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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전설 메스너 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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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방한에서 라인홀드 메스너는 세계 산악계의 거물이라는 이미지를 실증했다.
제 1회 울주 세계 산악영화제(UMFF) 참석차 처음 한국 땅을 밟은 메스너의 일정은 매우 분주했다. 가는 곳마다 그를 보려는 산악인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한국 산악인의 관심을 모은 그의 특별강연회는 입추의 여지가 없을 만치 300석 강연회장을 꽉 메운 가운데 진행되었다. 그는 강연회에서 자신의 등산인생과 철학을 들려주었다. 이날 그의 방한에 때 맞춰 출간된 역서《나의 인생 나의 철학. /메스너 지음. 하루재 클럽》에 저자 서명을 받기위해 몰려든 청중들의 인파로 장사진을 이루기도 했다. 한국산악인들이 그에게 갖는 관심의 척도를 짐작하게 하는 장면이었다. 이날 강연회에서 씁쓸했던 점은 그가 준비해 온 영상자료 화면의 오자와 통역자의 어이없는 실수에서 나타나 청중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그를 소개하는 화면의 자막에는 -“舞산소”. “舞셰르파”로 히말라야 14봉을 오른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자막의 의미를 새겨보면 “춤추는 셰르파” “춤추는 산소”가 된다. 메스너는 히말라야 자이언트 14개봉을 오르면서 셰르파를 쓰지 않았고(無셰르파), 산소(酸素)기구를 쓰지 않았다(無산소). 강연회에서 메스너는 알피니즘(Alpinism)이라고 말했고 통역 자는 그의 말을 받아 "알파니즘"이라고 전했다. 알피니즘이라는 말은 근대등산이 알프스에서 발원했기 때문에 알피니즘이라고 부르며 이 말은 등산을 뜻하는 세계 공용어가 된지 오래되었다. 이런 사소한 오류들은 국제행사를 준비한 주최 측의 준비 소홀 탓이다.
이번 영화제는 전 세계 6대주의 40개국에서 출품된 182편 가운데 총 24편이 본선에 올랐으며, 《스토리 오브 안나푸르나》와 《두 소년의 시간》 등 한국영화 2편도 포함되어 있다.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라인홀드 메스너는 1978년 세계 최초로 피터 하벨러와 함께 에베레스트(8848m)를 산소 없이 등정했다. 1970년 낭가파르바트에서 시작한 14고봉 편력은 1986년 로체를 끝으로 8000m 14봉 모두를 산소 없이 등정하는 신화를 남긴다. 완등에 소요된 기간은 16년이다. 그는 무산소. 단독등반. 알파인 스타일. 해트트릭 등 독특한 등반 방식을 창출해낸 20세기 최고의 신화를 일구어낸 알피니스트다.
메스너는 강연회에서 “산악인은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사람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 말은 알피니즘은 창조적인 행위임을 천명한 그의 평소 등산철학과도 일치하는 경구였다.
그는 1988년 캘거리 동계 올림픽에서 히말라야 14고봉 완등공로로 IOC위원회가 메스너와 쿠쿠츠카에게 은메달을 수여했다. 그러나 메스너는 이를 거절한 일은 그의 등산철학을 밝힌 유명한 일화다. 간단히 말해 알피니즘은 스포츠가 아니기 때문에 수상할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즉 등산은 창조적인 행위로 알고 있으며 순위를 비교해서 채점표에 기록하고 상대와 맞대놓고 경쟁하는 스포츠와 같은 것이 아니라고 수상 거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등산의 세계에는 경쟁이 없다. 상대와 맞대결하면서 순위와 기록을 겨루지 않고 그 성취를 내세우거나 보상을 바라지 않는 무상의 행위라는 점이 다른 스포츠와 구별되는 점이다. 만일 그가 메달을 받았다면 알피니즘이 스포츠라는 정의를 인정하는 셈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세계의 모든 산악인들 중에서 가장 많은 책을 저술한 저술가이기도하다. 14고봉 완등기《나는 살아서 돌아왔다. Uberlebt alle 14 Achttausender》를 비롯하여 50여권의 책을 펴낸 저술가이다. 영국의 저명한 산악저술가 프랭크 스마이드 보다 더 많은 책을 펴낸 사람이다.
국내 발간 역서만도 12권이다. 《제 7급 1977년》. 《도전 1979년》. 《검은 고독 흰 고독1983년》. 《죽음의 지대 1985년》. 《제 7급 1989년》.《나는 살아서 돌아 왔다 1991년》.《자유로운 영혼 1995년》.《에베레스트 미스터리 2000년》.《산은 내게 말 한다 2001년》.《벌거벗은 산 2004년》.《세로토레 2014년》.《나의 인생 나의 철학 2016년》 등이다.
