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대통령 생가를 찾아서
9반 전명수
우리나라 제5대에서 제9대까지 대통령을 지낸 박정희 대통령 생가가 위치한 경북 구미시 상모동을 찾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좁은 골목을 거쳐 생가를 찾은 기억이 희미하게 떠오르고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고 직접 살아온 초가삼간 중에서도 가장 허름한 집이였는데 지금은 새롭게 단장을 한 것으로 보여 진다. 이곳은 박대통령이 1917.11.14 태어나서 1937년 대구 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안채와 사랑채가 있고 그 바깥에 추모관이 서 있다. 박대통령은 고령 박씨이며 그의 선조는 상주에서 살다가 약목으로 이거하였고 1916년도에 이곳 상모동으로 이사하였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구미보통학교,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보통학교 교사를 지내다가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군주요 지휘관을 역임하였고 육군소장이었던 1961.5.16 군사혁명을 주도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었다. 1963년 육군대장으로 예편하여 제5대부터 1979년 제9대 대통령을 역임하였으며6.25전쟁이 발발하였던 1950.12월 육군소령 때에 대구에서 육영수여사와 혼인하여 1남 2녀를 두었고 1979.10.26 당시 심복이었던 안전 기획부장 김재규의 총탄을 맞고 서거하신 분이다.
생가 입구의 추모관에서는 확장공사가 한창 이루어지고 있었고 마을 입구에는 예전에 볼 수 없었던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생가주변에는 1970년 이전의 시대촌, 원형생가, 추모관, 내자의 공원, 문화센터, 연수관, 전시관, 체험장, 새마을회관 등 테마공원이 광범위하게 조성되고 있는 중이었다. 최근에 조성한 박정희대통령의 대형 동상앞에 서서 고개 숙여 묵념을 올렸다. 깔끔하게 깔아놓은 동상 입구통로 좌우에는 이제 막 심은 듯한 느티나무가 줄을 지어 서 있고 중요 업적 표시판을 연대별로 띄엄띄엄 설치해 놓았다. 이와 같은 사업들이 오히려 때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그분의 위업을 인식하고 추모하며 가신님의 뜻을 기리는 사업이 전개되고 있음에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조국의 근대화는 물론 무엇보다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경제 성장을 주도해주었던 그 공덕은 두고두고 잊지 말아야할 업적으로 생각되어진다. 한쪽에서는 군사독재정권의 총수로 민주주의의 후퇴자라 비난하는 인사들도 없지 않지만 그 어렵던 시절에 조국근대화의 기수로 새마을 운동, 자연보호 운동, 경부고속도로개설과 함께 추진한 국토개발, 식량의 자급자족, 자주국방에 힘써온 그분의 업적은 간단하게 설명을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역대 대통령을 거친 분들의 면면을 돌아보면 권력과 부를 함께 누렸을 뿐만 아니라 임기를 마친 뒤에는 이런저런 사연들로 구설수에 휘말리거나 영어의 몸이 되기도 하였지만 박대통령은 청렴하기 이를 데 없었고 사심 없이 오로지 조국을 위하여 한평생 몸 바친 분이라 하여도 잘못이 없다 하겠다. 정치적인 경쟁자들은 장기 집권, 독재자란 누명을 덮어씌우고 있으며 이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할지라도 우리네 서민들이야 두 다리 뻗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국가를 경영해주신 분이라 여기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에피소드와 뒷 이야기 꺼리가 있지만 매번 들어도 상큼하고 기분 좋은 일화 한 가지를 떠 올려 본다. 삼복의 어느 여름날 미국의 한 무기상의 책임자가 청와대 대통령집무실을 찾았는데 냉방기를 가동하지 아니하고 부채로 더위를 식히고 있는 대통령의 모습이었다. 안내한 비서실장을 보고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에어컨을 가동하라고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그 무기상은 자기네 회사의 무기를 구입해 주어서 감사의 말을 전한 다음 리베이트로 금일봉을 내어 놓았는데 박대통령은 정말 이것 내게 주는 거요? 내가 쓰도 되는 거요? 라고 물었고 그 무기상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관례가 국방상 도입한 무기구입 대금에 대하여 감사의 표시로 구입해준 국가 최고 권력자에게 의례적으로 일정금액을 리베이트로 제공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박대통령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 봉투를 거두어들이지 아니하고 이 돈 만큼 좋은 무기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여 그 무기상이 감탄하였음은 물론 세계에서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사례라 하였으며 당초의 리베이트 금액보다 훨씬 더 많은 무기를 보내 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세 자녀만 남기고 비운에 가신 후에 그가 남긴 유산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고 보면 얼마나 사심 없이 살았으며 청렴한 분이었던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굶주림으로부터 해방을 시켜주신 위대한 민족의 영웅이 태어나 자란 이 곳 상모동에서 그분의 숨결을 느껴보며 이제 국가와 사회 각계 인사들이 그분의 위업을 기리려하는 움직임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어 정말 다행스럽게 여기며 생전에 다 이루지 못한 자주국방과 모든 국민이 모두 더 잘 살 수 있도록 남은 우리가 함께 힘써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대통령 내외분이 영면의 세계에서 마음 놓고 편안하게 지내시기를 빌어 드리며 다시 한 번 생가를 돌아보았다.
첫댓글 친구님 챙겨주신 당신만의 소중한 일대기를 163페이지 친목회까지 눈과 마음으로 읽다가 잠시 이곳으로 왔다오 끝까지읽어볼게요 그때또 이야기 나눠요 박정희대통령 생가를 찿으셨군요 자신에게 엄격하고 근검 절약정신 오직 대한민국만을 생각하신 그분의 뜻을 요즈음 젊은이들이 좀 알아주었으면 하고 바랄뿐이요 항상건강하십시요
늘상 찾아주시어 고맙습니다. 박대통령에 대하여 이렁 저런 비판도 있지만 굼주림에서 해방시켜 준 우리민족의 영웅이라 생각 합니다. 행복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