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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기사파
만약 미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자연에 대한 모방이 아니라 색채와 선을 선택해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표현주의의 이론이 옳다면 당연히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될 것이다. 주제를 모두 없애고 색조와 형태의 효과에만 의존하면 미술이 더욱 순수해지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그것이다.
그러나 말로만 그러한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과 알아볼 수 있는 대상이 전혀 그려져 있지 않은 그림을 전시회에 출품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이것을 처음 시도한 사람은 당시 뮌헨에 살았던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였다. 이로써 추상미술이라고 불리는 것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칸딘스키를 중심으로 하는 독일의 표현주의 작가들을 ‘청기사파’라 한다.
<무제> 1910년
바실리 칸딘스키作 종이에 수채, 파리 퐁피두 국립현대미술관
최초의 추상화. 칸딘스키는 자신의 저서 <과거에의 회상>에서 1908년 어느 날의 일화를 소개한다. “어느 저녁 무렵 화실 문을 열었을 때 갑자기 표현 불가능한 아름다움을 지닌 한 폭의 그림을 마주쳤다.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화면은 다만 색채의 찬란한 얼룩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가가 보니 그것은 이젤 옆에 비스듬히 세워놓은 나의 그림이었다.” 칸딘스키는 이 특별한 경험으로 그림의 내용과 상관없이 오직 색채만으로도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인상 Ⅲ> 1911년 칸딘스키作 캔버스에 유채, 뮌헨 렌바흐 하우스
원색이 난무하는 '인상 Ⅲ(Impression Ⅲ)'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형상은 없다. 이 작품의 부제가 '콘서트'이고, 화가가 친구였던 작곡가 쇤베르크의 콘서트에 다녀온 직후에 스케치를 했다는 것을 알고 나면 비로소 검은 피아노 뚜껑과 객석에 앉은 청중이 보일 것이다. 피아노를 둘러싼 공간을 뒤덮고, 청중 사이로 스며들어 객석을 휘감고 있는 노란색은 그날 칸딘스키가 들었던 음악이다. 쇤베르크는 장조와 단조로 이루어지는 서양 고전 음악의 전통을 파괴하고, 무조(無調) 음악을 창시한 현대 음악의 거장이다. 처음 듣는 이들에게 그의 교향곡은 귀를 때리는 불협화음이나 다름없었다. 주위의 원색들과 강하게 충돌하며 마치 화면 밖으로 튕겨나올 것처럼 눈을 찌르는 칸딘스키의 노란색은 바로 그 소리의 '인상'인 것이다.
<구성 8> 1923년 칸딘스키作 캔버스에 유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이 작품은 구성 시리즈 가운데 하나로 칸딘스키 예술 세계의 중심을 차지하는 중요한 작품이다. 서로 연관성있는 형태들이 자유롭게 떠돌아 다니며 율동감을 느끼게 하면서 마치 한 편의 교향곡을 들려주는 것 같다. 여러 색깔의 동그라미는 타악기 소리를 나타내는 파장 같아 보이고 크고 작은 악기들이 내는 음을 가늘고 날카로운 직선, 혹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표현해 음의 특성을 말해주고 있다.
칸딘스키는 '로엔그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바그너의 음악에서 바이올린, 베이스, 관악기의 울림을 통해, 나의 마음 속에서 나의 모든 빛깔을 보았다. 야성적이며 미친 것 같은 선들이 내 앞에 그려졌다. 회화는 음악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었다.” 라고 말했다.
☆ 어피에트 몬드리안
(1872~1944 네델란드)은 어렸을 때부터 화가였던 숙부에게 그림을 배웠다. 20세에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였고 주로 고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림을 그렸다. 그러던 중 1911년 입체파의 그림을 접하면서 작품이 크게 변화한다. 풍경을 점차로 추상화한 그림으로 그렸다. 1914년 즈음부터 수직, 수평선만으로 그림을 구성해나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의 작품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몬드리안 스타일의 그림인데, 이렇게 자신의 작풍을 정립한게 그의 나이 무려 42세, 그야말로 대기만성 그 자체인 셈이다.
<회색 나무> 1912년
몬드리안作
캔버스에 유채, 헤이그 시립박물관
<빨강, 검정, 파랑, 노랑, 회색의 구성> 1920년 몬드리안作 캔버스에 유채, 암스테르담 시립 미술관
몬드리안의 특징을 간단히 요약하면 ‘차가운 추상’ ‘수직, 수평, 삼원색, 무채색’이라고 할 수 있다. 몬드리안은 자신의 작품을 ‘우주의 진리, 근원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하였다.
* 입체주의(Cubism)
입체주의는 세잔의 영향을 받아 1907~1914년까지 파리에서 피카소와 브라크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미술 혁신 운동이다. 이 운동은 초기 입체주의, 분석적 입체주의, 종합적 입체주의로 나눌 수 있다. 입체파는 르네상스 이후 서양회화의 전통적인 원근법과 명암법, 인상주의의 순간적인 현실 묘사를 지양하고, 자연의 여러 가지 형태를 기하학적인 형상으로 환원, 시점을 복수화하여 사물의 형태를 2차원의 회화 평면속에서 구축하여 재현하고자 하였다. 이들의 운동은 1차대전 발발로 종말을 맞았으나 그 성과는 그 후의 여러 미술에 영향을 미쳤다.
