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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에서 쿠알라룸푸르를 거쳐 돌아오며>
일행은 그랜드 바자르를 출발해서 이스탄불 아타튀르크국제공항에 도착(12:30)했다. 터키로 올 때와 마찬 가지로 이곳을 떠날 때도 싱가포르를 통해서 온 2명은 일행과 같이 행동할 수 없었다. 그들은 오늘 하루 호텔에서 더 자고 내일 출발한다고 했다. 일행은 그들과 함께 터키여행을 계속 안내해준 알리와도 작별인사를 했다.
일행이 인천공항에서 짐을 붙이고 항공권을 받을 때는 단체로 했는데, 이스탄불에서 인천으로 올 때는 개인별로 했다. 나는 락규 뒤에 서서 기다렸는데, 담당자인 항공사 여직원의 처리는 우리나라와 비교해서 늦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차례가 와서 수속을 받았는데, 그녀는 핸드폰으로 아들과 전화를 하며, 일을 처리했다. 락규가 “아들이냐”고 묻자, 그녀는 웃으며 “그렇다”고 했다. 그녀는 락규와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나는 항공권 2장(이스탄불->쿠알라룸푸르, 쿠알라룸푸르->인천)과 짐표를 받아 들고 입국수속을 끝내고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14:00).
<이스탄불 아타튀르크국제공항 항공사의 여직원과 락규>
<이스탄불 아타튀르크국제공항 풍경>
안에 들어간 우리는 아직 시간이 있어 점심을 먹기로 했다. 주머니에 있는 터키 돈(리라)을 몽땅 털어서 피자와 빵을 사서 점심으로 때웠다. 일행(31명)은 비행기에 탑승해서 터키를 떠났다(15:10). 비행기가 이륙해 고도를 잡자, 기내식이 나와 저녁을 먹고 잠을 청했다.
자고 있는데, 갑자기 불이 켜졌다. 이제 말레시아에 도착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아침으로 간단한 기내식이 나와 그것을 먹고 조금 시간이 흐르자, 쿠알라룸푸르국제공항에 도착(현지시간 06:30)했다.
짐은 다음에 갈아탈 비행기에 자동적으로 옮겨 실리므로, 일행은 작은 가방만 들고 올 때 기다렸던 공항 안으로 들어왔다. 일행 29명은 쿠알라룸푸르 시가지 관광을 위해서 밖으로 나간다고했다. 나는 쿠알라룸푸르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어서 공항에서 기다리겠다고 하자, 락규도 나와 같이 있겠다고 했다. 그러자 올 때 이곳에서 맥주를 같이 마셨던 일행이 나에게 스튜어디스에게 얻었다며 맥주 2깡을 건네주었다. 다른 일행은 안주를 주었다.
우리는 공항 2층의 라운지에 자리 잡고, 편안히 TV를 시청했다. 공항에는 지하도를 건너기 전의 건물에 3개의 라운지(뉴스, 스포츠, 영화)가 있었다. 의자는 푹신한 고급의자로 1인용과 2인용이 적당히 놓여 있었다. 나는 2인용의자 한쪽에 작은 배낭을 놓고 비스듬히 누워서 시청했다. 그런데 라운지마다 여러 대의 TV가 있었는데, 모두 삼성전자였다. 나는 우리의 국력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영화를 보다 말고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잠이 깨어 옆을 보았더니, 락규도 자고 있었다. 항공기에서 잠을 잤음에도, 지금이 터키에서는 잘 시간이어서 벌써 그곳에 길들여져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이것이 시차적응의 어려움이리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라운지에는 “여러분의 편안을 위한 의자입니다. 그러나 자지는 마십시오.”라는 영문 글씨가 있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벌써 점심시간이 훌쩍 넘어 있었다. 우리는 옆에 있는 “버거킹”에 가서 햄버거를 시켜 일행이 준 맥주와 같이 먹었다. 영화는 계속 다른 것이 나왔으나, 계속 보기 힘들 때는 저쪽에 있는 스포츠 라운지나 공항 이곳저곳을 살펴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 때 락규가 공항을 한 바퀴 돌아오면서 일행 중 돌아온 한 명을 만났는데, “시내에 나가니, 갈 곳이 마땅치 않아서 일행 대부분은 쇼핑을 하거나 마사지 숍에 들어갔는데, 이곳에서 기다리는 것이 더 좋았다.”고 했단다.
