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벌레가 날아다니는 눈앞에 손에 잡히지 않는 시어들이 어른거린다.
[시민포커스=조한일 기자]
비문
정수자
뭔가 자꾸 날아다녀 어지러워 툴툴대다
우린 딱 알아봤다 어슷비슷 비문임을
때 없이 문 문 더듬는
쓰린 아린 문하임을
홑눈을 겹눈처럼 혹或 혹惑 매어단 채
문전에 어릿어릿 충혈로 바치건만
날라는 문은 못 날고
날벌레만 나는 나날
비문증 쫓아내려 안과 좀 찾다 보니
도수 높은 권속들은 그냥 끼고 산다고
그마저 문의 일속이려니
비문들과 무문 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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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동행과 비자발적 동행이 손쉬운 선택의 문제가 아닌 채로 혼선을 빚으며 살아갈 때가 있다. 우리가 쓰는 문文학의 한 줄기인 시조는 시인들에겐 자발적 동행일 것이다. 타의에 의해 문文의 길로 들어설 수는 없는 노릇이고 설령 그렇다 해도 그것은 위작僞作만 만들어 낼 뿐이다.
눈앞에 ‘뭔가 자꾸 날아다녀 어지러워 툴툴대는’ 비문증飛蚊症에서 시인은 작품을 쓰려 더듬는 문文 문文과 모기 문蚊 문蚊을 중의적으로 가져와 ‘쓰린 아린’ 문하門下로서 ‘어슷비슷’ 동질감을 느끼고 있다.
‘혹或 혹惑 매어단 채’ 시조와 자발적 동행을 하고 비문飛蚊과 비자발적 동행을 하면서 ‘날라는 문文은 못 날고’ 모기 닮은 날벌레만 ‘나는 나날’을 살아간다는 시인의 고백 내지 독백. 그 시인의 작품을 통해 얻고 싶은 것과 버리고 싶은 것 사이의 “혼선”을 감지할 수 있다.
비문증이라는 “증상”은 고도근시를 지닌 사람들에게 생길 수 있는 시각적이면서 심리적인 실타래다. 그것을 한 올 한 올 풀어낼 수도 없고 의미도 없다. 다만, “처절한 무관심”이 답에 가깝다. 자발적 동행인 문文에는 “철저한 관심”으로 또 비자발적 동행인 문蚊에는 처절한 무관심으로 문文과 문蚊을 이질적 솔루션으로 대하며 사는 삶의 방식에 수긍이 간다.
비문증으로 안과를 한두 군데만 다니는 사례를 본적이 별로 없다. 혹或시나 하고...,, 이 비자발적 동행을 멈출 비책이라도 있을까? 반백 년 세월의 동행을 끊어줄 명의는 없을까? 찾아가도...., 그냥 살라 한다. ‘끼고 살라’ 한다. 도수 높은 눈으로 문文을 봐온 세월, 시詩를 보고 시時를 봐온 세월 동안 이것들을 끼고 살아온 것 처럼....,
훨훨 날아오르길 바라는 문文과 날아 가버리길 바라는 문蚊을 부여잡고 엇박자가 주류를 이룰지라도 정신없이 춤추다 보면 어느새 비문非文은 문文이 되고 비문飛蚊은 비문非蚊이 될 것이다.
날벌레가 날아다니는 눈앞에 손에 잡히지 않는 시어들이 어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