 치고, 그가 강호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당금 강호에서 절대적일 만큼 크다.
그런데 신황은 그런 자신을 의도적인지, 아니면 정말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철저하게 무심하게 대했다.
그것이 그의 자존심을 은근히 상하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감정을 쉽게 노출시키지 않았다.
그래도 강호의 선배고수로서 쉽게 감정을 노출시키는 것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이 상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혁련후를 보며 마음을 졸인 것은 다름 아닌 초관염이었다.
초관염은 잘 알고 있었다. 혁련후의 성격이 얼마나 괴팍한지 말이다.
지금은 비록 이렇게 웃음을 보이고 있지만 자신의 기분에 따라 천사도 되었다가 악마도 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혁련후다. 그런 혁련후를 상대로 저런 태도라니.
그러나 초관염이나 혁련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황은 오직 앞만 보고 걸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의 기억이 계속 재생되고 있었다.
백무광, 혁련후와 함께 한 힘겨루기는 겉으로 보기에는 팽팽한 힘 싸움인 것처럼 보였지만,
누구도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인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자신을 속인 채 그저 균형만 맞춘 것이다.
‘어차피 진짜 싸움은 시작도 안 했으니까.’
신황은 그렇게 생각했다.
강호에서 아무리 명성이 하늘을 찔러도 직접 겨루기 전에는 그 실력을 알 수 없다.
어차피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이고, 살아남은 자만이 자신의 몸으로 강함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혜아를 말려야겠구나......이런 놈은 결코 여자에게 쉬이 정을 주지 않는다. 자칫 잘못하면 혜아만 마음고생 할 테니 미리 말리는 것이 좋겠구나.’
혁련후는 무심한 신황의 눈을 보며 그리 중얼거렸다. 그는 적어도 한가지만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신황의 무심함이 진짜란 것을 말이다. 저렇게 무심한 자는 자신이 인정한 사람이 아니면 결코 정을 주지 않는다.
혁련후는 늘그막에 얻은 자신의 귀한 딸이 그런 남자로 인해 마음고생 하는 꼴은 죽어도 볼 수 없었다.
금자추는 무림맹 사천지부의 정문 무사다. 그는 특별히 무공이 강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들만큼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다.
그래도 그는 사천지부의 정문을 지킨다. 그것은 그가 가진 단 한 가지 장점 때문이었다.
금자추는 성실했다.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겨이 보는 일을 빼먹지 않았으며 또한 게을리하지도 않았다.
그런 점을 높게 사 무리맹 사천지부에서는 그에게 정문 경비를 맡겼다.
물론 그 이면에는 감히 누가 무림맹의 지부를 우습게 볼까 하는 생각이 숨겨져 있었다.
어쨌거나 요식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금자추 같은 삼류무사에게 맡겨도 상관없다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금자추에게는 그런 것 따위는 상관이 없었다. 위에서 어떻게 생각하든 그는 자신의 일에 매우 만족을 하고 있었고, 또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일로 인해 부모와 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들이 먹고살기 때문이다.
때문에 오늘도 그는 두 눈을 부릎뜨고 경계를 서고 있었다.
“임마! 그렇게 눈을 뜨니 그렇게 튀어나오는 거야. 사람이 좀 쉬엄쉬엄 해야지, 이렇게 융통성이 없어서야......쯧쯧~!”
오늘오 그의 옆에서는 주마운이 한소리 하고 있었다. 주마운 역시 무림맹 사천지부의 경비무사로 금자추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주마운은 머리에 깍지를 끼고 하늘을 쳐다봤다.
“날씨 우라지게 좋구나~! 이런 날은 매향루의 향옥이 궁둥짝이나 두들기고 앉아 있어야 하는데.....제길!”
주마운의 눈에 하늘에 둥실 떠있는 흰 구름이 마치 향옥의 둥근 궁둥이랑 겹쳐 보였다. 그는 한참이나 구름을 보다 무언가 심사가 뒤틀렸는지 금자추를 보며 투덜거렸다.
“젠장~! 융통성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놈하고 하필 같은 날 경계라니.”
그러나 시끄러운 주마운의 잔소리에도 금자추는 묵묵부답으로 전방만 바라봤다.
