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덕 할머니.
강순덕 할머니
강순덕 할머니는 나지막한 산자락 아래 밭을 가지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먼 통이 틀 무렵이면 밭에 나갑니다. 간밤에 농작물들이 얼마나 자랐는지, 혹 야생 짐승들이 농작물을 헤치지는 않았는지 살피곤 하지요. 순덕 할머니는 출근하면 농작물들을 향하여 큰소리로 말합니다.
“얘들아, 잘 잤어? 오늘도 건강하게 자라렴. 사랑한다 얘들아.”
농작물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면 할머니도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고 힘이 납니다.
금년에는 콩, 양배추, 당근을 심었습니다. 밭이래야 손바닥만큼 작은 것이지만 할머니에게는 소중한 재산입니다. 밭에서 얻은 채소들이 생활비가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날 아침도 밭에 나간 할머니는 밭두렁 한쪽이 파헤쳐진 것을 보았습니다. 깜짝 놀란 할머니는 앞산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에구 이 나쁜 놈들아! 농사를 이렇게 망쳐놓으면 할망은 뭘 먹고 살아? ”
보들보들 아기 손 같은 콩잎은 뿌리만 남았고 축구공 같던 양배추는 굴을 파 놓은 둣 패여 있습니다. 밭이랑에는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습니다.
‘이건 노루 발자국이네. 여러 놈들이 왔다 간 모양이야.’
순덕 할머니는 마침 이웃 밭에서 일하고 있는 영감님에게 소리쳤습니다.
“할방. 우리 밭에 밤손님이 다녀갔구먼요. 할방네는 괜찮아요?”
풀을 뽑던 영감님이 허리를 펴고 할머니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 밭은 별일 없수다. 할망네는 며칠 전 울타리 공사를 했는데 어떻게 들어갔지.”
“이젠 튼튼할 줄 알았는데 이것도 소용없는 일인가 보우.”
영감님이 말했습니다.
“요즈음 야생노루 피해가 커서 관에서 노루포획을 허락했대요. 엽사들이 개들을 끌고 숲을 돌아다니고 있어요. 벌써 수십 마리를 잡았다던데.”
“언제는 노루를 보호한다고 먹이 주기 운동을 하더니 이제는 피해가 많다고 총질을 하고. 이랬다, 저랬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구먼. 짐승도 생명인데 어쩌라고. ”
괜히 심사가 뒤틀린 할머니가 혀를 찼습니다.
강순덕 할머니가 중산간 지역에 들어와 밭농사를 지은 지도 벌써 10여 년이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목초지였던 땅을 얻어 혼자서 밭을 일구었습니다. 검은 돌덩이가 쌓인 척박한 땅을 개간하느라 허리가 활처럼 휘어버렸습니다. 고생 끝에 5년 전, 처음으로 무, 콜라비, 당근을 수확했습니다. 장에 내다 판 채소가 돈이 되었을 때 할머니는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습니다. 몸은 고달파도 노년에 생활비를 벌 수 있다는 것이 뿌듯했지요. 그런데 그 즐거움을 빼앗아가는 무리들이 생겼습니다. 농작물이 앙증스러운 잎을 내밀 즈음, 야생 짐승들이 밭을 기웃거리는 것이었습니다. 멧돼지들이 무밭을 다 헤집어 놓았을 때 할머니는 밭 둘레에 그물 울타리를 쳤습니다. 멧돼지는 힘이 얼마나 센지 그물을 뚫고 들어왔습니다. 이번에는 가끔씩 ‘엥’~ 경보소리를 내는 확성기를 설치했습니다. 느닷없는 경보 소리에 할머니도 깜짝 놀라곤 했습니다. 한동안 짐승들이 뜸해졌습니다.
‘호오, 됐다. 이래도 밭에 들어오는 것은 짐승이 아니라 귀신이지.’
어느 날, 이웃 밭에 불청객들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할머니는 이웃집처럼 울타리에 경광등을 설치했습니다. 산 중턱 채소밭에 도시의 네온사인처럼 반짝반짝 불빛이 아른거리다니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었습니다.
순덕 할머니가 잠시 낮잠에 취해 있는데 ‘탕 탕’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는 점점 더 가까이 들려왔습니다.
“탕, 탕, 탕.”
순덕 할머니는 눈을 질끈 감으며 귀를 막았습니다. 심장이 쿵쿵 뛰면서 오싹 소름이 끼칩니다. 어릴 적 전쟁통에 수없이 듣던 총소리였습니다. 총탄에 맞아 죽어가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비명소리도 생생하게 들려옵니다.
