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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호]
몽유의 로망스, 난유亂喩의 언어
송희복
1
나는 본디 시 쓰는 재능이 없어 시 쓰는 일이 주어진 업業이나 운명에서 멀찍이 벗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삶에는 우연한 계기가 주어지는 일이 가끔 생기고는 한다. 내게 이러저러한 일로 인해 시를 써보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언감생심이라고 여겼던 게 현실의 과업이 되고 있는 이즈음에 이르러서는, 나는 도대체 시란 무엇인가 하고 성찰의 물음을 던져볼 때가 있다.
시인들에게, 혹은 시에 관한 전문적인 논객들에게 시가 무어냐고 묻는다면, 그들의 대답은 맞울림의 화답이 아니라, 백인백색의 다양한 되울림으로 돌아올 것이다. 철학자에게 인생이 무어냐고 묻는 것과 같을 것이다. 시가 도대체 무어냐는 데 수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어 왔던 게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다. 끊임없이 새로운 정의를 다양하게 낼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정의는 새로운 정의에 의한 오류로 점철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시의 정의에 관한 한, 나도 내 목소리를 한 번쯤 내어볼 수는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내 이야기도 좀 해볼 일이다. 내가 시를 좀 써 보니 느낀 것은 시는 현실 속의 소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는 꿈속의 소리도 아니었다. 꿈이 아니면서도 꿈인 듯한 소리. 그것이 시였다. 비몽사몽의 긴장에 빠져보는 이만이 시를 쓸 수 있고 써야만 하는 권리를 얻을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 이즈음 내가 막연하게 가지고 있는, 시의 정의에 관한 한 생각의 일단이다.
백인백색의 다양한 되울림으로 돌아오는 것, 가치의 무정부 상태에 빠진 응답 중에서도 시에 관한 좋은 정의들이 적지 않다. 이 가운데 하나쯤 골라서 보일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다음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꿈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 시다. 꿈속의 이름들은 지상의 그 무엇과도 연결되 지 않는다. 이 꿈의 세계들은 동시적이며, 또한 마찬가지로 하나의 공간을 이룬다. 그것은 나부끼고, 추락한다.
― 후고 프리드리히
시 속의 이야기는 꿈속의 말은 정녕 아니다. 꿈이라기보다는 꿈같은 이야기를 모아놓은 각별한 말의 풍경인 것이다. 시는 꿈의 바람직한 지닐성을 지닌 것일수록 가치가 있다고 나는 본다. 그리하여 나는 현실 속에서도 통할 수 있는 꿈같은 말로 아로새겨진 독특한 시에 관한 꿈을 가져본다. 내가 생각하는 시의 궁극적인 꼭짓점이 여기에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본다. 요컨대, 혹은 비유컨대 시는 가르시아 로르카의 시집 표제처럼 몽유의 로망스(Romance sonámbulo)이리라. 꿈을 꾸면서 노니는 저 미지의 낭만浪漫 세계가 아닐 것인가?
2
시란 애최 논리적인 의미의 접근을 방해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인 글쓰기가 평이하게 공감하는 소통의 언어를 이끌어내는 것이라면, 시는 이 언어를 뒤틀어버리려고 하는 데 가치와 의의를 두려고 한다. 뒤틀어버리면 뒤틀어버릴수록 혼돈과 어둠 속에 은폐된 진실이 놓여 있다. 언어 속에서의 진실 찾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그러다 보니 내용도 상식을 반하는 것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시의 언어가 지닌 매혹은 논리를 배제하는 데서 세상을 바로 바라보거나 삶을 실상을 예감해야 하는 데 있다. 시의 언어가 논리적인 의미의 접근을 방해하는 거짓 진술로 이루어져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다음에 인용되어 있는 이선영의 시에 드러난 언어도 일상의 논리와 상식에서 좀 벗어난 자리에서 소위 거짓 진술로 일관해 있음을 우리는 볼 수가 있다.