그 모습에 주마운은 혀를 차는 소리를 내며 다시 투덜거렸다. 모든 일이 그렇듯, 맞장구 없이 혼자 떠드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때문에 주마운 역시 혼자 떠들다 지쳐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렇게 주마운의 방해에도 꿋꿋이 자신의 임무를 다하던 금자추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손에 든 창에 더욱 힘을 주며 주마운을 불렀다.
“형....님!”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금자추가 다시 주마운을 불렀다.
“형님!”
“왜 임마!”
“저 앞에 보이는 거 뭐 같수?”
“응! 이놈이 뜬금없는 소리를 하고 지랄이야.”
계속되는 금자추의 말에 주마운은 다시 투덜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순간 그의 안색이 변했다.
“저....거?”
“습격자?”
“빌어먹을!”
환한 대낮에 대담하게 무리를 지어오는 수십 명의 남자들, 복장은 평범했으나 하나같이 복면을 하고 있었다. 선의의 용건으로 오는 남자들이 저런 복장으로 올 리는 만무했다.
꿈틀~!
복면인들의 입부분이 움직였다. 곡선을 이루며 말려 올라가는 천 조각. 아마 복면 속에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리라.
그들의 눈에 허둥지둥하는 정문의 경비무사들이 보였다. 경비무사들은 자신들을 발견했는지 무어라 소리를 지르려 했다.
흭~!
순간 복면인 중 한 명의 손이 눈부시게 허공을 갈랐다.
“컥!”
“으악~!”
정문에서 경비하던 무사들은 외마디 비명을 지른 채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그들의 목에서 어느새 은색이 번쩍이는 비도가 손잡이까지 꼽혀 있었다.
십 장의 거리를 격하고 이루어진 공격이었다. 그럼에도 경비무사들은 전혀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죽어갔다. 그만큼 복면인의 비도술은 가공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선두에 선 우두머리 복면인이 말했다.
“최대한 잔인하게, 하나의 생명체도 남기지 않는다.”
씨~익!
그의 명령에 나머지 복면인들의 눈이 곡선을 그렸다.
그리고 사천지부의 높다란 담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들과는 달리 우두머리 복면인은 정문을 통해 사천지부로 들어갔다.
철퍽~!
그의 발밑으로 경비무사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선혈이 밟혔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무심하기만 했다. 무림맹의 본성도 아닌 사천지부의 경비무사의 목숨 따위는 그의 안중에는 들어오지도 않는 것이었다.
꿈틀~!
그가 지나간 자리에 쓰러져 있던 경비무사의 손가락이 미미하게 움직였다.
아직 금자추의 숨통이 끊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조금만 더....하면 큰 애 혼인까지 시킬.......’
그것으로 끝이었다. 금자추는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에게는 올 겨울 혼인시키기로 한 자식이 있었다.
그 때문에 더욱 열심히 일했는데, 이제는 그마저 소용없게 되고 말았다.
“크아악!”
“으아아~악!”
채채채챙~!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금자추의 시체 위로 울려 퍼졌다.
사천지부장 양명한은 갑자기 난입한 복면인을 보며 침중한 눈빛을 했다.
선자불래(善者不來) 내자불선(來者不善)이라, 아무리 봐도 이들은 결코 좋은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으악!”
쉬익~!
비명소리와 함께 무기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그의 귀를 어지럽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명한은 섣불리 다른 곳에 시선을 줄 수 없었다.
그의 앞에 있는 복면인 때문이었다. 그저 가만히 자신을 보고 있음에도 양명한은 쉬이 움직일 수 없었다.
‘감히 상대할 수 없는 고수!’
단지 자신을 보고 있는 것뿐인데 따가운 기운이 피부에 느껴졌다. 그것은 감히 양명한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경지였다.
그는 침중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이곳은 무림맹의 사천을 총괄하는 지부이오.”
“그래서 온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곳에 올 이유가 없지.”
복면인은 그런 양명한이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음을 흘리며 사늘하게 말했다.
오랜 세월, 평화에 찌든 무림맹의 무인들과 오랜 세월 와신상담 무공을 닦은 그의 부하들은 애당초 격에 맞는 상대가 아니었다.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자는 모두 무림맹의 무인들이었고, 도륙하는 자들은 모두 복면인의 부하였다.
