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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망했습니다만, 문제라도? - 02 : Back on Track
03. East vs West
유고 사태에서의 협력, 그리고 소련의 가스산업 협동조합화에 따라 유럽공동체의 주요국 인사들은 소련과의 협력 및 각종 중요사항 조율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로 1992년 11월 18일, 스웨덴 웁살라에서 연방과 유럽공동체 간의 회담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유럽 측에서는 존 메이저 영국 총리, 헬무트 콜 독일 총리,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 등을 포함한 각국 정상들, 자크 들로르 유럽 집행위원장 등이 참가했고, 소련 측에서는 람스도르프 외무장관과 리즈코프 총리, 보리스 푸고 내무장관을 비롯한 일행들이 대표로 나섰습니다. 또한 비세그라드 3개국 대표단과 세르비아의 스탐볼리치 대통령, 크로아티아의 투지만 대통령, 그리고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 대표단 역시 함께 당도했습니다.
가장 먼저 테이블에 올라온 의제는 가스관 사업이었습니다. EC 측에서는 1) 발트해를 경유하는 노르드스트림, 2) 체코 등 중부유럽을 관통하는 '유러피안 에너지 하이웨이', 3) 흑해를 통해 불가리아 등으로 이어지는 수트스트림의 3개 안을 제안했습니다. 그 중 문제가 되었던 것은 비세그라드 3개국 영토를 통과하기로 되어 있는 '유러피안 에너지 하이웨이'로, EC 측은 이들을 유럽자유무역지역(EFTA)에 끌어들이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소련 입장에서 이를 받기는 어려웠죠.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대표단은 서방에 여전히 편입될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소련과의 협력을 원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회의장을 중도에 빠져나가 버렸습니다.
이렇게 회담이 파토나자, 붕 떠버린 것은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를 위시한 발칸 국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어차피 서유럽의 관심 밖에 있었던 데다, 소련과의 협력 재건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어떻게든 논의를 진척시켜야 했습니다. 루마니아의 바카로유 총리, 불가리아의 디미트로프 총리, 세르비아의 스탐불리치 대통령을 중심으로 소련과의 에너지 협력, 경제통합기구 건설, 그리고 안보협력을 원하는 분위기가 거세졌죠. 이들은 소피아에서 소련 대표단을 만나 독립국가연합(CIS)의 구성을 합의했습니다. 공동통화위원회의 관리를 받는 루블 연동환율제, 장기적으로 시장통합 및 단일통화체제 구축, 공수동맹을 배제한 형태의 안보협력이 확정되었습니다.
한편 미국의 새 행정부(클린턴)는 소련과의 협력을 매개로 대중국 견제정책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클린턴의 대소련 특사인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모스크바를 방문해 회담을 가졌죠. 그녀는 소련에 1) 바르샤바조약기구의 재건 금지, 2) WTO 가입, 3) 중부-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공동 독립보장을 요구하는 대신 NATO의 동진금지 확약과 대동구권 투자를 약속했습니다. WTO 가입요건을 완화시키는 등의 미세조정을 거친 끝에 알렉세이 메스너와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합의안을 완성했고, 이는 클린턴 행정부 출범 직후인 1993년 2월 초 클린턴-야나예프 공동선언이라는 형태로 전세계에 공개되었습니다.
이를 확인한 비세그라드 국가들의 반응은 아연실색 그 자체였습니다. 이들은 이제 EC에 가입하기도 어렵고, CIS는 선수를 뺏겨 가질 수 있었던 이득 역시 일부분 포기해야 했죠. 특히 자유시장경제의 채택이 동유럽에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올 것이라는 모종의 보고서가 발간되고 나서 이들은 완전히 퇴로가 차단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얻을 수 있었던 혜택이라고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존속을 지원하고 각종 경제적, 안보적 이익을 취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물론 이들 국가에 대한 독립보장 역시 국제법적으로 구속력 있는 조약에 의해 담보되었기에, 동유럽 국가들 전체는 CIS에 가입하는 안을 확정지었습니다.
