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소개할 책은 민음사에서 출판한 황정은 작가의 장편소설 『백의 그림자』입니다.
저의 허섭한 설명보다, 제가 흠모에 마지않는 신형철 평론가의 작품해설을 인용하겠습니다.
이 소설을 몇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도심 한복판에 사십 년 된 전자상가가 있다. 상가가 철거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곳을 터전 삼아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내력이 하나씩 소개된다. 그 와중에 이 소설은 시스템의 비정함과 등장인물들의 선량함을 대조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과연 살 만한 곳인지를 묻는다. 이 소설을 두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이 소설은 우선 은교와 무재의 사랑 이야기로 읽힌다. 그러나 이 사랑은 선량한 사람들의 그 선량함이 낳은 사랑이고 이제는 그 선량함을 지켜 나갈 희망이 될 사랑이기 때문에 이 소설은 윤리적인 사랑의 서사가 되었다. 이소설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이 소설은 사려 깊은 상징들과 잊을 수 없는 문장들이 만들어 낸, 일곱 개의 절로 된 장시다. 이 소설을 한 단어로 정리하면 이렇다. 고맙다. 이 소설이 나온 것이 그냥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짧은 글에서 이 모든 것들을 다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 소설로 들어가는 많은 문 중 다섯 개를 골라 하나씩 열어 보려 한다 - 174쪽 작품해설 中
다음으로 소개할 책은 황매에서 출판한 오사키 요시오新潮文庫 작가의 소설 『9월의 4분의 1九月の四分の一』입니다.
제가 15년도 3개월간 읽은 책 중 단연 최고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 책엔 '보상 받지 못한 엘리시오를 위해', '켄싱턴에 바치는 꽃다발', '슬퍼서 날개도 없어서', '9월의 4분의 1' 이렇게 4가지 다른 소설이 담겨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고, 어느 하나 흥미롭지 않은 부분이 없습니다.
저는 오사키 요시오 작가의 소설을 이번에 처음 읽었습니다. 이 책에 담긴 네 개 소설의 공통된 특징을 꼽자면, 첫째는 음악입니다. 각 소설은 각기 다른 가수의 노래를 반복해서 언급합니다. 그것은 각 작품의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연출합니다. 둘째는 색 표현입니다. 우리가 책을 통해 실제 보는 것은 검은 글씨와 흰 바탕 뿐이지만, 이 소설은 단순히 '다양한 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색을 다양하게 표현하여, 독자가 풍경을 상상하는 것을 가능케합니다. 마지막 셋째는 작중 인물의 직업입니다. 모두 '글'과 관련된 일, 대개 교정작업을 업으로 삼고 있는 인물이 주를 이룹니다. 그들은 매순간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실험을 하고 그것을 그대로 글로 옮기는 듯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말과 사고의 과정을 읽는 것만으로 긴장감을 느끼게 하고, 리듬감을 즐길 수 있게 만듭니다.
묘지와 공원의 경계선에 이르렀을 때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소하치의 묘비를 돌아보았다. 고요하고 따스하게 펼쳐져 있는 무채색의 공간 속에, 진홍의 장및꽃다발만이 선명한 색채를 뿌리며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씩 멀어짐에 따라서, 그 붉음도 빨려 들어가듯 흑백사진의 풍경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완전히 잠겨버렸다. 104쪽
깊은 어둠 속에 조각상들이 가득 서 있었다. 빛을 받아 도드라진 그 몸체들을 보고 있다가 나는 문득 생각했다. 저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고 어떤 의미를 전해주기 위해 저기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거기에 머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조각상의 의미는 그 공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고, 나는 그저 그 존재를 느낄 수만 있으면 둘의 관계는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41쪽
게시판이 오랜 시간 정전이기에, 되도 않은 책 추천을 해봤습니다. 예전에는 소설책 읽는 것에 반사적인 거부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다 읽기모임 IMSI 이후엔 놀랍게도 제가 찾아서 소설을 읽게 되더군요. 두 책은 소설을 찾아 읽다 발견한 책들입니다. 여건이 되신다면 다른 조합원 분들도 읽어보시길. 안녕. 뿅.
첫댓글 소개~~ 고맙습니다**
꼭 찾아 읽어볼게요. 가장자리에 대한 영훈샘의 애정이 느껴지는 글 ^^*
두권의 소설을 소개받은 것도 반갑고 영훈씨의 좋은 소개글은 더 반갑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