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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 언급하신 장자의 지네를 알아보다가 얼마전에 퇴임하신 박재열 교수님 블로그(http://blog.daum.net/poetry21net/6233614)에서 장자의 지네에 관련한 내용을 찾게 되었습니다. intuition(직관)과 analysis(분석)에 있어서 어느 정도가 적합하냐에 대한 좋은 물음을 던져주는 것 같습니다. 같이 생각해보면 좋은 주제인것 같습니다. 중국의 고전인 『장자』에 있을 법한 이야기를 해 보자. 지네를 영어로 ‘centipede'라고 하는데, ‘centi'는 백이란 뜻이고 ‘pede'는 발[足]이란 뜻이다. 말하자면 발이 백 개나 되는 벌레란 뜻이다. 아마 지네의 이름을 맨 처음 지은 사람은 그 발이 많고 그 움직임이 하도 복잡해서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대나무 밭에서 만나는 지네는 그 발놀림이 하도 빨라서 그 발이 실제로 백 개인지 세어 볼 겨를이 없다. 하루는 이 지네가 바삐 기어가는데 누가 물었다. “지네야, 지네야, 네가 기어 갈 때 어느 발을 가장 먼저 떼며 그 다음은 어느 발을 떼며 또 그 다음은 어떻게 하니?” 지네가 생각해 보았지만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지네는 그것을 알려고 다시 기어보았다. 오른쪽 1호발 동작 개시, 왼쪽 1호발 정지, 오른쪽 2호발 동작, 왼쪽 2호발 정지. . . 사단 병력을 움직이는 지능이 필요한데 머리가 따라가지 못했다. 발의 움직임을 정리하기엔 발이 너무 많았다. 자연히 걸음 자체가 비꼬이고 온몸이 오그라져 한 치도 나아가지 못했다. 지네가 다시 모든 복잡한 생각을 지우고 걸으니까 걸음이 종전처럼 시원하게 걸려졌다. 물론 이 이야기는 장자가 자기의 사상을 우의적(寓意的)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일화는 시를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 챙겨야 할 태도를 꼬집듯이 일깨우고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지적 활동에만 너무 빠져 있다. 모든 입시와 입사 시험도 지적 활동 능력을 점검하는 것이 아닌가. 시를 쓰는 사람은 우선 지적 타산(打算)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적 타산이 빠른 사람은 상인이지 시인은 아니다. 지적 타산에서 시를 얻으려는 것은 지네가 백 개나 되는 발의 동작 하나 하나를 헤아리면서 기려는 것과 같다. 지네가 본능에 기대어 기는 것처럼 시인도 본능, 감정, 직관, 상상력, 혹은 환상에 기대어 시를 쓸 수 있어야 한다. 학교 교육이 합리성에 근거를 둔 이상 이런 요소는 미움 받기 일쑤고, 학교 교육에 충실하다 보면 비합리적인 상상이나 꿈이나 직관력에 대한 능력은 위축되고 만다. 현대인들은 거의 꿈꾸지 않고 상상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꿈과 무의식에는 얼마나 많은 인류의 희망과 예지와 신화가 담겨 있는가. 우리는 발의 동작만을 헤아리는 지네가 아니라 꿈꾸는 지네, 본능과 상상력으로 생동하는 지네로 갈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옳은 시인이니까 말이다. <장자>에서 나오는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장자(莊子) 외편(外篇) 추수(秋水)
(전략) 기(발이 하나밖에 없다는 상상의 동물)가 지네에게 물었다. "나는 한 발로 껑충껑충 뛰면서 가지만 그 한 개의 발조차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네. 그런데 자네는 그렇게 많은 발을 어떻게 일일이 움직일 수 있는가?" 지네가 대답했다. "별것 아닐세. 사람들이 침을 뱉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힘차게 침을 뱉으면 큰 것을 구슬처럼 크고, 작은 것은 안개처럼 뿜어나오지 않던가? 그것들이 서로 섞여서 떨어지는 것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다네. 그렇다고 사람이 일부러 그렇게 침을 뱉는 것은 아닐세. 나 역시 타고난 대로 움직일 뿐,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지는 모르네." (후략)
夔謂蚿曰(기위현왈),吾以一足趻踔而行(오이일족참탁이행),予無如矣(여무여의) 今子之使萬足(금자지사만족),獨奈何(독내하)? 蚿曰(현왈),不然(불연),子不見夫唾者乎(자불견부타자호)? 噴則大者如珠(분칙대자여주),小者如霧(소자여무),雜而下者不可勝數也(잡이하자불가승수야) 今予動吾天機(금여동오천기),而不知其所以然(이불지기소이연).
참고 ㅡ 박재열 교수님 블로그 (http://blog.daum.net/poetry21net/62336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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