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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교·도교·샤머니즘과 연결…정체성·행운의 원천으로 존재
한국인들은 한국의 아름다운 산을 다니면서 산신에 있는 사당들과 탱화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자주 가진다. 동시에 산을 오르내리는 등산객들은 그들의 종교적 믿음이 무엇이건, 지위가 어떻든 간에 산신에 대해 누구나 친밀함을 느낀다. 한국 역사에 있어 2,000년보다 훨씬 전부터 산악지형인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은 각각의 산봉우리나 경사면마다 산신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산신이 남자이건 여자이건, 하나이건 그 이상이건, 눈에 보이는 존재로 나타나든지 마음으로만 믿든지, 그것은 상관없었다. 산신은 마을마다 주요한 수호신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산신의 아이콘 역할을 하는 그림과 동상들은 한국의 대부분 산에 있는 수천 개 불교의 사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또한 매우 일반적이다. 수세기에 걸쳐 한반도라는 산악지역에 기반을 둔 한국의 산신은 중국에서 수입된 대승불교(Mahayana Buddhism)와 친숙하면서 복잡하고, 광범위한 관계를 맺으며 유지 발전해왔다. 산신은 사찰과 불교의 가르침 그 자체를 수호할 뿐 아니라 스님과 불교신자를 위한 정체성 확립과 힘, 행운의 원천으로서 존재해 왔다. 90% 이상의 절에 산신 그림·상 있어
결코 사라지지 않고 새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산신 남인천 청룡산 호불사에 10년 전 5m 산신 동상 건립
서울 도심에서 한국의 수도 서울을 600여 년 동안 정신적으로 보호해 온 남북의 산, 즉 북악산과 남산을 볼 수 있다. 두 산 모두 가파르면서 높지 않은 특징 있는 봉우리를 지니고 있다. 도심을 감싸고 있으면서 나름대로 음과 양의 보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동아시아 국가에서와 마찬가지로 한반도에서도 전통적 수도 위치는 풍수지리설에 입각해서 남북으로 혹은 동서로, 도시를 보호하는 듯한 역할을 하며 신성시되는 음양적 모습을 띤 산들이 많다.
서울이 국가의 수도가 된 이유는 이러한 음양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산들 사이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밀집한 빌딩 사이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중에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서울을 감싸고 있는 음양의 산들은 풍수지리적으로는 커플이 결혼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여성 성향의 산신은 인근 봉우리에 있는 남성 성향의 산신과 결혼하게 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서울의 주요 궁전은 북쪽의 백악산 바로 앞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다. 하얀 바위산이라고 하는데, 오늘날 종종 북악산 북바위산이라고 부른다. 그 꼭대기에 정녀부인을 추앙하는 백악사 사원이 있다.
정녀는 알려진 바와 같이 성실하고 정조를 지키는 바람직한 여성상을 의미하며, 부인은 그러한 특징을 가진 아내들을 지칭해서 존경의 의미로 부르는 개념이다. 정녀부인은 매년 지금 남산으로 부르는 남쪽 산인 목멱산에 안치된 남성 산신인 국토신과 영혼결혼한다고 여겨져 왔다. 이들이 합세해서 서울과 조선왕조를 재앙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이 어떠한 방식이든지 모욕을 당했을 경우 즉시 보호를 철회해 재앙이 찾아왔다.
산신 모욕 땐 즉시 재앙으로 보복당해
그 구체적 전설이 있다. 1591년 젊은 성리학자 권필이 전통적 민속신앙을 광적이라고 비난했다. 당시는 성리학이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조선시대였다. 그는 여성 산신을 모시는 북쪽 사원에 올라가 산신 그림을 헐뜯고 경멸하면서 뜯어버리는 모욕을 가했다. 정녀부인이 그 날 밤 권필의 꿈에 나타났다. 그녀는 분노를 표하면서 권필과 조선이 꼭 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 다음해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전 국토가 일본에 의해 유린 점령당하고 초토화됐다. 권필도 한반도 최북단 함경도로 유배 갔다. 그는 유배생활 중에 정녀부인의 꿈을 다시 한번 더 꾸고, 꿈에서 깨는 동안 심장병으로 죽는 비극을 맞았다.