<아비뇽의 여인들> 1907년 파블로 피카소作 유화, 뉴욕 현대 미술관
입체주의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림을 살펴보면 5명의 벌거벗은 여인들이 기하학적으로 구성된 몸을 하고 있다. 대상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고 조각을 나눈 뒤 한 화면에 종합하여 배열하였다. 가운데 두 여인은 그나마 제대로 된 형태를 유지한 편이나 양쪽의 여인 셋은 신체의 조각들이 섞여있는 모습이다. 등을 보이고 앉은 아프리카 가면을 쓴 것처럼 보이는 여인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공간 배경은 푸른색과 흰색의 기하학적 윤곽만을 표현하여 입체적인 느낌을 강조하였다. 아프리카 민속 가면을 보고 영감을 얻어 그린 그림이란 의미로 원시주의 작품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빵과 과일이 있는 풍경> 1909년 피카소作 유화, 바젤 박물관
초기 입체파 시기의 작품들은 자연을 원기둥, 구, 원뿔과 같은 형태로 처리되어야 한다고 본 세잔의 영향에 따라 평면성을 피하면서도 사물을 단순하게 그리고 동시에 입체감과 깊이감을 유지하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원근법의 1점 투시가 아닌 복수의 시점을 화면에 표현하려고 하였다.
<만돌린을 켜는 소녀>
1910년 피카소作 유화,
개인 소장
<바이올린과 포도> 1912년 피카소作 유화, 뉴욕 근대 미술관
<아비뇽의 여인들>을 비롯한 초기 입체파 작품에서는 어떤 대상인지 직관적으로 비교적 쉽게 파악할 수 있으나, 분석적 입체파 단계에서는 본격적으로 대상을 기하학적인 단위로 해체하여 재구성하는 수준에 이른다. 색채 역시 배제되어 녹색, 황토색, 회색 등으로 한정되었다. 색채보다는 평면들 사이의 관계 및 구조의 문제에 강조점을 둔다.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 1912년 피카소作
밧줄로 테를 두른 타원형 캔버스에 유채 그리고 등나무 의자의 이미지를 천에 프린트하여 그림에 붙임, 파리 피카소 미술관
종합적 입체파 단계에서는 형태의 해체가 극단적으로 진행되었고 이에 따라 원래 무슨 물체인지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실제 사물의 소재를 연상시키는 오브제(신문지, 벽지, 인쇄물, 판화 등등)를 붙이는 꼴라주(Collage)기법을 사용했다. 위 작품을 흔히 최초의 꼴라쥬라고 한다.
20세기 미술사가 전통을 전복시키는 끝없는 실험과 창조의 연속이라 할 때, 피카소야말로 그런 경향과 흐름을 한몸에 구현했던 인물일 것이다. 피카소는 하나의 화풍에 안주하기보다는 미술사의 흐름을 바꿔놓는 새로운 창조방식을 끊임없이 실험에 부쳤다. 20세기 전반의 미술사는 피카소와 더불어 진행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해변을 달리는 두 여인>
1922년 피카소作 유화, 파리 피카소 미술관
입체주의자로 알려진 파블로 피카소이지만 그는 다양한 조형적 실험을 하며, 화풍을 변화시켜 나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피카소가 1917년 로마를 여행하고 나서 이를 계기로 신고전주의적 경향을 띠는 신화적 소재에 몰입하여 그려낸 것이다.
그는 18세기의 신고전주의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새롭게 해석해 내는데, 과거 화려했던 로마의 유적들을 살펴보며 느낀 감정을 풍요로운 여성의 육체로 표현했다. 마치 거인을 그려놓은 것처럼 풍만하다 못해 과장스러운 두 등장 인물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원시시대의 여성상을 떠올리게 한다. 한편 피카소는 <해변을 달리는 두 여인>에서 ‘과슈’라 칭해지는 기법을 사용하여 유화를 그리면서도 수채화의 느낌을 구현하고 있다.
<게르니카> 1937년
피카소作 유화,
마드리드 국립예술센터
스페인 내전 당시 나치군이 스페인 게르니카 지역 일대를 1937년 4월 26일 24대의 비행기로 폭격하는 참상을 보고 그린 그림이다. 독일군의 폭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고 또한 부상당하였다. 1937년 1월 스페인 내전 진행중이던 시기에 스페인 공화정부 사절단이 피카소를 직접 방문하여 그 해 열릴 파리 국제박람회 스페인관의 벽화 제작을 의뢰했고, 당시 공화당 지지자였던 피카소의 승낙으로 게르니카가 제작되었다.
피카소가 이 그림을 전시했을 때 한 독일군 장교가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당신이오?"라고 질문하자 피카소가 "아니오. 당신들이 그린 그림이지."라고 대꾸했다는 이야기가 매우 유명하다. 한편 이 그림에 대해 평론가들이 '황소는 전체주의, 말은 핍박받는 스페인을 상징한다.'는 해석을 내놓자 피카소가 ‘소는 소고, 말은 말이다.’라고 대답한 일화가 있다.
