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겨울밤 그래도 자꾸 눈이 내리면 나는 찬 손으로 떨어진 별 하나 주워들고 뜨겁게 뜨겁게 입맞추는 거야
눈이 내리면 (이세룡·시인, 1947-)
+ 산토끼를 위하여·2
큰 눈을 마주보는 작은 눈 하나. 젖은 입술 가까이 마른 입술 하나. 손 위에 포개지는 다른 손 하나. 내 가슴이 네 가슴에 닿으려고 아아, 정신없이 바쁠 때도 一瀉千里 달려가는 내 사랑마음
그리고도 모자라서 나는 너의 슬픔 너의 침묵에도 점수를 준다. (이세룡·시인, 1947-)
+ 토끼길 노루길
토끼 산토끼길 떡갈나무 마른 잎 노루길 눈이 쌓여 흰눈이 쌓여 시린 토끼발, 붉은 노루발, 아이들 덫을 놓았을까 겁난다. (나태주·시인, 1945-)
+ 산까치와 산토끼
떡갈나무 숲 속에서 산까치가 논다 간지럼도 치고 입도 맞추고 하늘엔 구름으로 만국기 달고 땅엔 눈 뭉쳐 눈사람 만들고 지나가는 산토끼더러 함께 놀자 한다 돌도 안 지난 산토끼 가다가 멈추고 가다가 멈춘다 유혹일까 동화일까 (이생진·시인, 1929-)
+ 토끼와 귀
애기 토끼 모여서 숨바꼭질 하안다.
바위 뒤에 숨었다. 하얀 귀 보인다.
나무 뒤에 숨었다. 하얀 귀 보인다.
숨기는 숨어도 하얀 귀가 보여서 애구, 술래한테 이내 잡혔다. (박목월·시인, 1916-1978)
+ 애기 토끼
토끼 귀 소록소록 잠이 들고서
엄마 토끼 오오록 잠이 들고서
애기 토끼 꼬오박 잠이 들지요 (박목월·시인, 1916-1978)
+ 토끼 방아 찧는 노래
낼모레 설날이다 떡방아 찧자 엄마토끼 누나토끼 흰 수건 쓰고 오콩, 콩콩 콩 한 되 찧고 오콩, 콩콩 팥 한 되 찧고
애기토끼 때때옷은 색동저고리 누나토끼 설 치장은 하얀 고무신 오콩, 콩콩 쌀 한 되 찧고 오콩, 콩콩 조 한 되 찧고
계수나무 절구에 복(福)떡을 찧고 은도끼로 깎아낸 나무 절구 오콩, 콩콩 한 호박 찧고 오콩, 콩콩 한 호박 찧고
그믐날 밤이래서 어두워지면 초롱불 켜들어라 수박초롱 오콩, 콩콩 콩 한 되 찧고 오콩, 콩콩 팥 한 되 찧고 (박목월·시인, 1916-1978)
+ 행복
가끔 집을 비운 탓인지 고양이란 놈 어디로 가고 며칠 집이 허전했어요.
지지난 밤이었지요 한숨 자고 깨어나 누운 채로 조용함 즐기는데 톡톡 방문 치는 소리가 났어요.
누구일까 문 열어보니 토끼란 놈이 마당 한가운데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었어요.
초가을 달빛 가득한 속에 우린 그렇게 한동안 눈을 맞추었어요. (임길택·시인, 1952-1997)
+ 지리산 시- 토끼봉
노루목으로 가려다가 길을 잘못 들어 토끼봉에 올랐다.
지도 펴고 다시 보니 구름 한 조각 지도를 덮었다.
