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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삶의 회복(롬12:9-21)
지난 주 말씀에 연이어 ‘거룩한 산 제물’의 삶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울은 그의 명 저서 로마서에서 그는 ‘영적 예배자’의 삶이란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내면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 우리는 먼저 ‘이 새대의 풍조를 본 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구별’하는 가치관이 바뀌어야 하고, 둘째는 우리 모두가 지체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바울은 지체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지체된 것은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게 하시고, 지체들이 서로 같이 걱정하게 하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라고 지체의 소중함을 강조했습니다. 이 진리를 마음으로 몸으로 깊이 깨달아 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가끔 교회에서 장례식이나 어려움을 당하는 가정을 보고 저보다 더 깊이 서로 안아주고, 울어주는 장면을 보면 목사로써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신앙의 깨달음이란 지식의 깨달음이 아니라 생명의 깨달음이요, 생명의 깨달음은 서로 지체됨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유명한 예수님의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당시 지도자들인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투덜거리자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를 드십니다.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공통점은 모두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일백 마리 양중에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서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버리고 한 마리 양을 찾으시는 어떤 사람 모습, 드라크마라는 동전 10 닢 중에 하나를 잃어버리면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며 찾는 어떤 여자의 모습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경제적 원리로는 이해못함)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세상에 버릴 것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이면 더 말할 것 있겠습니까?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에게 일격을 가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졸라 그 유산을 가지고 타국에 가서 그 재산을 모두 방탄한 삶으로 탕진해 버린 아들, 잃어버렸던 아들입니다. 그런 아들도 버릴 수 없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로 예수님은 당시 지도자들에게 어떤 종류의 사람이라도 내치지 말라고 하나님 ‘아버지 마음’으로 엄중히 경고하시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자, 여자, 어린이, 학생, 청년, 어른, 할아버지, 할머니 등이 있지만 세밀히 들어가보면 다시 보지 않을 사람, 유익이 되지 않는 사람, 인간 취급하지 말하야 할 사람, 귀찮은 사람, 말도 걸기 싫은 사람, 배신한 사람, 성격이 맞지 않는 사람, 교회에서 만나기 싫은 사람, 상종하기 싫은 사람 등으로 구분해 놓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한마디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버리지 말아야 할 사람, 섬겨야 할 사람,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지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흑인 인종차별에 대항하여 자유와 인권을 위해서 싸우던 그는 27년간 감옥에 있었습니다. 석방 된지 몇 년이 지난 1994년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대통령 취임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27년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 활짝 열린 문을 향해 걸으며 나는 생각했습니다 / ‘내가 받은 고통과 분노 / 원한과 미움을 / 이곳에 묻어 놓고 떠나지 않으면/ 나는 또 다시 과거의 고통스러운 감옥에 갇혀 / 헤어날 수 없다’ / 그때의 그 현명한 결단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고 / 우리 아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줄 이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무엇이 사람을 버리게 하고, 지체임을 깨닫지 못하게 합니까? 만델라의 말처럼 고통, 분노, 원한, 미움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그것을 ‘그리스도의 평화’를 위해서 자기가 27년 동안 복역하던 감옥에 묻었습니다. 그는 적대감과 미움으로 새 나라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의 죽음 이후에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식을 뛰어 넘는 100여개국의 전, 현직 정상들이 함께 했고 이슬람, 기독교, 힌두교 성직자들이 종교를 넘어 기도로 장례식이 시작되었으며, 50년간 적대관계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미국의 정상 오바마와 쿠바 카스트로 대통령이 만나서 악수하는 장면은 전 세계를 감동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아프리카의 지도자 한사람, 한 사람의 기독교인이자 감리교인이 세상에 던진 메시지가 너무 강렬한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평화입니다” 그가 남긴 메시지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묵상하면 할수록 구약의 레위기 19장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라는 말씀이 자꾸 떠 올랐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소명은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거룩하다고 하면 흔히 우리의 일상과는 그다지 깊은 관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떠난 거룩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거룩은 내가 다른 이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교인들에게 아주 신령하다고 존경받는 목사님이 계셨어요. 그런데 그분은 집에서는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에요. 아내를 학대하고, 아이들에게는 아주 폭군이었대요. 어느 날 참다못한 사모님이 이불 보따리를 챙겨서 이사를 했어요. 강대상으로요. 당황한 목사님이 '당신 왜 그러냐'고 따져 묻자 사모님은 단호하게 대답했어요. "나는 여기에 서있는 당신하고 살고 싶어요.“
(저녁에 식탁에서 이찬수 목사님 설교 이후 집사람과 나눈 대화)
우리의 문제는 안팎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말로는 누가 거룩하지 않겠어요? 중요한 것은 삶이 아니겠어요? 행실에서 心中이 드러난다 하지 않습니까? 거룩한 삶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우리에게 주어진 생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레위기 19장은 계속해서 그 거룩한 삶, 하나님이 대리자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나열하고 있습니다.