현재도 이러한 교훈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을까? 아마 대부분 반신반의할 것이지만, 더욱 더 강력하게 산신숭배가 활성화 되고 있음을 쉽게 찾을 수 있다. 20년 이상 이 땅에서 산신을 조사하고 연구했다. 또 모든 지역을 찾아 헤맸다. 어느 때보다도 더 크고 많은 절에서 더 화려한 산신과 관련된 그림과 사원을 볼 수 있다. 지역 차원에서의 보호가 점점 요구되는 시점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회 지도자들과 일부 종교지도자들은 산신을 무시하고 파괴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문화관광부에 있는 정부 관료들조차 신성시되는 한국의 전통을 부정하고 무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많은 한국인들은 현대화된 사회에서 막연하게 산신 숭배는 이미 사라졌으며, 고대 유물 외에는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해가 갈수록 점점 더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산신에 대한 숭배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점점 증가하는 추세다.
한국의 아름다운 산을 찾는 사람들은 새로운 산신 그림과 동상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더 크고 상세하게 그려졌고, 세세하게 묘사돼 있다. 예전보다 새로운 주제가 등장하며, 예술적 가치가 높은 난해한 탱화들도 선보인다. 또 굉장히 도상화적인 요소와 예술가적 스타일의 다양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예전 골동품에서 발견된 것 보다 훨씬 섬세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띠고 있다. 또 십장생도와 같은 다른 전통 종교까지 확대되는 상징적 요소까지 발견되고 있다.
최근 들어서 불상만큼 큰 산신상이 나오고 있다. 한국에서 동상은 약 1,000년쯤 전에 종교가 최고의 가치로 평가받을 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반대로 산신상은 20세기 전에는 드물었지만 한국전쟁 이후에 샤머니즘 사원과 불교사원의 산신각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게 됐다. 최근의 동상들은 좀더 커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과거 10년 동안 한국의 유명한 절에서도 산신각 바로 옆에 대형 동상을 건립하기도 했다. 그 가장 좋은 사례가 지난 10년 전 남인천 청룡산 호불사에 봉안된 5m 짜리 동상이다. 아마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큰 산신 동상이지 않을까 싶다. 남인천은 산신 사원 발견을 기대할 만한 지역이 아니다. 그럼에도 거대한 동상이 세워졌다는 사실은 산신이 얼마나 대중적인가를 보여주는 증거다.
미륵불 같은 상징적 의미로 위상 강화
새롭게 만들어지는 현대주의적 산신 작품은 매우 비싸다. 현대주의적이란 용어는 복고풍(retor-folk) 또는 신전통주의적(neo-traditionalist)이라고 부를 수 있다. 많은 작품들이 나오는 것은 현대 한국문화에서 산신숭배가 점점 더 강해지고 중요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산신 그림을 기부하기도 하고, 매매시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이러한 점도 산신이 증가할 수밖에 없는 사례로 꼽힌다. 예전에는 산신각이 사찰 뒤쪽 숲으로 둘러싸인 산 사면에 조그맣게 자리 잡고 있었다. 때로는 찾기 힘들 정도로 전통 불교 양식을 보이고 있었다. 요즘엔 절도 점점 더 많이 개건축하고 있다. 그 와중에 3개의 산신을 뜻하는 삼신각과 3명의 성인 산신을 뜻하는 삼성각이 불교 숭배 지역에 들어서서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산신 외에 북두칠성을 뜻하는 칠성각과 외로운 성자를 의미하는 덕성각도 함께 모셔져 있다. 또 어떤 산신각에서는 3개의 제단 중앙에 용왕을 안치하고 있기도 하다. 몇몇 조그만 절에서는 새로운 삼성각을 법당보다 더 크고 웅장하게 만들고 있다. 불상이 안치된 법당 앞에 놓여 있어야 할 석등과 불탑이 새로 건립되는 절에서는 삼성각 앞에 설치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도 산신의 높아진 위상과 이를 모시는 민속신앙이 늘고 있는 현상을 설명한다.
