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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서 본 ‘상윳따 니까야(Saṃyutta Nikāya)’ 5강
폭류경(Ogha-sutta)1-2
두 번째 단락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아타 코 안나따라 데와따
Atha kho aññatarā devatā
아빅깐따야 랏띠야 아빅깐따 완나
abhikkantāya rattiyā abhikkantavaṇṇā
께와라깝방 제따와낭 오바셋와
kevalakappaṃ jetavanaṃ obhāsetvā
예나 바가와 떼누빠산까미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우빠산까밋와 바가완땅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ṃ
아비와뎃와 에까만땅 앗타시
abhivādetvā ekamantaṃ aṭṭhāsi.
그런데 어떤 천신이
깊은 밤 아름다운 모습으로
제따 숲 전체를 두루 환하게 밝히면서
세존이 계신 곳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간 후에 부처님께
예경하고 난 후에 한 쪽에 섰다.
아타 코(Atha kho)는 ‘이제, 또는, 그런데’ 라는 뜻입니다. 안나따라(aññatarā)는 ‘어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어느 천상에서 온 천신인지 모르기 때문에 ‘어떤’이라고 했습니다. 데와따(devatā)의 데와(deva)는 남성이고 데와따(devatā)는 여성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남성여성의 의미가 아니라 그냥 보편적으로 ‘천신(天神)’이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이때의 천신(天神)은 하늘에 사는 생명이라는 의미입니다. 불교에서도 신(神)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창조의 신이 아니고 하늘에 사는 생명이라는 의미로 천신이라고 합니다.
주석서에서는 일반적으로 천신을 데와(deva)라고 하는데 ‘유희한다고 해서 천신이라고 한다’라고 말합니다. 또 ‘눈, 귀, 코, 혀, 몸을 통한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으로 유희한다, 혹은 자신의 영광으로 빛난다는 뜻이다’라고 합니다. 이는 ‘천신들은 유희한다. 빛난다는 뜻이다’라고 해석합니다. 유희(遊戲)란 즐겁게 논다는 뜻입니다. 즐겁게 노는 그 자체가 빛나는 것입니다.
맛지마 니까야 주석서에 의하면 천신들은 세 종류가 있습니다. 인습적인 천신들인 삼무띠 데와(sammuti devā), 태생적인 신들인 우빠빳띠 데와(upapatti devā), 청정한 신들인 위숫디 데와(visuddhi devā)가 있습니다. 인습적인 신들인 삼무띠 데와(sammuti devā)는 왕들과 왕비들과 왕자들을 말합니다. 상좌불교에서나 인도의 여러 문헌에서는 왕을 호칭할 때 데와(deva)로 부르고 있습니다. 또 인도의 카스트(kaste) 제도에서 최 상위계급은 사제계급인데 이를 브라만(brahma)이라고 합니다. 브라만들은 자신들이 천상의 색계와 무색계 계급인 범천(梵天)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브라만(brahma)이라는 뜻은 범천이라는 의미며 이는 선정수행을 해서 가는 천상의 색계와 무색계를 말합니다. 태생적인 신들인 우빠빳띠 데와(upapatti devā)는 욕계천상의 천신들을 말합니다. 청정한 신들인 위숫디 데와(visuddhi devā)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번뇌가 소멸해서 열반에 이른 아라한들을 말합니다.
아빅깐따야 랏띠야(abhikkantāya rattiyā) ‘밤이 아주 깊었을 때’를 말합니다. ‘자정을 지난, 새벽 전, 깊은 밤’이라는 뜻을 아빅깐다 랏따야(abhikkantāya rattiya)라고 하며 같은 뜻으로 빠윅칸따야 랏띠야(pavikkhāntāya rattiya)라고도 합니다.
아빅깐따 완나(abhikkantavaṇṇā)는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를 뜻합니다. 아빅깐따(abhikkanta)는 ‘뛰어난, 훌륭한, 아름다운, 즐거운’이라는 뜻이고 완나(vaṇṇā)는 ‘색깔, 용모,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빛으로’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 가사를 금색으로 하는데 상좌불교(上座佛敎)인 테라와다(Theravāda)에서는 피부에 금색을 하고 가사에는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피부색이 주석서에 금색으로 나옵니다. 원래 하얀색인데 피부가 더 좋다는 의미로 금색으로 말합니다.
