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으로부터 138년 전 일본 나라현 텐리시 이소노가미궁에서 신비한 칼 한 자루가 발견된다.
길이 74.8Cm의 강철제 칼이다. 좌우쪽에 각각 달린 3개의 가지 칼과 칼의 앞날을 합쳐
'7개의 가지가 달린 칼' 이라는 뜻으로 '칠지도' 란 이름이 붙은 신비의 칼 보검이다.
지금은 일본의 국보 문화재이다.
1874년 이 신궁의 대궁사(大宮司)인 간 마사토모(菅政 友)가 처음으로 발견한다.
이소노카미신궁은 고대 일본 건국 때 사용됐다는 전설적인 칼인 신검(神劍)을 모시고 있는 신사다.
5~6세기 때는 야마토정권에서 군사를 관장하던 모노노베(物部-신라계) 가문이 관리하였고,
3류 사무라이들이 다시 신궁으로서의 위상을 회복시켜 주었다.
메이지 시절 이 신궁의 주지 간 마사토모(菅政友)는 1824년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중국사와 중국서예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정한론을 기초로 국수적
사고를 강요하던 1870년대 일본내무성 역사편찬국(요즘의 교육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나이 50세가 되던 1874년 현직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이소노카미신궁의 주지 대궁사로 취임한다. 신궁내에는 인간의 발길을 허용되지 않는 ‘금족지(禁足地)’라는 신성한 땅이 있었다.
이곳에는 야마토정권의 무기고라 할 수 있는 신고(神庫), 즉 고래로부터 각종 무기가 소장되어
있었다. 대궁사로 취임한 간 마사토모는 1874년 8월 천수백 년간 인간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는
전통을 깨고 이곳에 은밀히 침투하여 비장되어 있던 칠지도를 비롯한 각종 칼 구슬 동경 철기류 등
수많은 부장품을 발굴한다.
이 칠지도는 금상감(金象嵌) 기법으로 새겨진 앞면 24자 뒷면 27자 등 모두 61의 명문(銘文)은
많은 관심을 불러왔다.특히 앞 뒤 8자가 보이지 않아 글자의 해석을 둘러싼 한일 두 나라 학자들의
논쟁이 치열하다. 먼저 칼 앞면의 글자 24자를 살핀다.
“태△ 4년 5월 16일은 병오인데, 이 날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 줄만하다. △△△△가 만들었다”
글자 그대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태ㅇ4년 5월 16일 병오인데 이날 백번이나 단련하여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막아낼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 줄만하다.OOOO이 만들었다."
일본은 당상 <일본서기>를 내세워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증거로 활용하려고 했다.
백제가 칠지도를 일본에 헌상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백제사신 구저 등이 칠지도 한 자루와 칠자경 한 개 및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을 보냈다.
백제왕이 계를 보내 말하기를,
'우리나라 서쪽에 시내가 있는데 그 근원은 곡나철산(谷那鐵山)에서 시작됩니다.
이 물을 마시다가 문득 이 산의 철을 얻어서 성스러운 조정에 바쳐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백제왕은 손자 침류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내가 통교하는 바다동쪽의 귀한 나라는 하늘이 열어준 나라이다.
그래서 천은(天恩)을 내려 바다 서쪽을 나누어 우리에게 주었으니
나라의 기틀이 굳건하게 되었느니라.
너도 마땅히 우호를 다져 공물을 바치는 것을 끊이지 않는다면
내가 죽더라도 여한이 없겠노라.'
이 후로 백제는 해마다 계속해서 조공을 바쳤다."
여기 나오는 백제왕은 근초고왕을 말한다.
일본서기의 기록대로만 해석하자면 백제의 왕은 이 칠지도를 주면서
왜국의 왕이 가야나 마한 등 지의 땅을 빼앗아서 백제에게 선물로 주는 등 은혜를 베풀었으니
귀한 나라 왜국에게 앞으로도 영원히 조공을 바치겠다고 다짐한 것으로 돼 있다.
아랫사람인 백제왕이 윗사람인 왜 왕에게 올려 바쳤으니 칠지도를 헌상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칠지도를 제작할 때 그 제작연도를 새겨 넣긴 했다.