☆ 원시주의
원시주의(Primitivism)란 원시 미술의 예술 정신과 표현 양식을 이해하고 그것을 현대 예술에 접목하려는 예술 운동을 말한다. 고갱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남태평양, 아시아 등 식민지 전통미술에 주목하였고, ‘고귀한 야만’의 순진무구함에 열광하였다.
문명화된 유럽 전통에 속하지 않는 미술을 원시주의 미술이라고 부르듯이 제도권의 화가 집단에 속하지 않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화가의 미술도 원시주의로 분류한다. 근대 화가들의 지상과제가 전통과 관습의 해체였다면, 아마추어 화가들에게는 이런 양식화된 기술을 습득할 기회가 없었다는 점에서 스스로 자유인이었다. 이들의 작품은 서툴고 소박할 수밖에 없었으며, 순박함이 인간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게 했다.
<키스> 1908년
콘스탄틴 브랑쿠시作 대리석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
브랑쿠시(1876~1957 루마니아)는 민속조각과 현대조각을 결합해 조각분야에 추상 개념을 최초로 도입한 선구적 작가였다. 한 치의 틈도 없이 껴안은 자세의 연인들은 서로 눈을 부릅뜨고 있다. 사랑의 체험은 맹목으로 이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이 연인은 맹목의 상태에 안주하기에는 서로의 가슴이 너무 뜨겁기에 상대를 더 깊이 알기위해서는 어떤 노력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확신과 사랑은 서로를 알수록 더 풍요로워지는 것임을 알기에 눈을 부릅뜨고 상대를 응시하고 있다.
<잠이든 뮤즈>
1910년 브랑쿠시作
청동 파리 퐁피두 센터
잠을 자고 있는 두상이라는 주제에 대해 콘스탄틴 브랑쿠시는 거의 20년 이상 몰두했다. 잠자는 뮤즈'를 구상하고 작업할 때, 그는 근본적인 형태와 단순화된 세부를 위해 개념들(ideas)을 줄여나갔으며, 이를 위해 극적인 요소와 디테일을 피했다. 그는 관성으로 인해 무겁게 내려앉은, 그러면서 평화롭게 쉬는, 바닥에 엎드린 머리의 모습으로 나른함의 본질을 만들었다.
☆ 모딜리아니
2014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7천 70만 달러에 낙찰된 모딜리아니의 <두상> 작품으로, 회화를 포함한 그의 모든 작품 중 가장 비싼 작품이다. 간결하면서도 예리한 형태 감각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모딜리아니가 1911년경 파리의 공사장에서 주워온 석회암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모딜리아니의 조각 작품은 그가 박물관에서 접한 아프리카 미술의 영향과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던 시절 접했던 중세의 조각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모딜리아니가 남긴 원시적인 요소와 종교적인 아우라를 지닌, 특별한 존재감으로 우아함을 발산하는 조각 작품들은 그의 짧은 인생과 가난으로 계속 이어지지 못한 채 실험적으로만 끝난 그의 작품 활동에 대한 아쉬움을 남기게 한다. 개인소장(프랑스)
중앙 아프리카 코드디브와르 구로族의 가면
<큰 모자를 쓴 잔> 1919년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작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보수적인 부르주아 가정이었던 잔의 가족은 가난하고 병약하며 마약을 하는 유대인 모딜리아니(1884~1920 이탈리아)와의 교제를 싫어했지만 두 사람은 동거에 들어갔다. 이듬해인 1918년 모딜리아니는 잔과 니스에서 요양을 했고 딸 지오바나를 얻었다. 1920년 파리로 돌아온 모딜리아니는 자선 병원에서 결핵성 뇌막염으로 36세에 요절하였다. 당시 임신 8개월째였던 잔은 모딜리아니가 죽고 이틀 뒤에 투신 자살했다. 10년 뒤 잔의 가족들은 잔을 모딜리아니 곁에 묻어주었다.
<잔 에뷔테른- 배경에 문이 있는 풍경> 1920년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모딜리아니는 단순화된 형태와 부드러운 선으로 인체를 표현했다. 큰 타원형으로 몸을 그리고, 작은 타원형의 얼굴을 그린 것이다. 그리고 길고 가느다란 목을 그리면 기본형태가 갖추어진다. 가늘고 긴 목의 표현은 원시미술을 비롯한 다양한 양식의 영향에서 비롯되는데, 그중에서 인체를 길게 왜곡시켜서 그린 매너리즘 화가들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형태를 감싸고 있는 부드러운 선의 연결을 통해 우아한 고전미를 발하게 된다.
<가리키는 사람> 1947년 알베르토 자코메티作
청동 179cm
자코메티(1901~1966 스위스)는 이탈리아계 혈통의 스위스 조각가이자 미술가이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후기 인상파 화가인 조반니 자코메티(Giovanni Giacometti)이다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똑바로 쳐다보며 자신 있고 당당한 모습으로 서있다.