이런 자들 때문에 지난 세월 무공을 닦았다니 어쩐지 억울해지기까지 했다.
양명한은 자신을 두고도 딴 생각을 하는 복면인의 태도에 이를 깨물었다.
아무리 격이 떨어지더라도 그 역시 수십 년 칼 밥을 먹고 산 무인이 아닌가. 그는 자신을 무시하는 복면인의 태도에서 자신이 살 수 있는 한 가닥 희망을 보았다.
쉬익~!
그는 소리도 없이 복면인을 향해 쇄도했다.
어차피 기호지세(騎虎之勢), 이들이 왜 무림맹의 사천지부를 습격했는지 알아내는게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라도 살아남는 것이 당연 과제였다.
절실한 그의 마음이 실린 검은 생애 최고의 속도로 눈부시게 출수됐다.
‘좋았어!’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의 검이 지척에 이르도록 복면인이 전혀 반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이었다.
“명을 재촉하는구나.”
복면인의 입에서 나직하게 터져 나오는 말과 동시에 그의 모습이 갑자기 양명한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퍽~!
이어 터져 나오는 한줄이 격타음.
순간 양명한은 미간에 불같은 통증과 함께 시야가 흐릿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복면인의 허리에서 다시 한 번 번쩍인 은색의 섬광.
주르륵!
양명한의 허리가 사선으로 기울어지며 상체가 흘러내렸다.
비병도 지르지 못하고 맞이한 최후, 아직까지 두 눈을 부릅뜬 양명한의 눈에는 짙은 불신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복면인은 발밑에 나뒹구는 양명한의 시체를 보며 중얼거렸다.
“허약하군! 중원은...........”
기대보다 무림맹은 자신의 기대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복면인은 사천지부의 무사들을 도륙하는 자신의 부하들을 보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의 원한이 풀리지는 않아. 중원 전체가 피로 물들어야만 우리의 한이 풀릴 거야.”
그의 음성은 무척이나 쓸쓸하면서도 처연했다.
그날 무림맹 사천지부는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정체불명의 복면인들이 환한 대낮에 난입해 잔인하게 살육을 저질렀다.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대낮부터 복면을 하고 다니는 남자들의 위세에 밀려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개방을 통해 근처의 지부에서 사람들이 파견 나왔을 때는 이미 모든 일이 끝난 귀였다.
처참하게 불타버린 사천지부, 그리고 반쯤 그을려 탄내를 풍기는 검은 시체들과 내를 이루며 흘러내리는 핏물뿐이었다.
사천지부에 파견 나와 있던 무인 이백오십 명이 때죽음을 당했다.
더구나 얼마나 잔인하게 죽였던지 그들의 시체를 보았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욕지기를 했다. 불에 그슬린 것은 둘째 치고, 제대로 형태를 유지한 시체조차 없었다.
이 사건이 충격적인 것은 바로 일어난 시간 때문이었다. 사천의 성도에서 대낮에 일어난 사건, 그들은 대담하게도 벌건 백주대낮에 살육을 저지른 것이다.
이 백주대낮의 참극은 곧 지급으로 무림맹에 보고됐다.
하지만 무림맹에서 미처 어떤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사천에 있던 무림맹의 다른 지부들이 또다시 습격을 받았다.
사천에 있는 문파들인 청성파(靑城派)나 아미파(峨嵋派), 그리고 사천의 주인인 당문은 철저히 외면한 채
오직 무림맹의 지부만 노려 일어난 이 사건은 강호에 일파만파 파문을 안겨줬다.
콰~앙!
제갈문은 탁자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탁자 위에는 방금 전에 날아온 서신이 펼쳐져 있었다. 서신에는 사천에 존재하는 무림맹 지부의 참사에 대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제갈문은 잠시 창문을 보며 숨을 가다듬었다. 흥분한 것도 잠시, 그는 곧 이성을 되찾고 사천에 일어난 참사에 대해 분석하기 시작했다.
“분명, 이것은 우리를 노리고 벌어지는 일이다. 하지만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구나.”
만약 평소였다면 그는 분명 무림맹의 모든 힘을 통해 사건의 배후를 밝혀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무림맹은 천하대회의라는 거대한 행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때문에 따로 인원을 동원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분명 이 시기를 노리고 있을 벌이는 것이다.
