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생각과 수필
수필 쓰기는 자기 자신을 표현하거나 자신에 관해 말하는 방식이다. 자기체험이나 자기생각을 떠나서 수필 창작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자기생각’은 자아와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명사형이 아니라 자아의 활동 가운데 이루어지는 동사형이다. 그래서 자기생각은 통제하지 않으면 자꾸만 자체 속으로 깊이 빠져들고 만다. 자기 속으로 빠져드는 자기생각을 어느 철학자는 ‘자서전적 태도’라고 명명했다. 이러한 태도는 심리적으로 세계와 사물을 모두 자기동일성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수용한다. 자기생각에서 출발하므로 수필쓰기는 ‘자서전적 태도’에 갇히거나 ‘자기동일성’의 심리를 강화하는 쪽으로 쏠릴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쓰려고 하는 수필이 자기생각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려서는 곤란하다. 이런 수필은 독자와의 공감대가 최소화한다. 왜냐하면 ‘자기생각’은 타인을 배제하는 속성에 깊이 젖어있기 때문이다.
실은 생각이 적어서 공부가 모자란 것이 아니다. 실없이 생각이 많은 데다 결국 그 생각의 틀 자체가 완고한 테두리를 이루는 게 오히려 결정적인 문제다. 이 경우에 전형적인 증상은 냉소와 허영이다. 냉소와 허영이란 타인들이 얼마나 깊고 크게 자신의 존재에 구성적으로 관여하는지를 깨닫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 (김영민의 <공부론>에서)
생각은 공부의 출발이다. 자기생각 없이는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다. 자기생각에 바탕을 두는 수필쓰기는 더더욱 그렇다. 논어에서 “學而不思卽罔”(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다)이라고 했다. 많이 배우더라도 배운 것을 자기 생각으로 주체화하지 못하며 자신의 앎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생각하므로 인간은 존재한다. 인간 삶을 이야기하는 문학이 생각을 떠나서 성립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생각이 ‘자기생각’의 테두리 안에 갇히는 것이 문제다. “思而不學卽殆”(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것도 이런 문제를 경계하는 데에서 나온 말이다. 자기생각의 경계 안에 갇힌 생각은 ‘위태롭다.’ 타인의 생각을 배제함으로써 자기 주관에 함몰하고 말기 때문이다. 타인의 생각, 즉 내 밖의 것을 충분히 고려한 가운데 정립된 나의 생각은 튼실하고 설득력이 있는 법이다. 글쓰기 과정에서 내 생각은 타인의 생각을 만나 변증법적인 통일을 이룰 때 나만의 개성적인 스타일(style)을 확보한다. 이는 글쓰기에서 내 생각을 ‘자연화’(보편화)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보편적인 논리를 획득하는 것이다.
산문문학으로서 수필쓰기가 이러한 언어의 논리를 구축하지 못하면 위태롭기 짝이 없다. 수필에서 글의 논리성은 문학성보다 앞선다. ‘말이 되는 이야기’는 수필의 오메가고 알파다. “<내 생각>만으로는 영영 너의 <사실>에 접근할 수 없다는 사실, 그래서 내 생각의 막(膜)을 찢고 나가는 모종의 실천적 근거 없이 들먹이는 관념적 상호소통의 이상이 종종 공소하다”는 점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남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 ‘냉소’, 남에게 자기를 보이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진 기이함이나 새로움에 현혹되어 있는 ‘허영’은 수필쓰기의 기초를 연마하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첫댓글 '말이 되는 이야기'는 수필의 시작이고 끝이며, 글의 논리성이 문학성보다 앞선다는 말씀이네요. '냉소'와 '허영' 은 극복대상이라는 것도 알려 주십니다. 정말 아는 것이 병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냉소와 허영을 극복' 쉬운일이 아닙니다. 노력은 해야겠죠.이러다 수필 한편쓰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