<서있는 아네트> 1954년 자코메티作 청동
자그마한 얼굴에 두드러진 오똑한 코, 그 위에 깨알처럼 빛나는 눈, 울퉁불퉁 거칠게 매만진 질감, 군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홀쭉한 몸, 앙상한 팔다리... 수직 인간 조각들에는 고대 이집트 조각이나 아프리카 열대 우림에 사는 단(Dan)族의 영향도 나타난다. 그는 동서고금 다양한 문화에서 영감을 끌어냈다. 책을 통해 접한 동아시아의 조각들도 모작을 만들어보며 연구하곤 했다고 한다.
<걷는 사람> 1961년
자코메티作 청동 183cm
가늘고 긴 인간의 골격으로 작은 충격에도 금방 부서질 것 같은 현대인의 모습을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앉아있는 남자의 흉상-로타르 좌상> 1966년 자코메티作 청동
파리 몽파르나스 작업실에서 ‘로타르 좌상’을 빚다 심장 이상으로 입원한 뒤 영영 작품 앞에 앉지 못했다. 미완의 유작을 완성한 건 평생 조수이자 모델로 자코메티를 도운 동생 디에고였다. 유작 모델인 엘리 로타르는 반짝 인기를 누리다 추락한 사진 작가다. 유작을 해탈한 구도자의 등신불 형상으로 만든 건, 인생의 덧없음을 절감해서일까.
☆ 헨리 무어(1898~1986 영국)
무어의 초기 작품에는 큐비즘의 영향을 볼 수 있으며, 동시에 그리스·이집트 그리고 콜럼비아의 원시미술도 그의 제작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1930년경 그는 독특한 작풍을 세웠는데 그것은 인간상, 특히 가로 누운 자태가 중심적인 테마가 되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조상의 내부가 이따금 뚫어진 공동인데, 이른바 이 虛의 형식이라고나 할 공동이 경직된 구성과 유기적인 선의 흐름을 가진 실상에 무한한 변용을 주고 있다.
<모자상>
1925년 무어作 돌
우리는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무엇보다도 우선 제목과 작품에 드러나는 형상의 일치를 기대하게 된다. 그것이 완전한 입체로 제작되는 조각 작품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우리가 ‘모자상’이라는 작품의 제목을 대할 때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서구 예술전통에 뿌리 깊은 형상, 즉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로 대표되는 성스럽고 아름다우며 완벽하게 다듬어진 조각상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 육중하고 견고한 돌의 질감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비서구적인 조각 작품의 제목 역시 ‘모자상’이다.
20세기 최고의 영국조각가로 평가받는 헨리무어(1898~1986)는 미에 대한 고전적이고 르네상스적인 생각을 부정하고 조각전통에 거부감을 표출했다. “조각의 세부에 집착하는 관객은 작품의 형태에서 이야기나 그 잔재를 찾기 전에 형태 그 자체를 느끼는 법을 우선 배워야 한다.” 재현의 완벽성을 기대하며 상투적인 지각방식으로 미술작품을 대하는 감상자에게 가하는 무어의 일침이다.
<기대누운 인물> 1938년
무어作 돌, 런던 테이트 갤러리
작품을 제작함에 있어 무어의 첫 번째 신조는 ‘재료에 충실하기’이다. 1934년 무어가 남긴 “돌은 부드러운 속살처럼 보이도록 왜곡되어서는 안 되며 그 재료의 단단한 속성이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말은 이러한 신념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한마디로 돌은 돌답게 나무는 나무답게 원재료의 재질과 특성이 완성작품에서도 그대로 들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무어는 또한 작품을 더 크게 만들거나 형상의 첨가를 위해 이어 붙이지 않고 재료가 본래 가지고 있는 덩어리의 한계 내에서만 작품을 만들었다. 결국 작품의 윤곽선도 조각재료가 결정하는 것이다.
<여인의 초상> 1895년
앙리 루소作 캔버스에 유채, 피카소 미술관
피카소는 몽마르트르 언덕의 한 중고품 가게에서 마주친, 어떤 아마추어의 그림에 사로 잡혔다. 그는 그 작품을 캔버스 값에 불과한 5프랑에 사서, 작업실의 가장 좋은 장소에 걸어놓고 평생 소중하게 간직했다. 이 그림은 피카소가 ‘나를 강하게 사로잡은, 프랑스에서 가장 솔직한 심리 초상화’라고 평가한 루소(1844~1910 원시주의)의 <여인의 초상>이었다.
세관원이었던 루소는 40살이 다 되어서야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일요화가(Sunday painter)였다. 기본이 안된 그의 그림은 늘 웃음거리였다. 루소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화가들의 친구가 되게 해준 것은 피카소였다. 제도권 화가들과는 전혀 다른 영역에 거주한 몽상가 루소의 초현실주의적 작품은 다른 화가들에게 많은 영감과 즐거움을 주었으며, 그는 위대한 화가가 되었다.