수완나(suvaṇṇā)는 황금을 말합니다. 완나(vaṇṇā)는 공덕을 말할 때도 쓰입니다. 꼬따마 수완나(gotama suvaṇṇā)라고 할 때는 부처님의 공덕을 말할 때 사용합니다. 그리고 ‘꽃’을 말할 때도 완나(vaṇṇā)를 씁니다. ‘이 꽃을 올리는 공덕으로 나도 아름다운 몸을 가지기를’이렇게 기원하기도 합니다. 꽃이 시들어가는 과정에 무상을 보기 때문에 내 몸도 점점 사라진다는 것을 새기면서 무상을 관찰합니다. 테라와다(Theravāda)에서는 이런 뜻으로 꽃 공양을 올립니다. 또 세 가지, 네 가지라고 할 때 ‘가지’의 뜻도 있습니다. 세 가지 발우라고 할 때에 씁니다. 이처럼 아빅깐따 완나(abhikkantavaṇṇā)는 아름답고 멋진 모습이나 빛을 말합니다.
천신들은 주로 깊은 밤에 찾아옵니다. 이 중에 욕계천신들은 본인의 모습으로 내려와서 부처님 앞에 바로 나타납니다. 색계천신들은 자신의 모습으로 오지 않고 다른 모습을 만들어서 옵니다. 색계천신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모습과 많이 다릅니다. 그림자처럼 있거나 빤짝빤짝 빛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여기 경전에 나오는 천신은 빛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색계천신으로 주석서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을 경전결집을 할 때 여러 스님들 앞에서 암송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무색계의 천신은 부처님께 오지 않습니다. 주석서에 무색계 천신들이 왔다는 얘기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깊은 밤에 천신이 부처님을 만나 뵈러 왔다고 했는데 여기서 부처님의 하루 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부처님의 하루 일정 | |
| 아침 6시 ~ 오전 10시 | 6시에 기상, 세면 탁발준비, 탁발, 공양, 설법. 상황에 따라서 부처님이 다니시는 모습이 실제로 걸어가시는 뚜리따 짜리까(turita carika), 신통력으로 가시는 아뚜리따 짜리까(aturita carika), 걷기아 신통력으로 가시는 뚜리따아뚜릿따 짜리까(turitaaturika carika) 등 세 가지종류가 있습니다. 짜리까(carika)는 다닌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지순례를 할 때 순례도 짜리까입니다. 상좌불교에는 열반상이 많습니다. 한국에서는 열반상을 많이 볼 수가 없습니다. 마하 까루나 사마빳띠(Maha karuna samāpatti) 멸진정에 드셨다가 나온 후 큰 자애로 오늘 누구를 도와줄 것인가를 신통으로 보십니다. 하루 일정을 시작하기 전에 하십니다. |
| 오전 10시 ~ 오후 6시 | 공양 후 니로다 사마빠띠(nirodha samāpatti, 멸진정)에 들어가시고 나오셔서 재가자들의 수행지도, 수행상담, 법문 등을 하십니다. |
| 오후 6시~ 오후 10시 | 재가자 상담을 마치시고 해가 지기 전에 샤워를 하십니다. 그리고 스님들 중심으로 수행지도 및 스님들의 하루 점검, 법문, 질의응답 시간을 갖습니다. |
| 오후 10시 ~ 밤 2시 | 천신들과 대화 |
| 밤 2시~ 새벽 6시 | 천신들이 가고 나면 걷기명상을 하시고 주무시고, 멸진정에 들어가십니다. 시하 세이야(sīha seyyā, 사자처럼 주무신다) 부처님은 주무실 때 오른쪽 방향으로 옆으로 누워서 사자처럼 주무신다. 어릴 때 동자승들이 모여서 자면 스님께서 밤에 들어오셔서 점검하시는데 부처님처럼 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시하(sīha)’는 사자를 말하고 ‘세이야(seyyā)’는 모습입니다 |
| 부처님의 다니시는 모습 3종류 | |
| 뚜리따 짜리까(turita carika) | 걸어가시는 것 |
| 아뚜리따 짜리까(aturita carika) | 신통력으로 가시는 것 |
| 뚜리따아뚜리까 짜리까 (turitaaturika carika) | 걷기와 신통력으로 같이 가시는 것 |
| 짜리까(carika)는 다닌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지순례를 할 때 순례도 짜리까(carika)입니다. | |
부처님께서 하루 일정을 시작하기 전에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셨다가 나오시면 오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혜안으로 살펴보시는데 먼저 위급한 상황에 놓인 사람을 구해준 경우가 많습니다. 그 중에 몇 명의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멸진정(滅盡定)은 상수멸진정(想受滅盡定)이라고도 하는데 무색계 4선정의 비상비비상처전에 이르러 오온의 상(想)과 수(受)가 소멸한 선정의 상태입니다. 윤회하는 생명이 이를 수 있는 최상위의 정신세계입니다. 그러므로 멸진정은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이르는 열반이 아닙니다.
다음은 부처님께서 괴로움에 처한 자가 때가 되어 도움이 필요한 자를 구한 경우입니다.