나도 기다리는 것이 심심하고 지루했다. 여행일 중 하루는 완전히 이곳에서 허송세월을 보낸다는 생각도 들었다. 락규의 배낭에 있던 카페에서 나누어 준 가이드북을 빌려 그것을 모두 읽었다.
저녁시간이 되어 락규와 간단히 요기를 하고, 애꿎은 TV만 눈이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아무리 기다리기 힘들어도 시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흘러갔다. 전광판에 일행이 타고 갈 비행기와 게이트가 뜬 것을 보고, 작은 배낭을 메고 공항구내열차를 타고 게이트로 갔다.
그곳에 가니 일행 대부분이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둘이만 있다가 그들을 만나니 반가웠다.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기다리다가 비행기를 타고 쿠알라룸푸르국제공항을 출발(23:40)했다. 낮에 잤기 때문인지 한 숨 자고나자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이번 터키여행을 반추해 보았다.
터키공화국은 북위 35~42도, 동경25~45도로 아시아대륙의 서부이자 유럽대륙의 남동부에 위치하고 있다. 지중해, 에게해, 흑해와 다르다넬스해협, 보스포루스해협 등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며 불가리아, 그리스, 시리아, 이라크, 이란, 아르메니아, 그루지아 등 7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면적은 779,452제곱Km로 남한의 약 8배이고 동서 1,600Km, 남북 550Km이며 인구는 약7,653만 명이다. 터키가 자리한 아나톨리아고원은 아시아와 유럽의 접경에 해당하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고대부터 수많은 왕국이 역사에 등장하고 사라졌다. 히타이트, 프리기아, 우라르투 등 고대왕국과 그리스 도시국가 등 다양한 민족과 문명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중동의 젖줄인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이 아나톨리아고원에서 발원한다는 것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권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터키나 이스탄불과 같이 한 나라는 물론, 한 도시가 두 개 대륙에 걸쳐 있는 곳도 여기밖에 없다.
터키를 여행하면서 다양한 기후풍토와 옛 어른들이 만들어낸 엄청난 유적들을 보았다.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민족이나 타국간의 전쟁에 의해서 훼손된 유적들을 볼 때마다 가슴 아팠다. 특히 그리스, 로마 및 이집트의 신상과 신전들인 헬레니즘문화권을 장악한 전쟁의 승자들이 지진이나 전쟁으로 무너진 신전 등의 석재를 가져다 자기들의 성당이나 자미 및 성채 등을 지은 것이 안타까웠다.
어떤 사람이 볼 때에는 다 무너지고, 돌덩어리와 돌기둥 몇 개만 남았다고 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들이 기원전에 석재로 이와 같은 조각을 남기고 엄청난 신전과 도시를 건설했다는 것이 무척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는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지금처럼 기계로 하지 못하고, 모두 손으로만 했다고 생각하니 그저 엄청나다는 느낌만 들 뿐이었다.
카파도키아는 자연이 만들어낸 예술품이지만, 신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바위를 파고 지하도시나 바위동굴에서 생활한 사람들이 눈에 어른거렸다. 아무리 바위가 무르다고 해도 흙보다 무척 단단하리라는 것은 어린아이라도 쉽게 알 수 있으리라. 그들이 무슨 사유로 이곳에서 생활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 때로서는 어쩔 수없는 사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가하면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것은 우리와 같았으나, 해상교역이 번창할 때는 지중해에서 흑해로 들어가거나 나올 때는 반드시 다르다넬스해협과 보스포루스해협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 때문에 해협 좁은 곳에 요새가 들어서고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 되어 서로 이곳을 탐냈으리라.
한편 해상무역이 쇠퇴했지만, 터키공화국이 되면서부터 요새 등은 중요 관광지가 되었고, 해변 및 언덕에 자리 잡은 주택과 숲들은 푸른 바다와 어울려 너무나 아름다운 경관을 인간들에게 선물했다. 이 때문에 일행도 유람선을 타고 보스포루스해협을 돌아보지 않았는가. 생각하면 끝이 없었다.
이번 여행에서 특별히 생각나는 것을 되돌아보니, 다음과 같았다.
첫째, 오스만제국의 첫 수도인 “부르사”를 방문한 것이다.
오스만제국은 아시아, 유럽 및 아프리카 등 3개 대륙을 장악한 대제국이었다. 그러나 이 대제국이 첫 수도로 택한 곳이 부르사였다. 이 때문에 이곳은 오스만제국 초대 술탄 5명의 무덤과 울루자미 등 터키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었다. 이런 곳을 방문해 그들의 유적을 본 것이 마음에 들었다.
