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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소설가의 방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아, 나의 융프라우
방 영 주
강한직은 신설화, 그리고 배덕환 교수와 함께, 등산 열차를 타고 해발 2061m의 크라이네 샤이데크 역에 도착했다. 역 주위의 건물로는 상점 하나와 호텔 둘이 있을 뿐이었다. 한국은 무더운 중복 근처였지만, 여기는 쨍한 만추의 날씨였다. 게다가 태양이 몹시 강렬하게 내려꽂히고 있었다. 강한직은 준비한 선글라스와 모자를 썼다. 그는 앞장 서 사이데크 역 위쪽을 향해 걸었다. 그들 일행은 아이거를 거쳐 융프라우를 탐험할 참이었다. 고산 지대라 공기가 맑아 거리 감각이 정확하지 않았다. 강한직은 모든 사물이 가깝게만 느껴졌다. 그는 일행을 따라, 아이거 산 쪽으로 한참을 올라, 오싹한 한기를 느끼며 BC를 설치했다. 여기서부터 봉우리까지는 온통 흰눈에 덮여 있었다. 그 사이로는 만년설이 녹아 흐르며 빙하의 계곡을 이뤄 내고 있었다. 국내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신비하고, 장엄하며, 위압적인 모습이었다.
강한직은 고개를 바짝 젖혀 반원을 그리며 눈앞의 고봉(高峰)들을 훑어보았다. 그것들은 하늘을 향해 주먹질이라도 하듯 거대한 모습으로 불끈 불끈 솟아 있었다. 그의 눈길을 좇던 배 교수가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오른 쪽으로부터 세 개의 거봉들이 보이지. 첫 번째는 해발 4158m의 융프라우 산, 다음은 4099m의 뮌힌 산, 그 옆은 3970m의 아이거 산이야. 바로 중앙 알프스의 명봉들이지.”
“아……!”
신설화는 그렇게 탄성을 질렀다. 강한직은 진작부터 모두 알고 있었다는 투로 표정을 심상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거였다. 그는 배 교수에 대한 반감을 그런 식으로 표출하였던 것이다. 배 교수는 여기에 와서도 설화한테 제 본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설화에게 은밀히 접근해 술을 권한 다음, 그녀의 캠프에 슬그머니 기어들어 치근거리기가 예사였다.
강한직은 배 교수로부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는 한동안 시선을 융프라우 산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산은 처녀가 흰 속살을 모두 드러낸 채, 다리를 한껏 벌리고 있는 형상이었다. 은근하면서도 유혹적인 모습이었다. 한직은 거기에 뛰어가 폭 안기고 싶었다. 배 교수는 설화를 힐끔거리며 이었다.
“융프라우는 스위스 말로 ‘처녀’라는 뜻이야. 보다시피 생긴 모양이 그렇고, 또 아무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곳이지. 알겠어? 무슨 말인지?!”
“……”
강한직과 신설화는 아무 말도 안했다. 배 교수의 눈길은 어느덧 설화의 온몸을 벗기듯 훑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직은 배 교수의 눈길을 쫓았다. 설화는 꽉 끼이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청바지 지퍼 아래는, 둔부가 말발굽처럼 도발적으로 도드라졌고, 그 사이는 밋밋하게 푹 꺼져 있었다.
신설화는 배 교수의 시선을 피해, 몸을 비틀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래서 배 교수의 설명은 음담패설처럼 들렸다. 설화는 눈꽃 같은 얼굴을 홍조로 물들이며 슬쩍 돌아서 버렸다. 강한직은 그녀가 면구스러워 하늘을 보았다. 그 한편에서 거대한 먹구름이 슬금슬금 몰려오고 있었다. 곧 눈이라도 올 모양이었다. 설화는 캠프에 들어가 방한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한직은 여기로 오기 전에 대학도서관 앞에서 한, 설화의 말을 떠올렸다.
신설화는 막무가내로 강한직에게 등산반에 가입하라고 졸랐다. 그런데 설화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녀가 한직을 거기에 끌어들이는 데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는 것만 같았다. 한직은 그것을 알고 싶었다. 도대체 왜 그래? 알다시피 난, 등산하고는 거리가 멀잖아? 난 친구들에 끌려, 얼결에 몇 번 산에 오른 경력밖엔 없는데……. 날 좀 옆에서 항상 지켜 줘. 오빠, 제발! 오빠에 대한 내 마음 잘 알잖아…… 얼마 전이었어. 배 교수는 자신의 집 근처 카페에서, 나를 불러…… 나에게 과장된 슬픈 표정을 지으며, 너절하게 지껄였지…… 자신은 홀아비래…… 본처와 이혼을 하고, 한때 자신이 몸담았던 고등학교 제자와 재혼을 했다는 거야…… 그 제자는 자신의 운전사와 눈이 맞아, 줄행랑을 놓았다는 거지…… 왜 그런 이야기들을…… 그 통속적 드라마의 주인공인 배 교수가…… 제자인 나에게, 창피한 줄도 모르고, 주절주절 늘어놓았겠어? 게다가 나만은, 대학원을 마치면 이 대학에, 꼭 남게 해주겠다고 치근거리다 끝내 나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고, 내 가슴을 마구 주무르고…… 그는 나와 함께 살고 싶대! 자신의 여생을…… 일테면 배 교수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나에게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거지…… 우리 엄니는, 내가 이미 대학 교수라고, 떠버리고 다니는데…… 내년에는 대학원 진학도 해야 되고…… 참으로 난감해…… 난, 정말 어쩌지? 배 교수가 그래? 어쩜 교수라는 작자가 자기 제자에게 그럴 수가? 그래, 알았어!
지리학은 가히 잡학이라 할만 했다. 안 걸쳐지는 학문이 없었다. 특히 어느 지방 하면 그곳의 땅 냄새까지 떠올릴 정도가 돼야 했다. 나머지는 그 다음의 몫이었다. 그래서 배 교수는 지리학과의 핵심 인물들로 등산반을 꾸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핵이 설화였다. 한직은 그날로 즉시 등산반에 가입했다. 그때부터 그는 배 교수, 설화와 함께 전국의 산을 타고 다녔다. 그러다 한직은 그들을 따라, 이 알프스 북벽의 등반에 참가한 거였다.
강한직은 고산 등반 경험이 부족했다. 그는 숨이 막히고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다. 하긴 여기로 오기 전 배 교수의 지도하에 신설화와 북한산, 설악산 등지에서 등벽훈련을 쌓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여긴 험준하기로 소문난 알프스 북벽이었다.
강한직은 힘차게 산을 오르는 배 교수와 설화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들은 무슨 경쟁이라도 하듯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한직은 그들을 도저히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좀 천천히 걸었으면 좋으련만 뭐가 저리 급하단 말인가? 배 교수가 뒤를 돌아보았다.
“강 군, 게서 뭐 하는 거야! 빨리 오지 않고!”
“아직 이런 고산 지대에 익숙하지 못해서요. 죄송합니다. 전 여기서 조금 쉬었다 오르겠습니다.”
강한직은 배 교수가 따르라면, 그는 어떤 상황에 있든, 그렇게 해야 했다. 배 교수는 자신의 학과장이기 이전에 이 등반대의 대장이었다. 배 교수의 명령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배 교수는 한직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경멸 투로 피식 웃었다. 배 교수는 한직에게 보라는 듯 설화의 손목을 덥석 잡아끌었다. 한직은 그들로부터 등을 돌렸다.