첫째, 소빠까(sopaka)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이 제자는 새 어머니한테 심하게 괴롭힘을 당하면서 아버지한테도 버림받았습니다. 몸에 시체를 묶어서 못 돌아다니게 하고 밤에는 무덤에 데리고 가서 무섭게 하는 모습을 부처님이 보셨습니다. 나이가 7살인데 어린 아이가 돌아다니다 맞아죽을 것을 아시고 구해오셨습니다.
둘째, 수니따(sunita)는 청소하는 하인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7살 때 구해오셨습니다.
셋째, 마따꾼(matakun)은 도과를 얻을 만큼 복이 있는데 사회의 잘못된 압박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시고 도움을 줘서 데리고 왔습니다.
넷째, 쭐라빤따까(culapantaka)가 자살하러 갔는데 부처님이 아시고 도와주십니다. 쭐라빤따카는 3개월 동안 게송 1개를 외우지 못할 정도로 바보였습니다. 쭐라빤따까의 형이 스님이었습니다. 쭐라빤따까는 매일 저녁때가 되면 형님 스님께 가서 부채질을 해줬습니다. 어느 날 부채질 하면서 망상을 하고 있었는데 ‘모두들 나를 바보로 보는데 환속하고 결혼해서 아이들도 낳고 가정을 이루고 우유 사업을 하겠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부인이 우유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가다가 항아리가 떨어져 깨져버렸는데 화가 나서 부인을 때렸습니다. 그런데 꿈 속이라 부인을 때린 게 아니고 부채질하고 있던 형님 스님을 때린 것이었습니다. 형님스님이 “너는 재가자로 돌아가서 살아라. 이런 상상까지 하니 너는 더 이상 여기 있을 필요가 없다. 돌아가서 재가자 생활이나 해라” 그 말을 듣고 쭐라빤따까는 실망해서 자살하려고 했는데 부처님께서 이를 아시고 도와주셨습니다.
다섯째, 왁깔리(Vakkali)라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부처님을 좋아해서 출가했는데 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부처님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스님들이 다 알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부처님이 어느 날 “너는 왜 나를 좋아하느냐? 이 썩어서 없어질 몸을 봐서 뭐하려고 그러느냐. 사리뿟따처럼 공부해서 정각을 이루어라”라고 하시면서 부처님이 혼냈습니다. 그러자 왁깔리는 충격을 받아서 자살하러 갔는데 이것을 부처님께서 아시고 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왁깔리에게 “나를 매일 볼 수 있는 일을 주겠다.” 하시면서 법을 공부하는 과제를 줍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공부하여 왁깔리는 법을 이해하고 도과를 성취했습니다.
공덕을 지으라고 하는 것은 공덕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인연이 없으면 부처님께서도 도와주지 못합니다. 기원정사와 가까운 곳에 가축을 키우는 축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축사에서 돼지만 죽이고 살던 ‘수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매일 돼지를 죽였습니다. 그래서 돼지 죽이는 소리가 제따와나 사원 입구까지 들릴 정도였습니다. 제따와나가 가까이 있어도 그는 한 번도 사원에 오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스님들이 탁발을 갔다 돌아오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돼지소리와 비슷한데 이상한 소리로 들려 온 것입니다.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부처님께 말씀드리니 부처님께서 “오늘 돼지를 죽인 ‘수카’라는 사람이 죽었다. 그동안 돼지를 죽인 업으로 돼지처럼 죽은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죽을 때 내는 소리가 제따와나 까지 들렸던 것입니다.
제가 대학에서 공부할 때 이슬람 여성이 한 분 계셨는데 항상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불편하지 않은가 물어보았습니다. 그분은 ‘신심으로 한다’고 말했습니다. 무엇이나 익숙한 사람은 자기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불편하지 않습니다. 인도의 카스트제도 영향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들은 뿌리깊이 그런 사상이 박혀있기 있기 때문에 자기 생각을 바꾸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불편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 업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도 자기 삶에 익숙한 사람을 구하지 못합니다. 지옥에 떨어진 존재들도 거기서 못 벗어나는 이유는 누구도 자신이 원하지 않아서 그 업 때문에 구해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다음 문장으로 가보겠습니다.
께와라깝빵 제따와낭 오바셋와
kevalakappaṃ jetavanaṃ obhāsetvā
아비와뎃와 에까만땅 앗타시
abhivādetvā ekamantaṃ aṭṭhāsi.
에까만땅 티따 코 사데와따 바가완땅 에따다오짜
Ekamantaṃ ṭhitā kho sādevatā bhagavantaṃ etadavoca:
까탄눗왕 마리사 오가마따리띠?
Kathannutvaṃ mārisa, oghamatarīti?
