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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중면장년회 총무 김형준입니다
(11)월 어르신찿아뵙기 보고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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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어르신 : 대룡리 장인일 중면면민회장님
<중면장년회 어르신찾아뵙기>
고즈녁한 낙산사의 늦가을에 찾은 장인일 중면회장님의 양양땅 정취를 담뿍 안았던 휴일 오후
강원도 양양, 서울에서 가는 길은 녹녹치 않았다. 이미 여러 차례 발길이 닿았던 곳이고, 오늘 찾는 중면 면민회장인 장인일 회장님이 거주하시는 자택을 찾는 것 또한 초행길이 아니지만 길은 멀었다. 동행한 식현리 출신의 유근배 형제와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양양까지 2시간 10분, 토요일인 탓인지 그 시간은 30여 분이 훌쩍 더 넘어서야 양양 터미널에 도착을 했다. 인천에서 일찍 먼저 출발했던 김형준 형제(천덕리, 중면장년회 총무) 또한 예정 시간 3시간을 지나 30분을 넘기고서야 도착했단다. 고속과 시외 버스가 모두 선다는 양양종합터미널엔 장인일 회장님께서 일찍 나오셔서 우리를 맞이해 주셨다. 장 회장님 차량으로 발길을 옮기는데 또 한 분의 낯익은 얼굴, 바로 사모님이신 김인동 여사님의 모습이 보였다.
점심 시간을 한참 넘긴 시각, 출츨함을 달래러 미리 봐뒀던 식당 쪽으로 발길을 옮기려니까 회장님께서 왈(曰), 이곳은 낙산사가 지척이니 그 근처로 가서 식사를 하고서 낙산사를 돌아보자고 하신다. 찬성, 대찬성입니다!!
곧 이어 낙산사 인근의 바닷가를 찾았는데, 아주 눈에 익어 보인다. 그제서야 언젠가 특전사 동기 소모임에서 단체로 찾아들었던 물치항에 들어섰음을 알았다. 맞다, 여기서 생선회를 먹었고, 그보다도 물치항의 일품이라던 물치 물회에 감탄해 했었지!
물치항은 그다지 크다고는 할 수 없지만, 1층은 활어가 뛰놀고 2층은 활어도 팔고 식사도 하는 횟집들이 여러 집 들어서 있었다. 초행길이 아니라서 가장 부산스럽지 않은 구석진 횟집을 선택했다. 여긴 주로 자연산이었지만 그래도 당연히 자연산일 수밖에 없는 광어 큰 놈이랑 우럭 두 마리,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쥐치를 횟감으로 결정을 했다. 産地였지만 서울의 수산시장보다는 비싼 가격에 역시 서울이 물가는 싸다는 생각을 새삼 해본다.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자, 몇 가지 밑반찬(스끼다시)이 나오는데 싱싱한 낙지 탕탕이랑 바다고동 등이 한아름 접시에 담겨 나온다. 이건 그냥 스끼다시 수준이 아니었다. 장 회장님 앞엔 평소대로 막걸리가 놓여졌고, 나와 형준 형제에겐 소주가, 근배 형제 앞에는 맥주가 자리했다. 술을 안 드시는 사모님에겐 사이다와 콜라가 대령했고.... 바다 위를 비추는 늦가을 햇살과 더불어 11월 어르신 찾아뵙기의 식사자리는 이렇게 무르익고 있었다. 건강을 비는 축배와 더불어 ......
“6.25동란이 났을 때 고향 개풍군에서 아버지는 경찰관이셨어. 당연히 참전을 해야 했는데, 계속해서 인민군한테 밀리니까 피란을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우리 삼남매를 데리고 나오셨는데 어머니는 당시 환갑도 안되신 할아버님을 혼자 놔둘 수가 없어서 남으셨고, 큰누나와 작은누나, 그리고 나만 아버지와 함께 임진강을 건넜어요. 이산가족이 된거지. 이미 인민군들이 들어와 있어서 우릴 보고 ‘따콩! 따콩!’ 따콩총을 쏘는거야. 더욱이 경찰 가족인 우린 잡히면 끝장인 상황이었어.”
피란 당시의 상황을 말씀하시는 장인일 회장님의 말씀에 어느 새 힘이 주어진다.
경찰관 가족인 상황에선 가족 모두가 나오셔야 했지 않냐는 나의 질문에 장 회장님은, “한분은 연세가 드신 분이고 또 한분은 여자니까 별일이야 있겠냐고 생각했던 거지. 그리고 다행히 할아버지가 동네 인심을 안잃으셨어. 대개 동네 일꾼이나 머슴들이 붉은 완장을 찼었는데 이들이 할아버지는 눈감아 줬던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식현리에서 나룻배를 타고 김포 통진이라는 곳으로 넘어왔는데, 거기 전선에서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 그래서 삼남매가 인천을 거쳐서 함께 내려가는거야. 일행 중엔 아는 이 하나 없는 이남 땅에서, 소래로 해서 오산을 거쳐 평택까지 내려가는 거야. 두달 동안 무작정.. 그러니까 인민군들과 함께 내려갔던 거지.