강한직은 숨을 고르며 망원경을 꺼냈다. 그것으로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옆으로 원색 복장 스키어들의 힘찬 활주가 보였다. 반대편에는 등산객들을 실어 나르는 케이블카와 거대한 폭포가 눈에 들어왔다. 산 밑에는 싱그러운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노란 색의 가로줄이 있는 새빨간 등산 열차가 작은 둔덕을 간질이며 기어올랐다. 그 사이로 방목되는 양떼와 젖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었다. 저 멀리 빙하가 흘러 만들어진 호수에는 유람선도 떠 있었다. 그 모든 것은 그야말로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강한직은 그대로 하산해 그 속에 누워 한숨 푹 자고 싶었다. 그러나 앞에 있는 사람들은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산의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저토록 미치게 만드는가? 또 무엇이 저들에게 자신의 목숨까지 걸게 하는가? 나약한 유한자의 한계성에 대한 도전? 열등감으로 꽉 찬 인간의 자기 보호 본능? 한직은 그들에 대해 다소 짜증을 느꼈다. 그들을 괜히 따라왔다고 후회했다. 물론 신설화만 이 등반에 참가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빠질 생각이었다. 한직은 언제든 설화의 곁에 있고 싶었다. 아니, 있어야 했다. 더구나 배 교수와의 동행에서야. 그래서 따라온 것이었다.
강한직 네와 신설화 네는 감포군 감포읍으로 이사를 했다. 설화 부친은 감포군 군수로, 한직 부친은 감포군 감포 읍장으로 영전하면서였다. 설화와 한직은 남녀 공학인 감포종합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설화는 고1이었고, 한직은 고2였다. 그들은 본격적으로, 이른바 사춘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신체적으로도 그들은 거의 성인의 그것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피차에 조숙한 편이었다. 학교에서는 방과 후에 단체 영화 관람을 했다. 감포극장엔 학생들뿐이었다. 제목은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 학생들의 나이가 나이인 만큼 거의 영화 속에 몰입하여 주위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어쩌다 감탄사 같은 것이 간간 튀어나올 뿐이었다. 한직 역시 다를 바 없었다. 그는, 자신을 로미오로 줄리엣은 설화로 환치하여, 영화를 보고 있었다. 양가의 상황도 그들 네와 조금은 닮아 있었다.
강한직과 신설화가 배 다른 남매지간이었다는 사실을 안 것은, 그들이 대학생이 된 뒤였다. 그들은 충격이 컸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피차에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사이였다. 부계 사회였다. 그들이 결합하는 데에는 법적으로는 아무 하자가 없는 일이었다. 다만 사회 통념상, 윤리상의 문제가 가로놓였을 뿐이다.
영화가 끝났다. 어딘지 감미롭게 느껴지는 비극이었다. 강한직은 신설화를 찾아 감포극장 뒤편으로 난 오솔길을 걸었다. 상현달이었지만 공기가 맑아 꽤나 밝았다. 양옆은 배밭이었다. 달빛이 배꽃에 떨어져 하얗게 빛났다. 그야말로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였다. 설화의 얼굴도 그랬다. 이제 조금씩 처녀티까지 나는 설화였다. 한직은 이제 설화를 함부로 대하기가 어려워졌다. 설화도 그런 모양이었다. 한직의 가슴은 알 수 없는 흥분으로 쿵쾅거렸다. 한직은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한마디 던졌다. 영화 어땠어? 좋았어. 오빤? 나도. 끝 장면이 특히 인상에 남아. 한직은 설화 앞에서 약간은 우쭐해지고 싶었다. 말하자면, 오빠로서의 체면을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난 결말이 약간은 작위적이라 느껴지더군. 하여, 감동이 반감되었지. 오빠는 그 난 척 하는 게 문제야. 난 오히려 결말을 그렇게 처리한 까닭에 더 가슴에 남아. 앞뒤가 딱 떨어지는 이야기는 어딘지 더 거짓말 같거든. 헌데 오빠는, 그 상황에 처하면 어떻게 할 거야? 수면제를 먹고 죽은 척하는 여자의 뒤를, 독약을 먹고 따르라고? 설화는 한직을 힐끗 노려봤다. 설화의 얼굴엔 섭섭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설화는 볼이 잔뜩 부어 말했다. 로미오가 보기엔 틀림없이 죽은 여자였어. 한직은 농담을 그만하고 싶어졌다. 나도 그렇게 했을 거야. 설화가 한직의 손을 잡았다. 부드러우면서도 따뜻하고 끈적끈적한 느낌이, 한직의 손에서 전신으로, 전류처럼 흘렀다. 설화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예술 작품 속에서의 죽음은 종착점이 아니라, 부활을 의미한다고 봐. 새로운 세상에서의 새 삶을 뜻하는 거지. 추하고 힘겨운 이승이 아니라, 저 아름다운 천상에서 말이야. 얼마나 낭만적인 상상이야. 난 오빠가 죽으면 나도 따라 가겠어. 이건, 정말이야. 나도, 그래. 자, 천상의 약속! 설화는 계지(季指)를 들어 올렸다. 한직은 새끼손가락을 설화의 거기에 걸었다. 그들은 엄지끼리 도장을 찍듯 꽉 눌렀다. 설화와 한직은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어른들이 그들의 하는 양을 보았다면 유치하다고 생각했을 거였다. 그들 양가의 어른들이 그들의 언행을 보고 들었다면 미쳐 팔짝 뛰었을 터였다. 설화의 부친과 한직의 부친은 묘한 관계에 있었다. 그들은 한직의 모친을 한때 공유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감포 중․고등학교 동문이었다. 모친들과도 그랬다. 설화의 부친과 한직의 부친은 업무상 밀접했다. 그런 만큼 서로 마주칠 일이 많았다. 그들은 공석에서는 다정한 선후배로, 또 친밀한 상급자와 하급자로 처신했다. 하지만 사석에서는 그들 사이에 알 수 없는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들 모친들의 상황도 같았다. 한직의 마음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들의 부모는 그들이 성숙해 가자 접근을 완전히 통제했다. 한직은 왜 그러는지 도대체가 알 수가 없었다. 한직이 그 연유를 물었을 때, 그의 부친은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넌 내가 하라는 대로만 따르면 돼! 라고 소리쳤을 뿐이었다. 그의 모친도 같았다. 이건 설화 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렇게 남들의 눈, 특히 그들 부모의 시선을 피해 다니는 것이었다. 한직은 가슴에 무거운 무엇을 얹은 것만 같았다. 한직은 목이 멘 소리를 냈다. 난 무슨 어려운 일이 있어도, 네 곁에서 너를 지켜 주겠어. 우리 어떤 상황에 처해도 헤어지지 말자. 꼭-! 자, 천상에까지의 약속! 설화와 한직은 다시 한 번 손가락을 걸어 도장을 찍으며 웃었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피차에 몹시도 공허하게 들렸다. 그들 부모뿐만이 아니라, 어쩌면 더 많은 사람들이 공모해 자신들을 떼어놓을 것만 같았다. 한직은 좀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그만 귀가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한직은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 이제 그만 가자. 그래야 해. 나, 아빠한테 혼나. ……. 한직은 설화로부터 약간 떨어져, 옮기기 싫은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달빛이 설화의 단발머리 아래 목덜미에서 반사되고 있었다. 한직은 그 자리에 붙박여, 저만큼 멀어져 가는 설화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강한직은 망원경을 배낭에 집어넣었다. 그는 어쩔 도리 없이 배 교수와 신설화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들을 잃으면 안 될 일이었다. 잠시 후였다. 한직은 정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그들과 조우할 수 있었다.
배 교수는 강한직을 보자 이죽거렸다.
“젊은 사람이 하체가 그리 부실해서야 이담에 장가를 들어 어떡하려고 그래? 내 서릉(西稜)으로 난 등산 루트를 확인했어. 이젠 그만 내려가 쉬면서 등반 준비를 하자고. 내일 02시에 BC를 떠나, 하루 만에 등정을 끝낼 거야. 그게 우리의 계획이야. 알겠지?”
“…….”