그때 어떤 천신이 깊은 밤중에
제따 숲 전체를 두루 환하게 밝히면서
예경하고 난 후 한 곁에 물러섰다.
한 곁으로 물러선 그 천신은 세존께 이와 같이 여쭈었다.
에까만땅(ekamantaṃ)의 에까(eka)는 ‘하나’이고, 만땅(mantaṃ)은 ‘한 쪽’을 말합니다. 그래서 에까만땅(ekamantaṃ)은 ‘한 곁에’라는 뜻입니다. ‘한 곁에’는 서로 마주 앉았을 때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곳을 말합니다. 그리고 인도 문화는 앞에 바로 앉지 않고 양쪽으로 앉습니다.
이 문장에서 세존이라고 했을 때의 세존은 빨리어로 마리사(mārisa)입니다. 마리사(mārisa)는 인도의 모든 문헌이나 산스크리트어 문헌에서 천신들이 서로를 부를 때 사용하는 호격존칭어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천신들이 자기들끼리 부를 때 사용하는 언어지만 예외로 천신들이 부처님이나 제자들을 부를 때도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마리사(mārisa)는 경전에 자주 나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마리사(mārisa)의 원래 뜻은 ‘괴로움을 없애버린 자’라는 뜻입니다. 괴로움을 없애버렸다는 것은 해탈의 자유를 얻은 자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번뇌가 불타서 소멸한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정신적 상태가 바로 열반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과 아라한을 마리사(mārisa)라는 존칭으로 불러 예우한 것입니다.
주석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리사(mārisa)는 좋은 말이다. 천신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사용하는 언어다. 이는 괴로움이 없는 자, 괴로움을 여읜 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경전을 번역할 때 마리사(mārisa)나 괴로움을 여읜 자라고 하지 않고 ‘세존이시여’ 또는 ‘존자시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 아타 코(Atha kho) 이제, 또는, 그런데 아빅깐따(abhikkanta) [abhikkamati의 pp.] 앞으로 나아간, 지나간, 가버린; ‘많이 지난’ 아빅깐따야(abhikkantāya) (f.Loc.sg.) abhikante의 Loc.sg 랏띠야(rattiyā) (f.Acc.sg.) [ratti.f.밤] 밤에 아빅깐다야 랏띠야(abhikkantāya rattiyā) 밤이 많이 지난 시각에, 새벽녘에 완나(vaṇṇā) (m.) 모습, 색깔, 용모 아빅깐따완나(abhikkantavaṇṇā) (m. Ins.Abl.sg.) 아름다운 모습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모습으로; 께와라(kevala) (adj) 혼자의, 독존의, 전체의, 완전한 께와랑(kevalaṁ) (adj, Acc,;adv) 단지, 다만, 오직 깝빵(kappaṁ) (Acc.sg.;ind.) 알맞은, 적당한;, 시간, 겁; 유사함 께와라깝빵(kevalakappaṁ) (nt.Acc.sg.) 전면적으로, 두루 제따와낭(Jetavanaṁ) (nt.Acc.sg.) 제따 숲을 오바셋와(obhāsetvā) (ger.obhāseti)[fr.√bhās, 비추다, 눈부시다], 오바셋와(obhāse + tvā:) 비추면서, 빛나게 하면서 예나(yena) (ya의 Ins.) ~인 곳으로, ~인 곳에 예나(yena A) ~ tena B ~: A 있는 곳으로 B하다 바가와(bhagavā) (m.Nom.sg) 세존이 예나 바가와(yena bhagavā) 세존이 계신 곳으로 떼누빠산까미(tenupasañkami) =tena + upasañkami 우빠산까미(upasañkami) (aor.3.sg) [fr. upasañkamati, upa + saṁ + √kam]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우빠산까밋와(upasañkamitvā) (ger. upasañkamati) [upa +saṁ + √kam; upasañkam +tvā] 가까이 다가가고 나서, 가까이 다간 간 후에 바가완땅(bhagavantaṁ) (m.Acc. sg. bhagavant ) 부처님께 아비와데띠(abhivādeti) [caus. abhivādeti] 인사하다, 경의를 표하다. 예배하다. 아비와뎃와)abhivādetvā (ger. abhivādeti) [abhivāde + tvā] 인사를 한 후에, 절하고 나서, 예경하고 나서 부처님께 가까이 다가간 후에 예경하고 나서 에깜 안땅(ekam-antaṁ) (ind.) [acc.eka + anta] 외로운 곳에, 한 쪽에, 한쪽 모퉁이에 앗타시(aṭṭhāsi) (aor.3.sg.) [fr. tiṭṭhati, a + √ṭhā +si = aṭṭhāsi] 섰다. 서 있었다. 한 쪽에 서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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