가만....그러고 보면 황주상단과 그들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황주상단 역시 우리의 자금줄인 무령상단을 압박하고 있으니........., 하긴, 상관없겠지!”
순간 제갈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허공을 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비영(秘影)!”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등 뒤에 비영이 나타났다. 제갈문은 그런 비영을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황주상단과 사천지부를 습격한 흉수들의 연관성을 조사하도록.......분명 어떤 연관이 있을 것이다.”
“존명!”
스르륵!
비영은 대답과 함께 다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연관이 없으면 연관을 만들면 되고, 흉수의 정체를 모르면 흉수를 만들면 된다. 그것이 제갈문의 생각이었다.
“분명, 황주상단이 일련의 사건에 중심에 있는 게 틀림없어!”
그것은 어떤 예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무림맹을 둘러싸고 어떤 암류가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비록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황주상단을 들쑤신다면 그들도 더 이상 숨지만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후후~! 정체가 뭐든 상관없지. 어차피 거대한 해일에 휩쓸려 사라질 운명이니...... 물론 그거기 전에 신황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회수해야겠지?”
아마 신황은 모를 것이다. 그의 품에 있는 물건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한편으로는 그래서 안심할 수 있었다.
일단 신황의 품에 물건이 있다면 다른 이들에게 넘어갈 확률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천하대회의가 코앞으로 다가옴에 따라 수많은 문파들과 세가들이 본격적으로 무림맹을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강호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호북으로 몰려들었다.
북경의 팽가 역시 그런 가문의 하나였다. 하지만 팽가가 다른 문파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전면적인 세대교체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장로급 이상의 인원은 팽가에 남고, 장년층과 청년층으로 이루어진 고수들을 중심으로 인원을 꾸려 그들은 팽가를 나섰다.
천하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팽가의 정예들이 나서는 날, 뜻밖의 사람도 눈에 띄었다.
은색 머리와 은색 수염, 그리고 은색의 눈썹을 가진 부리부리한 인상을 가진 초로의 노인, 그는 바로 팽가의 가주인 팽만우였다.
원래대로라면 그는 팽가에 그대로 있어야 했지만 이제 차기가주로써 행보를 시작한 아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같이 길을 나선 것이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팽가의 장손인 팽관수와 무이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은 팽만우의 결정이었다.
그는 가문의 장손인 팽관수의 안목을 넓혀주기 위해 같이 갈 것을 결정했다. 그리고 무이는 이미 신황과의 약속에 의해 같이 동행하기로 결정이 난 상태였다.
서문령과 금아현은 팽관수와 무이의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며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봤다.
가문의 정예들과 같이 가기에 신변의 걱정은 없지만, 그래도 자신의 핏줄이 험한 세상으로 가는데 걱정이 안 될 사람은 없었다.
서문령은 무이와 팽관수의 얼굴을 만져주며 말했다.
“할아버지 말씀 잘 들어야 한다. 그리고 관수가 오빠니까 동생인 무이를 잘 돌봐줘야 한다.”
“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니! 제가 잘 지킬게요.”
“그래, 내 강아지들......... 잘 갔다 오너라.”
“할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오냐!”
팽관수는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는 서문령을 오히려 위로했다.한편 금아현과 무이도 서로의 얼굴을 보며 이별을 하고 있었다.
“잘 갔다 와야 한다. 항상 몸조심 하고”
“네! 걱정하지 마세요. 전에도 여행을 했었어요.”
“안다! 하지만 걱정이구나.”
“헤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할아버지하고 음... 아빠...하고도 같이 가잖아요?”
무이가 웃음을 지으면서도 어렵게 아빠라는 말을 했다. 팽주형을 가리키는 말이다.
팽만우는 무이에게 팽주형과 서문령을 부를 때 항상 아빠, 엄마란 말을 쓰게 했다.
비록 입에 익지 않고 어색할지 모르나, 처음부터 그렇게 불러야 정이 더 두터워진다는 이유에서였다.
때문에 무이는 그들을 부를 때 어색하긴 하지만 반드시 엄마, 아빠라는 말을 썼다.