둘째, 이스탄불의 “보스포루스해협”일부를 유람선을 타고 돈 것이다.
보스포루스해협은 이스탄불시내를 유럽과 아시아로 갈라놓는 경계선이다. 지금은 두 개의 다리가 있으나, 그전에는 배로 통행했을 것이다. 해변을 따라 이어지는 언덕에는 바다와 숲, 그리고 나무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주었다. 대포를 쏘았을 요새도 지금은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셋째, 책에서만 보았던 “성 소피아성당”을 직접 본 것이다.
이스탄불을 상징하는 건물 중 하나로, 비잔틴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이었다. 그 규모도 엄청 컸지만, 기독교의 상징인 모자이크화(성화)가 많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오스만제국이 들어서면서 밖에는 4개의 미나레가 서고, 안에는 코란을 쓴 금문자가 많이 걸려 있었다. 처음의 성당에서 자미로 되었다가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갖은 풍상을 견데 내고, 아직까지 꿋꿋하게 서 있다는 것이 보는 이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넷째, “톱 카프궁전”을 돌아본 것이다.
여행 운영자는 톱 카프궁전이 별로 볼 것이 없어 보스포루스해협을 돌아보는 것으로 바꾸었다고 했다. 물론 보스포루스해협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이 궁전은 오스만제국의 술탄 18명이 살면서 세계를 주름잡던 곳이 아닌가. 이스탄불에 와서 이곳을 보지 못했다면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할 것 같았다. 다만 시간이 없어 보물전시실과 하렘을 보지 못한 것이 무척 아쉬웠다.
다섯째, 전통가옥이 잘 보존된 마을 “사프란볼루”를 본 것이다.
실크로드의 주요 통과지점이었던 사프란볼루는 교역의 요충지로 발전했으나, 실크로드무역이 쇠퇴함에 따라 같이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 때문에 오스만제국 시대의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있게 되었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 있다고 했던가.”이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관광객을 하루 푹 쉬게 해주는 곳이었다.
여섯째, 앙카라의 “아나톨리아문명박물관”을 본 것이다.
앙카라 성 남쪽에 위치한 박물관으로 아나톨리아고원(소아시아)에 등장했다가 사라진 나라들이 남겨 놓은 유물을 전시하고 있었다. 석기시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연대순으로 잘 전시해 놓았으며, 세계적으로도 귀중한 유물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이다. 여기에는 학창시절에 배웠던 유물들이 여러 개 있어 실물을 본 즐거움이 컸다.
일곱째, “소금호수”를 본 것이다.
우리나라는 신안 등에서 소금이 나오나, 염전을 만들어 소금을 생산하는 것이다. 하지만 앙카라에서 카파도키아로 가는 길옆에 있는 소금호수는 달랐다. 여기도 우기인 겨울에는 소금이 녹아 염호가 되지만, 지금은 건기이고 한 여름이라 호수가 뜨거운 햇빛으로 인해 소금으로 뒤덮여 있었다. 여기는 별도의 염전이 필요 없고, 그저 포대에 쓸어 담아 불순물만 제거하면 끝이었다. 우리는 왜 이런 곳이 없을까.
여덟째, “카파도키아”는 기암괴석과 함께 인간의 한계를 의심케 했다.
카파도키아의 아름다운 바위들은 익히 알고 있는 사항이다. 그러나 바위가 파기 쉽다고는 하지만, 굴을 뚫어 교회나 주택을 만들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지하 8층에 2만 명이나 살았다는 지하도시를 만든 것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그 안에는 교회, 학교, 포도주양조장 등이 있었다니 할 말을 잊었다.
아홉째, “메블라나 교단의 발상지”콘야를 돌아본 것이다
콘야는 이슬람 신비주의 교파인 메블라나 교단이 창시된 곳으로, 수피즘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수피즘은 일반적으로 검소, 청빈, 금욕을 실천하는 이슬람이다. 그들은 내면적으로 직접 신과 소통하기 위해 선무를 춘다. 종교색이 강한 도시여서, 이곳에 한 번 오고 싶었던 것이다.
열째, 시데의 “아폴론과 아테나신전”을 본 것이다.
모두 무너지고 기둥만 5개 남아 있는 신전으로, “로마시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이집트)가 목욕을 하고 석양을 바라보았다”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특히 석양이 빛날 때의 신전은 붉게 물들어 수많은 연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곳이란다. 비록 한 낮에 보았지만, 이곳에 왔다갔다는 것이 마음을 들뜨게 했다.