<잠자는 집시>1897년
루소作 캔버스에 유채,
뉴욕 현대미술관
루소 특유의 환상과 몽환적(夢幻的) 세계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1897년에 낙선전에 출품되었는데 부제는 ‘아무리 사나운 육식동물이라도 지쳐 잠든 먹이를 덮치는 것은 망설인다.’이다. 그림을 보면 보름달이 떠 있는 밤의 어느 사막에서, 지팡이를 쥐고 잠이 든 여인과 옆에는 만돌린과 물병이 있고 그곳에 사자가 나타났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은데 루소는 친절하게도 부제에 사자가 망설이고 있다고 설명까지 해주고 있다.
그런데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불편한 마음도 오래가진 않는 것같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은 안 되지만 그림 속의 사자나 관객이나 곤히 잠든 여인의 휴식을 방해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루소는 19세기말 시끄럽고 부조리한 세상을 떠나 그림 속 여성의 편안한 안식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싶었는지 모른다. 당시에는 이 그림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는지 어떤 사람이 그림 속의 병에는 무엇이 들어있느냐고 루소에게 질문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 루소는 그림속의 여인이 마실 물이 들어 있다고 대답했고, 이 그림은 팔리지 않았다.
<축구 선수> 1908년
루소作 캔버스에 유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천천히 동작을 하고 있는 것 같고 수염이 있는 얼굴들을 하나하나 보면 우스꽝스럽다. 그리고 동작을 보면 제목과는 다르게 무슨 경기인지도 불분명하다. 루소는 이 사람들이 하는 경기가 뭔지 누가 이기는지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이 사람들의 동작에만 관심이 있고, 이것도 풍경화에 집어 넣어버렸다. 특히 주변의 풍경을 그리면서 나뭇잎을 하나하나 그려 넣은 것이 인상적이다. “라파엘로처럼 그리는 법을 배울 때까지 4년이 걸렸지만 어린아이처럼 그리기까지는 평생이 걸렸다.” -피카소-
<꿈> 1910년 루소作
캔버스에 유채, 뉴욕 현대미술관
루소가 죽기 직전인 1910년에 그린 그림이다. 그가 그린 밀림 그림의 집대성이고 야심작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밀림 한 가운데 소파가 놓여있고 매혹적인 여인이 나신으로 누워있다. 여인을 둘러싸고 거대한 꽃들이 물결치고 있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놀랐는지 사자 두 마리와 코끼리 한 마리가 슬그머니 엿보고 있다. 그리고 여인의 뒤편에는 플루트를 부는 연주자도 보이는 환상적인 그림이다. 루소의 강렬하고 비범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작품이란 평가를 받는다.
☆ 초현실주의
*초현실주의라는 명칭은 1924년, 현실 그 자체보다 더 현실적인 어떤 것을 창조하려는 젊은 미술가들의 열망을 표명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말이다. 대부분의 초현실주의자들은 깨어있는 사고가 마비되면 우리들 내부에 숨어 있는 유아성과 야만성이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는 사실을 밝힌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저작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예술은 완전히 깨어있는 이성에 의해서는 결코 생산될 수 없다고 하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프로이트의 학설에 근거하고 있다. 그들은 이성이 과학을 가능케 했다는 것은 인정하나 비이성만이 우리들에게 예술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마음 속 깊숙이 가라앉아 있는 것이 표면으로 떠오를 수 있는 정신 상태를 열망했다.
<연인> 1928년
르네 마그리트作 캔버스에 유채, 뉴욕 현대미술관
마그리트(1898~1967 벨기에)의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인물들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그가 어린 시절에 받았던 충격적인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 마그리트의 어머니는 그가 14살 때 자살을 했다. 마을의 강에서 익사한 시신을 찾았을 때 어머니의 잠옷이 얼굴 부분을 휘감고 있었는데, 죽은 어머니의 이미지는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기의 그에게 크나큰 심리적 충격을 주게 된다. 그의 작품에서 ‘얼굴 없음’은 잠옷으로 얼굴을 감싼 채 발견된 어머니의 시신에 대한 무의식적인 기억과 관련이 있으며, 또한 그 때의 충격과 트라우마에 대한 불안한 심리, 그리고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가능한 것에 대한 시도> 1928년 마그리트作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그림 속의 미술가는 누드를 그리려고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마치 꿈을 꿀 때 그렇듯이 현실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우리는 꿈 속에서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 알지 못한다.
<겨울비> 1953년
마그리트作 캔버스에 유채,
휴스턴 메닐컬렉션
중산모를 쓰고 검은 외투를 입은 남자들이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역으로 수 많은 남자들이 하늘로 오르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현대사회 인간상의 한 단면을 날카로운 시각으로 나타내고 있는 이 작품 속에서 인간의 사회화, 세계화라는 전체 속에서 한 개인은 몰개성화되어 가며 생활의 패턴마저도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차갑게 느껴지는 건물의 벽과 커튼으로 닫혀있는 똑같은 모양의 창문도 빗방을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더불어 개인의 상실과 자아의 부재, 소통없는 현대사회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창가에 서 있는 소녀> 1925년 살바도르 달리作
유화, 마드리드 소피아미술관
달리의 여동생 안나 마리아를 모델로 그린 '창가에 서있는 소녀'의 그림은 미래에 대한 열망과 더불어 현재에 만족하기 보다는 현실을 벗어나 자유를 바라고 있는 듯 하다. 창밖을 보며 바람을 느끼고 바깥의 풍경을 감상하는 모습에서 행복감을 느끼고 시간의 여유를 즐기는 듯 보이기도 한다, 달리의 초기 작품이다.