그렇다. 노루목이든 토끼봉이든 구름 되어 자유로이 흘러가면 그만인 것을. (문효치·시인, 1943-)
+ 속도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는 인간들의 동화책에서만 나온다 만일 그들이 바다에서 경주를 한다면? 미안하지만 이마저 인간의 생각일 뿐 그들은 서로 마주친 적도 없다
비닐하우스 출신의 딸기를 먹으며 생각한다 왜 백미터를 늦게 달리기는 없을까 만약 느티나무가 출전한다면 출발선에 슬슬 뿌리를 내리고 서 있다가 한 오백년 뒤 저의 푸른 그림자로 아예 골인 지점을 지워버릴 것이다
마침내 비닐하우스 속에 온 지구를 구겨 넣고 계시는, 스스로 속성재배 되는지도 모르시는 인간은 그리하여 살아도 백년을 넘지 못한다 (이원규·시인, 1962-)
+ 토끼와 잉어
토끼는 산에서 살고 잉어는 물에서 산다 하루는 산토끼가 생각했다 잉어만 물에서 살까 나도 물에서 살 수 있으리라 산 친구들이 막는 것을 뿌리치고 강이 잘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올라섰다 친구들이 말했다 너는 물에서는 살 수 없다 너는 산에서만 살게 됐다 그러니 물로 뛰어들지 말아라 나는 산에서고 물에서고 어디에서나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내가 있는 곳은 어디에서나 다 산이 된다 토끼는 뛰어내렸다 물에서만 살고 있는 잉어가 말했다 나는 꽃이 피고 새가 날고 숲이 바다같이 깊은 저 산에 가 살리라 친구가 말했다 네가 살 곳은 물이지 결코 산이나 들이 아니다 너는 물을 떠나면 단 한 시간도 살 수가 없다 그러니 딴 마음을 갖지 말라 잉어는 친구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내가 산에 가서 사나 못 사나 보여주리라 그는 강에서 높이 뛰어올랐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밀려 산 어느 숲 속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후 지금까지 강으로 간 산토끼의 소식과 산으로 간 잉어의 소식은 아는 이와 전하는 이가 없다 지금까지도 다음까지도 말이다 (황금찬·시인, 1918-)
+ 토끼와 거북의 해바라기
한잠 잔 토끼가 빨간 눈을 하고 동화책을 나옵니다 햇살이 따뜻하네요 안녕하시죠? 할 말이 있는가 보네요. 종종(種種)이 다르니 난 경쟁심은 없었어. 경주를 한 것은 거북을 통한 물과 뭍의 이음이자 '나'란 존재의 확인이었지 사실 난 예수이고 싶었어 동산의 그 나무를 십자가로 여겼지 난 자야만 했고 뒤늦게 십자가에선 난 욕설로 보쌈한 돌들을 맞았지 십자가를 둘러메고 무덤에 묻혔지
이제야 거북이도 기지개를 켭니다 할 말이 있으신가요 ...... (느릿느릿) 난 종족 누구도 안 간 길을 간 거야
숭고한 토끼와 선구자 거북은 박수와 돌팔매가 난무하는 책 속으로 갑니다 다른 이유로 둘은 행복할 테지요 (정건오·시인, 강원도 횡성 출생)
+ 토끼와 주민등록증
이 시대엔 아무리 멀리 꿈을 꾼다 해도 주민등록증 안에서 꿈꾸는 것 같아. 검은 먹으로 뭉개진 지문들, 왼손가락과 오른손가락들이 토끼장만한 금 안에 생과 사처럼 나란히 누워서 언제나 좌우로 서로 검사하고 감시하고 있지.
도란도란 하는 말이 아무리 멀리 도망치려고 해도 돈키호테는 꼭 산초 판자와 같이 다녀야 한다고, 아무리 높이 도망치려고 해도 날으려고 할 때는 꼭 미리 낙하산을 준비해야 한다고. 언제나 중얼중얼, 연역법으로 면역이 되어가는 인생.
외출할 때면 꼭 주민등록증을 수첩 속에 수첩은 가방 속에 가방은 모가지에 쇠목걸이처럼 걸고 달려라 토끼! 달려라 토끼! 존 업다이크가 아무리 외친다 해도 토끼는 토끼장 근처에서 얼씬대며 달그락거릴 뿐.
난 이 도시에 토끼장이 이렇게 많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주민등록증이 든 가방을 식권처럼 목에 걸고 하루종일 총총 돌아다니다 집으로 돌아오면 아, 인생이란 얼마나 긴 제자리걸음의 장거리 여행인가 입맛 없는 토끼풀을 입에 대다가 입을 막고 달려가 수돗물을 틀어놓고 남몰래 목욕탕에서 우는 토끼들. (김승희·시인, 1952-) * 존 업다이크(John Updike, 1932-2009): 미국의 시인·소설가