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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삼태극 원문보기 글쓴이: 서울사나이
○ 침류왕과 진사왕의 상쟁
귀수대왕이 열도원정 중에 384년 2월에 전사하고, 침류왕 몰 385년 6월, 고구려 영락대왕 즉위 391년 5월, 진사왕 몰 392년 7월로 되어있다. 귀수대왕이 근강전투에서 전사한 후에 침류왕은 열도에서 가야군에게 발이 묶여 384년에는 본국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본국에서는 이복동생 진사가 왕위에 오르고 그러다가 서기 385년 침류왕은 열도 담로도에 아들 아신만 남겨두고 귀국을 시도하다가 진사왕과 가야군의 협공을 받아 열도까지 쫓아온 진사왕에게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야마구찌현 풍포에서 잡힌 침류왕은 자결을 강요당했다.
서기 중애기 2년 3월조에 침류왕이 열도로부터 귀국하는 상황이 아래와 같이 실려 있다.
『천황은 남국을 순수했다. 이때 황후 및 백료는 머무르게 하고 두셋의 경대부와 수백의 관인을 따르게 하고는 가볍게 떠났다. 기이국에 이르러 덕늑진궁에 머물렀다. 이때 웅습이 반하여 조공하지 않았다. 이에 천황은 웅습국을 치려고 하였다. 그래서 덕늑진을 출발하여 해로로 혈문(穴門)으로 갔다. 당일로 사람을 쯔누가[角鹿]에 보내어 황후에게 칙하여 "곧 그 항구를 출발하여 혈문에서 만나자"고 했다』
동년 6월조에 『천황이 풍포진에 정박했다. 황후는 각록을 출발해서 정전문(渟田門)에 도착하여 배 위에서 식사를 했다. 그때 다히[海즉魚]가 배 옆에 많이 모였다. 황후가 술을 다히[즉魚]에게 부었더니 다히들이 취해서 떠올랐다. 그때 어부들이 고기를 많이 잡아 기뻐하며 "성왕이 상으로 주신 물고기다"라고 했다...』
동년 7월조에 『황후가 풍포진에 정박했다. 이날 황후는 바다 속에서 여의주(如意珠)를 얻었다』
중애천황은 침류왕을 등재한 인물이다. 남국을 순수했다는 것이 백제기준으로 남쪽인 열도에 발이 묶여있었다는 뜻이다. 측근 몇 명과 수백 명의 호위군사만 거느리고 가볍게 떠났다는 것이 담로도에 아들 아신을 남겨두고 본국으로 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수백이라는 것도 군사수를 대폭 줄인 것으로 보인다. 가야군과 전장에서 대치하다가 귀국하면서 수백 명만 데리고 귀국하려고 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덕늑진은「옛날부터 지금의 와까야마[和歌山]시라는 설이 있다<일본서기/암파문고/2000년/권2/125p/주14>」라고 하는데 아닐 듯하다. 침류왕은 귀수대왕이 근강전투에서 전사한 후에 중주(=대화지방)에서 담로도로 물러가 있다가 아들 아신의 증원군이 오자 같이 있다가 귀국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이 응신을 재등재한 서기 계체기 10년 9월조에 「따로 오경박사 한고안무를 바치고 박사 단양이를 대신하려고 청하였다. 청대로 바꾸었다」라는 기사와 정확히 대응된다. 단양이는 침류왕이고 한고안무는 아신왕이다.
※ "왕인박사" 참조
또 고사기 응신기에 「백제국주 조고왕이 아직기를 시켜 암수 두 필의 말을 바쳤다」라는 내용과 대응된다. 이때의 초고대왕은 이미 생존해 있지 않지만 상징적으로 등장시킨 것이고 같은 내용이 서기 응신기 20년 9월조에는 「왜한직의 조인 아지사주가 그 아들 도가사주와 함께 17현민을 이끌고 내귀했다」라고 나온다. 17현민이란 17,000명 정도의 군사를 달리 표현한 것이고 궁월군의 120현민이 귀수대왕의 본주원정군 12만을 나타내는 것과 꼭 같은 방법이다. 말은 기마민족의 군대를 상징한 것이고 숫말은 1만 명, 암말은 7천 명의 군사를 은유한 것이다. 귀수대왕 전사 직후에 아신이 본국에서 위기에 빠진 부왕 침류를 구원하러 증원군을 이끌고 간 것이다.