강한직은 입을 다물고 곁눈질로 배 교수를 슬그머니 노려봤다. 물론 근간에 부쩍 심해진 강한직의 과민 반응의 하나이겠지만, 배 교수의 말은 한 여성 앞에서, 한 남자를 묵사발로 만드는 그것으로만 느껴진 때문이었다. 한직은 서둘러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하산을 하여 BC에 도착한 강한직은, 배 교수의 지시대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잠시 눈을 붙였다. 등산할 시간이 가까워졌다. 한직은 몸을 침낭에서 빼내야 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등산 장비들을 점검해 꾸렸다. 배낭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사하제(瀉下劑) 약봉지였다. 가벼운 변비증을 앓고 있는 그는, 혹시나 하여 설사약을 가져온 거였다. 한직은 높은 곳에 오르면 그 약이 꼭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것을 잘 간수해 배낭 안에 다시 넣었다.
BC를 떠나야 할 시간에 임박해 오고 있었다. 강한직은 하체에 힘을 힘차게 박으며 먼저 밖으로 나갔다. 이번만큼은 중년의 배 교수나 여자인 설화에게 져서는 안 된다는 각오, 아니 오기에서였다. 한직은 중학교 때는 축구 선수를 지냈다. 또 고등학교 시절에는 육체미 등으로 몸 관리를 한 적도 있었다. 그는 체력이라면 누구에게도 과히 빠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는 편이었다. 그런 그가 배 교수 같은 중늙은이한테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설화 앞에서 망신을 당한 거였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린 거였다. 다시 말해 ‘힘들여 산과 석벽을 꼭 올라야 하는가?’ 하는 회의감이, 그를 무력하게 만든 것인지도 몰랐다. 한직은 이를 앙다물었다. 이제는 달라져야 했다. 배 교수나 설화한테 약한 남자로 보여서는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강한직은 열심히 산을 올랐다. 그들 일행은 어느덧 등벽을 할 장소에 다다랐다. 한직은 등벽이 시작되자 배 교수와 설화에게 앞자리를 양보했다. 그건 단지 등반 선배들에 대한 예우에서였다. 설화 역시 등산의 대선배였다. 그녀는 자신의 부친을 따라 이미 많은 산을 누비고 다녔다. 대학에 와서는 주로 배 교수와 동행했다. 그녀는 한강의 한 강둑에서 농담처럼 한 약속을 지켰던 것이다. 한직이 군 복부를 마치고 복학하자, 설화는 그가 다니는 대학, 같은 학과의 졸업반으로 조교가 되어 있었다.
강한직은 대학에 입학하자 서울에서 하숙을 시작했다. 난생 처음으로 설화와 떨어지게 된 거였다. 한직은 설화가 못 견디게 그리웠다. 그는 주말이면 감포읍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곤 했다. 그해 늦봄이었다. 학교는 휴교령이 내려 있었다. 한직은 바로 감포읍에 내달렸다. 마침 토요일이었다. 다음 날, 한직은 설화와 한강 하류의 강둑을 걷고 있었다. 설화가 갑자기 발길을 멈추고, 한직을 한동안 쳐다보더니 불쑥 물었다. 오빠는 왜 지리학과를 택했어? 한직은 강화만으로 빠져드는 강물을 바라보며 맥쩍게 대꾸했다. 그냥……. 그래, ‘그냥’이었다. 한직이 지리학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는 기왕이면 소위 일류인 A대학교 배지를 달고 싶었다. 그게 전부였다. 한직은 천박한 속물의 끼가 청소년기부터 이미 싹트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는 또한 학력이 부족하여 읍장에만 머물고 있는 아버지의 피맺힌 소망이기도 했다. 한직의 부친은 한 수 더 떴다. 그의 부친은, 그가 법대에 들어가서, 사법 고시나 행정 고시에 합격하라는 거였다. 그것은 어쩌면 설화 부친에 대한 열등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의 부친은 한때 설화의 부친에게 아내가 될 사람을 빼앗긴 적도 있는 사람이었다. 아무튼 이 지방에서는 그래도 수재 소리를 듣는 한직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정도의 실력이 못됨을 자인하고 있는 터수였다. 한직은 대입이 가까워 오자, 아버지에게 교묘한 감언이설로 자신을 합리화했다. 저는 사회의 현실을 도외시하고 자신의 출세에만 매달리는 그런 사람은 되고 싶지 않습니다. 하면? 대학 교수를 하고 싶습니다. 그래……? 한직의 부친은 한동안 의혹에 가득한 눈초리로 자식을 뜯어보았다. 그의 부친은 이내 실망스런 표정을 지으며 눈을 내리 깔았다. 그의 부친은 아들의 의중이나 실력 정도를 이미 간파한 것 같았다. 그의 부친은 잠시 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것은 자신이 바라던 뭔가를 포기한다는 몸짓이었다. 한직은 대학 시험을 봤다. 그는 자신의 점수에 맞춰 낸 A대학교 지리학과에 어렵사리 입학을 할 수 있었다. 학년이 시작되자마자, 대학은 몸살을 앓고 있었다. 최루탄과 화염병이 전경과 학생들 사이를 어지럽게 날았다. 학교는 강의마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할 상황이었다. 한직은 그 지겨움에 넌더리를 치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아버지에게 했던 말과는 다르게, 이쪽도 저쪽도 아닌 회색분자로 마냥 겉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휴교를 하여 낙향한 거였다. 설화는 침묵하고 있는 한직에게 재차 물었다. 그 학과에서는 뭘 배워? 글쎄…… 대학 이야기는 이젠 그만 두자! 들어 둬야, 나도 내년 대학에 진학할 때 참고가 될 게 아냐? 난 오빠가 다니는 대학의 그 학과에 갈 참인데. 건, 또, 왜? 그냥……. 설화는 보조개를 깊게 패며 살짝 웃었다. 그녀는 풀잎이 이들이들한 강둑을 여기 저기 손가락으로 푹푹 찌르며 말했다. 이것은 봄까치풀꽃…… 저것은 평지꽃…… 조것은 거지덩굴꽃…… 또 저 녀석은 족두리풀꽃……. 설화는 한직으로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꽃 이름들을 마구 흥얼거렸다. 설화는 이어 입안을 온통 다 드러내며 웃고 또 웃었다. 설화의 웃음은 좀 독특했다. 그녀가 웃을 때면 진주홍의 입술이 활짝 벌어졌다. 목젖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그 사이로 가지런한 흰 치아가 더욱 돋보였고, 입안은 잘 익은 석류 속 같았다. 설화의 웃음은 언제 보아도 그랬다. 한직은 그 모습이 너무도 귀여웠다. 그는 잘못하면 실수를 할 뻔했다. 한직은 그녀의 작고 도톰한 붉은 입술에 가, 한동안 머물던 눈길을 화다닥, 떼었다.
강한직은 벽을 오르며 모든 게 배 교수의 판단 착오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거 북벽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진로가 아니었다. 게다가 산악 지대라 기후의 변화를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 폭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직의 몸을 마구 뒤흔들어 댔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누구든 바람에 날려 어떤 바위엔가 처박히고 말일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번쩍거리며 수평으로 휙휙 공격해 대는 번개는 오금마저 저리게 했다. 한직은 전신이 후들후들 떨려 왔다. 그러면서도 그는 설화의 안위만을 걱정하고 있었다. 한직은 설화의 목소리라도 한번 듣고 싶었다. 하면 좀 안심이 될 것도 같았다. 그런데 위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그들과는 어떤 의사소통도 할 수가 없었다.
강한직은 창자에서부터 목소리를 끌어냈다.
“설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메아리만 들렸다.
“설화아아…….”
한직은 설화를 향해 열심히 더 중얼거렸다. 그는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잠시 쉬었던 천둥소리와 강풍이 그것마저 모두 먹어 치웠다. 한직은 그것이 무엇보다 두려웠다. 자신들은 각자 죽음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강박감이, 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였는지도 몰랐다. 한직은 앞에 버티고 있는 바위에게라도 무슨 말이든 계속해야 했다. 번개가 그에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의 바위에 와 부딪혔다. 그는 몸을 웅크리며 소리쳤다.