미소협력관계가 구축되고 나서 중국은 외교적으로 고립된 형세가 되었습니다. 이 기조에 따라 한소협력이 진행되고 조소동맹조약 연장이 거부되자 북한은 중국과 밀접해졌죠. 완전히 세계의 2인자로 복귀한 소련은 또한 이슬람 사회주의와 부족연맹제에 기초한 아프가니스탄의 신정부와도 배상금 명목의 경제차관 및 투자 제공을 매개로 협력을 약속했습니다. 군축을 통해 정예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소련군은 앞으로 세계 열강으로 복귀한 연방의 국익을 위해 일할 것이며, 연방은 굳건한 강대국으로 자신의 위치를 지켜나갈 것입니다.
04. 호텔 르완다
1994년 4월 6일, 아루샤 협정으로 일단락되는 줄 알았던 후투족과 투치족의 종족갈등이 르완다 대통령 쥐베날 하비야르마나, 부룬디 대통령 시프리앵 은타랴미라의 '불의의 사고'로 인해 다시 터져나왔습니다. 후투족 온건파 출신의 두 대통령을 투치족 민병대가 살해했다는 짙은 의혹 하에, 피의 학살이 막 시작되었습니다. 며칠 뒤인 4월 10일에는 아가테 우윌링기이마나 총리와 그녀를 경호하던 UN평화유지군 소속 벨기에군 병력 9명이 잔혹하게 살해되는 사건까지 발생했습니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번지자 르완다에서는 '후투 파워'라는 이념을 주장하는 후투족 인종주의자들이 집권해 투치족에 대한 무차별 학살을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UN평화유지군(UNAMIR) 사령관인 캐나다 출신의 로미오 달라이르 소장은 "평화유지에 대한 권한 부여와 '아주 약간'의 지원만 있다면 더욱 적극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며 국가들을 설득했지만, 강대국들의 반응은 묵묵부답 그 자체였죠.. 유일하게 적극개입을 주장하는 쪽은 벨기에인데, 이들은 "신식민주의자"라며 맹렬히 비판받는 통에 이를 적극적으로 주장할 수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르완다는 테오네스테 바고소라가 이끄는 후투우월주의 정부, 역시 후투우월주의를 신봉하는 민병대 '인테라함웨' 외 다수가 후투족 일반 민중들을 선동해 투치족에 대한 무차별 학살을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프랑스에서 지원받은 자금으로 중국제 마체테를 50만개나 구입해 잔혹한 제노사이드에 사용하고 있었죠.
이에 맞서는 세력은 우간다의 요웨리 무세베니 정권, 그리고 탄자니아 사회주의 정권의 지원을 받는 폴 카가메의 르완다애국전선(RPF)으로, 이들은 후투 정부를 은밀하게 지원하는 프랑스에 대한 상당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결국 소련이 이들을 지원하는 데에는 어떠한 장벽도 없었던 셈이죠. 그렇기에 정부 내부에서도 개입 자체에 반대하는 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다만 지난 유고 건처럼 UN이라는 통로를 이용할 지, 아니면 일방적 개입을 단행할 지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전자를 택할 경우 개입에 소극적인 서방을 이끌어내 타협을 시도해야 하는데, 보수파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무의미한 짓을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만, 미국과 공조해 중국을 배제시키고 압박하자는 데에는 모두가 입장을 같이 했기 때문에 일단 회의장에서 대화를 시도하자는 의견에 결국 힘이 실렸습니다. 알렉세이 메스너 국제협력부장관은 자청해 베이징으로 향했고, 나머지들은 뉴욕의 UN본부로 향했죠. 메스너는 중국 측이 제시하는 조건들을 단 하나도 받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의 생각에 중국은 국제사회의 규범에 역행하는 반인권적인 국가였고, 그들에게는 냉정한 봉쇄전략이 가장 탁월한 방식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결과 중국과의 회담은 사실상의 파국으로 치달았고, 소련 외교관들은 추방조치를 당해야 했습니다.
UN에서의 회의는 프랑스의 거부권 행사로 역시 파국에 이를 뻔 했으나, 프랑스의 후투족 제노사이드 지원에 관한 사실이 공개되어 외교적 타격을 입게 될 것을 우려한 미국이 막판에 중재에 나서며 개입안이 통과되었습니다. 중국 역시 거부권을 행사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로써 평화유지군 임무에 '적극적인 보호'가 추가되었고, 이내 후투족 정부는 적절한 시점에서의 개입으로 몰락했습니다. 폴 카가메의 RPF가 르완다와 부룬디의 연방 대통령에 취임, 자이르 상황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대가로 미소 양국의 합의 하에 동아프리카 국가연합(케냐, 우간다, 탄자니아, 르완다-부룬디) 창설을 주도했고, 이들은 비동맹 범아프리카주의의 일익이 되었습니다. 폴 카가메, 요웨리 무세베니 등 주도 정치인들은 만델라의 ANC와 연계해 아프리카 연합의 창설에 힘을 보탰습니다. 이집트의 무바라크 정권,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 역시 이에 호응했죠.