기·기에서 양마니 마사니 하는 말은 군대를 지휘한다는 뜻이다. 馬飼首는 기병대장을 은유한 용어다. 아직기는 아신왕이고 위에 나온 한고안무는 아신이고 단양이는 침류다. 귀수대왕을 왕인박사로 꾸미면서 조부터 손까지 삼대를 내리 박사로 꾸며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3월조에 「웅습이 반하여 조공하지 않았다」라는 것은 웅습국이 가야인이 세운 나라이므로 침류왕이 귀국길에 가야군의 저항을 받았다는 뜻이다. 혈문은 지금의 구주 북동단과 본주의 서단 사이의 관문해협이다.
「황후에게 칙하여 "곧 그 항구를 출발하여 혈문에서 만나자"고 했다」라는 것은 혈문에서 가야군과 조우하여 전투를 했다는 말을 돌려서 표현한 것이다. 혈문은 가까스로 통과했으나 반도에 상륙도 못한 것인지 반도에 상륙했다가 진사에게 쫓겨 열도로 나온 차에 가야군의 협격을 받은 것인지는 서기에 나와 있지 않다.
6월조에 「천황이 풍포진에 정박했다」라고 하는데 풍포진은 지금의 야마구찌[山口]현 풍포군에 있고 혈문 통과 후에 도로 열도 서북단의 풍포진으로 쫓긴 것이다. 「황후는 각록을 출발해서 정전문(渟田門)에 도착하여...」라는 것도 사실은 풍포진에 도착한 상황이다. 인근지명을 들어 얘기하는 기법이다.
「다히[海즉魚]가 배 옆에 많이 모였다. 황후가 술을 다히[즉魚]에게 부었더니 다히들이 취해서 떠올랐다」라는 것은 가야군에게 침류군이 많이 전사했다는 말이다. 다히[海즉魚]란 다이[魚+周]로서 반도어로는 도미[조]가 되는데 같은 음의 도미[枕]를 가리키며 "침류왕의 군사"를 은유한 연결고리다.
즉어는 원래 붕어를 말하는데 바닷물고기 중에서 민물붕어처럼 생긴 것은 흑돔인 것이다. 신대기 하10단에도 赤女라는 이름을 가진 아까다히[赤海즉魚]가 나오고 신공기의 다히[海즉魚/즉魚]는 구로다이[黑조]라고 한다. 서기상의 도미[海즉魚], 도미[枕/鳥見]는 백제 침류왕을 가리키는 암호다. (즉=魚+卽)
7월조에 「황후가 풍포진에 정박했다. 이날 황후는 바다 속에서 여의주를 얻었다」라는 것은 이미 침류왕이 진사왕에게 전사했다는 뜻인데 침류왕은 실사상 6월에 전사한 것으로 분석된다.
신공이 여의주를 얻었다는 것은 침류왕이 전사하고 진사왕이 백제를 차지하고 이 사건이 후에 아신과 응신의 백제·왜분립의 계기가 되었다는 뜻이다. 신공은 아라가야왕 아라사등의 장녀이자 대화왕조를 수립하고 초대왕이 된 응신과는 친남매간이었기 때문이다. 여의주는 대화왕조의 성립을 은유한 것이다. 여기서는 신공이 가야계를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서기 중애기 9년 2월조에 침류왕의 최후가 다음과 같이 간략히 기술되어 있다.
『(5일) 천황이 갑자기 몸이 아프더니 다음날 붕하였다. 그때 나이 52세였다...(중략)...이에 황후와 대신 무내숙니는 천황의 상을 숨기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도록 했다. 황후가 대신 및 중신오적진사주, 대삼륜대우주군, 물부담색련, 대반무이련에 조하여 "지금 천하는 천황이 붕했음을 모르고 있다. 만약에 백성들이 알면 해이해지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4인의 대부에 명하여 백료를 거느리고 궁중을 지키게 하였다. 몰래 천황의 시신을 거두어 무내숙니에 주어 해로로 혈문으로 옮겼다. 그리하여 (*1)풍포궁에 빈하고, 무화빈염(无火殯斂)하였다. (22일에) 대신 무내숙니는 혈문에서 돌아와 다시 황후에게 보고하였다. 이 해 신라와의 전쟁으로 천황의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
풍포궁에 빈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곳이 침류왕의 빈장소가 있었던 곳으로 전해진다. 이곳은 앞에서도 나왔지만 백제 침류왕이 진사왕에게 전사한 곳이기 때문이다.