“가서 몸조심 하고, 항상 팽가의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거라, 넌 누가 뭐래도 팽가의 핏줄이고 나의 딸이니까.”
금아현의 말에 무이가 그녀의 목을 껴안았다.
“갔다 올게요. 그때까지 몸조심 하세요. 전 할아버지하고 같이 가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엄...마!”
“그래! 내 딸아.”
금아현은 무이의 등을 몇 번 토닥여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팽만우가 외쳤다.
“이제 출발하자. 이러다가는 해질녘에나 출발하겠다.”
그의 외침에 서문령과 금아현은 아쉬운 얼굴을 하며 일어섰다.그런 그녀들에게 팽주형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늦어도 두 달 안에는 돌아올 겁니다. 그때까지는 저와 아버님이 잘 돌볼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아범이 애들을 잘 돌봐 주거라. 하긴, 가구께서 워낙 아이들을 아끼니까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만.”
“하하하~! 그래서 이렇게 마차까지 준비하지 않았습니까! 아버님과 이이들이 같이 타고 갈.......”
팽주형의 말처럼 팽가에서는 이번 여정을 위해 마차를 준비했다. 모두가 팽관수와 무이, 정확히 말하면 무이를 위한 배려인 것이다.
서문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주께서 역정을 내실라. 얼른 출발하게.”
“알겠습니다. 어머님!”
팽주형은 고개를 끄덕이고 무이와 팽관수를 팽만우가 타고 있는 마차에 태웠다. 그제야 짜증어린 기색이 맺혀있던 팽만우의 얼굴이 풀어졌다.
“어서 앉거라.”
“네~. 할아버지.”
대답과 함께 냉큼 팽만우 옆에 앉는 무이, 그러자 그렇지 않아도 웃음을 짓던 팽만우의 입이 더욱 크게 찢어졌다.
팽관수는 그 광경에 고개를 흔들었다.
‘앞으로는 무이에게 잘 보여야 할지 몰라.’
무이 앞에서만 약해지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약간은 시샘마저 드는 팽관수였다.
“출발한다~!”
그때 팽주형이 크게 외쳤다.
그제야 움직이는 팽가의 정예, 그런 그들을 보며 서문령과 금아현은 하염없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한편 그런 팽가의 환송식을 은밀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팽가의 행사를 보다 마침내 그들이 자리를 떠나자 품에서 전서구를 꺼내 급히 휘갈긴 내용을 묶어 날려 보냈다.
“약 오십여 명으로 구성되었군...... 훗, 다른 문파들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인데? 뭐,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우리야 저들을 쫓으며 행적만 보고하면 되니까.”
그들은 잠시 팽만우 일행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다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창은 이제 사람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천하대회의의 날짜가 다가옴에 따라 수많은 무인들과 사람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무림맹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은 극히 일부였기 때문에 무림맹은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았다.
마치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날씨가 흐렸다. 그러나 그에 상관없이 초풍영은 무림맹의 외성을 마치 자신의 집안처럼 누볐다.
일단 한군데 자리 잡으면 꿈쩍을 하지 않는 신황과 달리 그는 몸이 근질거려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그 덕에 그는 무림맹에 온 젊은 사람들과 꽤 많은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오늘도 그는 친분을 쌓은 사람들과 함께 외성에서 제일 규모가 크고 화려한 객잔으로 들어갔다.
이곳 객잔은 무림맹에서 외인들을 접대하기 위해 특별히 만든 곳으로, 따로 밖으로 나가지 않더라도 무림맹 안에서 객고를 풀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초풍영이 만난 사람은 다름 아닌 광불과 혁련혜였다. 비록 첫날의 만남은 남궁영 덕분에 그리 유쾌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젊은 사람들이다 보니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더구나 그들 모두가 하나같이 배경이 만만치 않은데 반해 성격이 꽤나 소탈했기에 친해지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그날의 일을 핑계 삼아 앙금을 털었으니, 그들에게는 전화위복이나 마찬가지였다.
단 이 과정에서 남궁영은 철저히 소외를 받았다.
아무리 무인의 자존심이 걸려 있다 하더라도 무공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암수를 썼다는 것은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
초풍영 등은 객잔의 삼층에 자리를 잡았다. 삼층이 이곳에서 제일 한가할 뿐 아니라 시설도 깨끗하기 때문이다.