할머니가 미간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왜 끔찍하게 총으로 짐승을 잡는 거여? 피 흘리지 않고 없애는 방법은 없을까? 산짐승들과도 싸우지 않고 살면 좋을텐데.”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 지금 노루도 억울할 것 같습니다. 아주 아주 오랜 세월부터 노루들은 숲속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람들은 숲에 마구 들어와 농작물을 심고 골프장도 만들었습니다. 그뿐인가요? 사람들에게서 버려진 개들도 떼를 지어 다니며 노루의 생명을 위협하곤 합니다. 노루들은 주린 배를 채우러 밭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습니다. 먹이를 찾아 산 아래로 내려왔다가 자동차에 치어 죽는 노루도 많습니다. 노루들의 수난은 앞으로 얼마나 더 계속될지 모를 일입니다.
며칠 후, 밭에 나간 순덕 할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물 울타리에서 움직이는 것이 보였던 것입니다. 할머니는 침침한 눈을 비비고 자세히 보았습니다. 짐승이었습니다. 밭으로 들어오려던 짐승이 그물 울타리에 걸린 것이 분명했습니다.
‘옳지! 요 녀석 딱 걸렸다. 내 혼을 내줘야지.’
순덕 할머니는 굵은 막대기를 움켜쥐고 조심조심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뭔가요? 가까이 간 순덕 할머니는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그물에 머리가 걸려있는 짐승은 태어난 지 두어 달이 되었을까 싶은 아기노루였습니다. 아기노루는 머리를 들고 할머니를 빤히 바라보았습니다.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습이 ‘누구세요?’ 묻는 눈치였습니다. 맑고 초롱초롱한 눈이 사랑스러웠습니다. 순덕 할머니는 도영의 아기 때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일 년에 두어 번 만나도 ‘할미, 할미’ 하고 아장아장 다가오던 사랑스런 손자. 그 자그만 녀석을 품에 안았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었지요. 아기노루를 보는 순간 순덕 할머니는 미운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순덕 할머니는 손주 도영에게 하듯 다정스럽게 말을 건넵니다.
“아기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어? 그러다 잡히면 엄마도 못 만나고 큰일이잖아? 나랑 집에 가자.”
순덕 할머니는 노끈으로 목줄을 만들어 아기노루의 목에 걸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아기노루는 강아지가 주인과 산책하듯 아장아장 따라왔습니다.
’우선 요 녀석을 닭장에 넣어두자.‘
아기노루가 닭장에 들어가자 닭들이 ’얘, 뭐야?‘ 소리, 소리를 쳤습니다. 놀라긴 아기노루도 마찬가지였지요. 닭장은 난리법석 이었습니다.
’여긴 안 되겠군. 아, 거기가 좋겠다.‘
할머니는 창고 문기둥에 아기노루를 단단히 메어 놓았습니다. 야생동물을 발견하면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합니다. 신고를 하면 노루 포획 기간이라 죽이려 들것입니다. 할머니는 생각했습니다.
’어린 아기를 죽이는 것은 너무 해. 내가 강아지처럼 키워볼까? 안될 것도 없잖아.‘
그날 밤이었습니다. ’아악~ 아악~‘ 내지르는 소리에 할머니는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섰습니다.
’저건? 노루 울음소리인데?‘
노루 울음소리는 특이해서 금세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좀 있으니 ’아악 아악‘하는 소리 뒤에 더 여리게 ’아아악, 빽빽‘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순덕 할머니는 창문의 커튼을 조금만 열고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검은 물감을 칠해놓은 듯한 어둠 속에서 파랗게 빛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순덕 할머니는 겁이 더럭 났습니다.
‘노루들이 한두 마리가 아닌 것 같은데 왜 왔지? 119를 부를까?’
겁많은 노루들이 사람 집 앞에 와서 우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아주 다급한 일이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아악, 아악’ 다시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에 뒤꼍에서 아기노루가 다시 ‘아아악, 아아악’ 대답하는 소리도 들립니다.
‘아! 에미가 아기를 데리러 온 거구나. 아기를 내놓으라는 거지. ’
하지만 순덕 할머니는 아기노루를 보내 줄 생각이 없습니다. 노루는 조용하고 온순한 동물이라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노루를 키워보는 것도 특별한 재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기노루가 파닥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목줄을 풀려는 모양입니다. 순덕 할머니는 모른 척 가만히 있었습니다.
아침에 순덕 할머니는 아기노루에게 살갑게 인사했습니다.
“아가야, 잘 잤어?”
아기노루가 퀭한 눈으로 고개를 들고 쳐다보았습니다.