(*1) 「'住吉神代記'에 "在長門國 豊浦郡 北樹社 今謂住吉齋宮"이라고 되어 있고 또 '住吉忌宮'이라고도 쓴다. '제왕편년기' 중애조에도 "穴戶豊浦宮>長門國 豊浦郡 今北樹林是也"라고 한다. 지금의 야마구찌현 시모노세끼시 豊浦村의 기궁신사땅에 傳豊浦宮趾가 있다<일본서기/암파문고/2000년/권2/127p/주8>」
등장인물
무내숙니
무내숙니가 등장하는데 사실은 서기 신무전기 무오년 5월(8일)조에 기국 조산에서 이미 몰한 인물이다. 이것은 무내의 아들들을 무내라고 한 것이고 이들이 서기 신대기 하9단에서 천치언(=침류)이 죽었을 때 그 장례식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있는 새[鳥]들인 것이다. 무내숙니가 오호사사끼[大초료], 사사끼[초료], 천이조(天夷鳥/武夷鳥/天日名鳥) 등으로 은유되었기 때문에 그 아들들도 조류로 은유한 것이다. 바로 이들이 후에 서기 응신기 3년 시세조에 구원에서 진사왕의 실례를 꾸짖고는 그를 죽이고 아화(=아신)를 백제왕으로 옹립한 아신왕의 사촌들, 기각숙니, 우전시대숙니, 석천숙니, 목토숙니인 것이다.
중신오적진사주
중신오적진사주는 침류왕의 후손이다. 나까도미[中臣]는 신대기의 천아옥명을 조로 하는 성씨인데 성씨록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額田部; 天津彦根命孫 意富伊我都命之後也(좌경천신)
中中臣栗原連; 天兒屋根命十一世孫 雷大臣之後也(우경미정잡성)
中臣連; 津速魂命十四世孫 雷大臣命之後也(하내국천신)
藤原朝臣; 出自津速魂命三世孫 天兒玉命也. 二十三世孫內大臣大織冠中臣連鎌子(古記云鎌足) 天命開別天皇(諡天智)八年 賜藤原氏 男正一位贈太政大臣不比等 天渟中原瀛眞人天皇(諡天武) 賜朝臣姓(좌경천신)
이가쯔[烏賊津]는 이가쯔찌[雷]와 같고 '액전부'조의 오호이가쯔[意富伊我都]의 이가쯔[伊我都]와도 같다. '오호이가쯔'는 신대기에 나오는 다께미까쯔찌[武甕槌/建御雷]와 같은 이름이다. 액전부의 조 천진언근명과 중신의 조 천아옥명은 동일인물이고 서기 신무전기 갑인년 10월조에 나오는 천종자명도 동일인물이고 서기 신공기 47년 4월조에 액전부의 조라고 하는 천웅장언과도 동일인물인 것이다. '중신련'조와 '등원조신'조의 진속혼명은 '速'자를 연결고리로 하는 속고왕이고 그 3세손(=손자) 천아옥명은 침류왕이며 23세손으로 나오는 중신련겸자가 황극기에서 중대형(=응신)과 백제·왜분립을 밀약하는 아신왕이다.
삼륜군대우주
삼륜군대우주는 서기 수인기 3년 시세조 천일창 이야기에 나오는데 오호도모[大友]로 오호도모[大伴]과 같아 분명히 신찬성씨록에 가야왕족으로 나온다.
大伴造; 出自任那國主龍主王孫 佐利王也(대화국제번)
大伴連; 道臣命十世孫 佐천彦之後也(좌경천신)
大伴宿니; 高皇産靈尊五世孫 天押日命之後也 初天孫彦火瓊瓊杵尊神駕之降也 天押日命 大來目部立於御前 降乎日向高千穗峯 然後以大來目部 爲天靭部 靭部之號起於此也......(좌경천신)
대반무이련
오호도모.노.다께모쯔.노.무라지[大伴武以連]는 대반씨 중에서 다께[武]가 붙은 응신의 형 예진별명의 후손성씨인데 예진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 '모쯔[以]'는 가야왕족 수직돌림자 '마다'계열 이칭으로 '으'와 '이'가 교체되어 쓰이므로 모쯔[以]>'모찌'가 되어 모지[持]와도 같고 무쯔[牟都]>무지[貴]와도 같은 것이다. 서기 신대기 하9단의 천압일명(=천인일명), 서기 신무전기의 일신명, 도신명 등은 예진의 이칭이다.