“넨장맞을, 저것에 맞는 순간 난 숯덩이로 변하고 말 거야!”
한직은 속에 있는 생각을 입 밖으로 뱉으니, 공포감이 조금은 감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조심을 하여 바위에 계속 하켄을 꼽아 조금씩 위로 이동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상단부에 있는 사람들도 그처럼 할 수밖에 없을 거였다. 때문에 그들은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그들은 밤새 어둠 속에 갇혀 검은 벽과, 거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날은 밝았지만, 날씨는 오히려 더 악천후로 변해 있었다. 회오리 강풍에 눈보라가 어지러웠다. 한직은 자일을 힘껏 잡아당기며, 등을 휘어, 정상을 보았다. 난무하는 눈발 속에 아득하기만 했다.
“형체만 간신히 어른거리는군! 이런 상황에서 저기까지 정복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지…… 게다가 암벽에 무시로 쏟아져 내리는 낙석과 낙빙, 측면으로 시도 때도 없이 쳐 대는 낙뢰, 이건 하나의 싸움이야. 그래, 목숨을 건 전투…….”
한직은 바위를 향해 말하며 한순간 어떤 쾌감마저 느꼈다. 그는 이제 독백의 묘미를 약간은 터득한 거였다.
“줄 하나에 몸을 의지하여 삶과 죽음 사이를 곡예하며 벌리는 이 바위와의 치열한 투쟁, 적어도 사내라면 한번쯤은 해볼 만한 놀음이지. 아마도 그래서 산악인들은 악산을 더 좋아하는 모양이야.”
벼락이 바로 강한직의 옆에 떨어졌다. 그는 긴장감으로 전신이 팽팽해졌다.
“아, 그만 주절거리라는 하늘의 뜻이군. 알겠어. 아무튼 나는, 지금 자신도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힘이, 온몸으로 뻗쳐 나가고 있는 중이지. 자, 그렇다면, 저 정상을 향하여!”
한직은 물론 힘이 있을 턱이 없었다. 사실은 전신이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일테면 일종의 자기 암시였다. 그는 손과 발에 힘을 박으며 위로 올랐다. 그의 옆에, 사선을 그으며 위로 향한, 클랙이 보였다. 배 교수와 신설화가 거쳐 간 길이었다. 클랙은 오랫동안 낙수의 길이 되었던 까닥인 지 칼처럼 날이 서 있었다. 한직은 이를 악물고 날카로운 클랙을 잡으며 측면으로 이동했다. 그가 힘든 바위 클랙을 끝냈을 때는, 벌써 정오를 넘어서 있었다. 하늘도 활짝 개었다. 언제 그 오두방정을 떨었냐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해가 비치는 부분은 이미 해빙이 되고 있었다. 이따금 주먹만 한 것에서부터 집채만 한 바위나 얼음 덩어리가, 그들의 옆을 비질하듯 쓸고 갔다. 그들은 거의 우연에 목숨을 건 형국이었다.
강한직은 등벽을 멈추고 거미처럼 바위에 붙어 설화를 보았다. 그녀의 허리에는 한직이 잡고 있는 자일이 팽팽히 매어져 있었다. 그것은 그녀와 자신을 잇는 어떤 혈맥처럼 느껴졌다. 한직은 배 교수 쪽으로 시선의 고도를 올렸다. 배 교수는 로크 해머로 하켄을 박으며 열심히 진로를 개척하고 있었다. 그의 주위로 이따금 쇳소리를 내며 바위 부스러기가 허공에 날았다. 한직은 바위를 향해 말했다.
“배 교수도 지금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당신과 설화 사이에 연결된 줄을 싹둑 잘라 버리고 싶다. 난 설화와 둘만의 공동체로 남고 싶을 뿐이다. 삶과 죽음을 함께 할 수 있는 한 동아리로 말이다. 융프라우 산만은 설화와 둘이 등반하고 싶다. 난 당신에게 이 아이거 등벽을 마치면 그것을 제의해 볼 생각이다. 물론 당신은 펄쩍 뛰며 허락하지 않겠지만 말씀이다. 자, 이제 그만 중얼거리자. 설화가 등을 돌려 빨리 오르라고 나에게 손짓을 하고 있지 않는가?”
강한직은 클랙을 힘껏 밟았다. 그는 자일 잡은 손에 힘을 줘, 다시 바위 타기를 시작했다. 그때 그들을 얼마간 뒤따라오다 추월한 스페인 팀이, 중형 승용차만한 낙석으로 인해 11mm 자일이 모두 절단되었다. 배 교수는 그들을 그대로 두고 추월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배 교수는 등벽을 중단하고 그들을 구조하겠다고 나섰다. 그들은 그것을 거절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헬기 구조마저 거부하고 자력으로 탈출하고 있었다. 강한직은 그들을 통해 산사람들의 강한 의지를 읽었다. 그는 약간은 경외감을 담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만약 지금 저런 경우에 처했다면? 나를 구조하겠다는 누구에겐가 선뜻 손을 내밀었을 거야…… 허나 나도 몇 번 더 저런 상황에 처하다 보면 저들처럼 되겠지. 사람들은 저런 정신을 배우려고 많은 대가를 지불하는 것일 거야. 그래, 나도 이제부터는 더욱 진중한 태도로 산을 대해야 해. 이 산을 오르는 과정이 바로 우리네 사람살이의 그것일 테니까…… 배 교수에 대한 질투심이나 반감만으로 이 명봉을 정복할 수는 없을 거야. 우선 아이거산의 정령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이젠 더 이상 입을 열지 말자. 무엇보다 배가 고프니까…… 또 체력을 축적해 둬야 하니까…….”
강한직은 함구불언했다. 배 교수는 스페인 산악대가 안전한 곳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야 다시 등벽을 시작했다. 그의 다른 면을 읽고 있는 거였다. 한직은, 배 교수는 여자의 문제에서나 그렇지, 어쩌면 그렇게 야비한 인간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언뜻 들었다. 결함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다만 그것이 설화를 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과 문제가 된 거였다.
설화는 남자라면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어떤 중요한 것을 내걸고, 한번쯤은 덤벼 볼만한 가치가 있는 여자였다. 그건 강한직도 마찬가지였다. 배 교수는 명예를 걸었고, 한직은 원근 일가의 비웃음이나 배척, 또는 학점 등을 포함한 자신의 앞날을 건 모험이었다. 가능하다면 한직도 대학에 남고 싶었다. 부친에게 하나의 약속만이라도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배 교수는 점점 더 위로 향하고 있었다. 얼마간 휴식을 취해서인지 그의 몸놀림은 가벼워 보였다. 한 줄로 매어져 있는 설화와 한직은, 당연히 배 교수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직은 연이어 떠오르는 잡념들도 지우기로 했다. 그는 정신을 집중하여 산을 타기로 작심한 거였다.
강한직은 바위 지대를 지나 설원에 도착하자, 등벽화를 아이젠으로 갈아 신었다. 그는 발가락에 힘을 줘 설벽을 쇠 발톱으로 팍팍 찍으며 힘겹게 올랐다. 온몸에 진땀이 줄줄 흘렀다. 무엇이나 그렇듯, 여기에도 끝은 있을 터였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어둠과 악천후와의 치열한 전투가 다시 시작될 거였다. 그는 두려움으로 일순간 몸이 굳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제 어느 정도 등벽에 익숙해진 그였다. 곧 전신에 투지가 불타올랐다. 그는 부지런히 위에 있는 사람들을 따라 올랐다. ‘아이거 호스’에서였다. 거기서 배 교수가 등산 루트를 잘못 선택하여 몇 시간을 지체해야 했다.