클 '태(泰)' 자가 첫 글자로 새겨져 있고, 그 다음 글자는 마멸돼서 알아볼 수가 없다.
그 뒤에 4년(四年)이라고 돼 있다.
고구려와 신라가 한 때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도 했으나 동아시아에서는 대개 중국의 연호를 따랐다.
태(泰)자 다음에 보이지 않는 글자를 화(和)자로 본다면 '태화4년'이 된다.
이 태화는 당시의 진나라 즉 동진의 연호였을 것이라고 국내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동진 태화4년으로 보고 369년으로 보고 있다.
관련된 기사가 일본서기 신공황후기에 나와 있는데
거기에 보면 이제 왜가 군대를 한반도 남부지역에 파견해서
소위 인제 가야지역에 있는 일곱 개 나라를 평정하는 기사가 실려져 있다.
그것을 학교에서는 조정을 해서 369년 대개 근초고왕 때
그 칠지도가 만들 어진 시기와 같은 시기로 대충 보고 있다.
_양기석 충북대 교수-
이 명문은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태화4년 5월16일 병오에 백번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여러 병란을 물리칠 수 있으므로 마땅히 후왕에게 주도록 하라."
"供供侯王이라고 하는 문구가 있습니다. 공자는 제공하다 할 때 供자인데 그게 두개 중복이 돼 있고요,
그 다음에 諸侯 할 때 侯자를 쓰고요, 그 다음에 임금 왕 자를 써서 공공후왕 이러는데
이건 무슨 이야기냐면 태화4년 5월 16일 병오일 한낮에 백제에서이 백번 담금질한 철로 칠지도를 만드는데
이러한 검은 칼은 온갖 병화(兵禍 )전쟁으로 인한 화를 가름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땅히 후왕에게 공공하는 곳이 옳겠습니다."-강종훈대구카톨릭대교수-
"이 명문내용에 보면 두 나라의 관계를 시사적으로 보여주는 이런 구절이 있어서
그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학계, 한국과 일본학계에서 큰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宜供供侯王'이다 해서 그 諸侯할 때 그 侯王이 나옵니다.
그러면 그 후왕이라는 존재는 중국사에서 봤을 때 중국의 황제가 있으면
그 제후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연 그 후왕이라는 명문을 백제와 왜와의 관계로 놓고 봤을 때 누가 상위자냐."
-양기석충북대교수-
백제왕이 왜왕에게 칠지도를 주었다는 표현으로 바칠 헌(獻)자를 쓰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제공하다는 의미의 이바지할 공(供)자를 썼다는 대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2000년 일본의 오부치 수상 장례식에서 헌화 순서와 공화 순서를 따로 둔 예를 든 설명이 설득력이 있다.
"2000년 일본 오부치 수상 장례식 때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클린턴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조문객으로
장례식에 참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꽃을 갖다 바치는 그런 차례가 있었는데 클린턴을 비롯해서 많은
외국 사절들이 오부치의 관 앞에 꽃을 놓는 것을 헌화(獻花)라고 일본측에서 표현했습니다.
이 헌화 순서가 끝나고 난 다음에 공화(供花) 순서가 있었습니다.
제공할 공(供)자에 꽃 화(花)자를 쓰는 공화순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본 황족의 대표가 나와서 꽃을 오부치 관 앞에 놓는 것을 공화라고 했습니다.
이건 무슨 얘기냐면 공(供)하고 헌(獻)의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황족이 총리대신의 장례식에 꽃을 주는 것은 헌이라는 말을 쓸 수 없다라고 일본본 측에서는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강종훈교수-
칠지도의 경우도 제공할 공(供)자에 꽃 화(花)자를 쓰는 공화순서를 빌어 <宜供供侯王> 명문을 해석하면
일본 측의 주장처럼 백제 왕이 일본의 왕에게 '헌상(獻上)'했던 것은 분명 아니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 황제가 오부치 수상에게 조화를 하사하듯 백제 왕이 왜의 후왕에게 내린 공공(供供)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 칼 앞면의 34자의 글자는 국내 학계에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태화 4년 5월 16일 병오에 여러 번 담금질해서 이 칼을 정성껏 만들었는데
이걸 가지고 있으면 전쟁이 터져도 능히 이겨낼 수 있으니 마땅히 후왕에게 제공하노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