초풍영은 앞에 있는 술잔을 무척이나 맛있게 들이켰다. 그런 초풍영을 보며 광불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술을 마시면 무당에서 혼나지 않습니까?”
“크하~! 뭐, 어떻습니까? 이곳에서 무당까지 수백 리 인데 제가 이곳에서 술을 마시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두 분만 조용히 해준다면 제가 혼날 일은 절대 없습니다.”
광불의 물음에 초풍영은 입가를 닦으며 넉살좋게 대답했다. 그 모습에 혁련혜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두 분 모두 전혀 무당과 소림의 제자들 같지가 않아요.”
소림과 무당. 강호를 대표하는 양대 문파, 그만큼 엄격한 규율과 절제를 강요한다. 하지만 눈앞의 두 사람을 보자면 전혀 소림과 무당에 속해있을 것 같지 않았다.
초풍영은 사람 자체가 너무나 자유분방했고, 광불은 평상시에는 조용하지만 한번 울컥하면 불같은 성격을 자랑한다. 두 사람의 성격 모두 소림과 무당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두 문파 최고의 기재 중 한 명이라는 것도 특이할 만한 일이었다. 여하튼 그런 이유 때문인지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성격이면서도 무척 친하게 어울렸다.
혁련혜는 그런 두 사람과 어울리는 게 싫지 않았다. 솔직히 남궁영 같이 겉만 번지르르한 인간 보다는 이들이 훨씬 인간적이었으니까.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있었지만, 그것은 오직 그녀 혼자만 알고 있을 뿐이다.초풍영은 연거푸 술잔을 들이키며 말했다.
“이렇게 산에서 내려와 자유롭게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산에 들어가면 다시 ‘나 죽었소!’ 하고 꼼짝없이 잡혀 지내야 하는데....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 하지 안겠습니까?”
“그건 초형의 말이 맞습니다. 이렇게 한 번씩 속세 구경을 하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다고 봅니다. 꼭 절에서 면벽하는 것만이 수행은 아니니까.”
“그~! 광불 형은 내 말에 동의할 줄 알았습니다. 자! 한잔 더 합시다.”
광불의 말이 기꺼운 듯 초풍영은 그에게 술잔을 권했다.
광불은 거절하지 않고 초풍영과 잔을 부딪친 후 술을 들이켰고 혁력혜 역시 그들과 같이 잔을 들었다.
광불은 술잔을 맛있게 비운 후 혁련혜에게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그런데 혁련 소저와 혁련 대협께서는 어쩐 일로 무림맹에 오신 겁니까? 두 분 모두 무림맹에 오시는 게 껄꺼러웠을 텐데요.”
그의 말에 혁련혜가 자신의 입가를 닦아내며 말했다.
“후~! 비밀이라고 하면 더 안 물어볼 건가요?”
“그렇다면야, 더 이상 물어볼 수 없지요. 하지만 솔직히 궁금하군요.”
광불의 말에 혁련혜가 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말하는 광불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때무에 혁련혜는 순순히 웃으며 대답했다.
“뭐,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단지 이번처럼 대규모의 인원이 모이는 행사를 놓치고 싶지 않다고 해야 할까요?
무슨 일이 있으면 잘 뭉치는 정파에 비해 마도는 개인적인 성향 때문에 이렇게 모이는 것이 쉽지 않으니까요. 때문에 사람 구경을 하고 싶어 내가 우겨 이렇게 나오게 된 거죠.”
“그렇습니까?”
“후후~! 거기까지가 내 이유이고, 우리 아버지의 이유는 솔직히 나도 잘 몰라요.
나 때문에 아버지가 같이 나왔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마 천하에 단 한 사람도 없을 거예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하지만 왜 나왔는지는 나도 몰라요.”
솔직히 혁련혜는 혁련후가 이곳에 왜 왔는지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그녀는 오랜만에 맞이한 자유가 즐거울 뿐이었다.
광불은 혁련혜의 표정에서 그녀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다.
‘마도의 절대자가 괜히 무림맹으로 온 것은 아닐 텐데,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비록 마도를 걷고 있었지만 그래도 정사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아 정파인들에게도 인정을 받는 사람이 혁련후다.
