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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증언>
마태경 23.1-39
현실의 거짓 예언자들
1. 오늘 본문 마태경 23장은 서기관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다.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별할 수 있는데, 그들의 됨됨이(1-12절), 그들이 처하게 될 비참한 결과들(13-36절), 그리고 연결 본문(36-39)이다. 이 장에 적용되는 일관된 가르침은 내적인 것이 주가 되고 외적인 것이 종이 되며, 그런 관계를 형성해서 사람이 바르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참조. VCR 331).
2. 서기관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성직자는 아니었다. 서기관은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율법학자로 헤아려지기도 한다. ‘바리사이파’라는 말은 ‘분리주의자’라는 의미를 지니는데, 이는 그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키겠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이들과 분리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3. 복음의 말씀에 등장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전통적인 용어를 사용한다면 예언자라고 할 수 있고, 오늘의 용어로 표현한다면 말씀사역자들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씀을 보존하고 전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 처음에 주님은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다고 말씀하셨다. 1926년에 코라진 회당 발굴현장에서 돌 의자 하나가 출토되었는데, 그것이 ‘모세의 자리’로 밝혀져 주님 시대에 실제로 그러한 의자가 있었던 것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아마 회당 예배 때 그 자리에 앉아서 율법을 전하고 해석하며 가르쳤던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읽어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위선자들’로 책망된다. 따라서 그들은 말씀을 담당하는 예언자적 역할을 맡기는 했지만, 실은 ‘거짓 예언자’였던 셈이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고 자부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고, 따라서 ‘예언의 거짓’ 또는 ‘말씀의 거짓’이 오늘 본문에서 일관되는 주제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지난 주에 살펴본 대로 마태경 21-22장이 유대교에서 주님을 거부하고 반대한 다양한 모습으로 새겨진다면, 23장 본문은 그 교회가 지닌 가르침의 거짓됨 또는 말씀의 오도(誤導)라는 눈으로 읽어가야 할 것이다. 모세의 권위로 말씀을 가르치고 해석하지만, 그 가르침은 거짓되다는 것이다.
4. 서기관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거짓’은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행하고 지키지만, 그들이 (해놓은) 일은 따르지 말라. 왜냐하면 그들은 말하고 행하지는 않기 때문이다’라는 3절의 말씀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들의 행적(行蹟)은 본받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들의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지적이다. 이 말씀에서 드러나는 것은 ‘말 따로, 행동 따로’라는 것이니, 교훈과 행위의 분리이고, 결국 믿음과 삶의 분리로 헤아릴 수 있다. 서기관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신앙과 생활의 분리라는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5. 신앙과 생활의 분리는 구약의 말씀에서 불레셋 사람들로 표상되었다. 그들은 신앙적 지식만을 머릿속에 쌓아놓는 행태를 보이는 사람들을 표상했다. 왜냐하면 신앙적인 가르침을 품고만 있고 행하지는 않아서 이웃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까닭이다. 그래서 그들은 ‘할례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지칭되었다(삼상 17.26). 말씀에서 할례란 자아애와 세속애에서 정화되는 일을 가리키는데, 그 정화는 사람들을 사랑의 실천으로 이끄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기관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불레셋 족속은 바로 그 점에서 공통된다. 따라서 서기관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보인 신앙과 생활의 분리는 이웃사랑의 실천에서 드러나는 거짓됨으로 헤아릴 수 있는 사안이다(참조. AC 8313).
6. 서기관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모든 행적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5-7절). 따라서 그들의 행적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안에 들어있는 내용이 달랐다. 경문을 넓히고 술을 길게 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경건하다는 사실을 내보이려는 것이었다. 연회나 회당에서 상석을 선호하는 것은 자신을 지도적인 위치로 높이고, 그에 따른 권익을 확보하려는 것으로 파악된다. 광장에서 인사받는 것이나 랍비라는 칭호를 듣고 싶어 하는 것은 명예욕의 발로로 여겨진다. 형식과 내용은 일치되어야 한다. 형식이 없으면 내용은 보존되지 않는다. 내용 없는 형식은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리고 내용과 형식이 다르면 담긴 내용은 변질되고 말 것이다. 경문과 술은 말씀을 지킨다는 표시이다. 그것은 준수의 다짐이기도 하다. 상석 또는 주석(主席)이란 전체를 아우르며 인도해갈 수 있을 때 대표의 권위가 부여되는 것이다. 인사와 칭호는 존경스러울 때 자발적으로 우러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내용이 결여된 채 서기관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보이려고 했던 형식은 변질된 것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7. 나아가 주님은 랍비나 아버지, 지도자라를 이름으로 일컬어지려고 하지 말라고 권고하신다(8-10절). 왜냐하면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이 한 분뿐이시고, 우리 지도자는 그리스도이시고, 그래서 가르치시는 이도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사람은 다만 서로 형제이다. 따라서 서로 겸손해야 할 뿐이다(11-12절).