콩쥐와 심청과 춘향과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파레아나의 청춘과
표지가 닳고 닳은 그 모든 신데렐라들에
흙을 덮고 묘비명을 세운 이름
비 새고 바람 새는 지붕의 처마 밑에 가장 간절한 둥지를 튼 이름
제 속 고운 피의 유로를 찢고 유순한 생살의 곡창을 거덜내며 튀어나온 괴물을
끝내 버리지 못하는 지구 위 희귀한 생명체의 이름
세월의 바늘땀을 휘갑치기하며 자신이 낳은 것보다 더 오래 살아남고 싶어하는 이름
짓밟혀도 짓밟혀도 그게 아픈 사랑이라 믿으며
버려져도 쓰러져도 저를 쓰러뜨린 짐승을 위해 눈물 흘리고
세상 모든 참혹에 자신의 죄명을 붙이는 아, 엄마
그 단출한 두 음절 안에서 흘러넘쳤다 가라앉고 달아났다 되돌아오기를 평생으로 아는
세 음절의 고유명사를 묻고 지우고 뭉개며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이름
―「무서운 이름」 전문
이 시를 읽어 보면 딱 먼저 생각나는 것은 모성적인 마성이거나 마성적인 모성이다. 시인에 의한 시심의 동기 부여는 우리가 논리로 풀 수 있고 상식으로 알고 있는 거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새로운 혼돈 속의 진실에 있다. 모성과 마성의 거리가 멀다는 익숙하고도 완강한 사실에 대한 배반의 언어를 쏟아낼 수 있다는 사실이 그 시심의 동기 부여다. 시인이 제기한 새로운 시적 문제의식은 모성과 마성이 서로 친근할 수 있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모성의 마성이거나, 혹은 마성의 모성이거나 한 언어는 언어의 현실 바탕을 딛고 넘어선 새롭게 존립하는 또 하나의 진실된 언어의 면목이 아니겠는가? 복잡하게 만연하는 구문 속에서 긴 호흡을 고르면서 내뱉고 있는 시인 이선영의 극화된 진술 형태는 비밀스런 혼돈의 세상을 향한 새롭거나, 낯설거나, 또 다른 진실을 찾겠다는 것으로 향하는 것은 아닐까?
또봉이통닭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짝꿍인 또봉이 또봉이는 짝잃은 할아버지 혼자 지키 는 또봉이
낙원떡집은 가래떡이 말랑말랑한 낙원떡집 낙원떡집은 아직 낙원이 되기에는 먼 먼 낙원떡집
일오삼마트는 이름이 재밌는 일오삼마트 일오삼마트는 ‘일’자의 반쯤이 부서져 나간 오삼마트
명품세탁은 8시면 띵동하는 명품세탁 명품세탁은 맡기곤 찾아가지 않는 미 아보호세탁
향림원은 탕수육이 바삭바삭 향림원 향림원은 향기로운 숲이 아닌 콘크리 트 건물 2층
아가씨생선가게는 아가씨가 늘 활기찬 생선가게 아가씨생선가게는 여릿한 아가씨일랑 눈씻고 봐도 없는 비릿한 가게
이렇게 먹고사는 나는 오늘도 배달 201동 902호 나는 세상을 배달받으며 201동 902호에 갇혀 있거나 숨어 있는 사람
날 밝으면 제자리에 있는 평화로다 날 저무니 휘어진 뼈가 저며 오누나
―「남현동 悲歌」 전문
언어의 배열이 특이한 실험적 성격의 시다. 논리적으로 볼 때 불일치성을 지향하는 서정적인 변형의 시라고 해야 하나? 또봉이통닭, 낙원떡집, 일오삼마트, 명품세탁, 향림원, 아가씨생선가게…….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는 간판 이름이 다소 자유로운 연상에 기대어 툭툭 튀어나오고 있다. 아무런 이성의 통제가 없이 생각이 흐르는 대로 받아 쓴 시의 텍스트만이 진짜라면, 이 「남현동 비가」라는 제목의 시는 초현실주의의 진짜배기 시다. 그러나 초현실주의 시의 표현 방식이 모두 다 자동기술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시의 서술적인 표현 방식이 자동기술에 의거하고 있느냐 하는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시인의 거친 호흡이 정열적인 무의식의 그늘을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왜 남현동인가, 또 왜 비가悲歌인가 하는 것은 논리와 상식으로 해명되지 않는 부분이다.
아빠는 ㄱ
엄마는 ㅏ
딸은 ㅗ
아들은 ㅈ
그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된다
아빠가 아닌 ㄱ은 가족이 아니다
남편이 아닌 ㄱ은
엄마가 아닌 ㅏ는 가족이 아니다
아내가 아닌 ㅏ는
딸이 아닌 ㅗ는 가족이 아니다
누나가 아닌 ㅗ는
아들이 아닌 ㅈ은 가족이 아니다
동생이 아닌 ㅈ은
아빠이기를 마다하면
엄마이기를 마다하면
딸이거나 아들이기를 멈춘다면
ㄱ ㅏ ㅗ ㅈ은 뿔뿔이 흩어진다
ㄱ과 ㅗ와 ㅈ을 끌어모으는
ㅏ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ㅏ 한 조각을 가지면 다 얻을 줄 알았는데
그 ㅏ가 다른 가진 것 다 내놓으라며 총구를 겨눈다
―「가족」 전문
언어의 난맥상을 보여주고 있는 시의 대표적인 한 사례가 되지 않을까? 일종의 난센스의 시학이다. 언어 형식의 면에서나 의미론적인 맥락으로 볼 때 낱말과 음소가 만난다는 것은 물과 기름의 관계로 뒤섞여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아마도, 가족 구성원 사이에 정신적인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상항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선영의 신작시 다섯 편을 보면 초현실주의 시를 연상하게 한다.