산신의 위상이 불상이나 지위가 더 높은 신적인 존재의 특징과 혼용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도 한국 문화에 있어 산신의 중요성이나 탁월한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표출되고 있는 현상이다. 충북 청주에 있는 우암산 용호사의 미륵불 산신 동상이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산신에게 미륵불과 같은 종교적 지위가 부여되고, 인간의 미래를 구원해줄 신적인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상징적 의미는 더욱 강화되고 있으며, 그들의 지위도 더 확대되고 있다.
산신각 건립에 드는 돈과 에너지를 포함해서 위에서 설명한 모든 현상이 산신이 한국에서 죽어가는 종교의 모습이거나 사라져가는 문화적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도 아주 확산되고 있다.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는 한국의 특이한 문화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도시화된 한국은 끊임없이 고도의 문명화된 모습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산신 숭배와 산신 존경에 대한 전통은 결코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지방을 여행하거나 산에 오르는 누구나 산신에 대한 전통적인 것과 새롭게 변모된 모습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노고단·계룡산·마이산서도 매년 열어 과거 10년 동안 태백산·오대산·치악산 등서 수차례 지켜봐
한국의 산신에 대한 전통이 영속적인 고대 문화의 핵심이었고, 결코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강력하게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난 달에 이미 살펴봤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산신 탱화와 동상들은 더욱 더 커지고, 상세하면서 복잡해지며, 더 화려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등산객들에게는 더 많은 지역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다. 민족 정체성 확립을 위한 산신축제와 악운을 막고 부와 통일을 기원하는 산신축제는 불과 과거 몇 년에 걸쳐 개최되기 시작했다. 이는 한국의 유명한 산자락에 있는 소도시나 마을에서 지역문화의 중요한 상징이 됐으며, 지역주민의 역사적 정체성과 통합에 영향을 미쳤다. 과거 10년 동안 새로운 형태의 주요한 산신축제가 열리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충남의 계룡산, 서울의 삼각산, 대구의 팔공산, 전남의 무등산, 전북의 마이산, 태백산, 강원도의 오대산과 치악산, 그리고 지리산의 동서 양쪽에서 대규모의 산신제가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시장을 비롯해 군수와 지방 관리 등이 산신축제에 참여해서 의식을 직접 집전하기도 했다. 그들은 지역 공동체의 통합과 주민들에게 자긍심을 불어넣는 주요한 수단으로 참여했고, 그 가치는 매우 크다고 강조했다. 또한 지역관광산업을 육성시키고, 독특한 지방문화와 지역 전통을 재창조하거나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기복과 통일기원 산신축제 활발히 열려 지역의 산신제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전통 관습에 따라 열렸지만 형식은 상당히 현대화된 모습을 띠고 있다. 산신제 의식 스타일은 유교와 불교, 샤머니즘 요소까지 다 포함하고 있다. 종교적 갈등이나 마찰도 없이 복장을 갖추고 연속적으로 교대해 가면서 열린다. 산신숭배에 대한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의 공개적 승인과 지원은 사실상 현대 한국사회에서 혁명적인 것이다. 샤머니즘적 문화의 대중적 표출에 상당히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해온 관리들이 지배적인 한국의 관료주의에서는 더욱 그렇다. 지역 공동체의 권한 상승과 그 지역에서 신성시되는 산을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의 증가는 한국 관료 성향을 계속 더 변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적 현상은 지리산의 다양한 지역에서 볼 수 있듯이 고대로부터 그 뿌리를 가지고 있다. 최소한 5세기 삼국시대 이래로, 지리산은 한반도 남쪽지역에 신성시되는 많은 봉우리와 경사지를 가지고 있다. 신라왕은 지리산을 외부에 있는 오악 중 하나로 간주하거나, 왕국을 보호하는 다섯 개의 산으로 삼았다. 그래서 산신을 모시는 최초의 사원을 건립했다. 그들은 지리산에서 국가의 번영과 국민의 안위를 위해 다양한 지역에서 많은 의식을 열었다. 