8. 오늘 본문의 둘째 단락인 13-36절에는 탄식을 뜻하는 감탄사가 일곱 차례 나타난다. 개역 전통에서는 ‘화로다!’ 또는 ‘화 있을진저’로 번역되었다. 비슷한 다른 말로 나타낼 수도 있다. 어떤 말로 옮겨놓든지 간에, 그 말이 담고 있는 의미는 분명하다. 그것은 현재나 미래의 불운이나 불행 또는 비참하고 저주스러운 참혹한 현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잠시 생각하면, 사람들은 말씀에 나타나는 이와 같은 내용을 ‘저주’라고 받아들이는 듯하다. 특히 주님이 발하신 주님의 저주로!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은 결코 아무도 저주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고, 또 저주란 말로 비방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실현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설혹 누군가 누구를 저주한다고 하자. 그러나 저주받는 그 사람이 스스로 그 상태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저주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성경 첫머리 부분에 읽을 수 있는 ‘뱀이 저주를 받았다’는 말씀(창 3.14)은 스스로 그 저주스러운 상태로 들어갔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내적 상태는 스스로 바꾸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 상태를 만들 수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자신만이 자신의 내적 상태를 만드는 것이다. 더욱이 주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누구를 미워하거나 나아가 저주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신앙인들은 확고하게 다짐해야 할 것이다. 다만 뱀의 예처럼 주님이 화내시고 시험하시고 저주하시는 모습은 교훈을 위한 것이지 사실 자체가 아니라는 점이바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에 보이는 그러한 모습들은 ‘현상적 나툼’(apparentia)이라는 용어로 파악된다는 점도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참조. AC 245).
9. 본문에서 ‘화로다!’ 또는 ‘화 있을진저’라는 감탄사는 일곱 차례 나타난다. 이 감탄사로 이끌어가는 내용들의 주체는 본문의 주제로 제시된 서기관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휘포크리테스’(ὑποκριτής)라는 부가어가 일곱 예 가운데 여섯 차례나 병치되어 나타난다. ‘휘포크리테스’는 본래 배우를 가리키던 말이었는데, 나중에 ‘위선’을 뜻하게 되었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그러한 의미가 더해진 것이다.
10. 열거된 일곱 상태들 가운데서 첫째로 언급된 저주스러운 상태가 나머지 상태들을 이끄는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실상으로 헤아려야 할 것이다. 말씀의 서술은 처음에 나오는 내용이 이어지는 내용들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머리가 긴요한 것인데, 말씀을 이해하려고 할 때 늘 강조되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중요하게 여겨진다. 아무튼 그 첫 내용은 이러하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 (서서) 하늘 나라를 닫는구나. 그리고는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고 있는 사람들도 들어가도록 허락하지 않는구나!”(13절, 개인역). 주님의 이 말씀에서 우리는 서기관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하늘 나라의 문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은 천계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훼방꾼들이다. 그들의 행태는 인류를 사랑하여 구원하러 세상에 오신 주님의 최고목적에 가장 반대되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바로 그 일이 비참한 상태의 첫머리에 놓인 까닭을 헤아려 볼 수 있을 것 같다.
11. 이어진 14절을 본문으로 보유하고 있는 근년의 판본은 드물다. (우리가 확인한 본문은 1560년 제네바성경, 1611년 흠정역, 1696년 S. Schmidt판 Biblia Sacra와 19세기 말에 번역된 고문체한어 文理譯이다.) 옮겨보면, “화 있을진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위선자들아! 너희는 과부들의 집을 삼켜 버리고, 또 기도는 길게 늘어놓는구나. 그러므로 너희는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다.” 순정진리에 따르면, 말씀에서 과부란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인데, 선 안에 있지만 진리가 없는 사람이다. 따라서 선의 짝을 잃은 그에게는 진리가 필요한 것인데, 지금 거짓 말씀사역자들은 진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을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과부의 집을 먹어치웠다는 것이 그런 뜻이다. 더욱이 그들이 자기 명예나 소유를 위한 목적에서 그런 일들을 자행한다면, 그들은 정말 비참한 상태에 있게 될 것이다(참조. AC 4844).