다시 등반은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시간은 벌써 자정 가까이에 접근해 들고 있었다. 암벽 주위의 사정은 오늘 새벽과는 사뭇 달랐다. 바람이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사방은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이곳의 폭풍 전에는 그렇다고 했다. 이쯤에서 등벽을 멈추고 비박지를 정해야 할 일이었다.
강한직은 잠을 거의 자지 못했고, 끼니도 몇 번 거른 상태였다. 체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었다. 배 교수나 설화도 그럴 터였다. 그들은 이젠 뭔가로 뱃속을 채우고 눈도 붙여야 했다.
한직의 눈앞에 자꾸 헛것이 어른거렸다. 그가 좀 더 오르니, 마침 비박을 하기에 좋은 장소가 나타났다. 그는, 장갑을 낀 한쪽 손으로 뻑뻑한 눈을 비비며, 설화를 향해 소리쳤다.
“이 산의 맨 꼭대기는 어디지? 지금 얼마나 왔어?”
“아직 멀었어! 이곳은 ‘죽음의 비박지’라는 곳이야!”
“그 ‘죽음의 비박지’라는 명칭이 이 암벽 어디쯤에 붙어 있는 이름인지 난 몰라! 알 바도 없고! 아무튼 오늘 정상에 오른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잖아! 위의 배 교수님에게 전해! 이 근처 어디에서 비박을 하자고! 창자가 졸아들고 졸음이 억수로 쏟아져 난 도저히 더 이상 못 오르겠어!”
“이름이 불길하잖아! 기왕 내친걸음이니 신들만이 오를 수 있다는 ‘신들의 트레바스’까지는 가야지! 아니, 이건 내 생각이 아냐! 좀 전에 배 교수님이 내게 그렇게 말했어!”
“이런 빌어먹을…….”
아까 배 교수가 설화에게 무슨 말인가 하는 것 같았다. 배 교수와 강한직 사이는 거리가 너무 멀어, 어떤 이야기인지 잘 파악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직은 어쩔 도리 없이 등벽을 계속해야 했다. 이윽고 그들은 ‘신들의 트레바스’에 도착했다. 설화는 지치지도 않는지 잘도 올랐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독기랄까, 그런 게 있는 여자였다.
한직과 설화는 아직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한직은 내년이면 중학생이 될 터였다. 물론 설화는 그 다음 해였다. 설화 네와 한직 네가 감포읍으로 나오기 전이었다. 그들이 사는 데서 읍으로 진입하려면, 조그마한 고개를 하나 넘어야 했다. 그 고개에는 감포읍에 사는 악동들이 한직들의 하교 때를 맞춰 지켰다. 악동들은 개구리나 두꺼비를 잡아 커다란 무덤을 만들었다. 그 옆 나무에는 죽은 뱀과 쓰다 버린 브래지어를 매달아 놓았다. 악동들은 한직 동네의 여자 애와 남자 애에게 우선 무덤에 절을 하도록 시켰다. 그런 후에 남자 애에게는 브래지어를 얼굴에 비비도록, 여자 애에게는 뱀을 만지도록 시켰다. 그 영을 어기면 갖은 폭설과 폭력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심해졌다. 한직은 설화와 문제의 장소에 다다랐다. 한직은 그들이 시키는 대로했다. 설화는 눈을 하얗게 뜨고 미동도 없이 끝까지 버텼다. 악동들은 설화에게 달려들어 바지를 벗기려 했다. 한직은 눈이 확 도는 것 같았다. 한직은 악동들에 달려들어 주먹과 발을 마구 휘둘렀다. 물어뜯기도 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한직은 쓰러져 여기저기 밟혔다. 한직은 정신을 잃었다. 얼마 후, 한직은 눈을 떴다. 자신은 설화의 품에 안겨 있었다. 설화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한직은 문득 설화가 누나처럼 느껴졌다. 하여튼 그 이후였다. 이제 그 고개에서 아무도 설화와 한직을 건드리는 아이는 없었다.
강한직이 계산해 보니 ‘신들의 트레바스’까지는 24시간 이상이나 걸린 거였다. 그는 거기서, 자일에 매달려 마지막 남은 초콜릿 하나를 씹다가,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그 지점은 영하 5도였는데, 갑자기 불기 시작한 강풍으로 인해, 체감 온도는 훨씬 더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견딜 만은 했다. 날씨가 그래도 어제 새벽만큼 험악한 상황은 아니었던 때문이다. 피곤한 그는, 곧 혼수상태와도 비슷한 잠에 슬금글금 빨려 들고 있었다.
밤이었다. 한직은 어떤 소리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래, ‘어떤… 자신도 모르는… 어디론가…’ 그런 표현이 맞을 거였다. 자세히 들어보니 그것은 징소리였다. 그 속에 한 서린 여인의 목소리가 숨어 있었다. 장절(章節)의 구분이 없이 길게 불려 나가는 그것은, 어떤 신비로운 힘을 담고 있는 듯했다. 통장무가(通章巫歌)의 하나인 <바리공주>이였다. 한직은 무가(巫歌)의 진원지인 무가(巫家)에 도착했다. 사람들 앞에 무복(巫服)을 입은 무녀가 있었고, 그 옆에 한 나이 어린 여자 애가 앉아 있었다. 그 소녀는 뜻밖에도 설화였다. 무녀는 설화의 이모였다. 설화는 입을 헤 벌리고 굿청에 가득 차려진 제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과일과 떡, 그리고 생선과 육류가 가득했다. 설화는 온통 거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설화는 굿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한직은 설화를 보기에 민망했다. 무녀의 노래에 맞춰 한직은 피리 연주를 시작했다. 무녀는 어린 한직의 돌발적인 행동에 약간은 놀란 것 같았다. 무녀는 무슨 잡귀라도 출현한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무녀의 안면이 약간 일그러졌다. 무녀는 <바리공주>를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한직은 개의치 않고 계속 피리를 불었다. 한직은 무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설화의 얼굴에 눈길을 고정시킨 채 열심히 피리만 불었다. 이윽고 설화는 한직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설화의 백설처럼 흰 얼굴에 박힌 호수처럼 맑고 큰 눈은, 강한 흡인력이 있었다. 한직의 몸이 송두리째 거기로 풍덩 빠지는 느낌이었다. 어느 사이 한직은, 설화를 좋아하기 시작한 거였다. 얼마 후였다. 무녀는 한직을 힐끗 보더니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무녀의 무가는 신을 내기 시작했다. 이제 타악기, 그리고 가락악기와 하나가 된 <바리공주>는 그야말로 ‘신’을 내고 있었다. 설화는 볼우물을 깊게 패며 무엇에라도 끌리듯 불쑥 일어나 춤을 췄다. 그것은 아무 형식도 없는 설화 자신이 즉흥적으로 창작한 무용일 터였다. 어디선가 한 여인이 나타나, 굿판으로 달려들어, 설화를 끌어냈다. 설화의 어머니였다. 한직은 안타까웠다. 한직은 달려가 설화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어린 한직은 힘이 부족했다. 벌써 설화는 저만큼 어머니의 손에 끌려,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었다.
강한직의 자일이 무엇인가에 세게 잡아 당겨지고 있었다. 서슬에 놀라, 한직은 잠에서 퍼뜩 깨었다. 여명의 순간이었다. 한직은 본능적으로 위를 봤다. 설화가 그에게 오르라는 손짓을 연방 해대고 있었다.
“넨장맞을, 또 시작이군!”
한직은 장갑을 벗고 손등으로 눈께를 문질렀다. 그는 장갑을 다시 꼈다. 그리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인간 거미가 되어 등벽을 계속했다.
