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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유사 신앙을 거부하는 ‘시선의 힘’이다(왕상 15:33-16:14)
1. 오늘의 말씀 : 왕상 15:33-16;14
15:33 유다의 아사 왕 셋째 해에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디르사에서 모든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십사 년 동안 다스리니라
34 바아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
16:1 1 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니의 아들 예후에게 임하여 바아사를 꾸짖어 이르시되
2 내가 너를 티끌에서 들어 내 백성 이스라엘 위에 주권자가 되게 하였거늘 네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하여 그들의 죄로 나를 노엽게 하였은즉
3 내가 너 바아사와 네 집을 쓸어버려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 같이 되게 하리니
4 바아사에게 속한 자가 성읍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그에게 속한 자가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 하셨더라
5 바아사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과 권세는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6 바아사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디르사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엘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7 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니의 아들 선지자 예후에게도 임하사 바아사와 그의 집을 꾸짖으심은 그가 여로보암의 집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모든 악을 행하며 그의 손의 행위로 여호와를 노엽게 하였음이며 또 그의 집을 쳤음이더라
8 유다의 아사 왕 제이십육년에 바아사의 아들 엘라가 디르사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 년 동안 그 왕위에 있으니라
9 엘라가 디르사에 있어 왕궁 맡은 자 아르사의 집에서 마시고 취할 때에 그 신하 곧 병거 절반을 통솔한 지휘관 시므리가 왕을 모반하여
10 시므리가 들어가서 그를 쳐죽이고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니 곧 유다의 아사 왕 제이십칠년이라
11 시므리가 왕이 되어 왕위에 오를 때에 바아사의 온 집안 사람들을 죽이되 남자는 그의 친족이든지 그의 친구든지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12 바아사의 온 집을 멸하였는데 선지자 예후를 통하여 바아사를 꾸짖어 하신 여호와의 말씀 같이 되었으니
13 이는 바아사의 모든 죄와 그의 아들 엘라의 죄 때문이라 그들이 범죄하고 또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하여 그들의 헛된 것들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14 엘라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 시작 기도
아버지! 광야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원망하였습니다(민 21:4).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음식을 하찮은 것으로 멸시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불 뱀을 보내 저들이 죽어갔습니다. 그대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대로 구리 뱀을 만들어 달았습니다. 뱀에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본즉 살았습니다(민 21:9).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주의 길이 나의 길보다 높습니다(사 55:9). 그러나 길로 인해 마음이 상한 자, 무지 속에서 사망에 이를 자입니다. 나 또한 뱀에 물려 죽었어야 할 자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뱀을 든 것처럼 인자가 땅에서 들려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요 3:14). 주여, 최후 승리의 날까지 십자가를 굳게 붙들게 하소서. 주께서 정한 길을 따라 인내의 경주를 다하게 하소서. 오늘은 인터처치에서 예배드리고 교제합니다. 먼저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내 영혼을 보혈로 정케 하소서. 진리의 영이시여, 말씀을 조명하사 깨닫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본문 주해
열왕기상 15:32-16:7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3대 왕 바아사의 행적을, 16:8-14는 4대 왕 바아사의 아들 엘라 왕의 행적을 기술한다. 두 왕은 이전의 왕들과 마찬가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여로보암의 집안이 2대 만에 멸망하였듯이, 바아사의 집안 역시 2대 만에 멸망한다. 이것은 그들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남왕국 유다의 아사 왕 3년에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그는 디르사에서 24년간(BC. 908-885년) 이스라엘을 다스리되, 여로보암 왕보다 2년을 더 다스렸다(32절). 그는 상당히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으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다. 곧 그는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 범죄한 길을 그대로 따라갔다(33절).
‘디르사’는 바아사 당시 이스라엘의 수도였다. 디르사는 여호수아가 정복했던 31개 성읍 중 하나이다(수 12:24). 이곳은 오므리가 도읍을 사마리아로 옮길 때까지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다(16:24). 또한, 이곳은 세겜에서 벳스안과 요르단 계곡에 이르는 교역로를 관할하기 좋은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그레이).
바아사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한 것은, 여로보암이 벧엘과 단의 성소에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하고, 여러 산에 산당을 만들고, 보통 백성을 제사장으로 삼고, 절기를 마음대로 정한 것을 말한다. 특히 여로보암은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그 이름을 두신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는 길을 막고, 유사 신앙을 조장하였다.