열한째, “안탈리아박물관”을 본 것이다
터키에서 가장 중요한 고고학박물관 중의 하나로 인근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선사시대부터 오스만제국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전시되어있다. 특히 로마황제와 그리스 신들의 석상 및 석관들이 있었다. 신상들은 대부분 훼손된 것이 많았으나, 석관은 정교하고 화려하게 조각된 것이 많았다. 여기의 신상들은 미술시간에 많이 본 것들이었다. 다만 인근에 있는 고대도시인 페르게와 아스펜도스 등을 못 본 것이 아쉬웠다.
열둘째, 리키아 암벽무덤이 있는 “미라”를 찾은 것이다.
미라는 고대 리키아 암벽무덤이 잘 남아 있는 곳으로, 산 하나의 암벽 전체가 무덤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늘에 가까이 있을수록 더 빨리 부활한다고 믿어서 지위가 높을수록 정상 가까이에 무덤을 만들었다. 복구한 것이었지만, 원형경기장이 암벽무덤 옆에 있는 것도 특이했다. 또한 산타클로스의 모델인 성 니콜라스 교회를 보았다. 처음 보는 것이라 모두가 신기했다.
열셋째, “파타라유적지”를 돌아본 것이다.
고대로부터 발달한 도시였지만, 유적은 로마 비잔틴시대의 것이었다. 차를 타고 들어가는 입구에 개선문, 네크로폴리스(공동묘지), 물 공급소, 궁전, 바실리카 등이 있었으나, 버스는 곧바로 목욕장, 중심가로 및 시장, 리키아연맹 의회당인 오데온 및 원형경기장이 있는 곳으로 가서 거기만 봤다. 나는 빨리 걸어 모두 봤지만, 체계적으로 보았으며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넷째, “석회층”과 “히에라폴리스”가 있는 파묵칼레를 본 것이다.
하얀 석회층이 목화솜이 만들어 낸 성 같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목화의 성”이란 뜻의 파묵칼레가 되었다. 내가 보기엔 눈, 얼음, 소금호수 같기도 했다. 어쨌든 세상에 여기 밖에 없는 멋진 곳이었다. 또한 히에라폴리스라는 거대한 고대도시유적이 있음에도 시간이 너무 짧은 것이 아쉬웠다.
열다섯째, 고대 2대 신탁지의 하나인 “디딤의 아폴론신전”을 본 것이다.
이곳은 거대한 아폴론신전이 있던 밀레투스의 신전도시였다.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신전과 더불어 신탁을 하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기둥 2개만 신전을 지키고 있었다. 몇 명은 개인적으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으나, 대부분의 일행은 밖에서만 보았다. 다음에 다시 온다는 보장이 없는 한, 신탁을 하던 곳(상당히 보전이 잘 되었음)에 들어가 보는 것이 좋았을 것 같았다.
열여섯째, “보드룸 성”을 본 것이다.
이 성은 보드룸을 상징하는 것으로, 십자군이 건설한 것이었다. 학창시절에 십자군전쟁에 대해서 배웠는데 그 현장을 본 것이다. 십자군이 보드룸을 점령해 이 성을 지으면서 필요한 석재를 지진으로 무너진 근처의 “마우솔루스 영묘”에서 가져왔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는 승자의 전리품이리라. 지금은 박물관으로 변했지만, 모처럼 그곳에 간 이상 고대 7대불가사의 중 하나인 마우솔루스 영묘를 보지 못한 것이 몹시 서운했다.
열일곱째, 고대 로마의 도시유적지인 “에페스”를 돌아본 것이다.
터키 전역을 통틀어 양과 규모면에서 가장 큰 최대의 유적지였다. 일행은 언덕 위인 남문에서 출발해 바다 쪽인 언덕 아래의 북문으로 내려오면서 돌아보았다. 약 3Km를 걸어 왔는데 거의 빈틈없이 유적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안내자의 설명을 들었으나, 꼼꼼하게 전부를 설명해 주지 않아서 나름대로 동분서주했지만 거의 모든 것을 본 것 같아 기뻤다.
열여덟째, 베르가마의 아크로폴리스를 본 것이다.
헬레니즘 문화의 꽃이라고 불리던 페르가몬왕국의 중심지로, 베르가마의 뒷산 전체가 유적지였다. 제일 위에는 궁전, 신전 및 왕족과 고관들이 살았던 윗 도시가 있었다. 그 밑에는 중간도시가 있고, 제일 아래에는 아래도시가 있었다. 시간이 없어 중간도시까지 갔다 왔지만, 그 높은 곳에 성을 쌓고 상수도시설을 한 것이 놀라웠다.