물부담색련
모노.노.베.노.이구히.노.무라지[物部膽 連]는 초고대왕을 조로 하는 성씨 모노.노.베[物部]씨이고 '씹을 색( )'을 '구히[색]'라고 읽어 '이구히[膽색]'로 읽고 있는데 이것은 무내숙니의 후손성씨 중에 '이구하[的]'와 같다. 역시 무내의 아들인 것이다. (색=口+作-인변)
的臣; 道守朝臣同祖 武內宿니男 葛木曾都比古命之後也(하내국황별)
的臣; 石川朝臣同祖 彦太忍信命三世孫 葛城襲津彦之後也(산성국황별)
신공황후도 실사상 가라왕 아라사등의 장녀이므로 이상과 등장인물들이 전부 백제왕족과 가야왕족들뿐이다.
무화빈렴
불을 때지 않고 장례를 치르는 것을 호나시아가리[无火殯斂]라고 하고 있다. 숭준전기에서 하내국사(=진사)가 포조부만(=침류)의 시신을 팔단했기 때문에 불을 때지 않고 장사를 치렀다고 한 것인지도 모른다. '호나시'란 '불없이[火無시]'라는 뜻이다. 팔단하여 팔국에 보내 효수하게 했다 했으니 시신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시신이 없는 습능이라는 암시도 서기 경행기 백조삼능설화에 나온다.
응신을 재등재한 서기 신무전기에 예진별명(=도반명)이 담로도 유량항해전에서 침류, 아신군에 패해 전사하고 그 후 침류가 귀국하다가 진사에게 당해 죽은 것을 전혀 달리 각색한 스토리가 서기 민달기 12년 시세조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이때 은솔과 참관이 귀국할 때 덕이 등에게 은밀히 "내가 축자를 떠날 때를 틈타서 너희들이 몰래 일라를 죽이면 내가 왕에게 상세히 주하여 높은 벼슬을 내리도록 하겠다..."라고 하자 덕이와 여노는 다 좋다고 했다. 참관들은 혈록을 출발했다. 그때 일라는 상시촌에서 난파의 관으로 옮겼다. 덕이들이 주야로 의논하여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일라는 몸에서 화염처럼 신광(身光)이 있었다. 그래서 덕이 등은 겁이나 죽이지 못했다. 그러다가 12월 그믐날 빛이 없어질 때를 틈타 죽였다. 일라는 소생하여 "이는 우리사신의 종이 한 짓이다. 신라가 아니다"라는 말을 마치고는 죽었다...(중략)...덕이 등을 묶어 하백제 하전촌에 두었다. 대부 몇 사람을 보내 추문하였다. 덕이 등이 복죄하여 말하기를 "사실이지 은솔과 참관이 시킨 짓이다. 우리는 아랫사람이라 어길 수 없었다"라고 했다. 그래서 하옥하고 조정에 복명했다. 그리고는 사자를 위북에 보내어 일라의 동족을 다 모으고 덕이들을 마음대로 벌주게 하였다. 이때 위북군 등은 이를 다 받아서 죽이고 미매도에 버렸다(미매도는 아마 姬島일 것이다). (*1)일라를 위북으로 이장하였다』
등장인물
일라
여기서 日羅가 예진별명이고 서기 흠명기 17년 정월조에 「筑紫火君[百濟本記云 筑紫君兒 火中君弟」라고 나오는데 축자군은 아라사등이고 축자화군은, 고사기 신무기에 신무의 중자로 나오는 신팔정이명이 화군의 조로 나와 신팔정이명을 가리키는데 신무, 응신(=예전)과 동일인물이다. 그 형 화중군이 예진이고 여기 일라와 동일인물이다. 이 예진은 고사기 수인기에서 「볏짚성[稻城]을 태울 때 불 속에서 태어났으므로 그 이름을 호무지와께.노.미꼬[本牟智和氣御子]로 함이 좋겠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곧 '火中'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연유인 것이다. 호[本]는 호[火]로서 미칭이다.
아라사등을 등재한 서기 선화기에 서비소생의 장남으로 화염왕이 있고 정비소생의 중자로 상식엽황자가 있는데 다른 이름이 완자라 하여 이들이 각각 예진, 예전과 동일인물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 형 화염왕은 화중군과 의미가 바로 통하며 위의 인용문에서 「일라는 몸에서 화염처럼 신광(身光)이 있었다」라고 하여 이 일라라는 인물이 선화천황의 황자 화염왕과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화염왕, 화중군, 일라는 전부 예진별명의 이칭인 것이다. 日羅라는 이름도 이런 예진의 이칭과 뜻이 바로 통한다. 日羅는 "빛이 사방으로 발산"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말이며 글자 그대로의 뜻은 '해나라'로서 日本과 같은 뜻이며 또한 가라의 이칭인 아침땅[新羅]>"해뜨는 땅"과도 같은 뜻이다.