소련이 미국과 때로는 경쟁, 때로는 공조해가며 국제사회에서의 발을 넓히는 사이, 중국은 소련과의 단교를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밑작업으로 미얀마와 캄보디아에 진출하며, 아프리카 시장에 발을 뻗는 것도 유력하게 고려하고 있었죠. 저번에 회담을 파국으로 이끌었던 메스너가 또 한번의 기회를 받아 베이징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중인국경분쟁에서의 조건부 중립, 한반도 불가침선언의 지지를 받아들이고 아프리카 시장에서의 중국의 입지 구축을 지원하는 조건을 걸며 "이 기회를 놓친다면 양국의 앞날에는 비극만이 있을 뿐"이라며 은근히 압박했습니다. 원로 덩샤오핑의 강력한 지지로 협정이 통과되었고, 중국은 소련과의 연줄을 회복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불과 1년도 되기 전에 새로운 기회를 완전히 날려버리고 말았습니다. 북한에 투자했던 1400억 달러 상당의 개발기금은 자연재해와 현지 정부의 무능, 부패로 인해 날아가버렸고, 아프리카 시장에서는 착취적 행태를 반복한 끝에 시장축출조치를 당하고 말았던 것이었죠. 이는 중국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고, 이들은 휘청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유발작용으로 인해 아프가니스탄에서 축출되었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파키스탄을 사실상 장악, 베나지르 부토 총리를 축출하고 수니파 근본주의 정부를 세우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은 이란과 연대하기로 마음먹었고, 북한의 안정성은 사실상 나락으로 떨어지는 중이었습니다.
바야흐로, 다시금 세상이 화염에 휩싸일 위기에 놓인 것입니다....
<캐릭터 일람>
0.
- 이름: 예브게니 일리치 람스도르프
(Евгений Ильич Ламсдорфф)
- 플레이어: NPC- 생년월일: 1946년 1월 29일
- 클래스: 연방 외무장관
- 민족: 러시아인+부랴트인 혼혈
- 모국어: 러시아어
- 구사가능언어: 영어, 독일어, 중국어(약간)
- 배경:
예브게니 람스도르프는 1946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러시아인 지역당원이던 아버지와 부랴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총명함을 인정받았고, 활발한 콤소몰 활동과 뛰어난 학업성적으로 1965년 모스크바국립대학 인문학부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1학년을 마치고 장교로 군복무를 시작한 람스도르프는 1968년 상부로부터 긴급명령을 받아 그의 소대를 이끌고 어디론가 향하게 되었습니다. 연대장은 그에게 "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을 막으러 간다"고 전했지만... 그가 도착한 곳은 이상하게도 사회주의 동지의 나라라던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였죠. 그곳에서의 경험은 아주 끔찍했습니다. 비무장한 노동자, 아이를 업은 어머니, 지팡이를 짚은 노인에게 발포명령을 내려야만 했던 람스도르프는 그때부터 모종의 신념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사태가 진압되고 다시 복귀해 남은 복무기간을 마치고 복학한 뒤 대학을 졸업한 람스도르프였지만, 그는 밤마다 울부짖는 체코인들의 악몽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1972년 모스크바 지역당에서 교육행정업무를 맡으며 장래가 매우 촉망되었으나, 그와 안면이 있던 중앙당 정치국원 안드레이 키릴렌코와 니콜라이 리즈코프의 필사적인 만류에도 불구하고 람스도르프는 '브레먀' 방송에 소련 체제를 비판하는 투서를 남기고 그대로 체코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망명하고 말았습니다.
