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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41
요한계시록 11:3-6
두 증인
열려 있는 책을 먹은 요한 사도가 성전을 측량한 이유를 밝혀준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3절). “내가”라는 표현은 10:1 이하에서 “힘 센 다른 천사”가 요한에게 열려 있는 책을 주었는데 그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밝혀준다. 그러면 “두 증인”이 누구인가?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4절에서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라고 말씀하니까 해석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이단 사이비들이 교주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 주장하기도 하고, 죽음으로부터 살아난 역사적인 인물로 보는 이들은 에녹과 엘리야 또는 모세와 엘리야로 보며, 두 단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말세에 나타날 두 증인이라고 한다. 두 가지 원리로 주장하는 자들은 율법과 선지서, 혹은 율법과 복음, 또는 구약과 신약이라고 갖다 붙인다. 실제 5-6절에서 모세와 엘리야 사건을 언급하고 있기에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스가랴 선지서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2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잔대가 있는데 그 위에는 기름 그릇이 있고 또 그 기름 그릇 위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기름 그릇 위에 있는 등잔을 위해서 일곱 관이 있고 3 그 등잔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기름 그릇 오른쪽에 있고 하나는 그 왼쪽에 있나이다 하고(슥 4:2-3)
우리 성경에는 “촛대”라고 번역하였는데 ‘등잔대’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등잔대의 불을 밝히는 것은 감람나무, 즉 ‘올리브기름’이다. 하나님께서 스가랴에게 이러한 환상을 보여주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6)라고 하셨다. 그리고 등잔대 좌우의 두 올리브나무의 뜻이 무엇인가를 묻는 스가랴에게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슥 4:14)라고 답변하셨다.
“두 감람나무”는 직접적으로는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 왕적 통치자 역할을 하는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지칭한다.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는 왕과 제사장의 자리에서 새 성전을 짓는 역할을 하였다. 이런 점에서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에게 기름을 부어 세웠다고 말씀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기름 부음을 받을 자요 성전으로 오시게 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역할이었다. 그래서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성전을 짓는 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성전을 이루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영”, 즉 성령으로 이루신다는 의미이다. 왕이며 제사장적 지위를 가지고 완전한 증인의 역할을 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런 점에서 “두 촛대” 역시 1:20에서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라고 말씀한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기름 부음 받음으로 한 몸 되게 하신 교회를 의미한다. ‘일곱 등잔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온전히 성취된 완전한 교회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두 등잔’으로 증인의 역할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둘’이란 증거가 합법적으로 성립되기 위한 최소한의 증인의 수를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민 35:30, 신 17:6, 19:15, 마 18:16 등).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두고 하나님의 증인이라고 말씀하셨으나(사 44:8) 증인의 역할에 실패했다. 못 듣는 자들이요 맹인이었다(사 42:18, 43:8-10).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1:5)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우리가 증인이 되어 증인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는 명령의 말씀이 아니다. “내 증인이 되리라”라는 말씀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셔서 이루는 일이기에 약속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다는 의미이다. 이 말씀이 온전히 성취되었음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한 것이다. 결국 “두 증인”을 문맥상 표현으로 말하자면 요한 사도가 말씀의 기준으로 ‘측량한 성전’이다. 그러므로 ‘두 증인 = 두 감람나무 = 두 등잔대 =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이다.