<기억의 지속> 1931년
달리作 유화, 뉴욕 현대미술관
누군가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나타내고 있는 시계는 눈 녹듯 녹고, 치즈처럼 부드러워지고, 물처럼 흘러내린다. 즉 이 작품은 시간을 초월하여 시간은 인간의 인식에 따라 크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대부분이 아무리 메트로놈처럼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시계 침의 움직임을 당영한 것으로 여기며 평생을 보내도, 시간은 결코 규칙적이지 않다. 우리를 매혹시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간의 불규칙성과 유연성이다. 지워지지 않는 기억 앞에 시간 따위는 ‘속수무책’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그리스도>
1951년 달리작 유화,
영국 글래스고우 미술관
스페인 출신의 요한(1542-1591년)은 십자가의 주님만을 평생 묵상했기에 ‘십자가의 요한’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나중에는 성인으로 추앙을 받아 ‘십자가의 성 요한’이라고 불렸다. 작가는 초현실주의자로서 일생 동안 기괴함을 추구하면서 과대 망상적인 과시욕을 보여 주었는데, 이 모든 것이 바로창조력의 원천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예술가는 편집증의 일종인 망상을 개발해야 하며, 동시에 이성과 의지의 조절이 의도적으로 중지되었음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 작품은 바로 이런 작가의 성향을 극명히 표현하고 있다. 작가의 이런 태도는 종교와는 거리가 먼 그런 처지의 삶에서 종교적 상상력을 발휘한다는 것이 가능함을 입증하는 예가 되었다. 이 작품은 20세기의 종교화로서 가장 많이 알려진 유명한 것으로 가장 많이 복사되었으며, 그 평가에 있어서도 찬반이 극단적이었다.
<환각을 일으키는 투우사> 1970년 달리作
유화, 살바도르 달리 박물관
복잡 다단한 화면 구성은 화가의 편집증을 짐작케 할 정도다. 복잡한 구성이 노리는 1차 효과는 착시로서, 하나의 사물에 또 다른 사물이 중첩되어 드러나게 한 것이다. 그림 상단에는 달리의 고향 정취가 느껴지는 원형 투우장이 보이는데, 멀리서부터 작은 망점이 마치 날파리 형상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 작은 망점들 중 하나는 부피가 점점 커져 나중에는 비너스 상의 머리들과 연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중심 이미지로 들어가 보면, 전면에 드러난 비너스 가운데 둘 왼편 가슴이 오른편보다 과장되어 크게 묘사된 점에 주목하자. 이유는 이 비너스의 상체 위로 투우사의 얼굴이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비너스의 왼쪽 가슴은 투우사의 코에 해당하고, 비너스의 복부 주름은 투우사의 입술에 해당하며, 비너스의 주름진 의복은 투우사의 백색 셔츠와 연두색 넥타이로 변형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단부는 비교적 복잡하다. 좌측 하단에 창에 찔려 바닥에 쓰러진 투우가 보이는데, 소가 쏟아낸 피는 다시 호수로 변하고 그 위에서 유유자적 뱃놀이를 즐기는 인물 형상이 작게 잡혀있다. 두 개의 이미지가 서로 충돌하고 있는데 사실 이 그림은 구조 자체가 충돌이다. 이를테면 비너스 상과 폭력성을 상징하는 투우사와 죽은 소가 우측 상단에서 좌측 하단으로 사선 구도를 이루며 연결되어 있다. 반면 좌측 상단에서 우측 하단으로는 성스러운 여성의 얼굴과 파란 의복의 소년이 사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여성은 달리의 아내 갈라이며 소년은 달리의 유년 시절로 흔히 해석된다.
☆ 프리다 칼로
(1907~1954 멕시코)
초현실주의 화가로 멕시코의 전통 문화를 결합한 원시적이고 화려한 화풍으로 알려져있다. 6살에 소아마비, 16살에 교통사고, 30여 차례의 수술, 죽음까지 이른 병마, 디에고의 끝없는 여성편력, 세 차례의 유산, 불임 등 그녀의 삶에 반복된 고통과 절망은 수많은 작품의 오브제가 되었다. 거울 속의 자신을 관찰하며 고통을 이겨냈고, 자신과 관련된 소재들을 즐겨 그렸기 때문에 그림 중 자화상이 많다.
칼로는 과격한 스탈린주의자였으며, 생전에는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 정도로 여겨졌으며 유럽에서는 리베라보다 인지도가 더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70년대에 페미니즘이 부상하며 재조명되었고 현대에 와서는 영화, 노래 등 다양한 매체에서 회자되며 기구한 생애, 독특한 캐릭터와 작품들이 대중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오늘날 프리다 칼로는 20세기 멕시코 예술과 페미니즘의 아이콘이 되었다.