오죽하면 마중협(魔中俠)이라고 부를까? 때문에 무림맹에 들어왔어도 사람들이 그를 적대하지 않고 오히려 경외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혁련후 같은 거물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림맹에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정도의 절대자가 움직이는 것은 그만큼 합당한 이유가 있을 때뿐이니까.
광불은 그 이유가 궁금했으나 혁련혜조차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더 이상 알아낼 방법이 없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는 광불에 비해 혁련혜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아니 단순하게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누가 사람의 속을 완벽하게 알 수 있을까?
이 중에서 제일 속이 편한 사람은 초풍영인 듯 보였다. 그는 연신 만족스런 웃음을 터트리며 술을 마셨다. 정말 이렇게 마음 놓고 술을 마셔본 게 언제인가 싶었다.
혁련혜는 그런 초풍영을 보며 말했다.
“뭘 그렇게 급하게 마셔요?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크~! 말 마십시오. 이렇게 마음 편하게 술을 마시는게 그리 쉬운 일인 줄 압니까? 내 숙부님은 항상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고,
형님하고 술을 마시면 목에 뭐가 걸린 것 같아서 얹히는 느낌입니다. 그러니 두 사람이 없을 때 실컷 마셔둬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습니다.”
“신대협이 그 정도예요? 의동생인 초소협하고 있을 때도?”
“흐흐. 내 형님이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양반 진짜 남자입니다. 세상에 그런 남자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너무나 자신과 남에게 엄격하니...... 솔직히 나만큼 굵은 신경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양반 앞에서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 겁니다.
때문에 나도 그 양반 앞에서는 사례가 걸릴 때가 많아요.”
초풍영의 말에 혁련혜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좀 더 자연스럽게 초풍영의 말을 유도했다.
“그럼, 신대협의 사문은 어딘가요?”
“글쎄요, 워낙 자신에 대해서는 떠들지 않는 성격이라. 아~! 전에 얼핏 들었는데 아마 장백산 어딘가에 본가가 잇다 들었습니다. 참!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순간 초풍영은 말실수를 했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내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술잔을 들었다.
“자....자! 복잡한 이야기는 그만 하고 술이나 마십시다.”
하지만 광불과 혁련혜는 편하게 술을 넘길 수 없었다. 이제까지 신황의 모든 것은 철저한 비밀에 쌓여져 있었다.
단시일 내에 그만한 명성을 쌓은 자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로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는 것이다.
그의 사문은 고사하고, 심지어 그의 고향이 어디인지조차 알려지지 않았으니 말 다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 그의 본가가 장백산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중원의 그 누구도 모르는 그들만 아는 정보였다. 그것이 중요했다.
‘남들이 모르는 정보는 그만큼 높은 값어치를 가지는 법이지. 아빠에게 말해서 그의 본가를 알아보라고 해야겠네? 한 보름 정도면 충분히 찾아낼 수 있겟지?’
본가가 장백산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근처에 있는 마도의 문파 몇 군데를 동원한다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혁련혜는 그렇게 생각하며 은밀히 미소를 베어 물었다.
광불 역시 이 이야기를 소림에 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편 초풍영은 두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관심도 없는 듯 술만 들이켜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각자의 생각 속에 같은 자리에서 술을 마셨다.
남궁영이 객잔에 올라온 것은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무렵이었다.
그의 곁에는 그의 동생인 남궁유선과 몇 명의 노인이 함께 했다. 객잔에 올라서던 남궁영의 얼굴이 일순 일그러졌다.
그에 의아함을 느끼고 남궁유선이 남궁영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녀 역시 기분 나쁜 얼굴을 하고 말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 같이 웃고 떠들던 사람들이 이제는 다른 사람과 같이 술자리를 하며 똑같이 웃고 떠든다.
자신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저들이 네가 말한 사람들이냐?”
뒤에 남궁세가의 장로 중 한 명이 물었다 그는 무척 덩치가 비대하고 탐스런 수염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의 이름은 남궁도학으로, 탈혼일검(奪魂一劍)남궁도학 하면 강호의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대단한 검호였다.