오후로 접어들었다. 한직은 배가 너무 고파 운신도 하기 힘든 지경이었다. 그의 배낭에는 식량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배 교수는 등정을 하루 만에 끝내기로 일정을 잡은 데다, 중량을 줄이기 위해 등반식을 너무 적게 가져왔던 까닭에, 그 동안 그들은 거의 굶다시피 했었던 것이다. 소량의 단팥죽, 호박 가루, 초콜릿이 다였다. 그들은 그것마저 오늘 새벽 비박을 하기 전에 모두 먹어 치운 거였다. 한직은 ‘하얀 거미’ 상단의 ‘액시트 크랙’에서 바위틈에 박힌 얼음 조각을 깨 씹으며 허기를 달래야 했다. 그리고 계속하여 위를 향해 올랐다.
어둠이 설원을 덮어 가고 있었다. 오늘은 그래도, 조금 이지러지긴 했지만 보름달이 휘영청 밝았다. 다행스런 일이었다. 강한직은, 이 등벽이 끝날 때까지, 그 달이 계속 비춰 주기만을 기원했다. 그는 그걸 등불 삼아 벽을 오를 수 있을 거였다. 가끔 무슨 그림자 같은 설화의 엉덩이를 힐끔힐끔 보면서 말이다. 그런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먹구름이 달을 가리기 시작했다. 폭풍이나 폭설이 찾아올 거였다. 그는 순식간에 맥이 탁 풀렸다. 피로와 허기에 지친 몸이, 눈처럼 스르르 녹아, 어디론가 흩어질 것만 같았다.
배 교수 일행은, 다음날 02시가 넘어서야, 겨우 아이거산 정상에 섰다. 배 교수의 예상과는 다르게 등정에만 거의 48시간 이상을 잡아먹은 거였다. 이는 장장 1박 3일의 등정 노정이었다. 거기에 또 내려가는 데 시간이 걸릴 터였다. 어쨌든 여기서 조금만 눈을 붙이면 동이 터 올 것이었다. 그러면 쑥쑥 솟은 알프스의 거봉들과 쭉쭉 갈라진 그 등줄기들의 장관을 조망할 수 있을 거였다. 그러나 배가 너무 고픈 한직은 등정에 대한 즐거움 같은 것은 전혀 일지 않았다. 배 교수나 설화의 표정도 그랬다. 거기에다 처음으로 잠과 식사를 거르고 높으나 높은 곳에 오른 한직은, 고소 증세마저 느끼고 있었다. 하늘이 온통 노랗고 구토 증세가 일었다. 심하면 폐에 물이 차올라 치명적이 될 수도 있었다. 여기에 더 있다가는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어지럼증과 허기증을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 푹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강한직은 먼저 서둘러 하산을 시작했다. 그것은 하나의 시위였다. 배 교수와 설화도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들도 한직과 비슷한 상태였는지 모른다. 그들의 첫 번째 등정은 그렇게 별 감흥이 없이 끝나 가고 있었다. 한직은 산을 내려오며 바위를 향해 중얼거렸다.
“이 모든 것은 배 교수, 바로 당신의 잘못이야…… 여기에 와서도 설화와 나한테 꽤나 아는 척 떠벌렸지…… 허나 당신은, 내가 판단하기에 알프스를 전혀 경험한 적이 없어. 그런 당신은 여기의 상황은 무시하고 제멋대로 일정을 잡은 거야…….”
강한직의 중얼거림은 기어코 욕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런 잘난 척하는 당신의 못된 습벽은 강의 시간에도 가끔 나타나곤 했어. 그것 역시 어쩌면 설화 때문인지도 모르지…… 설화의 질문 앞에서 당신은 말이 막히면 얼굴이 붉어지며 안절부절못했으니까…… 그럴 때마다 난 당신을 항상 비웃곤 했지…… 당신은 어느 상황에서 건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솔직히 시인할 줄을 알아야 해. 그게 학자의 태도가 아니겠어? 해야, 이런 실수는 않는 법이지…….”
한직은 얼마간 더 지껄이고 싶었다. 그래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배 교수에 대한 질투심의 다른 표현인지도 몰랐다. 야비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한직에게는 모든 면에서 너무도 벅찬 상대를 연적으로 둔 까닭이었다.
강한직은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하나만 더 말해 두겠어. 나뿐이 아니라, 우리 학교 학생들 거개가 당신을 경멸하고 있어. 당신이 우리 학교 총장의 아들만 아니라면…… 우리 대학 강단에 선다는 것은, 코끼리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도 더 어려웠겠지. 아니, 다른 학교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당신이 설화한테 하는 짓만으로도 말씀이야…….”
한직은 설화의 뒷모습을 자세히 보았다. 그녀는 언제 어떤 모습으로 보아도 아름다웠다. 한직은 달음질쳐 올라가 그녀를 안고 싶었다. 그는 이 등벽에 참가하기 전, 설화와 함께 가 며칠 묵었던, 대둔산의 한 민박집을 떠올리고 있었다.
설화와 한직은 <금산민박> 202호실에 들었다. 그들은 2박 3일 동안 함께 기거했다. 낮에는 케이블카를 타고 산에 올랐다. 그들은 주위를 조망하거나 계곡 등에 가 더위를 식혔다. 그들은 시내버스를 타고, 바로 옆에 있는 운주나 금산 쪽으로, 나가 보기도 했다. 산을 끼고 있어 마을 경관들이 제법 괜찮았다. 그들은 해가 저물면, <금산민박>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한직은 간혹 드러나는 설화의 관능을 도저히 감내 할 수가 없었다. 누워 있는 설화의 검정색 원피스 아래에서 허연 허벅지가, 또는 위에서 겨드랑이의 털이 도발적으로 한직을 노려보곤 했다.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는 젊은 남녀가, 그것도 외지고 밀폐된 공간에서 며칠을 함께 한 거였다. 한직은 숨이 턱턱 막혀 왔다. 그는 밖으로 뛰쳐나가 냉수로 펄펄 끓는 몸을 식혀야 했다. 마지막 밤이었다. 설화는 한직이 안 되어 보였던지, 그의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가슴에 가져갔다. 만져도 돼……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돼! 오빠 알았지? 한직의 손에 뭔가 물컹하면서도 단단한 것이 만져졌다. 그는 화다닥, 놀라 손을 뺐다. 한직은 등을 돌려 누웠다. 설화가 한직의 위로 몸을 실어 왔다. 설화는 입술로 한직의 입술을 지그시 눌러 주었다. 설화의 향기가 오랫동안 한직의 입가를 간지럽게 했다. 설화는 한직에게서 몸을 떼며 말했다. 오빠는, 참 좋은 오빠야. ……?!
강한직은 별 감흥 없이 아이거 탐험을 마쳤다. 이제 융프라우를 등벽할 차례였다. 배 교수들은 융프라우 명봉을 정복하기 위해, 그 산의 등산 거점인 융프라우요호 역 근처에, BC를 설치했다. 그들은 내일 01시에 융프라우 산 북벽에 오를 계획이었다. 한직은 이번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설화와 둘만이 등정을 하고 싶었다. 한직은 처녀라는 명칭을 가진 그 산을, 설화와 단둘이 오른다는 것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 사이에 누가 끼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특히 자신을 앞서서 배 교수가 그 정상을 정복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강한직은 배 교수에게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좀 간사하다 싶게 지껄였다.
“교수님, 이제 등산의 참 맛을 어느 정도는 알 것도 같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고투를 벌이던 교수님이나 사고를 당했던 스페인 등반대에게서 배운 바가 큽니다. 저도 모험을 한 번 해보고 싶군요. 융프라우 산에는 우리 둘만, 제가 앞장을 서, 설화를 데리고 오르게 허락해 주십시오.”
“안 돼!”