그는 이번 방한 중에 산악서적 애호가 모임인 (사)韓國山書會(회장 최중기) 명예회원으로 입회했다. 울진 행사장 게스트 룸에서 진행된 입회 식에서 자신의 국내번역서들과 마주했고 한권한권 모두를 꼼꼼히 살펴보기도 했다. 또한 명예회원으로 입회를 받아준 산서 회 회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으며, 산악관련저서를 출간한 저자가 누구누구인지를 묻고 필자와 자신의 역서를 가장 많이 소개한 역자 김영도 선생과도 환담을 나누었다. 그와 함께 명예회원이 된《엘리지베스 홀리》의 저자이자 울주 세계 산악영화제 심사위원 자격으로 방한한 버나테드 맥도널드 여사는 山書會라는 단체는 아마도 한국이 세계에서 유일한 단체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대표작《프리덤 클라이머. Freedom Climbers》는 보드먼 태스커상. 밴프 그랑프리. 미국 알파인 클럽상. 케쿠 나오로지상 등을 휩쓸었으며, 등산관련저서 10권을 집필했으며 그녀의 저서는 9개국에서 출간될 정도로 널리 알려진 작가다. 이날 명예회원 수여식에서 맥도널드는 회원번호 181, 메스너는 182번을 받았다. 회원 패를 받은 맥도널드는 자기의 회원번호가 메스너 보다 빠르다고 좋아하면서 이런 사실을 메스너에게 알리지 말아달라고 말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메스너는 고향인 이탈리아의 알프스자락 볼차노에서 마운틴 뮤지엄( MMM)을 운영하고 있다. 중세유럽의 고성을 매입하여 박물관으로 쓰고 있다. 그는 방한 중 2014년에 개관한 국립산악박물관(관장 박종민)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져 주었다.
국립 산악박물관 영상 실에서 개최한 강연회에서 오늘날 급부상하고 있는 투어리즘과 알피니즘의 문제도 언급 했으며, 자연. 인문. 문화를 테마로 다양하게 구성된 기획전시실. 고산체험 실. 암벽등반체험 실. 국내외 등산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등산역사 실. 등반 사를 빛낸 산악인들의 발자취를 읽을 수 있는 산악인물실. 산악문화 실 등을 고루 관람했다. “국가 예산으로 산악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진 한국 산악인들은 매우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20세기 산악계의 전설 메스너의 인간적인 면모를 살펴 볼 수 있는 일화도 많다. 그는 한때 페터 하벨러와 단짝을 이루며 히말라야 등반 사에 큰 변화를 주도하는 기록적인 등반을 했다. 메스너는 페터 하벨러와 함께 1978년 상식을 초월하는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을 실현한다. 그러나 이 등반 이후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은 금이 간다. 이 세기적인 등반이 끝나고 하벨러는《고독한 승리》라는 등반기를 낸다. 이 등반기에 기록된 메스너에 관한 이야기가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것이 원인이 되어 두 사람은 헤어진다.
정상에 오른 메스너는 사진을 찍기 위해 고글을 벗은 것이 원인이 되어 설맹에 걸렸고,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상황에 처한 메스너는 하벨러의 옷자락을 잡고 날 버리고 가지 말라고 애원했다는 내용이 메스너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고 전해진다. 세계 산악계의 최강자임을 자처하던 그에게 하벨러의 등반기는 자존심을 건드리는 충격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신화를 창출한 고수다운 면모도 지니고 있다.
한 때 그의 경쟁자였던 예지 쿠쿠츠카가 메스너가 14고봉을 완등한지 불과 4주 뒤에 시샤팡마를 마지막으로 14봉 완등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메스너는 “당신은 제 2인자가 아니다. 당신은 참으로 위대하다”라는 내용의 축하 전문을 보냈다. 역시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이번 메스너 방한 중 전 일정을 메스너와 함께한 이인정 아시아 산악연맹회장과 한국산악회 정기범 회장, 그리고 메스너의 입이되어준 배경미 국장의 노고는 한국산악계의 성과와 실상을 알리는데 큰 몫을 했다.
난숙(爛熟)의 경지에 이른 유럽 알피니즘에 시선이 고정되어있던 그에게 후발 주자 한국의 도약을 보여주었고, 세계 속에 우뚝 선 한국산악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은 큰 수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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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의 매우 뜻있는 글 기고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