<유모와 나> 1937년
프리다 칼로作 유화 , 멕시코시티 Dolores Olmeds Foundation
프리다의 부모는 프리다가 11개월이었을 때 막내딸 크리스티나를 낳았다. 당시 어머니는 산후 우울증을 앓아 프리다를 인디오 유모가 맡아 돌보게 했다. 후에 프리다는 이 상황을 자신의 작품 ‘유모와 나’로 표현했다. 자신을 어린 소녀의 몸과 어른의 얼굴을 가진 모습으로 그렸으며 프리다를 안고 있는 인디오 유모는 돌로 만든 가면을 쓴 모습으로 표현했다. 그 표정을 짐작할 수가 없어 프리다를 돌보는 것이 즐거운지 싫은지 알 수는 없다. 오른쪽 가슴에서 두 방울의 젖이 흘러나와 아기의 옷 위로 막 떨어지려 하고 있다.
<가시목걸이를 한 자화상> 1940년 칼로作 유화
그녀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벌새는 희망을 상징한다. 절망의 시절동안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던 칼로는 가시목걸이에 매달려 있는 작은 새를 통하여 새로운 사랑에 대한 자신의 소망을 그렸다. 그러나 그림에서 고양이가 벌새를 덮칠 것처럼 표현되어 칼로 자신의 삶이 평탄하지 않았고 위태로웠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듯하다.
<부러진 기둥> 1944년
칼로作 캔버스에 유채
통증과 고통은 프리다의 그림에서 일정한 주제인데, 이 그림은 그녀가 겪었던 고통과 고뇌를 가장 직설적이고 자극적인 방식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그녀의 얼굴에 눈물이 흐르고 있지만, 정면을 직시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를 바라보는 청중 모두가 그녀의 현실에 직면하도록 인도한다.
<스탈린 앞의 자화상> 1954년 칼로作 오래된 천에 유채
자신의 죽음이 가까웠음을 예감한 칼로는 이제 병원이나 의사가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깨닫고 신앙 대신에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의지하여 마음의 평안을 구한다.
☆ 레메디오스 바로(1908~1963) 스페인 태생의 초현실주의 여성미술가.
스페인 내전과 2차세계대전을 겪고 멕시코로 망명해 그곳에서 생애 대부분을 보냈다. 두려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초현실주의를 택했으며, 생의 마지막 10년 동안에 그렸던 그림들은 그녀가 점성술괒 연금술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천체를 잡는 사람> 1956년 레메디오스 바로作 종이에 혼합재료, 개인소장
위 그림은 길다란 잠자리체로 별을 따고 달을 따는 유쾌한 동화의 한 장면이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달을 잡은 사람의 야윈 얼굴은 병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그 알 수 없는 무표정은 불길한 느낌을 자아낸다. 감정이입의 대상을 달로 하면 그 순간 달의 광채는 고통 속에서 내지르는 마지막 비명 같은 구원 요청으로 느껴진다. 바로의 그림에는 이렇게 구속되는 것- 타인에 의해서든 자기자신에 의해서든-과 수동적인 상태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과 불안이 스며있다. 이것은 그녀의 개인사와 관련이 깊다. 어머니의 고집으로 폐쇄적이고 엄격한 수녀원에서 보낸 학교 생활과 스페인 내전으로 자유로운 예술활동이 어려웠던 기억, 나치 점령지에서 겪었던 갖은 고생, 멕시코로의 망명 등이다.
<새들의 창조> 1958년
바로作 유화 개인소장
바로는 세계를 이해하는 원리로, 그리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힘으로서, 양 극단이라고 할 수 있는 신비주의와 과학에 모두 흥미를 가졌다. 이것은 결국 신비주의와 과학의 중간단계에 있는 연금술에 대한 관심과 탐구로 이어졌다. 위 그림은 연금술사이자 예술가인 올빼미 모습의 존재가 천체 또는 지상의 자연으로부터 얻은 색색의 안료로 새를 그린 다음, 여기에 삼각형 렌즈로 모은 별빛을 비추어서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올빼미는 그리스 신화의 지혜의 여신 아테나와 항상 함께 다니는 신조神鳥이기도 하다.