12. 위선적인 말씀사역자들은 맹세의 예에서 선후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말씀하신다: ‘어느 것이 더 크냐?’(17절). 나아가 ‘율법에서 더 무거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23절). 이는 무엇이 우선하는 것인지를 묻는 말씀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그들이 순서를 뒤집어 놓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주님은 내외의 관계도 밝히신다: “너희는 먼저 잔과 대접의 내부를 깨끗하게 하라. 그러면 그 바깥도 깨끗하게 될 것이다”(26절, 개인역). 선후의 관계는 내외의 관계로 발전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또 서두에서 밝혔듯이 주종의 관계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내부에서 없어져야 할 것들을 제시하신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사항을 파악해야 한다. 앞서 말한 대로 형식과 내용의 관계에서 볼 때 내용을 앞세워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다음으로, 사람을 그릇으로 설명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됨됨이가 결정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에 그릇이 잔과 대접 둘로 표현되었다. 잔은 마시는 것을 담는 것이니 물이나 포도주를 염두에 둘 수 있다. 대접 또는 접시는 먹을거리를 담는 그릇이다. 따라서 이 두 그릇은 성찬의 포도주와 떡을 연상시킨다. 우리는 주께서 주시는 그러한 음식물을 받아 담아야 한다. 그래야 주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참조. AC 5120). 그러나 본문에 나타나는 것처럼, 거짓 말씀사역자들이 담는 강포한 것이나 무질서한 것들에서 생겨나는 내용들로 채운다면(25절) 저주스러운 상태, 곧 하계(지옥)로 떨어지는 비참한 상태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13. 본문 33-36절은 이 단락의 결론으로 파악된다. 이 부분에서 핵심적인 내용은 ‘의인들이 흘린 피가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돌아간다’는 말씀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할 듯한 저주가 아니다. 우리가 앞서 황금률에 관해서 살펴볼 때도 알아보았지만, 그것은 ‘도-웃-데스’(do ut des: 네가 주는 대로 내가 준다)의 원리 곧 ‘행한 대로’라는 황금률 형식의 하나라는 점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행한 일들이 그대로 돌아가는 것! 천계에 이르지 못하도록 막았다면, 천계에 가지 않는 그 자체가 저주이다. 그에게 천계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알고 싶어도 알 수 없게 막았다면, 진리를 알 수 없도록 한 그 자체가 저주이다. 그는 진리를 모르고 거짓 속에 머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누가 행하고 염원한 작위(作爲)가 아니라 스스로 그 상태에 이르렀다면, 어떻게 그 상태를 대체할 수 있을까? 사람의 내적 세계는 그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그렇게 되도록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천계를 방해하는 그 자체가 바로 저주인 것이다.
14. ‘의인 아벨의 피에서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죽인 바라키아의 아들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그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35절). 여기서 아벨이 누구인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바라키아의 아들 즈카르야’는 이름으로 보면 예언자 즈카르야로 받아들일 수 있다(슥 1.1). 그렇지만 그의 죽음으로 헤아리면 주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성전 뜰 안에서 돌에 맞아 죽은 즈카르야로 볼 수 있기도 하다(대하 24.20-21). 역사적인 근거가 어떠하든지, 이 말씀의 깊은 뜻을 헤아려 보자. 피를 흘리는 짓은 자연적 육체적 생명을 말살하는 일이다. 나아가 그것은 더 근원적인 영적 생명에 대한 폭행이기도 하다. 그런 폭행은 진리의 근원이신 주님한테서 오는 진리를 막는 것이고, 진리를 받아들여 선한 삶을 살게 하는 일을 방해라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러한 폭행은 거슬러 올라가면 주님께 행하는 폭행에 해당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는 뜻을 방해하고 막는 모든 일이 결국 피를 흘리는 폭행에 해당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것은 주님께 행하는 폭행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해야 할 듯하다(참조. AC 9127).
15. 본문 37-39절 말씀은 앞 단락과 다음 단락을 잇는 이음매 또는 관절에 해당하는 본문으로 파악된다. 암탉이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 모으는 것처럼, 백성들을 예루살렘에 품으려고 해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있구나! 주님의 탄식이시다. 예루살렘이 폐허가 된다는 사실 자체가 저주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러나 기회는 지나간다. 주님은 이제 떠나실 것이고, 그의 다시오심을 환영하는 때를 기다려야 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39절). 그에 관련된 예루살렘의 여러 면모는 이어지는 본문에서 읽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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