추수를 하면서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밭 한 모퉁이를 남겨두고 떨어진 이삭을 줍지 않는 것 / 도적질·속임수·거짓말을 멀리하는 것 / 힘 있다고 해서 이웃을 해치거나 이웃의 몫을 가로채지 않는 것 / 듣지 못한다고 해서 귀먹은 사람에게 저주하지 않는 것 / 앞 못보는 이 앞에 장애물을 놓지 않는 것 /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는 것 / 다른 이에 대해 나쁜 소문을 내지 않는 것 / 힘없는 이웃을 막다른 골목까지 밀어붙이지 않는 것 /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을 보았을 때는 애정을 가지고 책망하는 것 등입니다. 남을 존중하고 아끼고 돌보아 주라는 것입니다.
이런 레위기의 이 거룩에 대한 강렬한 메시지가 오늘 본문의 말씀에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하지 마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14-18) - 레위기와 뭐가 다른가?
이 모든 ‘거룩한 삶의 회복’은 우리가 지체의식이 없이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는 일들입니다. 저는 지체의식이란 그리스도의 생명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그 생명이 그 속에 있기에 감당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믿습니다. 거룩의 회복은 곧 내 삶의 회복입니다.
바울의 명저 중에서 교회를 향해서 쓴 편지중에 가장 길게 쓴 편지가 고린도 교회를 향해 쓴 고린도서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참 많은 문제가 있었던 교회입니다. 교회가 네 사람의 파로 갈라져 있었습니다(바울, 아볼로, 베드로, 그리스도). 교회들 중에 음행이 성행했습니다(아버지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사람), 교인들끼리 돈과 물질 때문에 소송이 일어났습니다. 아내를 마음것 버리는 이혼소송이 난무했습니다. 성만찬 때 술 취한 사람도 나타났습니다.
이런 문제 있는 교회에 누가 다니겠습니까? 정말 한심한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를 향해 바울은 교회이 문제를 고전 11장까지 나열하고 난 뒤 12장에서 그는 그 유명한 ‘지체’를 이야기 하고, 13장에서는 우리가 노래 부르듯 부르는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그 핵심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서로 지체임을 알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회복의 역사가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산 제물’이고 ‘영적 예배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거룩한 산 제물’, ‘영적 예배자’가 되면 우리 삶의 어떤 대가가 따라 올까요? 지난 금요기도 시간에 증거한 말씀가운데 세례요한은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신부가 신랑을 기다릴 때의 기쁨, 나는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삶의 기쁨은 관계에서 옵니다. 우리 모두 ‘거룩함의 회복’, ‘생명의 회복’, ‘지체됨의 회복’이 있을 때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는 기쁨으로 가득 찰 줄로 믿습니다. - 우리 교회가 이렇게 되어야 한다.(지금 여러분은 주일날 뵙는 성도가 이렇게 기다려 지십니까? 이것이 지금 여러분이 영적인 온도입니다.)