<되살아나는 정물> 1963년 바로作 유화, 개인소장
연금술사적 면모가 집대성된 그림이다. 원탁의 촟불을 중심으로 접시와 과일들이 마치 거대한 은하계처럼 회전하고 있는, 강려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자세히 보면 맨 바깥에 돌고 있는 과일이 깨지면서 거기에서 씨가 떨어져서 바닥에 새로운 싹을 틔우고 있다. 죽음과 파괴가 곧 새로운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자연의 순환을 쉽게 압축적으로 나타낸 그림이다. 바로는 이 작품을 끝낸 후 다음 작품을 제작하다가 갑작스런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잭슨 폴락(1912~1956)
미국 중서부 와이오밍주의 농가에서 태어난 폴락은 가족과 함께 애리조나와 캘리포니아 등지로 옮겨 다녔다. 퇴학을 밥먹듯 당했지만, 1930년에 뉴욕에 정착한 이후로는 미술공부에 전념했다. 초기에는 표현주의적인 작품을 그렸지만 1930년대부터 추상화로 선회했다. 1947년 마루바닥에 펼친 화포위에 공업용 페인트를 떨어뜨리는 ‘드리핑’기법을 창안해 하루 아침에 유명해졌다. 거칠고 파격적인 추상회화를 통해 20세기 아이콘으로 떠올랐지만, 그에 비례해서 부담감이 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폴록은 알콜중독이었고, 44세의 젊은 나이에 애인과 친구들을 태우고 음주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더위속의 눈-Eyes in the heat> 1946년 잭슨 폴락作
캔버스에 유채와 에나멜
<작품 No.31>1950년
잭슨 폴락作 초벌칠 안한 캔버스에 유채와 에나멜, 뉴욕 근대미술관
Pollock의 가장 큰 그림 중 하나(269×530㎝)이며, 폴락은 바닥에 누워있는 캔버스에 <작품 No. 31>을 그렸다. "나는 이 방법으로 그림을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나는 이 그림을 둘러 볼 수 있고, 네 면에서 작업 할 수 있으며 문자 그대로 그림 속에 있을 수 있다." 고 하였다.
<파란 막대기들 No. 11> 1952년 폴락作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갤러리
☆ 팝 아트(Pop Art)
1950년대 미국과 영국에서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최고치에 이르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사람들은 자연, 환경이 아니라 광고판, 대중매체와 친하게 되었는데, 이에 착안해 추상주의에 식상함을 느낀 화가들이 TV나 잡지, 광고등에 등장하는 이미지를 작품의 재료로 채택하였다.
* 로이 리히텐슈타인
(1923~1997 미국)은 만화의 장면을 캔버스로 옮긴 작품으로 유명하다. 앤디 워홀 등과 함께 팝 아트의 대표적인 화가로 신문 연재의 통속인 만화를 캔버스로 확대해 그린 작품군으로 유명하다. 만화가 가지는 단순하지만 강렬한 선, 단순화된 색채 등의 표현력을 유채로 표현했다.
<이것봐 미키> 1961년
로이 리히텐슈타인作 유화
국립 예술 갤러리
디즈니 만화 주인공 미키 마우스와 도널드 덕이 등장하는 이 작품은 실제 만화처럼 말 풍선을 그려넣고 대사를 적어놓았다. 또한 인쇄한 것처럼 보이도록 인쇄물을 확대했을 때 생기는 점(dot)까지 세밀하게 나타냈다. 미키 마우스를 좋아했던 아들을 위해 그려준 그림 한 점이 무명의 예술가를 새로운 현대미술의 중심에 올려 놓았다.
<행복한 눈물> 19645년 로이 리히텐슈타인作 유화
로이 리히텐슈타인 재단
만화는 인생의 다양한 모습들을 과장하고 단순화시키고 변형시킨다고 생각한 그는 대중적이고 진부한 만화의 이미지를 독특한 양식으로 작품화함으로써 명성을 얻었으며, 인쇄에 사용되는 "벤데이 도트"의 망점 기법을 응용하여 간결하고 상업적인 독특한 작품을 제작했다.
<크리스탈 그릇이 있는 정물> 1973년 리히텐슈타인作 캔버스에 유채, Overall
사물의 구성요소를 단순화하고 평면적인 색채를 적용하여 대중의 감성에 효과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친숙한 이미지를 만들었다.
* 앤디 워홀(1928~1987 미국)
은 화려한 색채의, 같은 도판을 대량생산할 수 있는 실크 스크린 기법을 이용하여, 마릴린 먼로나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스타의 이미지와 상품, 달러 지폐 등 미국 사회에 유포하는 경박한 기호를 작품화했다. 그 도안은 물질이 풍부한 미국 사회를 구현하는 명쾌한 팝아트, 상업회화로 인기를 끌었다. 워홀은 자신에 대해 물었을 때, “나를 알고 싶다면 작품의 표면만 봐 주세요. 뒷면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라며 철저하게 ‘예술가의 내면’을 없애고 표면적임을 강조하였다.
<여덟명의 엘비스> 1963년 워홀作
실크스크린 잉크, 개인소장
<마릴린 먼로> 1964년
워홀作 실크스크린,
개인소장
☆
일부 미술관계자들은 인상주의 등장에서 1950, 60년대까지를 근현대 미술이라고 하고 1970이후의 미술을 동시대미술(현재미술)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소위 현재미술은 ‘~주의’라고 하지않고 ‘~아트’라는 명칭을 내세웁니다. 이를 테면 팝 아트, 옵 아트를 필두로 하여 키네틱 아트와 라이트 아트, 또는 정크 아트, 그리고 오늘날의 개념미술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현재 미술은 너무 다양하고 복잡해서 서양미술의 흐름을 앤디 워홀에서 마치겠습니다.
♡
수고 많았습니다.
덕택에 미술에 대한 눈이 좀 트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