하나니의 아들 예후가 여로보암의 길로 가는 바아사를 꾸짖으며 그의 집안이 멸망할 것을 예언하였다(1절). 예후의 아버지 하나니는 아사 왕이 하나님 대신 아람 왕을 의지하였을 때 아사를 책망한 선지자이다(대하 16:7). 하나니의 아들 예후는 북왕국의 바아사와 그의 아들 엘라를 책망하였고 남왕국 유다에서도 아사 왕의 뒤를 이은 여호사밧 왕이 하나님께 범죄했을 때 그를 꾸짖었다(대하 19:2).
2-4절, 하나니의 아들 예후가 바아사에게 한 예언이다. “나는 너를 먼지 속에서 이끌어 내어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삼았다. 그런데 너는 여로보암과 같은 길을 걸어서, 내 백성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고, 그 죄 때문에 내 분노를 사는구나. 3 내가 바아사와 그의 가문을 쓸어 버리겠다. 그리하여 네 가문을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가문처럼 만들겠다. 4 바아사에게 속한 사람으로서, 성 안에서 죽는 사람은 개들이 먹어 치울 것이고, 성 바깥의 들에서 죽는 사람은 하늘의 새들이 쪼아 먹을 것이다.”
바아사는 하나님이 먼지 속에서 이끌어낸 비천한 자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삼으셨다. ‘통치자’(히, 나기드)는 ‘왕’(히, 멜렉)과 달리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자는 아니다. 본래의 뜻은 ‘... 에 대항하여 세워진 자’이다. ‘나기드’는 여로보암에게도 사용된 바 있다(14:7).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북이스라엘 백성을 ‘나의 백성’을 칭한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이 그 이름을 두신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려야 했고, 여로보암은 이를 저지하여 백성들이 죄를 짓게 하였다.
바아사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여 범죄하였으므로, 그의 집안은 여로보암의 집안처럼 멸망에 이른다. 바아사에게 속한 자가 성읍에서 죽으면 개들이 그 시체를 먹고 들에서 죽으며 새들이 그 시체를 먹을 것이다. 이것은 바아사의 집안이 여로보암의 집안처럼 하나님께 돌이킬 수 없는 저주를 받는다는 표현이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죽은 자의 시체가 어떻게 취급되느냐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은 자인지, 저주를 받은 자인지 평가하는 풍습이 있었다(이형원).
바아사의 나머지 행적과 그가 한 것과 그의 권세,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다 기록되어 있다(5절). 바아사가 죽게 되었을 때 수도 디르사에서 장사가 치러졌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을 엘라가 왕이 되었다(6절).
5절에서 바아사의 행적과 그가 한 일과 그의 권세를 언급한다. 이것은 바아사가 24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하면서 강력한 권세를 유지하였고 상당한 정치적 성과를 내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여로보암의 종교 정책을 답습함으로써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왕으로 기록된다. 그로 인해 그의 집안은 다음 대에 멸절한다.
7절에서는 바아사와 그의 가문이 멸망하게 된 이유를 다시 한번 밝히고 있다. 그것은 바아사가 여로보암의 왕조 때부터 행하여 온 종교 정책을 답습하여 악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였고, 하나님이 여로보암과 같이 그의 집을 치신 것이다.
8-14절은 바아사의 아들 엘라의 통치기를 서술한다.
유다의 아사 왕 제 26년에 바아사의 아들 엘라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디르사에서 2년간(BC. 885-884년) 다스렸다(8절). 이어지는 본문은 엘라가 왕으로서 이루었던 업적보다 그가 왕권을 빼앗긴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엘라의 신하이며 병거 부대의 절반을 지휘하는 시므리 장군이 엘라를 모반하였다(9절). 그때 엘라는 디르사에 있는 아르사 궁내 대신의 집에서 술을 마셔 취해 있었는데, 시므리가 들어가서 그를 쳐 죽였다. 유다의 아사 왕 27년에 시므리가 엘라를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10절).
15절을 보면, 엘라 왕이 수도 디르사에서 향연에 참석해 술에 취해 있을 때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속해 있는 깁브돈 근처에서 진을 치고 전쟁을 하고 있었다. 이것만 보아도 엘라가 얼마나 개념 없는 왕인지 알 수 있다.
시므리는 왕위에 오른 후 바아사 가문에 속한 남자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였다. 바아사의 일가친척이든지 친구이든지 한 사람도 남겨 두지 않았다(11절). 시므리는 여호와께서 예후 선지자를 통해 바아사에게 말씀하신 대로 바아사 가문의 모든 사람을 멸망시켰다(12절). 16:3에서 하나님이 예후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었다.
이것은 바아사와 그의 아들 엘라가 지은 모든 죄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우상을 만들어서 이스라엘에게 죄를 짓게 하였으므로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의 분노를 샀다(13절). 엘라의 나머지 행적과 그가 한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다 기록되어 있다(14절).