덕이와 여노
德爾는 침류왕이다. 서기 효덕기 대화 5년 3월조에 나오는 침류왕의 이칭인 이리도덕(耳梨道德)에서 '덕'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진사왕을 王辰爾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기법으로 "이름에 '德'자 들어간 인물"이라는 뜻이다. 왕진이는 "백제王 중에 이름에 '辰'자 들어 있는 인물[爾]" 또는 "王仁의 아들 중에 이름에 '辰'자 들어 있는 인물[爾]"이라는 뜻이다. 여노(余奴)의 '余'는 백제왕성 扶餘의 준말이다. 백제계로서 이 당시에 열도에는 침류와 아신밖에 없었으므로 아신왕이다.
은솔과 참관
「덕이등(德爾等)」이란 말은 서기 중애기 2년 3월조에 나온 「두셋의 경대부와 수백의 관인」 즉 침류와 그 군사에 정확히 대응되는 것이다. 그런데 덕이와 여노의 윗대는 초고대왕과 귀수대왕뿐이므로 여기서는 초고대왕을 은솔로 귀수대왕을 참관이라고 평범하게 꾸몄다고 볼 수 있다.
실사상의 스토리
가야군은 근강전투에서 귀수대왕을 전사시킨 후에 침류, 아신군을 담로도로 몰아놓고 구주를 장악한 다음 소두도에서 동쪽에 있는 담로도를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자 신무가 「일신의 자손으로 해를 안고 싸우니 이롭지 않다. 그림자를 따라 싸워야겠다」라고 핑계를 대면서 사국을 남으로 돌아 웅야의 신읍으로 갔다가 거기서 무내숙니와의 내분으로 무내를 제거하고 담로도 유량항을 공격하다가 신무의 형인 도반명도 서지신이 되었다고 했을 정도로 고전을 하다가 침류가 귀국하는 틈을 타 추격을 한 것이고 마침 반도에서는 진사군이 열도까지 건너와 침류군을 공격하여 위와 같이 사지에 몰아넣은 것이다.
서기 신무전기에서 서지신(鋤持神)이 되었다고 한 도반명이 위에 얘기한 일라라는 인물이다. "쇠를 지닌 신"이란 것이 익사했다는 말이다. 이것이 신대기 상8단 이설6에서는 「담도에 이르러 조[粟]의 줄기를 타고 그 탄력에 의해 상세향으로 갔다」라고 나오는데 바로 이 인물이다. 조[粟]>조(潮)이기 때문에 "조(潮)의 줄기"란 사실은 '파도'를 은유한 말이다.
「상시촌에서 난파의 관으로 옮겼다」라는 말이 「소두도에서 사국을 남으로 돌아 기이수로(紀伊水路)로 가서 유량항을 공격했다는 말이다<백제에 의한 왜국통치 삼백년사/윤영식/369p>」
그 후 침류가 귀국하다가 진사왕과 가야군의 협공을 받아 전사하여 팔단을 당해 팔국에 효수했다고 한 내용이 여기서는 「미매도에 버렸다」라고 한 것이다.
위북
위북(葦北)은 구주 중서부에 가야가 개척했던 소국으로서 지금의 구마모도현에 해당하고 아시[葦]가 '아침'이라는 뜻으로 한자 '新'에 해당하여 '新北' 즉 '북신라'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신라왕자 천일창이 개척한 구주신라가 바로 이 위북의 남쪽에 해당하는 지금의 가고시마현이기 때문이다.
일라의 능
일라를 위북으로 이장했다고 하는데 일라의 능도 습능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 익사하여 서지신으로 부를 정도이므로 시신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익사 후에 시신을 찾았다면 있을 가능성은 있다고 보지만 예진의 시신에 관해서는 서기에 기사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사실은 (*2)후나야마[船山]고분의 주인공이 日羅로 판단된다. 하백제 하전촌이나 상시촌, 난파 등은 전부 열도 내의 지명이지 반도 내의 지명이 아니다.
(*1) 「肥後國志에 의하면 지금의 熊本縣 八代郡 坂本村 久多良木 馬場地藏堂과 葦北郡 津奈木町 赤崎에 있다고 한다<일본서기/암파문고/2000년/권4/41p>」 > 구다라기[久多良木]는 구다라기[百濟城]와 같다.
(*2) "船山古墳의 주인공은 가야왕족 예진별명" 추후 참조
출처 : 민족혼닷컴 http://cafe.naver.com/coreaspirits/1023
깨어있는 푸른역사 삼태극 http://cafe.daum.net/mookto
- 삼태극 전문 학술위원 서울사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