그런데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었다고 말씀한다. 어떤 옷을 입었느냐 하는 것으로 그 사람의 지위나 역할을 드러난다. 헬라어 ‘삭코스’는 ‘염소털이나 낙타털로 만든 거친 천’으로 구약에서 굵은 베를 띠거나 굵은 베옷을 입어 회개에 의한 슬픔을 표현하였다(창 37:34, 삼하 3:31, 왕상 20:31, 왕하 19:1 등). 가죽 띠를 띤 엘리야(왕하 1:8)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 세례자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막 1:6 / 마 3:4)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막 1:4, 마 3:11)하였다. 이런 점에서 “굵은 베옷”은 낙타털 옷을 입은 세례자 요한과 같이 회개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적 역할을 의미한다.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라는 말씀은 앞일을 미리 알려준다는 뜻이 아니라 회개에 이르는 말씀을 선포한다는 의미이다. “천이백육십 일”은 이미 앞의 강론에서 나누었던 것처럼 성전을 짓밟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습이 왕성하게 드러나는 기간인 “마흔두 달”과 같은 기간이다. 즉 “마흔두 달”은 어둠의 영역에 속한 상태와는 대조적으로 빛의 영역에 속한 상태를 “천이백육십 일”로 표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증인이 회개의 말씀을 선포하는 역할을 나타낸 것이다. 이것이 성전을 측량한 이유이다. 그래서 10절에서 “두 선지자”라고 말씀한다. 즉 ‘두 증인 = 두 감람나무 = 두 등잔대 = 두 선지자 =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라는 뜻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4절)이라고 말씀한다. 교회는 하늘에 속한 존재로 이 땅에서 증인의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다음 본문에서 증인의 권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한다.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5절). 출애굽 때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분향하려고 하였다가 불로 심판을 받았다(레 10:1-2). 엘리야 선지자에 의해 아하시야가 보낸 오십부장이 하늘의 불이 내려져 죽었다(왕하 1:10-12). 예레미야 선지서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이 말을 하였은즉 볼지어다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을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을 나무가 되게 하여 불사르리라(렘 5:14)
구약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불이 사람을 죽이고 태우는 것으로 나타내셨다. 이런 점에서 입에서 불이 나와 원수를 소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말씀이 “불”이라는 의미이다. 증인의 선포를 받아들이지 못한 자는 이미 죽음 가운데 있는 상태임을 드러낸다.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6절). 엘리야 선지자 때 일어난 일이고, 물이 변하여 피가 된 것은 애굽에 내려진 재앙이다. 이런 일은 엘리야나 모세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일이다. 엘리야나 모세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말씀을 선포하였던 것처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존재이다.
“하늘을 닫아”라는 표현은 하늘의 진리가 주어지지 않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하늘의 문은 이미 열려 있다(4:1). 그러나 죄인들은 자기 죄로 인하여 말씀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그것이 심판 아래 있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씀하는 “원수”란 나의 원수가 아니라 십자가의 원수이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18-19)
빌립보서 3장 초두에 보면 몸에 할례를 행하여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하여 경계하면서 그들은 육체를 신뢰하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육체를 신뢰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바울 자신은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으로 누구 못지않게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지만 그리스도를 얻었기에 그 모든 것이 배설물이라는 것을 고백하였다. 결국 율법으로 행하는 그 모든 것이 십자가의 원수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도 보자면 성전을 근거로 율법을 행하고자 하는 자를 성전 자체가 되도록 만드신 것이 구원이고 생명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가 먼저 성전을 측량한 것이고 그 측량된 성전을 두 증인으로 말씀한 것이다. 반면 하나님의 대적자, 거짓 선지자들은 예수, 복음을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변개하여 우리의 행위를 부추기는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을 전한다. 그것이 십자가의 원수이다. 원수는 하나님의 말씀이 심판하신다. 아니 이미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이 십자가로 온전히 다 드러났기에 말씀에 의해 성전 된 자와 아닌 자, 교회 된 자와 아닌 자로 구분되어 드러나게 되어 있다.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17-21)
우리는 주성교회 교인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인가? 그저 주성교회에서 말씀을 나누는 것이 재미있고 그 말씀에 심취해서 성경을 공부하는 것에 모든 관심이 집중된 상태인가? 십자가에 날마다 죽고 살아남의 은혜를 입은 증인인가? 우리가 어떤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의 본질,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확인하자는 뜻이다.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이라는 말씀대로 이 땅에 있지만 우리의 정체성, 본질이 하늘에 속한 자로 살고 있는가를 말씀으로 확인하는 것이 우리 모임의 의미라는 것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일 1:1-4)
오늘날 교회가 대형 교회로 성장한 것은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하여 인간의 죄를 지적하고 폭로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작은 교회에서 자신을 다 노출시키는 것보다도 큰 교회에 숨어서 교회 생활하고자 하는 수평 이동이 많다. 그래서 말씀을 선포함으로 말씀이 갈라놓도록 해야 하는데 교회 성장이 목표가 되어 말씀을 전하지 않은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커져야 하고 발전해야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으로 드러나고 있는 상태인가 하는 것이 관심사여야 한다(20230625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