이스라엘의 3대 왕 바아사는 비천한 신분이었으나 쿠데타에 성공하여 정권을 잡았다. 그가 여로보암의 집안을 멸절한 것은, 영적으로는 하나님이 유사 신앙을 제정한 여로보암의 집을 심판하신 것이다. 그러나 바아사는 그가 멸절한 여로보암의 길을 그대로 간다. 이것은 바아사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 여로보암이 왜 멸망했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아사는 정치적으로는 성공했는지 모르나 유사 신앙을 답습하여 영적으로는 실패한 왕이었다. 바아사의 아들 엘라는 피 흘리지 않고 왕위를 세습 받았다. 그러나 그도 역시 아버지의 길을 따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모반자 시므리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당한다.
바아사는 쿠데타로, 엘라는 세습으로 왕이 되었으나 둘 다 여로보암이 제정한 유사 신앙의 고리는 끊지 못하였다. 이것은 후에도 이스라엘 왕들이 계속 바뀌었으나 나라가 멸망하기까지 지속되었다. 과연 여로보암이 제정한 유사 신앙은 그리도 강고한 것인가?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의 시선’이 사람을 지배하는 권력이라고 하였다. 실존주의 철학에서 ‘본다’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그것은 ‘권력’과 관계가 있다. 인간이 어떤 사물을 ‘본다’는 것은 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관점주의 또는 시선의 해석학으로 불린다.
시선 또는 관점이 권력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시선이 우리를 꼼짝 못 하게 하고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 가고, 우리의 실존에 어떤 구조를 무너뜨리고 외부로부터 들어와서 우리의 존재를 침입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선에 의하여 지배받는 존재이다. 망루에 있는 간수가 죄수를 보는 것은 죄수들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권력이다. 개인적으로는 초자아, 공적 영역에서는 법, 종교영역에서는 교리나 전통이 시선의 권력이다.
타자의 시선이 권력으로서 다가올 때, 타인(타자의 시선)은 감옥이다(사르트르). 인간은 타자의 시선으로 살 수밖에 없고, 그것은 본래적 자기로 살지 못하며,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평균적 일상성에 맞추어 살아간다.
시선의 권력이 종교의 영역으로 옮겨오면 무서운 힘으로 작동한다. 교회에서 전통과 교리는 거스를 수 없는 권력으로 작용한다. 타자가 믿는 대로 믿어야 하도록 강제한다. 시대성을 반영한 교리나 전통이 영구한 것으로 고착되면, 그것은 권력이 되어 신앙의 자유를 빼앗고 참 신앙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어떤 교리나 전통이나 권위로 제한할 수 없는 자유자, 곧 스스로 있는 자이다.
미국의 구약학자 ‘월트 브루그만’의 기도문은 전통이나 교리나 특정한 경건이 권력화되는 위험을 지적하였다. “우리는 교리라는 망치와 경건이라는 못을 들고 당신이 우리가 정한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당신의 손과 발에 하나씩 망치질하려 합니다. 못 박으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곳에 있는 당신을 발견합니다. 우리와 늘 함께 있지만,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찾아오시는 당신을 보고 계속 놀랍니다.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하시다가도 뿌리째 뽑아 없애시는 주님, 모든 것을 허물어 버리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시는 주님, 우리에게 선택과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고 하면 우리는 분명 당신을 고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자유 안에서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주님, 당신의 자유를 우리에게 주십시오. 우리가 자유롭게 당신과 동행하게 하소서. 당신의 자유를 우리 삶에 허락하셔서 우리 또한 당신을 따라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 모두를 위해 당신의 자유를 이 땅에서 보여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유사 신앙은 끊임없이 해체되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선각자들을 세우셔서 유사 신앙을 해체하고 참 신앙을 회복시키셨다. 그들은 구름 같은 허다한 증인들이 되어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하는 데 우리를 견인하고 응원한다(히 12:1). 그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이고, 신약의 사도들이고, 모든 시대 신학자요 영성가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대마다 하나님이 세우신 증인들을 무시하고 오늘의 신앙을 경주할 수 없다.