이렇게 거룩한 삶의 회복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저는 오늘 긴 본문 중에서 두 가지만 가지고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14)
물론 이 말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5:44)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변형시킨 것입니다. 나와 내 가족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게 앙갚음하고 싶은 마음을 거두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를 위해 축복한다는 것은 감정적으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입니다. 왜 사도는 이 어려운 일을 하라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렇게 하는 게 결국은 자신을 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저주하는 일은 일시적인 카타르시스를 우리에게 주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함정을 판 사람이 그 함정에 빠진다는 말이 있듯이, 미움의 감정은 올무가 되어 우리를 묶어버립니다. 미움과 저주는 영혼의 무게를 가중시킬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중에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20)라고 주님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며, 사명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축복해 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삶속에서 다른 사람을 축복할 수 있을까요?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10절)
“소망을 품고 즐거워하며, 환난을 당할 때에 참으며, 기도를 꾸준히 하십시오”(12절)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십시오”(13절)
이것이 축복입니다(여러분은 아셨습니까?) 다정하게 대하고, 존경하고, 타인으로 인하여 환난을 당하더라도 기도하고, 쓸 것을 공급하고 잘 대접하는 것이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윤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영적 예배자, 거룩한 산 제물이 되는 길임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머니 장례식이 끝나고 장남과 장녀가 좀 부딪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서로 의견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저도 마음이 상했고, 누나도 마음이 많이 상했습니다. 제 마음 깊은 곳에는 섭섭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말레이시아로 왔습니다. 아침에 기도하는데 기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기도자리에서 자신을 내려 놓려 놓았습니다.
누나가 말레이시아 오는 일이 있어서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잘 대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대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저는 이것이 축복인지 몰랐습니다.
공항에서 만났던 누나와 매형은 저보다 더 다정했고, 더 따뜻했습니다. 그리고 잘 대접해 드렸습니다. 그리고 누나네 교회 교인들이 우리교회 와서 저와 교회를 위해서 눈물을 흘려 기도해 주었습니다. 이 모두가 서로를 향한 축복이었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거룩함의 회복은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서로 축복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지체로써의 거룩함의 회복은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15절)
축복을 소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은 머리의 사람이 아니라 가슴의 사람입니다. 머리로 이해한 것을 가슴이 ‘아멘’으로 응답할 때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보며 참 안됐구나 생각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위해 몸을 움직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이 가슴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게 쉬운 듯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기뻐하는 사람을 보면 그 기쁨이 내 몫이 아니라는 사실이 속상하고, 우는 사람을 보면 외면하고 싶어하지는 게 우리들입니다. 이웃과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자아가 없는 사람입니다. 세상을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바라보는 한 우리는 가슴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슴의 사람일까요?
“서로 한 마음이 되고 /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하지 마십시오”(16절) -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가슴으로 만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 이웃들을 가슴으로 만나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것이 제가 만들고 싶은 교회의 꿈입니다. 내년부터 저는 가정교회를 세울 것입니다. 교회가 가정 같고, 가정이 교회 같은 교회 말입니다. 목장예배를 중심으로 교회가 움직이기를 원합니다.
목장은 서로 한 마음으로 모이는 곳입니다.
교만한 마음을 품는 곳이 아닙니다 – 잘 난척 하는 곳, 자랑하는 곳(x) 섬기는 곳입니다.
비천한 사람과 함께 사귀는 곳입니다 – 수준, 성격, 학력을 보는 곳이 아니다.
(시인 고은 선생님은 집 머슴에게 인생사의 이치를 배웠다고합니다. “사람이 호강하면 저밖에 모른단다 / 남하고 사는 세상인데” <머슴 대길이>라는 시를 지었습다. 온기를 느낀다.
스스로 지혜 있는 척 하는 곳이 아닙니다 – 가르키는 공동체(x) 모든 이에게 배우는 곳
우리는 흔히 지혜자를 교양(고상한 성품)인 이라고 합니다. 교양인이라 할 때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교양인은 사람을 아끼는 사람이다. 다른 이들의 삶의 자리에 내려가는 사람입니다. 낮은 자리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막지 않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지체됨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풍성한 가지를 자진 나무가 건강하고, 열매도 많이 맺습니다. 이 진리를 기억하십시오. 자꾸 자기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잘라내면 결국 병들게 되어있습니다. 열매는 기대도 하지 못합니다. 저는 꿈꿉니다. 이런 풍성한 열매들이 결국 전도의 열매로 연결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공동체라고 부르길 좋아합니다. 사실 공동체를 뜻하는 영어 단어 ‘community’는 서로(com) 선물(munus)을 나누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다고 합니다. 물질적인 선물만이 선물이 아닙니다. 존재 자체가 선물인 사람이 있습니다. 존재자체를 선물로 누리셔서 “신랑이 신부를 기다리는 기쁨”으로 가득차기를 소원합니다.
거룩함의 회복 이것은 바로 이땅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뜻이 아니겠습니다. 성탄절기에 오늘 이 말씀앞에 서시는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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