서독 본 대학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배우던 그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경험했습니다. 인간은 무언가를 비판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를 끊임없이 증명받는 존재였고, 어떠한 주제든 성역 없이 토론해야만 헤겔이 말한 정-반-합의 논리에 따라 건설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람스도르프는 탄탄대로였던 자신의 인생이 누군가의 처절한 희생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보드카, 보르시, 톨스토이, 체호프, 라흐마니노프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사랑했고, 그의 조국 역시 사랑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는 '타락한 노동자 국가' 소비에트 연방을 구원하고 인민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진보를 가져다주어야만 하는 운명을 지고 태어난 이였습니다.
그러나 서방세계의 모든 것이 그의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음에 드는 구석이 꽤나 많긴 했으나, 그들의 대책없는 개인주의와 인간 소외, 빈부격차의 정당화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혀 옹호할 수 없었죠. 람스도르프는 고향에서나, 여기서나 소수파에 속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더더욱 '내 사람'에 집착했습니다. 다행히 문화와 예술, 음주가무를 즐기고 지갑 여는 데 인색하지 않으면서도 지나친 물욕을 경계하는 그의 성격은 꽤 많은 이들의 호감을 살 수 있었습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1986년, 새 서기장으로 취임한 고르바초프는 개혁개방을 외치며 그간 탄압해왔던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석방과 복권을 단행했습니다. 꾸준히 인연을 맺어왔던 리즈코프는 람스도르프를 잊지 않고 다시 연방에 불러들였죠. "개혁은 필수적이나, 미국인들에게 굽혀서는 안된다. 우리가 우리만의 원칙을 저버린다면 그들은 그대로 우리의 약점을 파고들어 종속시킬 것이다"라는 편지 내용이 리즈코프로 하여금 안심하고 람스도르프를 다시 불러들이게끔 하는 결정적 이유였습니다. 1988년 아르메니아 대지진 복구작업 지원 과정에서 고르바초프에게 눈도장을 얻고 나서, 그는 정치국 중앙위원회와 유류기지건설-가스공업부 장관으로 전격 발탁되었습니다. 물론 1990년 리즈코프와 함께 고르바초프-옐친의 "500일 경제재건계획"을 '비현실적'이라며 비판하다가 다시 서기장의 눈밖에 나긴 했지만, 그는 일단 자신의 직위를 유지하며 일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람스도르프는 소비에트 연방이 인권을 중시하고 공동체적 가치를 드높이며 서방과 협력하되 굴복하지는 않는 튼튼한 국가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는 약간의 고육지책이 필요할 지도 모르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해 주어야 하는 일이 빈번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이상만은 수단으로써 뒤집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바라는 조국에서는 그 누구도 무고하게 상처받지 않아야 하니까 말입니다...
1.
- 이름: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메스너
- 플레이어: 카라멜 마끼아또
- 생년월일: 1946년 5월 8일
- 클래스: 외무위원회 국제협력부 장관
- 민족: 러시아인
- 모국어: 러시아어
- 구사가능언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 능력:
지휘(0)/통솔(0)/행정(0)/경영(2)/호신(0)/조사(2)/위조(2)/선전(2)/공작(2)/화술(5)/장악(2)/압박(5)
- 트레잇:
#친절한 미소, 강력한 빠따: 동지에게는 무한한 신뢰와 친절을, 적에게는 가차없는 독설과 위협을 날려야 합니다. 영향력 하 국가에 대한 화술에 +2, 압박에 -1. 적성국에 대한 압박에 +2, 화술에 -1. 서방 국가에 대한 화술에 +1.
- 잔여포인트: 0
- 배경:
알렉세이 메스너는 1946년 5월 8일 대조국전쟁 승리 1주년이 되던 해 모스크바에서 소련 최고회의 의원인 니콜라이 메스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니콜라이 메스너는 당시 소련 법무장관을 역임한 사람이었습니다. 공산당 수뇌부의 일원으로 태어나 자란 그는 어릴적부터 소련에 대한 애국심을 교육받으며 자랐기에 조국 소련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을 마음 가득 가지게 되었죠. 아버지 니콜라이는 아들이 자신처럼 법조인의 길을 걷길 바랬지만 알렉세이는 외교관이 되어 조국의 이름을 국제무대에서 널리 퍼뜨리길 원했습니다. 그렇게 알렉세이는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외교학과에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하고 외무부에 들어가 외교관의 길을 걸었습니다. 브라티슬라바 조약, 모스크바 협정, 헬싱키 협정, 전략무기제한협정 등의 냉전 중반기 주요 외교장에서 경험을 쌓으며 평판을 쌓아나갔죠.