‘할머니는 내가 잘 잔 것 같아?’
노루의 눈빛을 읽은 할머니가 조그만 소리로 말했습니다.
“아, 엊저녁 그 소리가 네 엄마 소리였냐?”
“알면서 능청스럽게 시치미를 떼긴.”
“지금 날 원망하는 거야? 너 지금 숲으로 돌아가면 틀림없이 총 맞는다구. 내가 너를 살려 주려고 안 보낸 거야. ”
“흐엉. 나 엄마 젖 먹고 싶단 말이야.”
“네가 클 때까지 나랑 살자. 맛난 것도 많이 먹여주고 안전하니 얼마나 좋아?”
아기노루는 힘없이 앞다리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할머니는 변명처럼 중얼거립니다.
“넌 어려서 숲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지? 널 잡아먹으려는 짐승들이 득실거려요.“
그날 저녁, 또 엄마 노루가 왔습니다. 어미가 어찌나 큰소리로 ’악악‘ 대는지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면서 순덕 할머니는 어떻게 하면 어미 노루를 못 오게 할까 궁리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점심때 휴대폰 벨이 울렸습니다. 손자 도영의 목소리였습니다.
”할머니! 저 어제 친구와 제주도 여행 왔어요. 오후에 갈게요.“
순덕 할머니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부지런히 청소를 하고 냉장고를 열어보았습니다.
’푸성귀 말고는 먹을 게 없네. 녀석이 흑돼지고기를 좋아하니 얼른 사 와야겠다.‘
할머니는 급히 사발이 자가용을 타고 정육점에 가서 흑돼지를 사왔습니다. 오후에 손자 도영이 왔습니다. 도영은 아기노루를 보고 신기한 듯 좋아했습니다.
”노루를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네. 너무 귀여워요. 근데 얘 완전 아기인데 왜 여기 있어요?“
”어쩌다 길을 잃고 여기까지 온 모양이야. 그런데 귀여워서 내가 키우려고 해.“
도영이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할머니가요? 아기가 엄마 보고 싶을텐데. 나 네 살 땐가? 아빠 입원했을 때 엄마가 할머니 집에 맡겨 놓은 적 있었잖아요? 할머니가 잘해주는데도 난 엄마가 보고 싶어 병원 간다고 떼썼잖아요. 저 아가도 지금 엄마 생각만 할 것 같은데.“
그날 밤, 할머니는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었습니다. 소리 나는 쪽을 살금살금 가보니 노루 두 마리가 망을 보는 듯 방 쪽을 바라보고 있고 두 마리가 아기노루의 목에 걸린 끈을 풀고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빗자루를 들고 방문을 살며시 열고 나갔습니다. 망을 보고 있는 노루의 눈이 불꽃처럼 빨갰습니다. 할머니가 다가가자 노루는 성큼 앞으로 나오며 공격할 자세를 취했습니다. 할머니가 놀라 뒷걸음질을 하다가 엉덩방아를 찧고 나동그라졌습니다. 그 사이에 노루들은 아기노루를 데리고 후다닥 뛰쳐 나갔습니다. 졸랑졸랑 어미를 따라가는 아기노루의 뒷모습을 보면서 할머니는 서운했습니다. 한편 제 어미를 따라 갔으니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날이 밝자 할머니는 밭두렁 하나를 울타리 밖에 내놓았습니다. 지나던 이웃이 물었습니다.
”할망, 왜 울타리 밖에 채소밭을 내놔요? 짐승들이 금세 먹어 치울 텐데.“
순덕 할머니가 앞산을 보며 말했습니다.
”그러라고 내놓는 거야. 이쪽은 내 밥 두렁. 저쪽은 산짐승 밥 두렁. 같이 먹고 살려고. 그리고 혹시 모르거든. 아기 손님이 다시 찾아올지도.“
강용숙 프로필
1991년 아동문학연구로 등단.
한국아동문학 작가상, 한국아동문학 창작상, 한정동 아동문학상, 김영일 아동문학상, 선사문학상, 강서문학상 대상, 어린이 문화예술 진흥원 창작대상 등을 수상.
「땅꼬마 날개펴다」 「동화속에 맑은 생각이 퐁퐁퐁」 「여우네 학교가기」 「예쁜마음 동시생각」 「냐옹이 언니」 「땡큐 땡큐 곱빼기 땡큐」 위인전. 과학원리동화 시리즈, 환경동화, 전래동화 등, 60여권의 저서가 있음.
현재 한국문인협회 회원. 풀꽃아동문학회 고문. 아동청소년문학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