초현실주의 시의 선구자인 기욤 아폴리네르(G. Apollinaire)는 산문시 「해몽」에서 반半의식의 상태나 무無의식의 상태로부터 비롯된 환각적인 내용의 꿈같은 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과문한 탓에 나에게는 이 시에 관한 정보가 거의 없다. 다만 짐작되는 것은 초현실주의 시가 프로이트가 창안한 꿈과 무의식의 가설에서부터 빚을 지고 있었다는 것. 이로부터 꿈과 무의식과 같이 근원적인 것을 강요하는 초현실주의자들은 거리낌 없이 드러나 보일 법한 삶의 비밀들을 유린하려고 했었다고 한다. 지적 허무주의가 끼친 모종의 해독은 쓸모없는 신뢰의 문제를 제기하는 악의에 가득 찬 것들이었다.앙드레 브르통이 다다이즘과 결별하면서 선언한 유명한 경인驚人의 구절이었다. 무질서하고도 정열적인 이미지, 언어도단이라고 싶을 정도의 부적절한 표현, 논리적으로 일치하지 아니하는 서정적인 변형의 기술 형태. 초현실주의 시 텍스트 하나하나는 혼돈에로의 회귀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
시가 비밀스런 부호로 점철된 것이라면, 비평문은 암호 해독문 같은 것이리라. 말뜻의 원천적인 단절을 꾀하고 있는 인용시 「가족」과 같은 유의 시편은 비밀스런 부호로 그냥 내버려두는 게 시로서 오히려 존재론적이다. 분석적인 잣대를 들이대다간 교각살우의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다. 인용시 「가족」의 본문이 뭐가 뭔지 모르고 매사가 알쏭달쏭하다면, 독자인 낱낱의 사람마다 시편詩篇 그 자체로서의 말이 지닌 어떤 존재의 힘을 느낄 수 있는 법이다.
‘고등어’라고 했는데 ‘오징어’라고 듣는다
뒷사람이 ‘고등어’를 외쳤다가 ‘없어’를 듣고 ‘삼치’를 부르는 소리를 못 들은 척한다
이미 ‘오징어’를 자르면서 ‘오징어, 맞죠?’ 하는데도
‘아니요’, 기어코 ‘고등어’라고 한다
다시 ‘없어’를 들으며 자르다 밀어놓은 ‘오징어’를 보고도
못 들은 척했던 ‘삼치’를 끄집어낸다
물어보지도 않고 ‘삼치’는 삼천 원이겠거니,
우두커니 거스름돈 기다리다 멋쩍게 돌아나온다
밍기적밍기적 발걸음 소리 듣는다
자르다 만 오징어를 ‘미안하다’ 말 없이 미안해하는
고등어처럼 생긴 걸 못 보고도 고등어를 달라 한 것을 한심해하는
고등어를 사려다 잘못 산 삶, 삼치를 구워먹는 저녁
그런 저녁처럼 고등어구이를 놓치게 되는,
그런 김에 느닷없이 삼치를 집어들다 오징어를 다치는,
하룻저녁 새 벌여놓은 일
―「내 삶의 터닝포인트」 전문
시인의 호흡은 거칠어진다. 거친 만큼 이미지가 무질서하고 정열적이다. 언어의 진지함이 삶의 진정성을 반드시 보여주는 건 아니다. 이와 같이 마술적인 말장난 같은 것도 혼돈의 그늘 속에 있을지 모를 삶의 진실을 향하기도 한다. 고등어는 그냥 고등어가 아니다. 자르다 만 오징어를 ‘미안하다’ 말 없이 미안해하는 고등어처럼 생긴 걸 못 보고도 고등어를 달라 한 것을 한심해하는 고등어이다. 문법이나 의미의 연결이 전혀 실현되지 아니하는 고등어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일상의 우연한 오류로 인해 삶이 뒤집어지거나 뒤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 시야말로 비문(非文)의 언어가 빚어낸 존재의 집인 것이다. 삶에 대한 믿음이, 삶이 지닌 가장 덧없는 면에 대한 믿음이 너무 대단해지다 보면 결국에 가서는 그 믿음이 상실되고 마는 법이다.앙드레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선언(문)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견고한 믿음이 상실하는 순간의 전환점에 이르면 고등어를 놓치고 삼치를 집어들다 오징어를 다치는 예상 밖의 일이 생긴다.
