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대종사
탄허(呑虛 1913년 ~ 1983년) 본관은 경주, 법명은 택성(宅成:鐸聲), 법호는 탄허(呑虛) 속명은 김금택(金金鐸), 고전과 역경에 능통하였다
탄허는 전북 김제 만경에서 유학자였지만 천도교 신자로 개종한 항일 독립운동가 율재 김홍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3세까지는 정읍의 증산교의 일파 차천자교(車天子敎)에 있는 서당에서 한문과 서예를 배웠고 1918년부터 1928년까지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득도하겠다고 결심한 후 1929년에는 충남 보령으로 옮겨 14세 때 충청도 기호학파 최대 유학자인 면암 최익현의 문하 이극종으로 부터 사서삼경을 공부했다.
1934년 22세에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후 3년간 묵언 참선의
용맹정진으로 수행했으며, 15년간 오대산 동구 밖을 나오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탄허는 어려서 사서삼경과 노장사상을 두루 섭렵한 후 1934년부터 새벽 2시가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 반드시 참선을 하고 경전을 읽었다고 한다.
이를 입적하기 전까지 49년간 한결같이 했는데 한암선사에게 정식으로 승려가 되겠다고 삭발을 하면서 선사는 제자에게 삼킬 탄(呑) 빌 허(虛) 탄허 라는 법명을 하사했다.
이미 가문의 중매로 16세에 결혼해 자식을 뒀던 탄허는 승려가 되기 전 학문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고 한다. 책이 없어 주역(周易)을 공부하지 못하다가 처가에서 소를 팔아 주역을 사주자, 집에 돌아오지 않아 글방을 방문해 보니 흡사 미친 듯 춤을 추며 큰소리로 책을 읽고 있었다. .
탄허는 당시 주역을 손에 들고 500독(讀) 하였다고 전한다.
오대산에 일찌감치 학승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불경 번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고 힘찬 필력의 붓글씨와 비명, 계첩 등으로도 세인들의 화제가 되었다.
해방후 함석헌과 양주동은 탄허스님으로부터 장자 강의를 들었다고 전하는데 양주동은 1주일간 장자 강의를 듣고 탄허에게 오체투지로 절까지 했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 양주동은 탄허를 가리켜 장자가 다시 돌아와 본인 책을 설해도 오대산 탄허를 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그 학문적 깊이에 탄복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가장 현실적이며 직법적인 예언으로 유명한 탄허는 여러 경로를 통해 인류와 지구의 미래에 관해 언급하고 무엇보다도 주역의 원리에 의거해서 세계열강들의 관계와 미래상을 예측 하였으며, 변화될 세계상으로 자연재해와 핵으로 인해 전 세계가 70% 정도의 타격을 입을 때 한국도 피해를 보나 한국이 세계사의 주역으로서 우뚝 서게 될 것임을 주장하였다
월정사 조실(祖室), 오대산연수원 원장으로서 승려들을 지도했고, 1964년부터 1971년까지 동국대학교 대학선원 원장을 역임했다.
1967년 조계종 초대 중앙역경원 원장을 지내면서 팔만대장경의 한글 번역작업에 직접 투신, 한글대장경 간행에 공을 세웠다. 동양철학에 해박한 지식을 지닌 그는 해외의 석학들을 위해 일본 도쿄대학의 동양학 세미나에서 화엄학 특강을 했다.
또한 타이완 국립타이완대학교의 심포지엄에서 비교종교에 대한 특강을 하여 세계적인 석학으로 추앙받았다. 1983년 오대산 월정사 방산굴(方山窟)에서 세수 71세, 법랍 49세로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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