열여덟째, 트로이 유적을 돌아보면서 느낀 점이다.
트로이 전쟁에 대해서는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어드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만약 일리어드가 없었다면 트로이는 세인의 관심 밖이었고, 잘 알려지지도 않은 작은 전쟁터의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100년 이상 발굴을 해서 9기까지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따라서 트로이는 터키에 가면 당연히 찾는 단골코스가 된 것이다. 하지만 막상 가보니, 무너진 곳에 다시 도시를 세워서 중첩된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관광객이 찾는 것은 일리어드라는 문학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열아홉째, 비행기를 갈아타는 공항에서 기다리는 시간을 줄이는 것이다.
터키로 갈 때에는 쿠알라룸푸르에서 6시간 정도 기다렸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으나, 올 때는 얘기가 달랐다. 17시간 이상을 그것도 아침부터 밤중까지 17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 날짜도 하루를 소비하지만, 기다리기가 너무 지루했다. 앞으로 이와 유사한 일이 없기를 바라며, 만약 생긴다 해도 별도의 대책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생각을 마치고 쉬고 있는데, 머지않아 인천공항에 도착한다고 했다. 우리 영공에 들어오자, 하늘은 잔뜩 찌프려 있었다. 그래도 해는 떴고, 일행은 인천 영종도국제공항에 도착(07:00)했다. 비행기에서 내려, 짐을 찾는데 다른 사람 것은 모두 나왔으나, 우리 것은 나오지 않았다. 일행과 작별인사를 하고, 한참을 기다리자 배낭이 나왔다. 대단히 반가웠다. 우리는 좀 기다리다 버스를 타고, 부천 락규집으로 향했다.
<우리 영공에 들어선 후의 구름 낀 하늘 풍경 1>
<우리 영공에 들어선 후의 구름 낀 하늘 풍경 2>
지금까지 저의 터키 자유여행기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려요. 이 글은 제가 보고, 듣고, 알고, 느낀 것을 중심으로 썼기 때문에 함께 여행하신 분들이라도 관점의 차이 때문에 다를 수가 있겠지요. 함께 여행하지 않고, 다른 팀이나 개인적으로 터키를 여행한 분이라면 같은 곳에 갔더라도 다른 느낌을 받을 수도 있었고요.
저는 어디든 갈 때마다 여행기를 쓰지만, 점점 쓰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행 가기 전에 책을 사보기도 하고, 인터넷을 뒤지기도 하지요. 그러나 외국말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다르게 쓰기도 하고, 통계자료도 기준연도가 틀리기 때문인지 다른 경우가 있어요.
특히 인터넷에 나온 자료는 서로 너무나 다른 것이 많아 될 수 있는 한 사용하지 않는 편이지요. 인터넷에 나온 자료는 별도의 검증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하지 않고, 자기가 아는 대로만 쓰기 때문이겠지요.
여하튼 현장을 다니면서 보고 사진을 찍으며, 여러 가지 자료를 살펴서 여행기를 쓰려고 노력했어요. 가능하면 보고 느낀 것을 쓰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통계자료는 내가 아는 것 중에 가장 최신 것을 사용했어요.
이 여행기가 함께 여행한 분들께는 심심하거나 궁금할 때 다시 찾아보는 추억의 상자로 활용하시고, 터키를 알려거나 앞으로 가실 분들에게는 하나의 참고 자료가 된다면 제가 글 쓴 보람을 느낄 것 같아요.
끝으로 이번 터키여행을 계획하고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노력을 아끼지 않은 천년친구에게 감사드려요. 그리고 힘든 일정과 무더운 환경 등에 잘 적응하면서 여행을 함께한 여러분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해요. 이상으로 이번 여행기를 끝내면서 다시 한 번 저의 여행기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려요.
여러분 감사합니다! 그리고 건강하세요!!!
첫댓글 터키 여행이 끝났군요. 여행기의 간추린 내용은 세계역사와 지리 교과서의 요점 같았습니다. 여행의 즐거움속에 많은 고생하시고 여행기 작성 하시느라 많은 노력 하신 덕분에 읽는 사람은 편하게 재미와 흥미 있게 볼수 있었습니다. 특히 노산pc카패에 올려주셨심을 감사드림니다.
산죽님이 계속 댓글을 달아주어서 힘이 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