다행히 길을 앞장섰던 사람이 큰누님,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큰 누님이셔서 다행이기도 했어요.”
그때를 회상하던 장 회장님의 낯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현재 86세로 생존해 계시는 큰누님에게 치매가 왔기 때문이란다.
“그땐 마침 여름이어서 먹을 거는 도처에 널려 있었어요. 굶어죽지는 않아. 밭에 참외도 있고, 복숭아도 열려 있고, 고구마는 몰래 캐먹고.. 그리고 고향 파출소에서 급사를 했던 조창근이란 분에게 아버지가 길안내를 부탁해서 안내를 받았어. 얘네들을 데리고 다니다가 수복되면 고향으로 들어가라고 했다는데, 어디 전쟁이 끝나나? 그래서 걸어걸어 8월 되어 평택까지 갔는데 더 갈 기력도 없고 찾아갈 곳도 없는거야. 어머니는 할아버지 모시고 중면에 계시지, 경찰관으로 전쟁터에 나가신 아버지는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지..”
그 부친은 결국 전사를 하셨는데, 어느 전선에서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고 시신도 못찾아서 동작동 국립묘지엔 위폐만 모셔져 있단다.
결국 평택에서 발길을 돌렸는데,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조창근 씨의 제안에 따라 걸어걸어 중면으로 돌아왔고, 고향인 대룡리에서 할아버지를 뵈올 수가 있었단다.
“집으로 돌아왔더니 할아버지는 계신데 어머니가 없는 거예요. 어머니는 우리도 찾을겸 서울 삼각지에서 숙박업소를 운영하던 외할머니를 만나러 임진강을 건넜던 거지. 우리는 8월에 돌아왔고, 어머니는 9.28 수복 후에 돌아오셨는데, 고향집에 삼남매가 모두 다 와 있으니 얼마나 놀랐겠어? 외할아버지 만나러 왔던 것인데 말이지. 근데, 어머니가 우릴 보니까 기가막힌거지. 시아버질 만나러 왔는데 우리가 와 있는 거거든. ..그리고 그해 겨울은 무척 추웠어요. 이듬해 1월 20일날 중공군들이 쳐내려왔었거든. 그때는 걔들이 다시 내려오면 죽을 것 같으니까 모두 피란들을 하더라구.”
1.4 후퇴. 인민군 치하에선 할아버지가 후덕했던 탓에 머슴이나 노동자들인 적색분자들도 딱히 해꼬지하는 일이 없었지만 중공군 치하에선 어렵겠다는 판단을 내린 일가족은 피란 보따리를 다시 쌌다. 막내인 장 회장님이 열 살 되던 해였다. 할아버지는 재산도 지킬겸 남겠다고 하셔서 모친과 삼남매만이 다시금 임진강을 건넜다. 마침 어머니 친정이 부산 영도섬이라 곧바로 부산까지 피란을 가서 생활을 했다. 부친은 전쟁터에서 전사를 하셨고 .. 그리곤 종전이 됐고, 고향 중면으로 갈 길은 완전히 막혀 버렸다. 가족들이 서울로 올라와 정착한 곳은 마포, 고향 사람들이 많이 모여살게 된 것이었다. 마포는 같은 대룡리 출신인 김문환 부회장의 선친인 김진영 어르신이 지역 내 경찰관을 하면서 터를 일구어 온 곳이어서 고향 사람들이 제2의 고향으로 정착들을 많이 했다. 김문수 고문님(대룡리, 前군민회장)의 선친 또한 인근 공덕시장을 관리했던 터라 실향민들에겐 의지들이 많이 되었었다.
이번에는 부인 김인동 여사와의 인연에 대해 여쭈었다. 두 분은 같은 은행의 지점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무학여고(8회 졸업)를 나온 김 여사님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서울은행에서 농구선수 생활을 했던 터였다. 장 회장님은 1943년생인 부인과는 한 살 터울인셈. 김 여사님이 경기도 이천읍 백사면(白沙面)의 유지였던 안동김씨 부친을 둔 터라 결혼이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했다.
“이북 실향민에다가 5대 독자, 홀어머니를 둔 내게 누가 시집을 오겠나? 여긴 아들 넷에 딸 둘을 둔 부잣집 딸인데 .. 내가 열심히 대쉬해서 꼬신거지. 사랑한다고..” 그래도 명문 인동장씨와 안동김씨 후손들의 맺어짐이었다.
일찍이 국민학교 때부터 서울로 유학 생활을 했던 김 여사는 서울 토박이나 다름없던 터였고, 장 회장님은 같은 지점의 주임, 김 여사님은 행원이었는데, 장 회장님은 자신이 꼬셨다고 수차례 고백을 한다. 이른바 사내 연애를 했던 셈이다.