심지어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열기도 했다. 고려 시대에도 유교, 도교, 불교 등이 혼합돼서 행운과 보호를 간청하는 의식이 왕실 지원 하에 개최됐다. 노고단 정상에서 산신제가 처음으로 열렸다. 이후에는 조금 아래로 내려와 지속됐다. 노고단은 지리산에서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며, 거대한 지리산의 서쪽 끝에 자리 잡고 있다. 노고단의 이름은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 샤머니즘의 대모격인 할머니를 상징하는 데서 유래됐다. 그것은 현명한 늙은 여자를 위한 제단이었다. 오늘날까지 여전히 고대 의식을 지내는 노고단 제단자리에 거대한 돌탑이 있다. 그 돌탑이 선 자리에는 나무가 없는 벌거벗은 봉우리다. 많은 등산객들이 이 곳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며 사진을 찍던 곳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실제 노고단 정상은 국립공원 관리공단의 생태보존 프로젝트에 의해 거의 15년간 펜스로 막아 접근을 통제해왔다. 등산객들은 노고단의 두 번째 정상으로 이어진 탐방로를 따라 올라갔다. 그곳에는 많은 돌탑들이 쌓여 있고, 등산객들은 그 옆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매년 이곳을 방문하고 있으며, 여전히 신성한 장소로 여기고 있다. 조선왕조는 정책적으로 왕실의 보호 하에 유교 형식으로 연 2회 산신제를 지내는 신성한 3개 산을 정했다. 북쪽의 묘향산, 중부의 계룡산, 남쪽의 지리산 등 세 봉우리가 그곳이다. 농지와 농부들의 노동력으로 사당을 유지 보수시키고, 최소 1년에 두 차례 거대한 제사를 지냈다.
조선 땐 묘향·계룡·지리산서 연2회 산신제 지내
당동에 있던 대규모 사원과 애초의 사원 유물은 20세기 초 일제의 한민족 정신 말살이라는 식민정책에 의해 완전 철거되었다. 남악단에는 18세기 조선왕조 사원의 크고 오래된 모습을 여전히 찾아볼 있지만 역사성은 사라지고 없다. 계단은 시멘트로 수리되어 있고, 더 이상 아무 흔적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고대 한국은 할매산신이 주도 여산신이 대부분…수락·계룡·지리산 동쪽에 보여
가장 영험하기로 소문난 지리산 산신에 관한 고찰에 이어 이번 호에서는 산봉우리에 존재한다는 여자 산신령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산신령의 성별(性別)에 대한 쟁점은 단순하게 설명되기 어려운 부분이어서 20여 년간 계속되어온 나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의문점은 풀리지 않았다.
지리산은 둥그렇게 둘러싸인 형세의 영향으로 지기(地氣)의 음(陰)에 해당하는 산이라 여겨지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설악산은 바위가 많아 험준하고 굳센 형상을 띤 양(陽)의 산이다. 여산신(女山神)은 산각시, 산마수라, 산신할머니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300여 년간 만들어진 산신의 회화, 입상, 조각 등을 보면, 고령(高齡)의 남자로 묘사되어 있다. 사원이나 박물관에 소장 전시된 작품 중 97%가 할아버지 이미지를 풍기는 남자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조선 500년을 지배한 유교와 권위주의 문화의 영향인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에게 산신은 마치 수호신과 같은 존재로 여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산신을 여자로 간주해 매년 열리는 제사 의식에 앞서 일정기간 아내와 잠을 자지 않고 산신을 위해 밥을 짓는 선발된 남자가 모시는 것이 관례였다. 이것은 한국 샤머니즘의 성(性)의 상호보완성에 관한 통념이나 고대의 가부장적 문화에 대한 반향일지도 모른다. 영국 교수 제임스 그레이슨(James Grayson)은 한국 산신에 대해서 여산신이 명백하다고 주장했다.
음양 기운으로 한반도 영적 에너지 제공
이 산들을 사이에 두고 지기(地氣)의 양극인 음양이 존재한다. 이는 한반도 전체를 조화롭고 더 발전하도록 기운을 북돋아 준다. 음양의 상호작용으로, 남산신과 여산신은 한반도의 영적이면서도 역동적인 모태가 되고 있다. 묘봉 스님의 이론은 세련되고,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도 있다. 하지만 반론의 예들도 역시 제기되고 있다. 산을 예찬하는 이들의 이론과 주장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폭넓게 퍼져 있는가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다. 남한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며, 백두대간의 남단 종착지인 지리산 천왕봉(1,915m)의 산신령은 가장 중요하고도 영향력 있는 여산신이라 할 수 있다. 이 여산신의 이름은 지리산 천왕봉 성모할매 산신이고, 한국의 몇 안 되는 전통 수호신으로 손꼽힌다.