그렇게 외교관의 일에 열중하던 1980년. 알렉세이는 주영대사관의 공사참사관으로 발령받았습니다. 런던에서의 경험은 그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습니다. 분명 영국은 '지는 태양의 나라'이자 광업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구세대의 실패국가라고 배웠으나, 그런 영국의 인민들마저도 '초강대국'이라는 소련의 인민들보다 훨씬 나은 생활수준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국에서는 국영 백화점(굼) 등에서 길게 줄을 서야 살 수 있던 치약과 비누, 의류, 주류 등이 시골마을의 작은 상점에도 즐비하다는 것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부임을 마치고 모스크바로 돌아온 알렉세이는 자신의 조국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자유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도입을 지지하는 '반체제 인사'가 되었습니다.
1985년, 공산당 정치국원들과 서기장이 직접 참관한 연방 외무부 실무자 전체회의에서 알렉세이는 서방과의 화해, 자유화, 아프간 철수, 군 개혁, 경제개혁 등이 연방의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모험적 연설을 함으로써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관심을 샀습니다. 외무부 내에서 '인기 스타', 또는 '검은 양'이 된 알렉세이를 고르바초프는 기꺼이 중용하기로 했습니다. 대외교류위원회 서기, 그리고 고르바초프의 개인 외교안보자문위원을 역임하는 등 이른바 '고르비 라인'을 타는 듯 했죠. 그러나 개혁의 향방을 두고 둘의 사이는 극명하게 벌어졌고, 1990년 외무부 서유럽국장직을 끝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휴직계를 제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그에게 대학 시절 친구였던 람스도르프가 접근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눈 끝에 둘은 의기투합해 조국을 바꿀 마지막 찬스를 잡아나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들의 싸움은 이제부터입니다.
2.
- 이름 :아미나트 잠불라토브나 나가이
(Аминат Джамбулатовна Нагай)
- 플레이어 :렌지파일
- 생년월일 :1955년 11월 7일
- 클래스: 산업, 자원, 에너지위원회 정보통신부 장관
- 민족 :체첸계 고려인(체첸 3/4, 고려 1/4)
- 모국어 :소련파 북한말(문화어+중앙아시아 한국어)
- 구사가능언어 :러시아어, 북한말, 바이나흐어(체첸-잉구시어), + 제한적으로 망명지 언어
- 능력:
지휘(0)/통솔(0)/행정(2)/경영(5)/호신(1)/조사(4)/위조(3)/선전(1)/공작(0)/화술(3)/장악(3)/압박(0)
- 트레잇:#창조적 파괴: 다방면의 경험은 그녀에게 변화무쌍한 환경에 대한 적응력, 선호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민간조직의 혁신과 투자에 +2, 관료조직의 평시 관리에 -1.
#현란한 언론플레이: 그녀는 언론을 다루는 데에 상당한 재능을 보입니다. 여론선동 및 전환에 +1 모디파이어.
- 잔여포인트: 0
- 배경:
할아버지는 고려인, 친할머니와 어머니는 체첸인이라는 복잡한 가계도를 가진 아미나트는 북한 평양 출신의 여성으로, 그의 아버지 잠불라토프 나가이(나백선)는 스탈린의 지령을 받고 정권 수립에 참여하기 위해 북한으로 이주한 소련파 고려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이 8월 종파사건으로 대대적으로 소련파를 숙청하기 시작하자 나백선과 그의 딸인 아미나트는 소련 모스크바로 다시금 이주하였습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미나트의 부모는 북한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압박의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말았고, 아미나트는 체첸인 할머니와 함께 자라며 충격적인 진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미나트의 할아버지인 나창만이 1938년 스탈린의 대숙청때 누명을 쓰고 사망하였으며, 그 후로 나씨 일가는 소련체제에 대한 증오심을 마음 속에 품고 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모스크바 국립교대에 진학한 아미나트는 서서히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나탈리아 마그나트, 그리고 알렉산데르 타라소프와 만난 아미나트는 체 게바라와 레프 트로츠키 등의 사상을 공부하며 이윽고 신좌파 비밀결사인 '신 소련공산당(NCPSU)'의 당원으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75년 NCPSU의 정체가 발각되고 타라소프가 정신병원에 강제수감되는 동안 아미나트는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하였으며, 