중세 시대 기독교는 종교개혁으로 해체되었다. 종교개혁의 기독교는 100년도 안 되어 죽은 정통이라는 오명을 받았고 계몽주의에 의해 전복되었다. 계몽주의 이후 기독교는 무신론의 도전을 받았고 계시신학으로 반전되었다. 이렇듯 현존하는 성령의 역사는 기독교가 유사 신앙에 빠질 때마다 그들을 심판하였고, 다시 새롭게 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을 떠나 선례 답습 식으로 믿는 유사 신앙은 여로보암의 유사 신앙을 그대로 답습하며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과연 집요하고도 강고한 유사 신앙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하나님이 심판하셔서 이미 무너진 신앙을 답습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다. 그것은 바아사가 여로보암의 길로 가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마치 불나방이 불 속에 뛰어드는 것처럼 위험하다. 시선이 권력인 것은 참이다. 온전한 시선은 오직 ‘하나님이 보시는 시선’이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으신다(마 6:4).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은 유사 신앙을 거부하는 힘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진리대로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4. 나의 묵상
3천여 년 전 여로보암의 유사 신앙보다 더 심각한 유사 신앙이 지금 활개를 친다. 하비 콕스는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 이후 기독교 역사는 ‘신앙의 시대’가 아니라 ‘신념의 시대’가 되었다고 진단하였다(<종교의 미래>). 성령의 조명으로 성경을 진지하게 묵상하면 이 말에 항거할 수 없다.
신약시대 하나님이 그 이름을 두신 곳은 아들이 있는 곳, 곧 아버지 집이다. 그곳에서 창세전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영광을 보는 것이 참 신앙이다. 그러나 나는 오랫동안 이것을 알지 못하고 유사 신앙에 열심을 내었다. 이미 해체된 과거의 교리와 전통에 매였다. 아, 한 시대에 유효했던 신앙의 전통과 교리가 권력이 되어 신자들을 굴복시킨다. 거기에는 어떤 자유나 기쁨도 없다.
내가 자주 출입하는 모교 서울신학대학교에는 요즘 때아닌 창조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독일에서 공부한 바르트의 연구자 박영식 교수가 창조과학을 두고 현대에 맞지 않는 사이비 과학이라고 했다가 온갖 수모를 당하고 있다. 지구가 자전하여 일어나는 하루가 어떻게 창조의 하루가 되며, 지구의 나이가 어떻게 6천 년이 되는가? 이것은 중세 시대나 통하는 교설인데, 지금도 그것을 주장하는 세태에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되어지는 상황을 보면 확실히 유사 신앙은 권력이다. 무지막지한 목사나 지위를 유지하려는 총장은 교수를 해임할 태세이다. 더 크게 보면 한국교회가 걱정이다. 계몽주의 이후 니체에 이르기까지 이미 사망 선고를 받은 구시대의 전통과 교리를 목숨처럼 간직하고 있으면서, 참 신앙인 영생의 실제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먼저 눈을 뜬 자, 이 시대 증인으로 사명을 다한다. 날마다 말씀을 바른 주해로 묵상하고자 힘쓰고, 기회를 다하여 성경이 증거하는 복음을 전하여 생명으로 인도하는 일에 자기를 드린다. 때로는 무서운 고독감이 나를 휘감아 돌지만,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완전한 시선의 권력 앞에 나를 복종시킨다. 오늘은 인터처치에서 예배와 교제를 드린다. 풍성한 은혜를 사모한다.
5. 묵상 기도
아버지...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엘라는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합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성공했으나 유사 신앙을 따라 행함으로써 엄중한 심판을 받습니다. 여로보암의 집을 멸절한 바아사의 집안 역시 멸절합니다. 그들은 여로보암의 집안이 멸망하는 것을 보고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멸망하였습니다. 유사 신앙은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강고한 권력입니다. 3천 년이 지난 지금도 유사 신앙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이름을 두신 아버지 집에 거하지 않는 신앙은 엄밀히 말해서 유사 신앙입니다.
아버지여... 기독교 역사에서 대대로 유사 신앙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왕들을 선지자들을 통해 경고하셨듯이, 시대마다 선각자들을 세우셔서 유사 신앙을 경고하시고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폐기 처분된 유사 신앙을 답습하려는 이들이 있나이다. 그것은 성경의 진리보다 한때 유효했던 전통과 교리를 추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권력이 되어 신자의 자유를 박탈하고 교리나 전통에 예속시킵니다.
아버지... 저 역시 오랫동안 아무 생각 없이 거기에 예속되었습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묻지도 않고 선례 답습 식으로 믿었습니다. 이미 폐기 처분된 교리나 전통을 추종하면서 거기에 예속되었습니다. 공의의 심판을 통해 비로소 아버지 집에 거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시대마다 사용하신 구름 같은 증인들에게 빚진 자입니다.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이 시대 증인의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케 하소서. 오늘 있을 인터처치 예배와 교제 모임에 함께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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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타인의 시선이 사람을 지배하는 권력이요... 유사 신앙은 권력이다..매일 아버지 집에 거하여 아버지가 주는 양식을 먹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