지리산 천왕봉은 가장 영향력 있는 女산신
아주 오래 전 천왕봉에 사당이 지어졌을 때 작은 성모할매 산신의 화강암 좌상이 세워졌다. 1m도 채 안 되는 높이에 얼굴이 넓적하며, 다리를 포개고, 한국식으로 마치 기도할 때나 존경을 표시할 때처럼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은 모습이었다.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외관으로 보면 1천 년은 더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좌상의 보안을 위해 사찰 안에 큰 바위들로 보호하고 있으며, 그 앞에 기도드리는 장소를 마련했다. 경남도에서는 조사를 통해 이 복구된 좌상이 진품임을 확인했고, 도민속문화재 제14호로 지정한 뒤 ‘지리산 성모’라 명명했다. 또 다음과 같은 내용도 포함돼 있다. ‘한국 샤머니즘의 전설은 이 성모가 한국 전통 민속의 조상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여덟 명의 딸들에게 군사기술을 가르쳤고, 그녀들을 8개 지방에 보냈다. 또한 모든 이들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는 성스러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도 한다. 한일합병 동안 이 성모상은 일본의 여신들을 물리치는 역할을 감당했다. 천왕사는 경상남도 민속문화재 14호로 지정되어있다. 2006년 8월6일에 기존의 그것보다 더 큰 동상을 만들어 국가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고 있다.’
가장 신성시하는 태백산 토착 샤머니즘서도 최고 오랫동안 불교·유교 이념 띤 지배권력에 억압받아
한국에서 신성시 되고 있는 산 정상 봉우리들은 다른 전통적 종교에서도 성지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가장 좋은 예가 지리산이다. 이는 지난 3월과 4월호 원고에서 이미 자세히 설명했다. 충남 계룡산과 서울 삼각산 역시 좋은 사례다. 하지만 한국에서 신성시 되는 몇몇 산은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 특히 토착 샤머니즘이나 한반도에 전래된 지 1636년의 역사를 가진 불교 등에 의해서도 그 신성함이 존중받고 있다.
한국 사람에게 흰 색은 신성한 빛의 색으로 여겨왔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빛줄기가 구름 사이로 비추며 생명의 비를 뿌리게 해주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고대 사람들이 하늘에 기도를 올리던 산을 ‘백판’ 이나, ‘백산’이라 불렀다. 밝은(하얀) 산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가장 크고 밝은 산을 태백산(太白山)이라 불렀다. 이런 특정한 지역을 애초에는 ‘한배달’ 또는 ‘행박모에’라 불렀다고 한다. ‘밝음이 넘치는(excessive brightness)’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태백산의 이름과 특징은 신라 초기부터 신성시 되어왔다.
역사·민족 문화의 명소로 자리 잡아 태백산은 도립공원 경계선 안쪽으로 해발 1,500m에 달하는 네 개의 중심 봉우리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특정한 신화와 성지, 사원과 관련돼 있으며, 각각의 종교적 특징과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해발 900m 주변까지 더 넓게 보자면 20여 개 다른 봉우리를 더 포함하고 있다. 태백산 정상인 장군봉(1,566.7m)은 한국에서 일곱 번째로 높은 산이다. 1,500m에 있는 망경사라 불리는 절이 남한에서 가장 높이 있는 사찰이다. 전 세계 어디서나 큰 강의 분수령은 그 주위 산을 신성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로 꼽힌다. 태백산은 두 큰 강의 수원지다. 한국에서 두번째로 길며, 강원, 충북, 경기, 서울 일대에 매우 중요한 물 공급원인 남한강은 태백산의 북쪽에 있는 함백산의 검봉 북쪽 사면에 있는 검룡소(Golden Dragon Source)에 원천을 두고 있다.