배 교수는 단호하게 잘랐다. 강한직은 그의 표정을 살폈다. 배 교수에게 청을 더 넣고 어쩌고 할 틈이 조금치도 없어 보였다. 물론 그럴 게였다. 배 교수는 알프스에 대해 꽤나 아는 척 떠벌렸지만 아무래도 처음인 것 같았다. 아이거 북벽 등반에서 그게 이미 입증된 거였다. 배 교수는 이 알프스 등벽을 위해 너무도 많은 시간과 경비를 허비해야만 했다. 그런 그가 마지막 등정을 포기하고 캠프에 죽치고 있을 리는 없었다. 게다가 설화와 한직이, 배 교수 자신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밤을 지내게 할 리도 만무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설화나 한직이, 자신도 참여하지 않은 등반에서 무슨 사고라도 당한다면, 지도 교수인 그 역시 책임을 면하지는 못할 거였다. 한직은 어떤 면에서 거의 억지를 부리고 있는 셈이었다. 그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그는 문득 사하제가 자신의 배낭 안에 있음이 뇌리에 휙 스쳤다. 그의 입가로 간교한 웃음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강한직은 배 교수가 먹고 마시는 것이면 무엇이든 계속하여 사하제를 섞거나 탔다. 거기에다 배 교수는 폭음까지 했다. 술이 깨자마자 그는, 심한 복통을 앓으며 밖으로 뛰쳐나가곤 했다. 한직은 그 행위-사하제를 섞거나 타는-를 멈추지 않았다. 다음 날 등정에 임할 시간이 되자, 배 교수는 거의 탈진해 있었다.
강한직은 때를 놓치지 않았다.
“오늘 좀 쉬시면 몸이 회복되실 겁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설화와 둘이 등정을 마치고 오겠습니다.”
“그래야겠네. 난 지금 미동도 할 기력이 없어. 날이 밝아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러니 너희들끼리 한 번 해봐. 귀국 날짜가 얼마 안 남았어. 하니까 등벽은 일정대로 끝내야 해!”
“예, 알겠습니다. 아니, 감사합니다.”
강한직은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반면 배 교수는 파리한 얼굴로 온몸이 축 늘어져 있었다. 하면서도 그는 의혹의 눈을 번뜩거리며, 한직의 표정을 계속하여 탐색하는 거였다. 배 교수는 뭔가 눈치를 채고 있는 것 같았다. 필시 그럴 거였다. 한직은 시치미를 뚝 떼고, 잽싸게 설화의 손을 잡아끌어 밖으로 나갔다.
오늘도 달이 밝았다. 다행한 일이었다. 강한직과 신설화는 정오쯤에, 심한 배앓이를 하는 배 교수를 캠프에 남겨 두고, 융프라우 산의 북벽으로 등벽할 길을 하나 확인해 두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눈이 몹시 내려, 바위에 덮여 있었던 까닭에, 진로를 모색하거나 개척하기에 무척 힘이 들 것 같았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들은 할 수 없이 거기로 등산 루트를 정했다. 한직과 설화는 지금 바로, 그 지점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얼마 후였다. 강한직의 뒤를 따라오던 설화가 불쑥 물었다.
“오빠 짓이지?”
“뭘?”
“배 교수의 복통!”
“난, 너와 둘이서만 저 산에 오르고 싶었어. 아이거 북벽에서부터 죽 생각해 온 거야. 하여 배 교수에게 설사약을 먹인 거지.”
“피이, 엉터리. 아니, 이제 보니 오빠는 교활한 면이 많아. 앞으로는 나도 아주 조심해야 되겠는데. 혹시, 수면제나 흥분제 같은 것은 안 갖고 다녀?”
“지랄!”
강한직은 뒤를 돌아봤다. 신설화의 표정이 궁금한 때문이었다. 설화는 달빛에 부옇게 떠오른 얼굴로 설원에서 쾌활하게 웃고 있었다. 한직은, 그녀도 어쩌면 둘만의 이런 은밀한 등정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한직은 설화에게서 즉시 몸을 돌려, 힘차게 앞으로 나갔다.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다. 강한직과 신설화는 미리 확인해 두었던 등벽로에 도착했다. 한직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말을 꺼냈다. 그러나 다소 장난 투였다. 그만큼 그의 마음은 풍선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던 것이다.
“등반 선배님께 특별 배려를 부탁합니다. 내가 먼저 저 정상에 오르도록 허락해 달라는 말씀입니다. 대신 내려올 때는 선배님을 앞세우겠습니다.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신설화는 강한직의 어깨에 한 손을 얹고 선언했다.
“알겠노라!”
신설화는 말을 마치고 양손으로 허리를 잡더니, 목젖이 훤히 드러나는 그 특유의 웃음으로 깔깔댔다. 강한직도 그녀를 향해 허허, 웃어 주었다. 그러나 마냥 좋아 웃고만 있을 일이 아니란 것을 그들은 곧 깨달았다. 그들의 앞에는 험준한 설벽이 떡, 버티고 있는 거였다.
강한직은 피켈을 휘두르며 등벽을 하다, 하켄을 박고, 카라비너로 자일을 연결하곤 했다. 그가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아도, 밑에서 설화도 그러고 있을 터였다. 이젠 그들 둘은 완전한 일심동체가 된 것이었다. 한직은 설화의 속살을 헤집으며, 그녀의 어느 지점에 도달해 가고 있다는, 묘한 착각에 빠져들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에 대한 죄스런 생각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을 붉히고는 하였다.
한참 후였다. 바위 지대가 나왔다. 거센 바람이 눈을 쓸고 간 흔적이었다. 강한직은 아이젠을 벗고 올랐다. 한 10m도 못 가서 이번에는 설벽도 빙벽도 아닌 어중간한 암벽에 다다랐다. 거기는 바위 위에 눈과 얼음을 살짝 발라 놓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아마도 난이도가 가장 높다는 7급은 될 터였다. 한직은 아이젠을 다시 신었다. 그래도 이동을 하는 데 무척 힘이 들었다. 게다가 날까지 저물고 있었다. 한직은 몇 시간쯤 죽을힘을 내서 싸워 겨우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강한직이 바위에 만들어진 고랑인, 한 꿀루와르의 하단에 서니, 출발한 이튿날 01시가 되어 있었다. 다른 팀이면 그곳까지 벗어나는데 9시간이면 충분한 것을, 그는 꼬박 하루를 잡아먹은 것이었다. 역시 등벽 경험이 부족한 탓이었다. 그러나 설화는 아무 불평도 안했다. 한직이 미안하여 밑을 보면, 그녀는 다만 걱정스런 얼굴로, 슬며시 미소를 짓고는 했었을 뿐이다.
강한직은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각자 식사를 끝내고, 여기서 눈을 좀 붙이자!”
“오빠, 맘대로 해!”
강한직과 신설화 목소리의 반향이 여기저기서 크게 우렁우렁 들렸다. 한직은 그것이 재미있었다. 그는 다시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오빠, 맘대로!”
“그래…… 너를, 캠프에 혼자 남아 있는 저 늙은 늑대에게서 빼내, 또한 그악스런 방해꾼들인 우리네 부모들로부터 너를 빼돌려, 너를, 내 맘대로 하고 싶다…….”
강한직은 앞에 버티고 있는 암벽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의 가슴에는 뭔가 안타까운 심정이 몹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한직은 그런 감정을 애써 삭이며, 꿀루와르의 우측 직벽에서 자일에 매달린 채, 단팥죽 한 봉으로 하루의 식사를 끝낸 다음, 잠을 청했다. 피곤하여서인 모양이었다. 한직은 부지간(不知間)에 눈이 스르르 감겨 오고 있었다.