그만큼 남궁도학은 자신과 남궁세가에 자부심이 컸는데, 신황에 의해 가문의 장남이 망신을 당했다고 하자 심기가 많이 상해있던 차였다.
하지만 그는 쉽게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오늘은 저들을 혼내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젠 아예 아는 척을 하지 않는군요.”
남궁영은 즐겁게 웃고 떠드는 초풍영 등을 보며 이를 갈았다.
특히 그의 눈은 혁련혜에 집중돼 있었다. 그의 눈은 질투의 빛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남궁유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궁도학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타일렀다.
“됐다. 어차피 저런 잔챙이들과 연을 맺어봐야 득이 될 것 하나 없다. 넌 몸가짐을 조심하고 지금 만날 분에게만 잘 보이거라.”
오늘 그들은 매우 중요한 사람을 만나기로 했다.
생각 같아서는 이곳의 객잔을 통째로 전세 내었으면 좋겠지만, 이곳의 사정이란 것이 어느 한 사람이 객잔을 통째로 전세 낼 만큼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에 비해 객잔의 수도 모자랐고, 또한 객잔을 모두 무림맹에서 관리했기에 밖에서처럼 객잔 하나를 통째로 빌릴 수가 없었다.
때문에 아쉬운 대로 이런 곳에서나마 약속을 잡아야 했다.
초풍영과 광불, 혁련혜도 남궁영과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올라온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일부러 그들을 무시했다.
어차피 그날의 일로 메우기 힘든 앙금의 골이 깊게 파인 상태였다.
남궁영은 어떨지 모르나 초풍영이나 광불 등의 성격으로는 그와 다시 친분을 회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같은 공간에 있다 보니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때문에 술을 마시면서도 은근히 그들 쪽으로 시선이 가곤했다.
이곳 객잔에 있는 사람들 치고 무인이 아닌 자가 없었다. 그들 역시 갑작스런 남궁세가의 출현에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듯 그들을 계속해서 흘끔거리며 바라봤다.
하지만 그들이 워낙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감히 다가가 인사를 하지는 못했다.
그때 광불과 초풍영의 얼굴이 동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어 혁련혜도 눈살을 찌푸렸다. 기분 나쁜 느낌, 아니 무언가 기분 나쁜 냄새가 객잔에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분 나쁜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순간 광불의 안색이 변했다.
“저자가 왜 이곳에?”
그의 눈에 계단을 올라오는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남궁도학과 남궁영 등은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올라오는 이를 맞았다.
그의 태도는 매우 극진하면서도 존경이 담겨 있어 그들이 만나기로 한 사람의 위세가 매우 대단하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오대세가 중 한곳의 장로와 장남이 이렇게 극진하게 대할 리 없으니까.
중인들은 매우 궁금한 시선으로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맞는 인물이 누군지 바라보았다.
순간 누군가의 입에서 헛바람 새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히~익!”
“설마?”
그들의 눈에는 공포의 빛이 짙게 떠올라 있었다.
남궁가의 장로와 장남이 극진한 표정으로 대하는 노인, 외형은 깡마르고 거무죽죽한 피부 대문에 봄품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 초라해 보이는 노인이 실은 얼마나 가공한 인물인지.
“당....문!”
“천....수암제(千手暗帝)!”
그랫다. 이 초라하면서도 볼품없는 노인이 대륙십강의 일인이며 온몸에 독으로 뭉쳐져 있다는 당문의 문주인 천수암제 당만천이었다.
비록 대륙십강 중 사제(四帝)에 속해 서열은 떨어지지만 강호의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독과 암기의 조종, 어찌보면 다른 어떤 무공의 달인들보다 더 위험했기에.
당만천은 서늘한 얼굴로 묵묵히 남궁세가 사람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입을 연 것은 그의 뒤에 있던 묘령의 여인이었다.
“오랜만이에요. 남궁 장로님, 남궁 공자.”
그녀의 이름은 당수련, 사천당가의 꽃이라 불리는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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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감사합니다
잘보고갑니다^^
많이 기다렸는데 이렇게 재미있게 올려 주심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즐감
즐감
감사합니다
고맙게 잘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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ㄳ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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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봅니다
즐독 하구 갑니다
즐독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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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하고 갑니다.
감사.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 하고 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