이때부터 아미나트의 11년에 걸친 망명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의 상징 유고슬라비아는 노동자 자주관리와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를 실현하고 있었고, 아미나트는 유고 시스템을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1980년 유고의 최고지도자 티토가 사망하며 민족주의자들이 유고 전역에서 득세하였고, 아미나트는 이번에도 망명하여 굴라쉬 공산주의를 실현하던 헝가리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노쇠한 야노슈 카다리의 헝가리 또한 쇠퇴기에 있었고,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사회주의 모델이 완전한 실패를 했다고 판단한 아미나트는 마침내 서구로 향했습니다. 스웨덴, 네덜란드 등지에서 '비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사회주의', 즉 반공 사회민주주의와 코포라티즘 등에 대해 공부하며 망명가 생활을 이어가던 아미나트는 1982년 람스도르프를 만나 친분을 다졌고, 일명 '람스도르프 서클' 내 좌파로써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1986년 고르바쵸프의 초청으로 람스도르프와 동지들이 소련으로 복귀한 뒤에, 아미나트는 몇 안되는 '복지국가형 자유주의'를 공부한 사람으로써 리즈코프 내각의 각종 경제정책 실무에 참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체첸인-고려인의 이중 정체성을 가졌던 아미나트의 입장에서 체첸인 동지라고 생각했던 소련공군 전략폭격대 사령관 '조하르 두다예프' 소장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융단폭격을 했다는 사실이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에 의해 폭로되자, 큰 충격을 받은 아미나트는 사하로프의 국회연설 당시 원내에서 그를 옹호하며 악명과 유명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후 경제업무에서 좌천되어 1990년 12월 한국 노태우 대통령의 소련 방문을 담당하는 의전일을 맡았던 아미나트는 1991년 8월인 지금 무너지는 연방을 어떻게든 평등한 사회민주주의 국가로 개혁하던 재건국하던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생각을 마음 속 깊이 품고 있습니다.
3.
- 이름 :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사사노프
(Андрей Андреевич Сасанов)
- 플레이어 : dear0904
- 생년월일 : 1955년 8월 20일.
- 클래스: 내각 총무처장관
- 민족 : 우크라이나+체코인 혼혈
- 모국어 : 우크라이나어
- 구사가능언어 : 러시아어, 체코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 능력:
지휘(0)/통솔(2)/행정(5)/경영(1)/호신(0)/조사(4)/위조(0)/선전(0)/공작(2)/화술(4)/장악(3)/압박(0)
- 트레잇:#적의 적은 나의 친구: 이념과 이상의 차이는 일시적 협력에 그 어떤 장애도 되지 않습니다. 국내 적대/알력집단의 포섭 및 설득에 +1.
#명품 서포터: 탑, 원딜, 정글러가 빛나려면 누군가는 와드를 박아야 합니다. 각 메인이벤트 당 한번, 타인의 행동에 +2의 버프를 추가 부여해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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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사사노프는 1955년 키이우에서 우크라이나 당원인 아버지, 그리고 조약 체결 행사때 방문한 체코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적부터 외가인 체코와 우크라이나 사이를 오가면서 지내 왔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13번째 생일날 우크라이나에 있던 사사노프와 가족은 비보를 전해 들었고, 그때부터 사사노프는 신념을 가졌습니다. 우크라이나에 대기근을 조장하고, 체코에 피바람을 몰고온 소련을 언젠가는 내 손으로 엎어버리겠다고. 그러나, 그는 아직 어렸기에 자신의 속내를 깊게 숨기며 가슴속의 칼을 다듬었습니다.
1974년에 그는 키이우 종합 대학에서 법학과-외교 관계 연구소에 진학하여, 군 복무를 거쳐 훌륭한 성적으로 석사학위와 함께 졸업 했습니다. 사사노프는 국제법과 지역학을 배우면서 본인의 의지를 더욱 단단하게 굳혔고, 대학 총장의 추천사를 받아 소련 외무성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외무성에서 일하는건 상당한 고통이었습니다. 프라하의 봄에 일조한 그로미코. 그리고 소련의 높으신분들. 그리고 그게 어느정도 눈에 띄는 바람에, 사사노프는 1984년 외무성에서 한직인 종교 문제 위원회로 좌천 되었습니다. 그는 차라리 더러운 사람 밑에서 계속 있기보다는 낫다 생각하며, 그 좌천을 받아들여 2년동안 버텼습니다.