강한직은 미명의 시간이 되어 눈을 떴다. 신설화는 이미 깨어 눈으로 양치질과 세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들을 마치고, 한직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이제 빨리 오늘 일을 시작하라는 뜻이었다. 한직도 약식으로 얼굴과 치아를 닦았다. 그는 수도 없이 많은 하켄을 박고 빼며 꿀르와르를 계속 올랐다. 한직은 팔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강한직은 한참만에야 꿀르와르를 벗어났다. 이제부터는 설벽과 빙벽의 연속이었다. 그는 천신만고 뒤에 그곳도 탈출할 수가 있었다. 그 뒤로 얼마간은 바위 지대가 꽤 이어져 있었는데, 거긴 조금 쉬웠다. 그 끝이었다. 90도 이상 깎이어 앞쪽으로 휘어진 암벽이 떡 버티고 있었다.
강한직은 등벽하기에 가장 어렵다는 삼각오버행으로 그 바위를 오르다 장갑을 떨어뜨렸다. 그는 맨손으로 바위를 타야 했다. 벗겨진 살가죽에서는 피가 흘렀다. 손톱이 다 빠질 지경으로 너덜거렸다. 한직은 사력을 다해 바위에 매달렸다. 그가 조금만 실수를 한다면 설화와 자신은 죽은 목숨이었다. 강한직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좋았다. 그러나 자신의 자일에 명줄을 걸고 있는 설화가 그래서는,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강한직은 이윽고 앞으로 숙여진 바위 끝에 올라 신설화의 자일을 끌었다. 덕분에 그녀는 손쉽게 그곳을 지날 수가 있었다. 잠시 후였다. 다시 빙벽이 나타났다. 한직은 피켈로 얼음을 일일이 깨 내며 홀드를 만들어 잡고 올랐다. 형극의 길이라 아니할 수가 없었지만 끝이 예정된 노정이었다. 또한 설화와 함께 하는 길이었다. 한직은 이를 악물며 더욱 힘을 쏟아 부었다.
오늘도 날이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강한직은 힘이 닿는 데까지 벽을 탔다. 그는 아이거를 등반할 때처럼 힘들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한편으로는 신을 내고 있다는 표현이 옳을 거였다. 이는 등벽에 대해 어느 정도 이력이 난 탓도 있었으나 무엇보다 설화가 곁에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한직은 역시 둘만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계속 팔과 다리를 움직였다. 설화도 그랬다.
위를 향해 오르는 단순한 반복 속에 또 하루가 끝나 가고 있었다. 그들이 캠프로 돌아갈 시간도 이미 지나 있었다. 지금 BC에서는 배 교수가 눈이 빠져라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신설화는 배 교수와 무선 교신을 시도하려고 했다. 그러나 벽이 전파를 차단하고 있어 통화가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이쯤에서 오늘의 등벽을 마쳐야 했다. 한직과 설화는 내일을 위해 이제부터 벽에 매달려 휴식을 취해야 했다.
해는 어김없이 밝아 왔다. 강한직은 정상을 보았다. 그 바로 아래 부분은 얼음과 눈으로 뒤덮여 있어 등반 속도가 무척 더딜 것 같았다. 예상대로였다. 그는 빙설과 싸우다 한참만에야 정상에 설 수 있었다. 한직은 서둘러 신설화의 자일을 끌어 올렸다. 드디어 설화의 손이 한직의 손에 잡혔다. 한직은 정상에 올라 우뚝 선 설화를 포옹했다. 설화는 이제 자신만의 존재였다. 그 누구도 방해할 사람이 없었다. 한직은 설화를 껴안은 채 몇 바퀴를 빙빙 돌았다. 그는 설화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설화, 사랑해!”
강한직은 여기서는 그런 말을 해도 괜찮을 듯싶었다. 전혀 어색하다거나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설화도 그런 모양이었다. 그녀는 환하게 웃더니 소리를 죽여 받았다.
“오빠…… 나도…….”
강한직은, 형언할 수 없는 어떤 감정으로, 가슴이 뿌듯하게 복받쳤다. 그것은 꼭이 정상을 정복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는 설화를 다시 껴안았다. 한직은 그녀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끝없이 펼쳐진 설원을 보았다. 아름다웠다. 아니, 신비스러웠다. 저녁노을이 지고 있어 더욱 그랬다. 한직은 설화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 배경을 등지고 선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직은 설화의 매혹적인 모습에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강한직은 설화의 입술을 보았다. 그녀의 붉고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 입술이 약간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직에게 참을 수 없는 어떤 충동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처음으로 설화와 길게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입에서는 귤 속처럼 싱그럽고 달콤한 향내가 났다. 그것은 꽤 오랫동안 한직의 입안에 여운으로 남아 있었다.
강한직은 설화의 등에 감긴 팔을 풀었다. 한직은 배낭에서 사진기를 꺼내 설화의 모습을 찍기 시작했다. 활짝 웃고 있는 피사체는, 한직의 카메라 안에 몇 번이나 갇혔다. 한직은 그녀에게 사진기를 건넸다. 설화도 카메라로 한직을 그렇게 했다. 융프라우 등정 기념 촬영을 마치자, 한직은 말했다.
“이제 그만 하산하자. 곧 날이 어두워질 텐데.”
“조금만 더 있어. 그냥 내려간다는 게 뭔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그건 나도 그래. 그러나 여기서 살 수는 없는 일이잖아?”
“하긴…….”
신설화는 할 수 없다는 듯, 이 산에 오를 때의 약속대로, 먼저 내려가기 시작했다. 강한직은 뒷걸음질 쳐 그녀를 따랐다. 융프라우 북벽의 중간 지점이었다. 한직은 몸을 지탱하고 있던 하켄이 빠지며 갑작스레 몸의 중심을 잃었다. 그는 설벽에 온몸을 비비대며 설화의 아래쪽으로 확 미끄러져 내렸다. 한직은 정신이 아득해 왔다. 설화는 자신의 자일을 잡은 채, 몸을 뒤로 젖히면서, 한직의 자일을 당겼다. 헛일이었다. 한직의 자일은 계속하여 슬슬 풀려 나가고 있었다. 그는 끝내 허공에 달랑, 매달렸다. 설화의 하켄도 중량을 이기지 못해 조금씩 뽑히고 있었다. 한직은 이제 둘 다 죽은 거라 생각되었다. 그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한직은 보조 자일에 매달린 잭나이프를 재빨리 꺼내 줄을 잘랐다. 그리고 동시에, 한직은 허공을 날았다.
융프라우 북벽의 중간을 조금 내려온 어느 지점이었다. 자일을 끊고 얼마간 낙하하던 강한직은, 다행히 분지처럼 된 거대한 눈 웅덩이에 떨어지며 정신을 잃었다. 한직은 서서히 몸이 얼어 가고 있었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강한직은 의식을 조금씩 회복해 가기 시작했다. 한직은 죽은 게 아닌가 하여,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며 눈을 떴다. 그의 위에 누군가가 있었다. 설화였다. 그들은 벌거벗은 채로, 눈과 서로의 방한복 사이에, 폭 파묻혀 있었던 것이다. 설화는 자신의 체온으로 밤새 얼어 가던 한직의 몸을 녹이고 있는 중이었다.
신설화가 강한직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죽어도 함께! 살아도 함께!”
강한직의 눈에 눈물이 조금씩 맺혀 들었다. 얼마 후부터였다. 한직의 몸에 설화의 체온이 제대로 전달되기 시작했다. 한직의 하체 한 부분이 화기를 머금으며 슬그머니 항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한직은 이를 악물며 어떤 욕망을 참아내고 있었다. 한직은 설화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때였다. 한 패거리의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배 교수들이었다. 배 교수가 질투심에 불타는 눈알을 번들거리며 구조대와 함께 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설화가 무전기로 배 교수에게 사고 지점을 알린 모양이었다. 한직은, 설화를 정겨운 눈으로 보며, 속으로 나지막이 외쳤다.
“아…… 나의, 융프라우…….” ■
첫댓글 세나님 덕분에 도서관이 부자됐슴다. 요즘 너무 바쁘고 경황없어 다 읽어보지 못하지만 꼭 모아뒀다가 읽을 겁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