김인동 여사가 결혼 당시엔 회장님 나이도 잘못 알았다며 다섯 살이나 올렸다고 고백을 하자, 장 회장님은 그건 사회통념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보충 설명을 곁들인다.
“당시엔 남자가 동갑 정도이면 여자가 남자를 내려다보는 경우가 많았지요. 그래서 그렇게 올리게 됐지.”
사주단자나 궁합은 어떻게 했냐는 의문을 표하자, 그건 사실대로 갔다고 하신다. 가호적이 만들어지던 그 시절엔 실제 나이가 적어지거나 틀리게 표기되는 일이 꽤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서 계속 질문을 이어갔다. 상위에 놓인 단맛나는 생선회가 표가 날 만큼 사라졌을 때 우리는 넉넉히 매운탕을 시켰다. 이날 시장기가 더해진 점심 식탁은 참으로 즐거웠다.
개풍군 중면 면민회 장인일 회장님, 그의 인생 여정은 참으로 화려하고도 다양했다. 서울은행, 외환은행, 경기은행의 지점장을 거쳐 신동아그룹의 계열사 대한생명에서 상호저축은행을 만들었고, 상임감사를 끝으로 IMF가 오던 1997년도에 공직생활을 마쳤다.
여담삼아 두 분 사이에 누가 더 재산이 많은가고 묻자, 김인동 여사님의 대답이 냉큼 들어온다. “당연히 제가 많죠!” 그러면서 사모님은 유산으로 받은 것도 꽤 있고, 장 회장님처럼 IMF때 없애버린 재산도 없고하니 당연한 것 아니냐고 하신다. 월급의 절반 이상은 늘 부인에게 갖다바쳤다는 장 회장님의 변명도 곁들여졌고....
잠시 후, 식당을 나온 우리는 장 회장님 차를 이용해 낙산사로 갔다. 불이 난 이후에는 첫방문이었던 낙산사는 몇 군데 새 건물이 들어섰으나 여전히 교교했다. 휴일이라 사람들이 붐비긴 했지만 하나하나 구경을 하면서 올라갔다. 종루에선 생애 처음으로 타종을 해보기까지 했다. 거기서 무엇을 빌었는지는 비밀로 남겨 둔다.
웅장하면서도 만가지 소원들이 빌어져서 자리하는 대웅전, 極樂寶殿(극락보전)이 걸려 있는 포교당, 불자가 아니더라도 이곳을 찾으면 꼭 들르게 된다는 해수관음상, 홍련암, 의상대 등이 낙산사를 역사 속에 지탱케 하는 동력이 되고 있는데, 이것들을 거의 돌아볼 만큼의 시간이 있었던 것이 못내 고맙고 다행스러웠다.
낙산사를 나오는 길에 우리의 복잡한 이후 여정을 들으신 장 회장님의 제의로 우린 나머지 여정 전체를 취소하고 장 회장님 자택으로 행선을 결정했다. 토요 주말에는 강원도가 워낙 복잡해서 차량도 매진이고 호텔 등 숙소도 일이십 만원을 주고서도 얻을 수가 없는 형편인데, 우리 또한 강릉 경포대까지 3시간을 돌아돌아 가서는, 어렵게 구한 경포해변의 모텔에서 하루를 자고서 열차 편으로 귀경을 할 예정이었었다.
“그럴 것 뭐있어요? 저녁은 내가 봐둔 집에서 양꼬치 구이로 한잔을 하고 우리집에서 자면 되지. 마침 내일은 주일 예배차 서울로 가니까 아침 일찍 라면이라도 먹고 올라가도록 합시다.”
기가 번쩍 뜨이는 희소식에 냉큼 동의를 하고, 예약했던 모든 절차를 취소했다. 그리고는 장 회장님이 가려고 했던 양구이집 대신 인근의 재래시장에 들러서 머릿고기와 순댓국, 그리고 치킨 두 마리를 샀다. 장 회장님은 마트에서 소주와 막걸리, 소주 몇 병을 사서 준비했고 ...
이미 어둑해진 양양의 한켠에 자리잡은 회장님 댁은 유독 아늑해 보였고, 그곳에서 회장님과 우리 세 나그네는 술잔에 대화를 섞으면서 늦도록 밤을 보냈다. 그리곤 이른 새벽 이웃 동네에서 울어제끼는 수탉 한 마리의 기상 소리를 들었다.
<글/ 중면장년회장 김용근 작성>
첫댓글 안녕하세요.
게시된 글에서 대룡리 김문환 부회장의 선친은 김주명 어르신으로 정정합니다.
위폐 > 위패로 수정
어르신찿아뵙기는 12월에도 지속됩니다
대대손손 복록을 기원합니다
이영철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