시의 메타포 속에는 다양한 형태의 난유(亂喩, catachrèse)라는 것이 잠재되어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 그것은 수면 하에 가라앉아 있다. 그런데 이선영의 시편인 「내 삶의 터닝포인트」는 수면 위로 드러난 물고기처럼 금빛 비늘을 반짝거리게 한다. 이 시를 읽으면 난유라는 게 딴 게 아니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난유란 도대체 무얼까? 보조관념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고 들썩이다가 소멸되면서 또 다시 무수히 생성하는 것. 각별히도 의미가 있는 저 난유의 시학은 그렇게 완성되어 있다.
가을 하늘에 흰 거품처럼 피어오른 구름
그 속에 빠져 물씬 향기를 맡으며 허우적대고 싶은 구름
그 위를 가볍게 올라타 입파람을 불어대며 놀리고 싶은 구름
단풍구름 홍초구름 억새구름
구름이고 싶지 않다,
천둥치거나 벼락치는 날의 들이치는 주먹구름
우박이나 장대비로 쏟아져 내리는 땡비구름
분노구름 슬픔구름 음울구름
구름이고 싶지 않다,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이 떠내려가는 팝콘처럼 바라보는 구름
시리아의 상처 난 아이들이 풀어져 나간 붕대처럼 바라보는 구름
아파트 옥상이나 바위 꼭대기에 올라선 사람들이 놓친 구명정인 듯 바라보는 구름
이런 구름이고 싶다,
오 마가쟁 드 누보테스의 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를 지나
옥상정원에 올라서 ‘날자 날자꾸나’ 날개도 없이 날갯짓하는
이상이라는 이상한 새의 발을 받쳐 주는 구름
아름다웠던 소풍 끝내고 하늘로 돌아가는 천상 시인의 넋을 거뜬히 업어다 주는 구름
―「구름 悲歌」 전문
인용시 「구름 비가悲歌」는 구름을 소재로 한 구름 같은 이야기의 시다. 물론 구름만이 가지는 덧없음의 비정형(非定形)의 이미지는 해체되어 있다. 구름이 왜 슬픔의 노래인가 하는 논리도 해체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이선영의 신작시 다섯 편 중에서도 비교적 논리가 정연한 변증법적인 구조의 시인 것은 사실이다.
구름과 슬픈 노래라는 표제의 논리적인 비정합성은 시의 거짓 진술에 의거한다. 그리고 시인의 주관적인 감정이 자연 대상물인 구름에 투사되어 있다. 이 물활론적인 감정이입(empathy)은 시의 비유 형식으로선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감(sympathy)이 없는 삭막한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현실적인 단절의식을 반영하는 객관적인 상관물이기도 한 것이다.
3
넓은 의미의 초현실주의가 철학적인 태도 및 세계관의 문제라면, 좁은 의미의 그것은 글쓰기의 한 방식인 것이다. 이선영의 신작시의 경우는 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내가 알고 있는 이선영의 시 세계는 초기 시에 관한 막연한 인상뿐이다. 그 동안 그의 시 세계가 어떻게 전개되어 오고 변화되어 왔는지에 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이번에 발표된 신작시가 그의 시적인 관습과 동향인지, 아니면 새로운 실험의식의 소산인지에 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어떠하든 간에 그는 세계 속에서 현존하는 시인으로서 이번의 신작시를 통해 개인 고유의 자유와 실존에 관한 문제를 더 깊게 천착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본다. 끝으로, 초현실주의자 중에서 가장 독자적인 위치에 선 시인이었다는 폴 엘뤼아르에 대한 마르셀 레몽의 평판을 인용해 볼 것이다.
……시인은 세계 속에 현존한다. 그는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어떤 한 장소에 믿을 수 없을 만큼 현존한다. 그 장소에서는 총체적인 자유라는 방향으로 카타르시스가 이루어졌으므로 슬픔과 기쁨이 서로 구별할 수 없는 한 덩어리가 되고 고통과 희망으로부터 남는 찌꺼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김화영 역, 『프랑스현대시사』, 문학과지성사, 1983, 399면.)
송희복/ 1990년 〈조선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 『저물녘에 기우는 먼빛』 외. 현재 진주교육대학교 교수.
첫댓글 글 감사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