태백산은 광활하고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담고 있는 대한민국의 보배이지만, 이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어떠한 범주나 영역에서 보더라도 태백산은 최고의 산이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명산 중에도 단연 손꼽힌다. 어떤 이들은 영산 혹은 신성한 산, 신령산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신라시대 승려였던 도선국사가 제시했던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태백산은 ‘한국의 가장 영험하고 신성한 지리적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풍수지리설은 오늘날에도 백두대간의 지력과 수원을 바탕으로 한반도의 척추라 여기는 가장 핵심적인 이론적 근거라 할 수 있다. 백두대간은 백두산부터 거의 일직선 상으로 한반도의 남쪽을 향해 뻗고 있으며, 소백산의 서부지역을 지나기 때문이다. 고대 신라의 왕들은 태백산을 통일된 왕국을 보호하는 외부의 오악(다섯 개의 봉우리)이나 5대 큰 산으로 여겼다. 그래서 산신 숭배 사원과 천제단 봉우리(1,563m)에 하늘의 신에게 제사를 지낼 제단을 만들었다. 영봉(Spirit Peak)은 국가와 민족의 안녕을 지키며 날씨에도 관여한다고 믿었다. 한국은 근대 이전에 두 가지 통치방식을 보였다. 불교적 스타일과 왕권에 기반을 둔 유교적 의식이 그것이다. 이는 이후 국가의 정체성을 성립하는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삼국유사나 역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태백산의 산신은 한국의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신령으로 오랫동안 그 명성을 누려왔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의 경덕왕은 산신이 그의 궁전에서 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태백산 주변의 지역주민들은 여전히 천산신이라는 산신을 위해 일 년에 두 번씩 특별의식을 수행한다.
1950년대 들어 천제의식…93년부터 공식 축제로 열려
한국에서 가장 영험한 산이자 한국 토착 샤머니즘에서 가장 신성한 산인 태백산에 대해서 5월호에서 살펴보았다. 태백산의 지리적 중요성과 지형적 위치, 상서로운 이름, 고대의 명성, 특히 신라시대에 막강했던 산신과 함께 신라를 수호하는 영험한 산의 역할, 그리고 6세기경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망경사 등과 같은 성스러운 장소 등은 모두 태백산을 상징하는 요소들이다.
한국의 유서 깊은 사찰 중 하나인 정암사는 643년에 자장율사에 의해 함백산의 북서쪽 부근에서 발견됐다. 이는 자장율사가 문수보살로부터 받은 계시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절 위 높은 절벽에 살고 있는 음험한 인간을 내쫓을 수 있는 종을 발견할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다. 자장율사는 이를 발견하고, 바로 그 자리에 적멸보궁탑을 세우고 그가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모니의 유품을 그 탑 안에 안치해 두었다. 단종을 산신으로 모신 사원도 있어
태백천제축제라는 이름의 공식적인 행사로 열리게 된 1993년 이래로, 태백시의 시장이나 행정 관료들이 때때로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주변 사찰의 주지 스님이나 문화적 저명인사들도 함께 하면서 이 행사가 국가의 평안과 안녕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 믿고, 또 그것을 널리 보여준다. 제례의식은 지역주민들에게도 고유문화의 가치를 알고 계승, 발전시키는 데 자부심을 불어 넣어준다. 이 행사는 여러 단체와 사람들의 노력, 그리고 지원금이 한국의 가장 영험한 산인 태백산의 오랜 전통을 오늘날까지 잘 이어오는 데 기여하고 있다. 왕실기록 보관장소로 활용 태백산의 다른 중요한 사찰은 봉화군 주요 봉우리에서 남동쪽으로 9km 떨어진 각화사다. 이 절은 676년 원효대사가 신라를 위해 명상의 시간을 가질 당시 창건했다. 조선시대에도 그 중요성을 인정받은 곳이다. 임진왜란과 같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왕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조선시대에 귀중한 문서를 보관하는 네 곳 중 한 곳으로 지정되면서 왕실의 기록이 외딴 곳에 수호 역할을 하는 산으로 옮겨졌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사고지의 주춧돌만이 남았지만 사찰은 재건됐고 번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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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三流人生 원문보기 글쓴이: 醉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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