그리고 1986년,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몇몇 부서들을 개혁 할때, 외무부로 다시 불려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는 람스도르프를 만났고, 같이 술 자리를 가졌습니다. 그와의 대화는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소련은 이대로는 안된다." "프라하의 봄을 진압한건 미친일이었다." "부당한 탄압들은 모두 사라져야 한다." 같은 말과... 계산까지. 이후 람스도르프와 자주 만나면서, 이 호인의 조력자가 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화술과 인맥으로 형님의 아르메니아 행을 지원했고, 사사노프는 공연히 람스도르프 라인으로 인식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0년 람스도르프가 서기장의 눈 밖에 났을때, 그의 라인인 사사노프 또한 문학 출판국 본부로 밀려났지만, 그는 계속 버텨낼 것입니다.
사사노프는, 소련은 인민을 탄압하는 국가로써, 소련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람스도르프가 소련에 칼을 들이댄다면, 그를 절대적으로 도울것입니다. 그것이, 소련을 붕괴 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더 기뻐하며 도울 것 입니다...
- 사회 안정성 : 3(불안함)
: 낮을 수록 극단주의가 횡행하고 급진적 수단이 선호됨.
- 공화국 단결도: 7(괜찮음)
: 낮으면 분리독립 시도가 빈발함.
- 정권 지지도 : 9(열렬한 환호)
: 낮으면 인민들이 들고 일어남.
- 국가평판 : 5(미묘함)
: 낮을 수록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국가로 인식됨.
- 주요 대외관계 : 미국(7) / 중국(4)
@카라멜 마끼아또 그런데 공작은 외국에 했는데 왜 국내 안정도가 까이는거지?
@E.E.샤츠슈나이더 아이고.. 두다예프 통제에 성공했지만, 그쪽은 시작부터 이슬람주의니;
@카라멜 마끼아또 안들켰으니까요(?)
@렌지파일 아미나트의 지역구인 크즐로르다와도 멀지 않은 곳이죠. ㅋㅋ
@카라멜 마끼아또 공작을 했는데 안 들켰다 - 결과가 성공적이고 빠르다 - 그럼 수단 결과 안 가려도 되네? - 막 나가자! 이런 연산 아닐지?
@dear0904 일종의 둠 페널티 개념이긴 한데, 굳이 따지자면 그렇게 볼수도 있겠네요. ㅋㅋㅋ
급발진했는데 결과 좋음 -> 공작 내용은 극소수만 알지만, 전반적으로 분위기 자체가 한탕주의(…) 경향 강화 -> 민간에도 영향을 줌
이 코스가 좀 더 맞을듯. ㅋㅋ
@E.E.샤츠슈나이더 미국의 위조+선동 겸한 해외공작도 결국 미국 국내에 악영향을 많이끼쳤죠..
@E.E.샤츠슈나이더 그렇죠 ㅋㅋ 기만에 대한 둠 페널티. 인건 알지만, 해석을 덧붙이면 더 좋죠.
@E.E.샤츠슈나이더 타지키스탄의 지형입니다. 딱 봐도 아주 골치아프게 생겼군요(…)
@E.E.샤츠슈나이더 신장과 파키스탄도 이슬람주의고, 아프간은 다른 나라 도울 여력이 안될테니..
@E.E.샤츠슈나이더 ... 아프간과 동급이군요. 야조프 장군은 트라우마 재발 하실런지...
@E.E.샤츠슈나이더
@dear0904 ???: 아프가니스탄에서… 5만명의 부하들을 잃었다… 그런데도 빌어먹을 정부 놈들은 지켜만 보고 있었지. 앞으로 애국자가 부족해질 일은 없을 거다…
@E.E.샤츠슈나이더 맙소사..!
@렌지파일 “기억하게, 러시아어는 사용해선 안되네.”
@E.E.샤츠슈나이더 혹시 형벌부대...?
그런데 여기서 굴라그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카라멜 마끼아또 소련 굴라그는 54년, 60년 두번에걸쳐 없어졌고 그 후엔 정치범들은 정신병원에 넣었는데, 이것도 고르바쵸프때 사라졌을겁니다
다음화는 언제 올라오나요?
지금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